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343]
이봄의 스승은 나무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욥기 14장)
구약성서의 욥기는 인문학의 보고로도 꼽힌다. ‘고난을 인내하고, 견디어, 소망에 이른다’라는 주제가 우리 인생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아차산을 오르다가 베어진 고목 밑동에서 새순이 돋은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나무의 윗동이 잘려나간 그루터기가 새 움을 틔운 것이다. 죽은 나무라 일컫는 몸통으로 새 순을 내고 잎을 키우다니. 나무는 꺾이고 잘려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공부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70을 넘기면 세상을 다 산 것처럼 행동한다. 마땅히 할 일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하루를 보낼까 궁리를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곳곳에서 삶이 시들해 보이는 것도 이때다. 시듦에는 정적이 있을 뿐 생기가 없다. 생각도 대화도 앞으로 못 나가고 뒤를 맴도는 일상이 되다 보면 그곳에 생기가 갈해진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관성의 법칙에서 나온다. 반관성은 노년의 삶에 생기를 빼앗고 생각을 무미건조하게 한다. 생각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지난 기억이나 되돌리는 생활로 이어가다 보면, 삶은 소모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 하면 관성의 법칙으로 돌아갈까를 생각하는 것이 건강에 좋고 삶에 활력을 찾아준다. 작은 일도 만들면 앞으로 나갈 수 있고, 어제가 아닌 내일을 말할 수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 한 관성의 법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날 나무가 스승이란 것을 깨달았다. 나무를 자른 둥근 면에 보이는 둥근 무늬의 나이테를 보면서…. 1년에 하나씩 생기는 나무의 나이가 나이테이다. 여름과 겨울이 분명한 지방에서 뚜렷하고, 열대우림의 나무엔 나이테가 생기지 않는다. 여름의 폭양과 세한의 겨울을 견딘 인고의 나무일수록 보다 뚜렷해지는 둥근 나이테를 생성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연륜(年輪)이라 쓰고 읽는다. 혹한의 겨울을 보낸 나무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셈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가리켜 ‘연륜이 묻어난다’고 말할 때가 있다. 한 우물을 깊이 판 장인들, 예술가들, 전문인들에게 붙이는 말이다. 적어도 한 분야에 10년 이상을 몰입한 사람들의 어깨에 붙여주는 견장이다. 연륜이란 그들이 겪어온 성장과 고난의 세월이 나이테처럼 둥글어져 모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수천 년의 비바람과 물결에 깎이어 둥글어진 강가의 몽돌처럼….
한글이 아름답다고 하는 데는 영어처럼 ‘주어+동사+목적어’의 어순이 아니라 ‘주어+목적어+동사’로 쓰여 표현이 더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를 말할 때 여러 동사가 동원된다. 나이라는 명사 뒤에 오는 동사를 ‘들다’ ‘먹다’로 쓰는데, 둘 다 밖에서 안으로 향한 생명의 말법이다.
누구도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나이와 죽음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삶은 점자책을 읽듯 결국 ‘죽어가는’ 문제를 짚어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바람이 있다면 잘 늙고, 잘 시드는 일이다. 그렇게 늙고 싶은 바람을 키워주는 문장들이 있다.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른 희망이며,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라고 표현한 문정희 시인의 ‘나무학교’가 마음에 문신을 그려준다.
나이만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끊임없이 성찰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다. 나무가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어른인 것처럼 우리 또한 내색하지 않아도 어른이어야 하고, 어른스러워야 한다. 흰머리와 얼굴의 주름이 나이 듦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처럼 겉으로만 먹은 나이는 나이테를 만들지 못한다. 내 경험이 너무 강한 사람은 누구의 좋은 말도 잘 안 들리는 법이다.
나이가 들더라도 푸른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죽을 때까지 죽은 것이 아닌 아차산 고목처럼, 봄날에 살아나는 나무처럼, 새눈을 틔워야 한다. 해마다 작은 성장이라도 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이에 관한 한 나무는 이봄의 스승이다.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