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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로마. 바티칸시국(아들 부부 유럽여행)2011년 7월27일[7편]
가장 먼저 안내 받아 들어온 곳이다...
"피냐의 안뜰"이란다.멀리 건물 중앙에 보이는 솔방울이
있다 그것이 피냐다.(솔방울=피냐)일단 이곳에서 모든 관람객은
가이드의 전채적인 설명과 시스티나 예배당의 유명한 천지창조 에 대한
설명과 주의점을 듣는다.
내가 25년 전에 유럽여행을 2번 갔을 때 에도 중앙에 토란대가 있었고
그곳에 앉아서 사진도 찍었었는데 네이버에서 다음 카페로
옮기면서 네이버 사진을 다 죽여 버려서 사진이 지금은 없다~ㅠㅠ
◈ 바티칸 시국 (Vatican City)
바티칸 시국(市國;Vatican City State)은 로마 북서부에 위치한 약 13만3천여평의
국토와 750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작은 주권국가이기도 하다.
또 이나라는 전세계 8억 가톨릭 신자의 최고 목자이신 교황의 거처 및 집무실이
있는 교황청이 있으며 교황이 국가원수로서 교황권을 행사하는 가톨릭 국가이기도 하다.
교황청이 주권 독립국가인 바티칸 시국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이태리와 1929년 맺은
[라때란조약]이후 부터이다. 이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은 절대군주인 교황이 다스리는
독립국으로서 모든 세속적인 정치권력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후부터
바티칸 시국은 하나의 국가체제로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신자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필요한 조직과 기구를 갖추고 있다.
바티칸 시국은 국제법상 전 세계 교회를 대변하는 특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권의 행사로 전 세계에 교황사절을 파견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사회, 문화,
도덕등 여러 문제에 크게 관여하고 있고 UN의 전문기구와 학술기구 등에도 가입하고 있다.
바티칸 시국은 또 독자적으로 화폐, 우표, 신문, 방송국등을 갖고 있다. 특히
1931년에 설립된 바티칸 방송국은 전 세계 34개국어로 방송되고 있고 신문
[롯세르 바또레 로마노]는 발행부수가 10만부이지만 전 세계언어로 번역된다는
점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신문이기도 하다. 또한 바티칸 시국은 국가 전체가 순교지
혹은 유적지이며 르네상스시대의 유명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걸작품으로 이루어진
뛰어난 예술의 국가이기도 하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이
성전은 326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첫 사도 성 베드로의 무덤위에 세운 것인데
현재의 대 성전 구조는 18세기 이후 브라만테, 라파엘, 미켈란젤로등 많은
예술가들의 손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
o 교황령 바티칸 시국(Vatican City)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카톨릭의 총본산 바티칸 시국(Vatican City)은 성 베드로 광장 앞의 도로 위에 있는
흰색 선으로 이탈리아와 국경을 삼고 있다. 바티칸 시국의 영토는 바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구역뿐 아니라 성베드로 대성당, 그리고 그 주변 및 이탈리아
영토인 로마에 있는 성당과 궁전을 포함한 13개의 건물, 로마 동남쪽 120km지점에
있는 교황의 여름 별장지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를 포함하고 있다.
이탈리아인과 스위스인으로 구성된 약 1천명 가량의 인구를 가진 소국으로서
이탈리아어와 라틴어를 주로 사용한다.
바티칸 시국의 설립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7세기 말엽, 프랑크제국은 메로빙왕조의 다고베르트1세(Dagobert I)가 죽은 후
지방 제후들과 귀족들이 실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특별히 오스트리아 지역은 피핀가의 세력권 안에 있었는데, 732년 프랑스 연안까지
침범해온 이슬람을 격퇴하고 알라마넨, 튀링겐, 작센, 바이에른등을 쳐서 병합시킨
피핀 II세의 서자, 칼 마르텔(Karl Martell, 714-741, Karl Martel은 망치(the Hammer)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이름처럼 유럽의 관문에 침입하는 이슬람을 격퇴함으로 유럽에
이슬람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이 741년에 죽은 후 그의 두 아들이 영지를 분할하여
상속하였다. 첫째인 칼만(Karlmann)은 동쪽(Austrien, Schwaben, Thuringen)을,
둘째인 피핀3세(Pippin III)는 서쪽(Neustrien, Burgund, Provence)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칼만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어 747년에 수도원으로 돌아가 버렸고 이로 인해
전 영토는 피핀3세의 손에 들어갔다. 피핀3세는 751년 메로빙가의 무력한 왕 칠데릭
3세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수도원에 유폐시킨 후 프랑크 제국의 왕이 되었다(751-768).
이로써 메로빙 왕조는 몰락하고 카롤링 왕조(Die Karolinger, 751-814)가 시작되었다.
한편, 752년 교황 스테판 2세(Stephanus II, 752-757) 때에 이태리북부가 랑고바르덴
(Lombard)족의 침입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랑고바르덴족은 라벤나(Ravenna)를 향해
진격해 왔다. 유약한 교황은 피핀(Pippin III)에게 군사적 보호를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구테타로 정권을 잡았던 피핀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리화할 기회가 생긴것이었다. 피핀은 교황을
도와 랑고바르덴을 물리쳤고 중부 이태리 일대의 영토를 교황에게 위임하였다.
이것이 교황령(敎皇領) 탄생의 시작이었다. 교회사에서는 이 사건을 일컬어
피핀의 증여(Donation of Pippin)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고유의 영토를 가지고 있던 교황령은 1868년 이탈리아 통일 운동으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70년 9월 로마를 점령한 이탈리아는 1871년 5월
바티칸 궁전을 이탈리아에 귀속하였다. 교황에게는 바티칸 궁전, 라테라노 성당,
카스텔 간돌포 별장의 영구사용권이 허용되었으나, 교황은 이에 반발하여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과의 논쟁이 계속되었다. 거듭되는 논쟁 끝에 1929년 2월 11일에
이르러 무솔리니 정부와 교황청은 라테른 협약을 통하여 바티칸 시국에서의
교황의 완전주권을 인정하고, 몰수된 교회재산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짐으로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제법상의 주권국, 바티칸 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헤라클레스 황금동상]
손에 쥔것은 용맹을 표현한 동물의 가죽^^
트로이목마.포세이돈.신에대한 배신의 대가라고.
("라오콘")1506년 로마의 네로궁전터 부근에서 발견된 높이는
2.4m의 헬레니즘 시대의 최고 걸작인 대리석 조각 작품이다.아폴로를
섬기는 트로이의 제사장 (신관)인 라오콘이 그리스군의 목마를 트로이
성 안에 끌어 들이는 것을 반대하여 신의 노여움을 사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보낸 뱀에게 자식과 함께 물려죽는 내용이다.
발견 당시 팔 부분은 발견되지 않아서 상상으로 팔을 뻗은 모습으로 미켈란젤로가
복원을 하였는데 그 후 어느 골동품점에서 라오콘의 부러진 팔부분이 발견 되어서
지금의 구부러진 팔 모양으로 다시 복원 되었다고 한다.
(조각상 밑에 친절히 뻗은 팔의 사진이 있다)
"벨베데레궁"의 뜰^^
["토루소"]
미켈란젤로가 완벽한 인채표현 이라고 극찬한 몸통만 있는 작품
이라고 알고 있는데 원래는 <토루소>가 아닌 칼을 쥐고
앉아있는 조각상 이었다는 것이다.
천정 벽화 그림^^
(누나가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신경을 써서 많이 담았다 한다)
이 그림은 조각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림이다.
천정 환기구^^
미켈란젤로 조각상^^
이 그림은 카펫트로 짠 그림이다.많이 있다.
천지창조 그림^^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관한 그림^^
"천지창조 와 최후의 심판" 그림인데 시스티나 예배당은 워낙
사람이 많아서 설명을 할수가 없어 (입구)이곳에서 설명을 할수
있게 설치 해 놓았다.설명은 약1시간 가량 대작 이라서 설명도 길고^^
◈ 베드로 대성당
3백년에 걸친 그리스도교 박해의 시대가 끝나고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황제 때
우리 종교가 공인(公認)되자, 황제는 이곳 네크로폴리스(공동묘지)를 깔아뭉개고
베드로의 무덤위에 성당을 지었다. 이것이 성 베드로 성전의 시초이다. 그런 후
16세기 초 교황 율리우스 2세 때, 남은 성당을 헐어내고 대성당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건축 미술가 브라만떼가 시작한 이 성당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등 당대 일류
예술가들을 거치면서 착공 120년만인 1626년에 완성됐다. 울바노 8세 교황께서
이 성당을 봉헌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돌은 성당 초석에서부터 132m나 되는
웅대한 것으로 미켈란젤로의 걸작품이다. 성당 안 왼쪽 문으로 들어가 표를 끊은
뒤 엘리베이터로 돔 입구까지 올라갈 수 있고, 거기서 돌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베드로 광장은 물론, 로마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전은 1,510㎡의 면적과 내부 길이 186m, 안뜰과 벽의
두께까지 합하면 211m이다. 돔의 직경은 42m, 성당안의 제대는 44개, 성상이 395점,
이 가운데 대리석이 104개, 석회석이 161개, 청동이 40개, 석고가 90개이다.
☞ 미켈란젤로 (Buonarroti Michelangelo : 1475~1564)
미켈란젤로 부오노로티는 1475년 이탈리아의 아페닌 산중의 작은 마을
카프레세에서 태어나 남자들 틈에서 자랐다. 누이는 하나도 없이 형제만
넷인 데다 어머니마저 여섯 살 때 여의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미움을 사 늘 야단을 맞았다. 그의 아버지는 성질이 사납고
성미가 괴팍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조각칼이나 붓을 주무르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호된 매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예술가가 되겠다는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할 수 없이 두 손을 든 아버지는 미켈란젤로를 피렌체의 길란다이오에게 보냈다.
길란다이오는 제자로 들어온 미켈란젤로의 그림 솜씨가 너무나 훌륭하여
시샘을 했다. 미켈란젤로가 길란다이오로부터 미움을 산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마침내 여기서 쫓겨나 당시 메디치 동산에서
조각을 가르치던 베르톨도에게로 왔다.
미켈란젤로에게는 메디치 동산이 에덴 동산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그는,
신이 그의 손을 만든 뜻에 합당한 일을 배웠으며, 학문과 예술의 세계,
음악과 시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미켈란젤로는 그러나 여기서도 끝내
견뎌내지 못했다. 예민하고도 뛰어난 어린 예술가를 동료 선배 미술가들이
앙심을 품고 괴롭혔던 것이다. '애송이가 곧 자기들의 작품을 능가할
것'이란 데 배가 아팠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끝내 피렌체로 쫓겨났고, 그는 여기서도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미켈란젤로가 영원한 신앙의 도시 로마로 간 것은 나이 갓 스무 살 때인 1496년.
그는 여기서 베드로 성당의 그리스도와 성모의 석상 제작에 응모,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그 일을 시작했다. 이 때 로마에 있는 모든 예술인들이
그의 작품을 보려고 몰려왔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다시 돌아온 것은 스물 여섯 살 때, 어느 날 대성당의
안마당을 거닐다가 기가 막히게 잘 생긴 대리석 덩어리가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허락만 해 준다면 이 대리석으로 무언가 해
보이겠다고 제안했고,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바로 일을 시작했다.
1502년 8월 2일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거대한 다비드의 상을 1504년 1월 25일에
완성했다. 왼손으로는 어깨 위의 돌말매를 잡고 오른손에는 원수에게
날려보낼 돌멩이를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불후의 조각을 '거인'이라고 불렀다. '거인'으로
유명해진 미켈란젤로는 다시 로마로 불려갔다. 미켈란젤로는 1505년 교황인
율리우스 2세의 간청으로 그의 기념 묘비 제작에 착수했으나 중도에
그만두었고, 1508년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그림이야말로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만 4년간 예배당의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았고, 물감을 개는 사람과,
교황 이외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는 늘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위로 치켜 뜨고 천장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미친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힘든 일을 그는 4년에 걸쳐 완성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에다 '최후의 심판'을 완성한 것은 그의 나이 66세 때.
4반세기 전 그 자신이 그린 '천지 창조'와 쌍벽을 이는 작품이었다.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많은 인간의 무리가 어지러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의 그림이었다. 그는 일흔 살이 넘어서도 베드로 성당에
새로운 원형 지붕을 설계, 여든 아홉이 될 때 완성했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그리스도의 상을 다듬느라
온힘을 쏟았다. 이제 나이 89세, 그는 임종의 순간에 이렇게 말했다.
"예술이 뭔지 알만 하니까 죽어야 하는군. 이제 본격적으로 진짜 작품을 해낼 것 같은데..."
1533년 미켈란젤로는 클레멘스 7세로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위에 최후의
심판도를 그리라는 명을 받았다. 외부로부터 여러 차례 침략을 받은
교회로서는 교회를 괴롭히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그림으로 그려 위로하려는
뜻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그 교황은 곧 세상을 떠나고 새로
교황이 된 파울루스 3세가 다시 명령하여 작업 발판이 만들어진 것은
1535년 4월이었다. 이 벽화가 완성된 것은 1541년으로서 200㎡의 넓이에
391명의 인물이 그려졌다.
벽화의 중앙에 선 예수는 오른손을 들어 심판을 나타내고 성모가 곁에 앉아있다.
그 주위를 거의 반원으로 성자들이 있다. 주위에는 죽은 자가 소생하여
하늘에 오르고 있다. 예수의 바로 밑에 있는 것은 왼쪽이 라우렌티우스이고,
오른쪽에 성 바르톨로메오가 미켈란젤로의 영혼도 육체도 빠져나간 껍데기를
쥐고 있다. 마리아의 왼쪽은 십자가를 든 성 안드레아, 그 곁에는 성 요한,
예수의 오른쪽 백발노인은 열쇠를 들고 있는 성베드로이며 그 왼쪽은 성바울이다.
단테의 영향을 받은 이 그림 중에는 단테도 있으며 수건을 쓴 모습의
베아트리체도 있다. 위쪽은 천국에서 만나는 기쁨을 그렸으며, 그 밑에는
순교자들의 모습이 각기 활이나 마차바퀴와 더불어 그려졌다. 나팔을
부는 천사와 죄인의 명단을 든 천사와 부활하는 죽은 자의 모습이 무섭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가장 아래에 뱀을 감고 있는 남자는 교황의 의전장으로서 미켈란젤로가
이것을 제작하는 중에 마치 목욕탕이나 술집같다고 비난한 것에 화가
나서 그와 같이 그려놓은 것이라 한다.
※ 교황선거(conclave = 敎皇選擧 = electio papalis)
로마가톨릭 교회에서 새 교황을 뽑기 위하여 행해지는 선거. 교황은 11세기까지
성직자와 일반성도가 선출하였다. 4세기경부터 로마황제·로마귀족·독일왕들이
교황선거에 개입했고 9∼11세기에는 독일왕이 교황을 해임하자 1059년 이래
교황선거권은 추기경에게 한정된다. 1179년 제 3차 라테란공의회에서
추기경들에 의한 2/3 다수결제가 확립되었다. 1274년 리옹공의회에서
외부로부터의 개입과 2/3 다수결 선출방식에 의한 선거 절차의 지연을
막기 위하여 유권자를 밀폐된 곳(conclave = ‘자물쇠를 잠근다’는 뜻의
라틴어)에 가두어 투표하게 하는 제도를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정했는데,
그 후 콘클라베는 교황선거 추기경회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1904년까지 가톨릭을 믿는 열강(列强)의 군주들은 교황선거에서 후보자에
대한 거부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교황이 죽어서
그 지위가 비게 되면, 교황재무장관(카메르렝고)이 추기경단장과 함께
추기경단을 대표하여 교황대행이 되며 죽은 후 빠르면 15일째 되는 날,
늦어도 19일째 되는 날에 콘클라베에서 선거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선거는 비밀투표로 후보선출에 필요한 출석자수의 2/3 표를 얻을 때까지
계속된다. 선거와 함께 하얀 연기가 연통에서 솟아오르면 새로운
교황이 탄생했다는 뜻이며 피선출후보자의 동의, 본인에 의한 교황명
결정, 착의(着衣), 추기경단의 순명(順命)서약, 결과 공표, 새 교황에
의한 강복(降福)으로 선거는 끝난다. 그후에 새 교황이 지정하는
날에 추기경단에 의한 교황관(敎皇冠) 수여식이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상)
성베드로성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조각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상>이다.
이는 그가 21세때 만든 조각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상이다
◈ 성 베드로 광장
성 베드로 광장을 찾는 순례자나 여행자들은 누구나 대성당 앞의 광활한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돌기둥에 안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베르니니의
걸작이다. 광장은 240㎡의 타원형으로, 멀리서 보면 넓은 사다리 꼴이 공간이
돌기둥과 궁전의 지붕 사이에 뻗쳐 있고 마데르노가 조각한 전면이 우뚝 솟아 보인다.
궁전의 옆부분은 반원형으로 도리아식의 주랑(柱廊)이 네 개씩 줄을 지어 있다.
이 거대한 건물에는 모두 284개의 기둥과 88개의 첨탑(尖塔)이 있고 96개의 성인상이
조각돼 있다. 기둥 높이는 186m로 가로 148m의 면적을 자치하고 있다. 이 역사적
업적은 알렉산델 7세의 명령으로 베르니니가 1656년부터 시작하여 1667년에 완성했다.
이곳은 전세계 백성을 인자하게 두 팔로 안고 있는 전 인류의 어머니인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광장 한 복판에는 25.88m의 이집트식 첨탑이 네 마리의 청동제 사자의 호위를 받으면서
있다. 이 첨탑은 성 베드로가 순교했던 네로 황제의 원형 경기장에 장식되었던 것으로
맨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시스또 5세의 명으로 이 첨탑은 1586년 도메니꼬
폰타나가 세운 것으로 첨탑 양쪽에는 14m 높이의 분수대가 두 개 있다. 오른쪽은
1613년 마데르노가 설계했고 왼쪽 것은 1670년 카를로 폰타나가 만든 것이다.
두 개의 분수와 첨탑 사이에는 광장의 중심부를 나타내는 둥그런 바위가 두 개 놓여 있다.
이곳에서 돌기둥을 쳐다보면 마치 거대한 하나의 울타리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돌기둥으로 된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대강당은 1971년 5월 30일 바오로 6세의
명령으로 조각가 삐에르 루이지 네르비가 지은 것이다. 이곳에는 7천 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과 12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홀이 마련되어 있다. 정문 현관은 산
우피치초 광장에 있다. 베드로 대성당과 미켈란젤로의 불후의 명화가 있는
시스틴 성당의 사도궁 가운데서 바라보면 성 베드로 광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옆의 바티칸 박물관을 따라가면 대성당으로 갈 수 있다.
◈ 사도궁전
사도궁전은 베르니니의 돌기둥 울타리 오른쪽에 우뚝 솟아 있다. 이 거대한
건물은 13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7세기에 걸쳐 완성된 것이다.
처음 니콜로 3세 때에 중앙부를 짓고 그후 다시 시스또 5세의 감독 아래
도메니꼬와 카롤로 폰타나가 다시 손질을 했다. 사도궁의 정문은 청동의
문이라고 불린다. 정문 건너편에는 로얄 계단이 있다.
사도궁의 뜰로 잠깐 고개를 돌리면 라파엘 기념관이 세 개 있다.
두 번째 기념관은 라파엘 자신이 그림을 그려 장식 한 곳으로 자세한
설명은 뒷장에서 하기로 한다. 맨 윗층에는 교황의 개인 집무실이 있다.
일요일 오후의 축일이면 교황 성하는 성 베드로 광장이 보이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창문으로 나와 운집한 군중들에게 연설을 하고 축복을 한다.
2층에는 교황의 알현실과 교황도서관이 있다. 수요일에 교황은
순례자들을 접견한다. 단, 여름철은 카스텔간돌포의 여름 별장에서
접견을 하며 그 밖에는 늘 이곳 대강당에서 순례자들을 접견한다.
여름철 몇 달 동안 교황성하는 휴식과 건강을 위해 여름 별장에서
집무를 한다. 이때의 순례자 접견은 일요일에 별장 발코니에서 하게 되며
교황의 연설은 스피커를 통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도 들을 수 있다.
◈ 바티칸 시국 및 박물관
바티칸 시국은 모든 것이 종교적, 예술적인 세계 최소의 독립국이다.
매주 수요일의 10:00 에는 교황이 궁전의 창으로 나온다. 바티칸 박물관은 09:00 - 14:00
(7-9월과 부활절때는 17:00까지, 토요일은 14:00까지) 오픈. 일요일과 축제일은 휴관.
◈ 바티칸 궁전(PALAZZO VATICANO)
산 피에트로 성당 옆에있다. 피나코테카, 피오 클레멘티노 미술관,
이집트 박물관, 에트루스코 박물관,비블리오테카, 지도의 화랑,
브라초 누오보, 키아라 몬티, 라파엘로의 방, 라파엘로의 복도,
시스티나 예배당등이 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이 있다.
◈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시스틴 성당은 시스또 4세의 명으로 1475년부터
1482년에 걸쳐 지오반니노 데이 돌치가 설계를 하고 바치요 폰델리가
건축을 한 것으로 교황의 이름을 따서 시스틴 성당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성당은 교황이 비공식적인 의식을 행하는 곳이며 또 교황의 비밀 선거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성가대와 양쪽으로 나눠진 대리석 후면은
15세기의 미노 다 휘에 솔레가 완성한 걸작이다. 양쪽 벽에 여섯 개씩 있는
12개의 그림은 모세와 그리스도의 일생을 나타낸 것으로 모세의 일생에 대한
그림은 에집트로 가는 모세(페루지노), 모세의 선택(산드로 보띠첼리),
홍해를 가르는 모세(코시모 로첼리), 코레의 아들을 벌하는 장면
(보띠첼리)과 십계 그리고 모세의 죽음(구라 식뇨렐리)이 있다.
예수의 일생에 관한 것은 예수의 세례(페루지노), 예수시험을 받으심과
나병환자를 낫게 하심(산드로 보띠첼리), 첫째 사도를 부르심
(도메니코 기로란다이오), 산상설교(로쎌리와 삐에로디코시모),
천국 열쇠를 주시는 예수(페루지노), 최후만찬(코시모 로쎌리)이 있다.
원형의 천장은 미켈란젤로가 1508년부터 1512년에 걸쳐 율리오 2세의
명을 받아 창세기를 프레스코로 나타낸 것이다. 제대에서부터 프레스코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창조하는 하느님과 하늘과 해, 달, 식품, 바다와 육지,
특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는 모습과 선악과를 먹는 모습 그리고 낙원에서
내쫓기는 아담과 하와의 그림은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노아의 방주와
홍수 그리고 끝으로 아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술을 마시는 노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천장의 이 그림들은 네 귀퉁이마다 나체가 된 네사람이 프레스코에 나타낸
사실을 하나 하나 설명이나 하듯 그림을 가리키고 있다. 한참 그림을
따라가면 예언자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예루살렘의 장래를 알고 슬피우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천장 한 구석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야만의 형벌과 구리뱀,
올로훼르바의 목을 자르는 주디따, 골리앗의 죽음이 그려져 있다.
제대 뒤에 있는 최후의 심판은 1535년부터 미켈란젤로가 30년에 걸쳐
천장 프레스코를 다 마친 다음에 바오로 3세의 명을 받아 만든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비평가들은 미켈란젤로가 천장을 만들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지구상의 인류의 불행을 나타내려는 예술적인 사명감을 갖고
있었지만 후에 가서는 예술보다는 깊은 신앙심이 더 앞섰다고 말하고 있다.
이 그림은 가톨릭 교리를 완벽하게 나타내 주고 있지만 쉽사리 설명을 하기는
아주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다. 맨 뒤에는 비통한 얼굴의 죄인을 심판하고
반대로 착한 이에게 상을 주시는 예수의 모습이 있다. 이 작품은 390명 이상의
인물이 나타나 있는 2백㎡가 넘는 거대한 그림이다. 이 작품의 중요한 등장
인물들을 보면 성모마리아, 세례자 요한, 십자가의 성 안드레아, 교회를
다스리는 열쇠를 가진 성 베드로, 그 옆에는 성 바오로가 있다.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는 그물을 가진 성 로렌조와 성 발도로메오가 살갗이 모두 벗겨진 채 그 옆에 있다.
중앙에서 왼쪽에는 여인들이 서 있고 오른쪽 남자들 모습 속에는 치레네오의
시몬과 도둑이었다가 회개한 디스마가 구세주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있고 그 밖에
수레에 탄 성녀 카타리나와 활을 쏘고 있는 세바스티아노가 있다. 왼쪽 아래에는
구름 위의 천당에 승천한 착한 사람들이 천사의 나팔소리를 듣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참혹한 광경이 나타나 있다.
지옥의 무서운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왼쪽 맨 아래에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는 모습이 있다. 그 가운데 동굴에는
마귀들로 가득 차 있으며 바로 오른쪽에는 지옥문이 보이고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삼도의 나룻배가 맨 아래에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여기에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긴 나귀 귀도 두 개 그려 넣었다. 시스틴
성당의 최후의 심판은 르네상스 예술의극치이며 바오로 3세가 트렌토 공의회에서
규정한 것 같이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처하는 최대의 작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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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칫 체육복 같을 수 있는 파란반바지를 세련되게 잘 소화시켰네~ㅋ
조각상들이 옷의 질감과 피부의 질감 머리카락의 질감을 어쩜 저리도 잘 살렸는지 볼때마다 신기방기
천장벽화가 조각이 아니라 그림이란게 놀랍다
미켈란제로의 일대기를 써준 것 감사
재밌게 잘 읽었어~^^ 감동적👍
바티칸시국 복습 제대로 했네~ 엄마도 자료 공부하고 준비하고 편집하느라 공생 많았겠어~^^
사진 보니깐 우리부부 둘다 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