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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후 초등학교 학력으로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라간 장군-송요찬
호랑이처럼 용맹스러운 맹장
송요찬(宋堯讚, 1918~1980) 장군은 미군들로부터 타이거 (Tiger)송(宋) 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호랑이처럼 용맹스러운 맹장(猛將)이었다.
그가 그런 말을 듣는 것은 그의 호방하면서도 대담한 성격에 기인하고 있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를 놓친 적이 별로 없다.
그 이면에는 강한 훈련을 통해 자신의 부대를 단련시키며
항상 싸울 수 있는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유지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의 전투지휘관으로서의 탁월한 활약상도 한몫했다.
6.25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사단장을 가장 오래 한 장군으로 유명하다.
전시 최장수 사단장인 셈이다.
전쟁기간 내내 그는 사단장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요찬 장군은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육군헌병사령관을 3개월 정도 하다가
수도사단장을 거쳐 남부지구경비사령관을 잠시 역임한 후,
다시 수도사단장을 거쳐 제8사단장으로 재직 시 휴전을 맞았다.
6.25전재 때 사단장급 이상 고급지휘관 중 유일하게 미국에 유학을 가지 않은 장군 중의 한 명이었다.
그리고 전쟁기간 내내 지휘관을 하며 전후방 전선을 누볐던 유일한 장군이기도 하다.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전장을 지키며 전투복을 입고 전장을 누비며 싸웠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송요찬 장군은 참모형 (參謀型) 장교가 아니라 전투형(戰鬪型)의 지휘관 타입(type)이었다.
이는 마치 산중(山中)의 왕이라고 하는 호랑이가 산야(山野)를 누비며 포효(咆哮)하듯,
송요찬도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계획을 수립하는 재사형(才士型) 장교가 아니며,
호랑이처럼 야전을 누비며 부대를 호령(號令)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좋아했던 승부욕이 강한 전형적인 지휘관타입이었다.
그런 탓인지 송요찬 장군의 군대 경력에는 참모 경력이 없다.
이는 우리 국군사(國軍史)에서 매우 보기 드문 경우에 해당된다.
송요찬 장군은 1946년 소위 임관후, 제5연대에서 소대장을 시작으로
제8연대에서 중대장과 대대장을 역임했고,
제9연대장, 제10연대장, 제15연대장, 헌병사령관, 수도사단장, 남부지구경비사령관,
제8사단장, 제3군단장, 제1야전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직책을 쉼 없이 거쳤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참모직을 수행하지 않았다.
백선엽 장군도 여단 참모장과 정보국장을 역임했고, 정일권 장군도 육군본부 참모부장을 역임했다.
그렇지만 송요찬 장군만 오로지 군대 경력 중 유일하게 지휘관직을 수행했다.
그것도 전시에 모두 역임했다. 놀라운 체력이자 정신력이었다.
송요찬 장군의 최대의 장점은 자신의 핸디캡(handicap)을 슬기롭게 극복할 줄 안다는 점이었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그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에게 노력하는 길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한문(漢文)도 스스로 깨우치며 공부했고, 영어도 사전을 통째로 외우다시피 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영어사전을 한 장씩 외우고 나서, 그것을 씹어 먹었다.
머리로도 먹고 입으로도 먹는 영어공부였다. 그만의 독특한 공부법이다.
그렇게 해서 영어를 정복해 나갔다.
전쟁 기간 내내 그의 상의 주머니에는 항상 영어사전이 들어 있었다. 암기해 나갔다.
그는 전투 중 틈이 날 때마다 사전을 꺼내 영어단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암기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미국의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 당선자가 수도사단을 방문했을 때,
그는 아이젠하워에게 영어로 브리핑했다.
그가 영어로 아이젠하워에게 브리핑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놀랬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완벽히 소화해 냈다.
송요찬 장군다운 배포이자 자신감이었다.
연대장 해임 후 헌병사련관 파격적 인사
그런 송요찬 장군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송요찬은 1918년 2월 13일 충청남도 청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나마 아버지는 그가 9살 때 돌아가셨다. 2남6녀 중 차남이었다.
그는 집안 형편상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한 그는 농사일을 도우면서 틈나는 대로 서당에서 곁눈질로 한문을 배우다가
목마름을 이기지 못해 금강산에 있는 사찰(寺刹)로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며 스님 밑에서 한학(漢學)을 배웠다.
그렇게 그의 인생이 달라진 것은 인생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복무하게 됐다.
일본군에서 그는 일본군 조장(曺長, 고급부사관)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그러다 8.15 광복을 맞은 송요찬은 군인이 되기 위해 미군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자격요건이 준사관 이상으로 제한되어 입교할 수 없게 됐다.
이때 간신히 최경록(崔慶祿, 육군중장예편, 육군참모총장 역임)의 도움을 받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5월 1일 육군참위(소위)로 임관할 수 있게 됐다.
최경록과 송요찬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최경록의 도움을 받게 됐다.
그때까지 송요찬의 소원은 장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때부터 송요찬은 특유의 적극성과 부단한 노력으로 군대생활을 했다.
송요찬의 첫 부임지는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제5연대였다.
그곳에서 창설요원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 9월 제5연대의 일부 병력을 모체로 강릉에 제8연대를 창설하게 되자,
그는 제8연대 창설을 위해 강릉으로 이동했다.
강릉 제8연대에서 송요찬은 대위로 진급한 후,
1947년 3월 1일부로 제8연대 제3대대장에 임명됐다.
고기가 물을 만나듯 군대 생활에서 그는 승승장구했다.
진급도 동기생보다 뒤쳐지지 않고 정상적으로 달렸다.
소령 진급 후 그는 제1연대 부연대장을 거쳐 1948년 6월에 제11연대부연대장으로 수평 이동했다.
제11연대는 제주도에서 공비토벌 임무를 수행 중에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제9연대장으로 영전과 동시에 육군 중령으로 진급했다.
제9연대장에 임명된 그는 제11연대로부터 제주도 평정작전 임무를 인수받아 수행하던 중,
1949년 2월 제9연대는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수도여단(여단장 이준식 대령)에 배속되어 서울로 이동하게 됐다.
그러나 얼마 후인 1949년 6월,
그는 다시 강릉에 주둔하고 있는 제6사단 제10연대장으로 전출됐다.
송요찬은 제10연대장 재직 시 38도선 이북에 위치한 양양 돌입사건 으로 1949년 7월 24일 연대장에서 해임됐다.
이후 그는 육군보병학교 학생감과 제5사단 제15연대장을 거쳐
1949년 4월 최영희(崔榮喜, 육군중장예편, 육군참모총장 역임) 대령의 후임으로 헌병사령관에 임명됐다.
헌병사령관 임명은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만큼 송요찬 대령이 군 수뇌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다.
6.25전쟁 내내 지휘관으로 전후방 전선 참전
6.25전쟁 발발 당시 육군헌병사령관이었던 그는 개전 초기 적의 공세에 밀려 국군이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
헌병들을 진두지휘하여 낙오병을 수습하여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국군을 재편성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맥아더 원수가 1950년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때 헌병사령관으로서 맥아더 원수를 경호했고,
한국은행에 보관 중인 금괴를 후방으로 안전하게 호송하여,
나중에 이 금괴가 대한민국이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가입할 때 출자금으로 사용되게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국가 발전에 또 다른 기여를 하게 됐다.
이후 임시수도이자 부산의 관문인 대구(大邱)에 북한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자,
육군본부는 송요찬 헌병사령관을 8월 10일부로 대구방위사령관에 임명하고, 대구 방위 임무를 맡겼다.
6.25 전쟁 최대의 위기였던 낙동강 전투에서
그는 임시수도 대구를 총책임지는 대구방위사령관으로서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의 그러한 공로는 그가 야전 사단장에 임명되는데 크게 일조(一助)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9월 1일 송요찬 대령은 백인엽(白仁燁, 육군중장 예편, 군단장 역임) 대령의 후임으로
수도사단장에 임명되어 안강 및 경주 부근 전투를 수행했다.
북한군이 노리는 경주는 그들의 최종목표인 부산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국군과 북한군은 경주를 놓고 혈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강-기계전투, 호명리전투, 비학산전투 등을 통해 수도사단은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했다.
그 중심에는 사단장 송요찬 장군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북한군 9월 공세를 막아내고, 국군 제1군단이 반격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 전공으로 그는 1950년 9월 20일 육군준장으로 진급했다.
드디어 장군이 됐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그가 만4년 만에 드디어 장군이 된 것이다.
송요찬 준장이 지휘하는 수도사단은 동해안을 따라 두만강으로 북진(北進)해 나갔다.
그의 거센 북진 행보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형산강을 박차고 나간 수도사단은 포항-울진-강릉을 거쳐
강원도 양양에서 드디어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 작정의 선봉에 서게 됐다.
이때부터 수도사단은 북한 지역의 회양, 신고산, 원산(10월 1l일 점령)을 거쳐 함흥과 흥남을 차례로 점령하고,
11월 22일에는 드디어 소만(蘇滿) 국경 근처에까지 진출했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자칫 평범한 시골청년으로부터 묵힐 뻔했던 송요찬은 국군 사단장이 되어 북진의 선봉에 셨으니,
그 감개가 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과의 국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중공군의 개입으로 수도사단은 왔던 길로 다시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른바 38도선으로의 철수였다.
이때 동해안으로 진출했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수도사단과 제3사단으로 편성, 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육로로 철수하지 못하고 해상으로 철수를 하게 됐다.
국군이 철수할 원산 이남 지역을 중공군이 이미 점령하고 퇴로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제1군단에 속했던 수도사단은 해상을 통해 철수를 하게 됐다.
1950년 12월 18일 흥남에서 철수하여 묵호항으로 상륙한 수도사단은 전열을 정비한 후,
1951년 1월 27일 다시 강릉으로 진출했다.
이후 송요찬 장군이 지휘하는 수도사단은 동해안 지역에서 주로 전투를 실시하다가
1951년 5월 중공군 5월 공세 때에는 제1군단장 백선엽(白善燁, 육군대장 예편, 육군참모총장 역임) 소장의 명령에 의거
중공군의 좌측 돌파구에 해당하는 대관령을 점령하고 중공군의 강릉 진출을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대관령을 점령했던 제1연대의 연대장은 한신(韓信, 육군대장 예편, 합참의장 역임) 대령이었고,
제1연대는 수도사단의 예하 연대였다.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는 말처럼 한신 연대장도 그 누구보다 지혜와 용맹함이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에게 영어로 브리핑
이후 송요찬 장군은 동해안의 최전선 월비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1951년 11월 15일 지리산일대 공비토벌을 위해 급히 편성된
백야전전투사령부(白野戰戰鬪司令部, 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배속되자
전선에서 벗어나 후방 지역으로 이동하게 됐다.
수도사단은 최영희 장군이 지휘하는 제8사단과 함께 지리산 일대의 공비토벌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로 인해 지리산 공비들은 당분간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지리멸멸하게 됐다.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다음 해인 1952년 4월 송요찬 장군이 지휘하는 수도사단은 새로 재편된 제2군단 (군단장 백선엽 중장)에 배속되어
중동부전선의 춘천 북방으로 이동하여 수도고지전투와 지형능선전투 등을 수행했다.
송요찬 장군은 이때까지 사단장 자리를 지켰다.
낙동강 전선에서 같이 싸웠던 동료 사단장 중 그때까지 남아 있는 사단장은 송요찬 장군이 유일했다.
그러한 노고와 그동안의 전공으로 송요찬 장군은 1952년 7월 8일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소장 계급장은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장군이 수여했다.
송요찬 장군은 진급과 동시에 약 2년간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수도사단의 지휘권을
이용문(이용문, 1953년 6월 비행기 추락사고로 순직, 육군소장 추서) 준장에게 넘겨주고,
전북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남부지구경비사령부의 초대사령관에 임명되어
지리산일대의 공비토벌작전을 지휘하게 됐다.
군 수뇌부에서는 다시 지리산 일대의 공비들이 준동을 하게 되자
이를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남부지구경비사령부를 창설하고,
정규전과 공비토벌작전에 경험이 풍부한 송요찬 장군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그러나 1952년 10월 8일, 송요찬 장군은 다시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어,
당시 최대의 격전지로 알려졌던 지형능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선에서 승리한 수도사단은 경기도 광릉지역으로 가서 휴식과 정비를 취했다.
그 무렵인 1952년 12월 초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Dwight D. Einsenhower)원수가 한국에서의 전쟁을 종식하겠다는
자신의 대통령 선거공약을 지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게 됐다.
곧 대통령에 취임하게 될 아이젠하워의 입장에서는 확전을 할 것인지,
휴전을 할 것인지에 대한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에서 미군 부대뿐만 아니라 유엔군 그중에서도 한국군의 능력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의 방한 일정에는 한국군 부대방문도 들어있었다.
그로서는 무엇보다 미국이 돕고 있는 한국군의 사기와 전투능력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한국정부에서는 아이젠하워가 방문할 한국군부대로 경기도 광릉에 주둔하고 있는 수도사단으로 정했다.
물론 사단장은 송요찬 소장이었다.
당시 송요찬은 한국군 사단장 중 최선임이면서 가장 오랫동안 사단장을 역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유능한 전투사단장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앞에서 행한 송요찬 사단장의 영어 브리핑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미국의 전쟁영웅 아이젠하워 원수 앞에 놓인 작전상황판(作戰狀況板)을 보고,
송요찬 장군은 아주 짤막한 영어로 브리핑을 했다.
상황판의 아군 부대 표시는 청색으로, 적군부대 표시는 적색(赤色)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송요찬 장군은 상황판에서 적군을 나타내는 적색을 가리키며,
영어로 Enemy here, We go to north. 라고 말했다.
적은 여기에 있고, 우리는 북쪽으로 진격하겠다 는 의미였다.
이보다 더 명확한 브리핑이 어디 있겠는가.
적의 위치, 아군의 위치, 그리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아주 간단한 영어로 마쳤다.
아마 전사상 가장 짧은 브리핑이었을 것이다.
송요찬 장군만이 할 수 있는 브리핑이었다.
보고를 받던 아이젠하워 장군도 그 의도를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각수반 겸 국방부장관 역임, 정국 수습 수행
휴전 무렵 그는 미국 유학 대기 중 중공군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인 7.13공세로
전황이 국군과 유엔군에 불리하게 전개되자,
다시 금성 동남쪽 지역을 방어하던 제8사단장으로 임명됐다.
미국 유학은 무기한 연기됐다.
그는 또 다시 전투지휘관으로 차출된 것이다.
이때 그는 금성천 이북까지 진출함으로써 중공군의 최후공세인 7.13공세를 물리치고,
중부전선에서 오늘날의 휴전선 확정(확정)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휴전 후, 송요찬 장군은 비로소 미 지휘참모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아이젠하워와 리지웨이 장군 등 미국의 명장(名將)들이 반드시 거친다는 지휘참모대학에서
1년간 전략 및 전술학을 배운 송요찬 장군은 귀국하자마자 제3군단장에 임명됐다.
군단장 취임 후 얼마 안 돼 그는 육군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때가 1954년 9월이었다.
이후 그는 백선엽 장군의 후임으로 제2대 제1야전군사령관(1957년)에 임명됐다.
이때 제1군사령관의 참모들 중에는 참모장으로 박정희(朴正熙) 소장이 있었고,
작전참모에는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역임했던 채명신(蔡明新) 준장이 있었다.
여기에서 송요찬 장군은 박정희 장군과 각별한 사이가 됐다.
채명신 장군도 육사 생도시절 은사이자 상관인 참모장 박정희 장군을 모시며 제1군을 발전시켰다.
송요찬 장군은 1959년 2월 다시 백선엽 대장의 후임으로 제11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군대내 소장파 장교들을 중심으로 정군(整軍)운동이 일어나자,
참모총장 직에서 용퇴(勇退)했다.
이때 군의 중장급 이상 장군들이 대거 예편했다.
그중 백선엽 장군과 유재흥 장군도 포함됐다.
이때가 1960년 5월 23일이다.
이로써 그는 14년간의 군대 생활을 마치고, 육군중장으로 예편했다.
하지만 5.16이 일어나면서 그는 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아 공직에 몸을 담게됐다.
5.16 후 그는 내각수반 겸 국방부장관을 역임하면서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군을 추스르는 역할을 수행했다.
제1군사령부 시절 송요찬 장군을 상관으로 모셨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강직하면서 권력을 탐하지 않은 송요찬 장군을 전격 기용했다.
국가의 혼란기에 최적임자로 그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송요찬 장군은 딱 1년간 내각수반 겸 국방부장관을 역임하고 물러났다.
나가고 물러설 때를 아는 것이다.
공직에서 진퇴를 모르는 자만큼 어리석은 인간은 없을 것이다.
송요찬 장군은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가만있질 못했다.
내각수반에서 물러나자마자 곧바로 인천제철 사장을 맡았다.
그만큼 국가를 위해 할 일이 많았다.
거기에는 그의 역량과 자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인천제철사장을 역임하며 조국 근대화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1980년 10월 19일 송요찬 장군은 62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송요찬 장군은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해도 반드시 실천하고
그 결과에 대해 평가를 받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고집불통인 석두(石頭)라는 별칭이 따라 다녔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었다.
전시 긴급을 요하는 상황에서 그의 이러한 행동은 자칫 대세를 그르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1952년 5월 중공군 공세 시 그는 대관령을 확보하라는 군단장 백선엽 소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장시간 부대 기동을 지연시킴으로써 자칫 국군 및 유엔군 전체의 작전에 작전상 커다란 차질을 가져올 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육훈련을 통해서만 군인이 필요로 하는 필승의 신념과 책임감
그리고 인내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장군으로 정평이 나 있음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남정욱/오동룡 공저,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들, p.119~131에서 발췌 인용).
① 송요찬은 2남6녀 중 차남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초등학교 졸업 후 한문과 영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금강산에 들어가 한학도 배웠다.
일본군 지원병에 입대하여 복무해 조장(고급부사관)까지 올라갔다.
해방후 미군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갈려고 하였으나 자격요건이 제한되어
같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 동기생인 최경록(육군중장예편, 육군참모총장 역임)의 도움으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5월 1일에 육군 소위로 임관 할 수 있게 되었다.
② 1884.9.20. 구한말 이 땅에 미국 선교사가 들어왔고 기독교가 퍼지기 시작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 후 국민은 가난하였지만 애국심은 투철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군에서 대령 이상의 고위 장교들은 영어를 배워야 했고
일부 장교들은 구식부인과 이혼을 하고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과 결혼을 하였다.
본인이 아는 바로는 박정희가 그랬고 송요찬(?)도 그랬다.
채명신이나 이병형 장군 부인들은 이대 영문과 출신이다.
③ 송요찬 장군은 초등학교 학력을 가지고 군에서 육군참모총장에 올랐고,
정부에서는 국방부장관에 내각수반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
최고의 야전지휘관이면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이러한 성공배경에는 성실함,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꾸준히 노력하는 근면함,
물러날 때와 나아갈 때를 아는 지혜로움, 권력을 탐하지 않는 현명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송요찬 장군의 6.25전쟁때의 수많은 전공과 국가수호 의지,
그리고 국가 발전에 기여한 것에 대해 무한한 찬사와 경의를 보낸다.
④ 휴전 후 송요찬 장군은 미지휘참모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아이젠하워와 리지웨이 장군 등 미국의 명장들이 반드시 거친다는
지휘참모대학에서 1년간 전략 및 전술학을 배운 송요찬 장군은 귀국하자마자 제3군단장에 임명됐다.
군단장 취임 후 얼마 안 돼 그는 육군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때가 1954년 9월이었다.
이후 그는 백선엽 장군의 후임으로 1957년 제2대 제1야전군사령관에 임명됐다.
이때 제1군사령관의 참모들 중에는
참모장 박정희 소장이 있었고,
작전참모에는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역임했던 채명신 준장이 있었다.
여기에서 송요찬 장군은 박정희 장군과 각별한 사이가 됐다.
채명신 장군도 육사 생도시절 은사이자 상관인 참모장 박정희 장군을 모시며 제1군을 발전시켰다.
송요찬 장군은 1959년 2월 다시 백선엽 대장의 후임으로 제11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군대내 소장파 장교들을 중심으로 정군운동이 일어나자,
참모총장 직에서 용퇴했다.
이때 군의 중장급 이상 장군들이 대거 예편했다.
그중 백선엽 장군과 유재흥 장군도 포함됐다.
이때가 1960년 5월 23일이다.
이로써 그는 14년간의 군대 생활을 마치고, 육군중장으로 예편했다.
하지만 5.16이 일어나면서 그는 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아 공직에 몸을 담게됐다.
출처 : 한국군 맹장 중 에서 -
첫댓글
송요찬 장군 이제야 알어내요,,
이런분들이 있어기에 우리나라가
부흥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