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안재세= * 서세동점 이후 과대포장된 서양중심사관, 한민족 노예화를 획책한 일제식민사관, 화하독존의 대중화사관, 왜곡·축소·비하된 자멸사관(自蔑史觀)을 떨쳐버리고, 현생 인류 세계사의 중심에서 민족적 특성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한민족의 주체적 시각으로 세계사를 재정비하는 시도의 하나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더 많은 연구와 보충을 통한 보다 체계적인 세계사 골격 정비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
유목제국과 고려의 강성
1. 거란의 성장과 ‘전연지맹’
거란부족의 힘을 결집하는 데 성공한 야율아보기는 혼미한 중원지방을 경략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감숙성 출신의 무장 석경당(石敬唐)을 크게 원조해 주기로 했는데, 석경당은 그에 대한 댓가로 후당국을 멸망시킨 다음에 황하 이북의 16개주를 거란에게 양도하기로 약속하였다. 석경당과 거란의 연합군은 후당국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고 석경당은 후진국을 세웠다. 후진국(後晋國)은 약속대로 소위 연․운16주(燕雲十六州)로 불리우는 하북․산서 지방의 영토를 거란에게 할양하였으므로, 거란은 본격적으로 황하이북의 모든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구려의 옛 강역을 대부분 획득한 거란은 국호를 「대요국(大遼國)」으로 고치고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칭했다. 그러나 유구한 환․단 이래의 문화유산은 물려 받지 못한 채 무력에 의한 강토회복만을 이룩한 대요국은, 그 반대로 문화유산은 다소 물려 받았으나 강토는 한반도 남쪽으로 치우쳐 있던 고려와 시종 정통성 문제를 가지고 다투게 되었고, 그 결과는 거란의 대거 침략에 의한 전란으로 이어졌다.
후진국은 처음에는 대요국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갖추어 대했으나, 석경당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석경당의 조카 석중귀는 대요국과 대등하게 겨루려 하였다. 대요국의 태종왕은 크게 노하여 석중귀를 공격하여 그가 머물던 변(卞)을 함락하고 그를 생포해 버렸다. 이로써 후진국은 불과 12년만에 멸망해 버렸는데, 태종왕은 도읍인 대량(大梁)에서 대약탈을 자행하여 중원지방의 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 당시 거란군의 대약탈을 ‘타초곡(打草穀;풀과 곡식을 베어 버림)’이라고 했는데, 거란군은 젊은이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 죽이고, 늙은이와 어린이는 모두 도랑과 골짜기에 쳐 넣었으며, 수백리의 지역에서 변변하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철저히 약탈했다. 약 석달간에 걸친 대약탈을 마친 후 태종왕은 황하를 다시 건너서 돌아 오다가 도읍에 당도하기 전에 갑자기 발병하여 사망했다.
대요국의 중원철수를 틈타서 석경당의 부하장수였던 감숙성 출신의 유지원이 후한국(後漢國)을 세웠다. 그러나 이 또한 불과 4년만에 유지원의 아들 유승우가 섣불리 대요국에 대한 공격을 기도하다가 자체내에서 먼저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간단히 망해버렸다. 반란군의 수령은 곽위였는데 그는 나라 이름을 후주국(後周國)으로 고쳤다. 쫓겨난 후한의 잔당은 황하 북쪽 구석의 12개주를 장악하여 북한(北漢)을 세웠으나, 북한은 후주국을 치다가 패하여 대요국에 구원을 청했다. 그러자 대요국은 북한을 지원하는 대신 북한을 대요국의 속주로 삼았다. 후주의 세종은 대요국과 맞서서 물러서지 않았으나 재위 6년만에 죽고 그 아들 곽종훈이 세째번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도 또한 귀덕절도사로 있던 조광윤에 의하여 망하고 조광윤은 송(宋)나라를 세웠다.
송태조 조광윤은 혼란에 빠졌던 중원지방을 무마시키려고 각 지방의 반란세력들을 평정하는 데 평생을 바치다시피 했으나, 뒤를 이은 송태종왕은 쓸데없이 다시 대요국을 자극하기 시작했으므로 거란과의 분쟁이 재개되었다. 송의 세번째 왕인 진종왕 때에 이르러서는 감숙성 북쪽 오르도스에서 세력을 굳혀 온 서하(西夏:탕구트)까지도 틈만 나면 송에 대한 침략을 시도했으므로 송나라는 매우 곤하게 되었다. 거란의 맹공격을 견디다 못한 진종왕은 전주(澶州)에서 굴욕적인 강화조건으로 대요국에 굴복하고 말았다. 전연지맹(澶淵之盟)으로 불리운 그 회담에 의하여 송나라는 거란국에 매년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의 공물을 상납하기로 하고, 거란국을 형의 나라로 받들게 되었다.
실력도 없이 허풍에 가득찬 중화사상만을 무기삼아 대요국을 굴복시켜 보려던 송나라의 시도는 이렇게 망신속에 끝나 버렸고, 간신히 명맥만은 보존하게 되었던 송나라는 대요국에 대하여 동생의 나라로서나마 당분간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이처럼 거란으로부터 압박받는 상황에서 송나라에서는 유교가 보다 실용적인 방향으로 변형되어 갔고, 그것은 그 후 성리학(性理學)이라는 형태로 귀결되었다,
2. 고려의 강성
신라말기의 혼미한 내정문란으로 곳곳에서 발생한 민란의 결과 정립된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태조 왕 건은 대단히 포용력이 큰 인걸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신라와 후백제의 권력가들을 처단하는 대신에 거의 모두(특히 신라의 호족의 경우에는) 고려의 권력구조 내부로 받아들여서, 비교적 평화로운 방법으로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였다. 한편으로 보면 각 지방의 호족 세력들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일종의 편법을 썼다고도 볼 수 있으나, 어쨌든 죄없이 전쟁터로 끌려다녀야만 했던 민중들에게는 극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려태조가 평화지향적인 홍익인간 이념의 큰 뜻을 실천에 옮기는 데서 그 위대함을 드러내었던 점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각 지방의 강력한 호족세력들이 기존의 기득권을 그대로 보존한 채 고려의 핵심부분을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중대한 모순이 발생할 소지를 이미 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새로운 사회기풍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권력가들의 존재는 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태조가 남긴 유명한 십훈요(十訓要) 중에는 참으로 태조의 진의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제 8조로서,
“차현(車峴;차령산맥) 이남은 반역의 기운이 있으므로 등용하지 말라.”
는 귀절이다. 우리의 눈을 의심케하는 데 별 무리가 없는 이 대목은 다음의 조선시대에 서북인들 등용에 차별을 두었던 정책과 함께 고려․조선에 걸치는 가장 우매하고도 졸렬한 민족분열적 발상이라는 점에서 단연코 쌍벽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것은 두 시대의 모든 장점을 덮고도 남을 만한 최대의 오점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항목은 관용성으로 유명한 태조황제의 포용력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 개의 외래사상에 불과한 불교를 국교로 정한 사실은, 이미 심각한 종교적 갈등과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는 불씨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제 8조에 대해서는 후일의 위작이라는 연구도 있으므로 판단에 주의를 요한다.
이러한 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전 세계를 통해서 유일하게문명인류의 큰 맥을 이어 받은 고려는 유구한 역사전통도 함께 살려 나아가는 데 성공함으로써 강력한 국가로 성장해 갔다. 그러한 사실은 불교 최대의 행사인 연등회와 함께 환․단이래의 전통을 잇는 팔관회(八關會)가 시종일관 성대하게 거행되었던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거란의 강성으로 인하여 멸망한 대진국의 유민들을 입국 초기부터 무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들 유민들과 함께 거란의 야만적인 침략정책에 대비해 온 고려는, 세번째 황제 정종때 광군사(光軍司) 30만을 정비하고 서경으로 천도할 준비를 하는 등 거란에 대하여 초강경책을 취하는 한편, 고려의 입국취지이기도 한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이라는 거창한 의지를 과시하였으므로, 거란은 고려의 고토회복정책에 의하여 침공당할까봐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거란도 고려와 함께 강성일로에 있었으므로 고려로서는 일단 내정을 정비하는데 주력하기로 하여 여러가지 문물제도 완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네번째 황제 광종은 신라말기의 난세이후 터무니없이 증가했던 노비들의 수를 대폭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다. 노비들은 주로 호족들에게 속해 있었으나, 그들 중에서 본래 양민이었던 대부분의 노비들을 해방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고려 중앙정부는 민중의 지지를 얻는 한편 지방봉건세력을 약화시키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광종은 난세에 빠진 중원지방의 후주국(後周國)에서 평화로운 고려를 동경하여 망명해 온 귀화인 쌍기를 등용하는 한편,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엄격한 시험을 거쳐서 문․무 겸비한 실력가를 관리로 채용하는 과거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과거제도는 중원지방에서는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었으나 오히려 동방에서는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과거제도에 의하여 실력있는 자는 누구든지 등용되었고, 아무 실력도 없이 권세와 재력에 의지하여 높은 지위에 까지 오르던 폐풍은 일소되었으므로, 이 또한 중앙정부의 권위확충과 지방호족 세력에 대한 견제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다. 그러한 중앙집권제의 확립은 5세 임금 경종과 6세 임금 성종을 거치면서 확립되어 갔으나 대체로 지방자치제와 공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시대 이래의 지방토호들의 세력온존과 불교사원들의 과다한 토지소유 등은 고려사회의 암적 존재로서 끝까지 어두운 일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 민중의 사활이 걸린 고려의 토지제도는 사유지를 인정하지 않는 토지공유제를 원칙으로 했으나, 후대로 내려가면서 공음전․사원전 등이 세습적 성격을 띄게 되면서 문란해져 갔고, 그 결과는 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고려국민이 부담하는 세금은 삼국시대 이래의 1/10조세였고, 일정기간 국가사업에 동원되는 용(庸)과, 각 지방의 특산물의 일정량을 중앙정부에 납품하는 조(調) 등의 세가지만 부담하면 되었다. 고려 초기부터 흑창(黑倉), 상평창(常平倉),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등의 민중구제기관과, 구제도감․혜민국 등의 대민 의료봉사기관이 잘 운영되었으며, 성종시절에는 고아에 대하여 10살때까지 관청에서 무료급식을 실시하고, 재면법(災免法)을 운영하여 천재지변으로 수확량이 대폭 감소되었을 때는 세금을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면제해주기도 하는 등, 풍요와 선정(善政)에 의하여 고려는 모든 주위 변방의 나라들 민중들이 부러워하는 바가 되었다. 환․단의 후예답게 홍익인간의 문명세계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복지국가건설을 위하여 상․하 모두가 힘을 합해 노력한 값진 결과였던 것이다. 3,4대에 걸친 이러한 고려초기의 복지사회 건설 성공이야말로 그 후 닥친 거란의 대침공을 모두 격퇴하는 가장 큰 힘이 되었다.
고려사회에서 큰 문제점의 하나로 남아 있었던 것은 역시 노비들의 존재였다. 주로 역적이나 인륜파괴자들을 예방적으로 제재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역대 황조 이래의 노비제도는, 그러나 서양식의 고대노예제도나 근대 미주대륙에서의 혹인․인디오를 대상으로 한 노예제도 등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대단히 융통성있는 사회적 관행이었다. 즉 고려의 노비들은 어느정도 법률상의 보호를 받았으며, 자신의 재산도 소유할 수가 있었고, 심지어는 국가의 변란시에 특별한 공훈을 세우면 관료로 발탁되기도 했던 것이다.
외적이 침략해 왔을 때 누구보다도 이러한 노비들이 앞장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투쟁하였던 사실은 이처럼 융통성 풍부한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노비들도 오랑캐의 앞잡이가 되어 호사를 누리느니보다는, 비록 노비의 신분이라도 문명대국인 고려의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호족들의 세력확장도구로 이용되어 사회모순을 가중시켰고, 노비수모지법(奴婢隨母之法)이라는 암적인 조항이 개선되지 못하고 노비를 확대재생산하는 극단적인 폐단에 흘렀으므로, 말기의 사회불안요인으로서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
노비는 물론 거래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고려중엽 이후에는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양민들보다도 오히려 뛰어난 자들도 나타났고, 또는 특권계급(호족 등)의 비호 아래에서 안전하게 생계를 도모하려는 농민들이 자진해서 농노로 들어가는 경우까지 발생하였다. 서양중세기의 봉건제도 성립과정과 유사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고려는 이와 같은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서 봉건제도 자체의 빠른 붕괴로 나아가는 발전적 과정을 밟지만, 서양에서는 또다른 봉건제도적 퇴보인 해외식민지개척(즉, 해외침략)이라는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문제는 한 번 노비가 된 자들을 이용하여 그 자손들까지 모두 노비로 만듦으로써 자기 세력을 늘리는데 써 먹으려고 했던 신라이래의 욕심사나운 호족들이 온존하였던 데에 있었다. 그러나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 자들을 자손대대로 노비로 만듦으로써 반사회적 야만행위에 경각심을 일으키려 했던 발상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노비의 후손이라도 국가에 큰 공을 세우면 양민으로 환원시켜주는 등의 융통성이 있었던 고려의 노비제도는, 당시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인간미와 관용성이 풍부한 제도였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바로 비슷한 시기인 유럽중세때 한 사람의 노예매매 가격이 후추 한 부대가격 정도에 불과했던 점을 같이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미주대륙에서 수천만명이나 되는 ‘억울한 노예’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인간․반생명적으로 개․돼지보다도 못하게 취급받았던가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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