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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등반가 아닌 등반가로 남고 싶었다!”
카라코람•알프스•남미 암탑 누빈 여성 거벽등반가
1992년~1999년, 선인봉서 앨캡 노즈로
산을 좋아하던 여고생이었던 나는 1992년 친구와 북한산 백운대를 오르다가 거짓말처럼 솟은 인수봉과 처음 대면했다. 거대한 암봉 자체도 매력적이었지만 바위에 붙어 개미처럼 꿈틀거리며 올라가는 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하는 클라이머들을 눈앞에서 목도한 순간 등반에 대한 호기심과 부러움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인수봉을 오르는 등반가들이 마치 신과 같이 느껴졌다. 나도 저길 한번 올라보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처럼 선 암벽을 오를 방법이 내게는 전혀 없었다. 아쉬운 시선을 거두고 만경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길을 잃은 나는 다행스럽게도 가족과 함께 산행중인 타이탄산악회 송태선씨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만경대 리지를 주파할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바위를 오르내리며 느낀 짜릿함은 나를 전율케 했다. 이후 1년. 나는 타이탄산악회에 입회했다. 하늘 같은 선배들은 여자와 남자를 구분하지 않고 스파르타식으로 몰아붙였다. 여자라고 해서 후등으로 등반하는 것을 봐주지 않았다. 장비 몇 개를 손에 쥐여주고 무조건 “고(go)!”를 외치면 “네”라는 대답과 함께 등반을 시작했다.
1 1993년 어느 날이다. 안산 암장의 크랙에 붙었다.
2 아래 나의 거벽등반 데뷔는 요세미티의 노즈였다. 그레이트 루프 인근을 인공등반으로 오르고 있는 나.
특히 최철산 선배는 나를 더욱 강한 등반가로 키웠다. 그의 강압(?)에 어려운 루트 선등에 나섰다가 추락하면서 턱이 까진 적도 있었지만, 등반의 재미에 비하면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매주말 산에 가다 보니 지하철에서 한 종교인을 자주 만났다. 그는 어느 날 나를 보고 작정한 듯 어디 가느냐고 따지듯 묻었다. 이때 나는 종교가 선인침리교라서 도봉산에 간다고 농담 같은 답을 했다. 이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산은 나에게 신앙이었으며 종교였다. 10년 동안 국내에서 바위와 빙벽을 오르며 역량을 키우니 자연히 욕심이 생겼다. 더 큰 벽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때마침 친구 채미선과 의기투합한 나는 미국 등반을 함께 준비했다. 그러나 비자문제로 발목이 잡혀 그녀와 함께하지는 못했다. 거벽에 대한 꿈은 1999년 청화산악회 선배들과 요세미티행 비행기에 오르며 실현됐다. 1,000m의 거대한 벽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혹했다. 등반이 늦어지면서 식량과 물이 부족해지자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늦은 밤 엉덩이만 걸칠 수 있는 테라스에 도착했다. 천우신조인지 바위틈에는 통조림이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팠던 우리는 캔을 크랙에서 모두 꺼내 먹어치웠다. 다음날 아침 그곳이 화장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날 맛있게 먹었던 통조림 캔을 찬찬히 살펴보니 말라비틀어진 변이 붙어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거벽에서의 생존은 그런 것이었다. 남자 대원 세 명과 함께 한 노즈 등반은 5일째 정상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컸다. 사흘치 식량만을 준비했던 판단 미스로 인해 겪었던 고통 때문이었다.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거벽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뼈저리게 느낀 등반이었다.
1 멀티4 원정에서 알파인등반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힌두쿠시산맥 무스뜸 정상 직하에서 하혈한 나는 하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2 홍일점으로 참가한 멀티4 원정 당시 대원들. 맨 오른쪽이 나다.
2001년, 나를 직시한 멀티4 원정
파키스탄 히말라야 멀티4 원정대(대장 서기석)에 참가했다. 100일 동안 5,000~6,000m급 봉우리를 다섯 개를 오른다는 무식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대원들은 밥만 먹으면 오르는 서기석, 김창호, 임성묵, 장기헌, 최석문, 이병주 등 괄목할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등반가들이었다. 여자 대원은 오직 나뿐이었다. 높은 고도가 처음인 나는 원정 초반 고소증으로 엄청나게 고생했다. 얼굴이 호빵처럼 부풀어 올랐고 구토도 했다. 그러나 정작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건 남자들과 함께 전인미답의 벽을 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체력과 기술 어느 하나도 내세울 것이 없었다. 모자란 점이 너무 많았다. 짐도 많이 못 메고, 걸음도 늦고, 체력도 부족해 등반이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나약해지는 나의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화가 났다. 하지만 형들은 그때마다 처음이라 그렇다며 적응되면 나아질 거라며 용기를 주었다.
원정 말미, 나는 힌두쿠시산맥의 미등봉 무스뜸(5,620m)에 서기석, 임성묵 형과 팀을 이루어 도전했다. 우리는 눈사태와 퍼붓는 낙석을 뚫고 사흘간 올라 정상 직하에 섰다. 그러나 정상을 목전에 둔 우리는 하산을 선택해야만 했다.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체력이 저하되면서 생리를 마친 지 열흘만에 하혈을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형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두고 올라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기석이형이 미안하다면서 내려가자고 했다. 세계 초등을 목전에 두고 나 때문에 하산한 것이 미안했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여자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이전까지 나는 여성 등반가가 아닌 등반가였다. 하강하며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전진캠프에 내려온 나는 텐트 뒤에 숨어서 자책하며 엉엉 울었다. 슬픔이 가라앉자 여성단일팀을 꾸려 알파인스타일 등반에 나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서로를 보다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여성들과 거벽을 오른다면 그 역시 의미 있고 아름다운 알피니즘의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이른 여름 시작한 원정은 밀이 익을 무렵 막을 내렸다. 멀티4 원정을 통해 나는 고산거벽등반은 기술도 중요하지만 이를 받쳐줄 강한 정신력과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쳤다. 그리고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팀워크의 중요성에도 눈을 떴다. 나를 직시한 것이었다.
1 마음 맞는 선후배들과 팀을 꾸려 나선 알프스 원정에 나섰다. 그랑드 조라스 정상 인근이다.
2 그랑드 조라스 정상. 왼쪽부터 채미선, 김점숙, 나.
3 자이언 국립공원의 멀티피치 루트를 오르고 있다. 나는 미국 등반 투어를 통해 크랙등반을 다시 배웠다.
2006년~2008년, 여성 단일팀으로 오른 알프스와 남미의 거벽
2001년 멀티4 원정을 마친 나는 그해 12월 등반가 최석문과 결혼했다. 2002년에는 아들 최보건을 얻었다. 육아로 인해 산에 가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스트레스가 점점 심해졌다. 잠자는 아이가 이유 없이 밉고, 젖을 짜고 있는 나 자신이 싫었다. 매일 같이 울었다. 죽고도 싶었다. 우울증에 걸린 나를 보고 가장 놀란 건 나 자신과 남편이었다. 일단 살아야겠다는 판단에서 부모님께 보건이를 맡긴 나는 유축기를 들고 다시 등반에 나섰다. 자연스레 우울증은 치유되었고 예전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후 나는 아이가 자는 틈을 이용해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결혼 전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더욱 치열하게 트레이닝을 했다. 몸에 힘이 붙자 2001년에 생각했던 여성단일팀 원정대를 꾸릴 기회가 찾아왔다. 거벽등반가인 김점숙, 채미선, 김동애와 함께 2006년 알프스의 거벽을 올라보기로 했다. 우리는 한 달 동안 몽블랑 뒤 타귈 삼각 북벽, 에귀 디 미디 북벽, 그랑드 조라스 북벽, 몽블랑을 차례대로 올랐다. 서로 등반실력도 엇비슷하고 마음도 잘 맞아 남자들과 등반하는 것보다 여러 모로 편하고 재미난 원정이었다. 등반 경험이 많지 않아서 사소한 문제로 의견충돌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서로 로프를 묶는 순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따라가는 등반이 아닌 서로가 원정대의 주인이 된 우리는 최선을 다해 벽을 오르고 또 올랐다. 알프스에 이은 나의 도전은 2008년 파타고니아로 이어졌다. 이명선, 한미선과 함께 파이네 중앙봉을 겨누었다. 이 봉우리는 2007년 남편 최석문이 등정한 봉우리였다. 우리가 처음 등반을 계획하고 준비할 때 이 봉우리에 대한 여성 단일팀 등정 여부는 관심 밖이었다. 여성단일팀 초등을 노린 등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파타고니아의 바람은 상상을 초월했다. 날씨 변화도 너무 급작스러웠다. 28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등반했지만, 우리는 정상 100m를 남겨두고 강풍에 밀려 하산해야만 했다. 며칠 뒤 재차 등반에 나선 우리는 등반속도에 성패를 걸고 올라 파이네 중앙봉 정상에 섰다. 안전하게 하산한 우리는 다음 등반 대상지인 아르헨티나의 쎄로토레로 급히 이동했다. 등반 기간이 보름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우리에게 등반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하단 벽에 붙는 순간 악천후가 몰아닥쳤다. 우리는 닷새 동안 벽에 갇혀 있었다. 더는 오를 방도가 없었다. 나는 이때 한미선과 이 벽을 다시 오르자고 굳게 약속한 후 하산을 결정했다. 파타고니아 등반을 통해 느낀 점은 등반 자체도 힘들지만, 벽 밑에까지 가는 과정 또한 등반 못지않다는 것이었다. 40kg의 짐을 메고 베이스캠프로 향하던 순간 우리는 고행자가 되어야만 했다. 벽으로의 접근도 등반의 일부이며, 목표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과정이자 노력임을 여실히 깨쳤다. 파이네 중앙봉을 여성팀으로 처음 올랐다는 사실은 귀국 후 알았다.
2009년~2011년, 크랙등반을 다시 배우다
여자라고 해서 산의 높이가 낮아지거나 쉬워지지는 않는다. 등반은 오르는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 오르느냐에 따라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남미에서 귀국한 나는 경량속공등반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자연적인 위험요소가 너무 많아 이를 제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속도를 담보할 수 있는 자유등반이었다. 등반력 향상에 노력한 나의 첫 목표는 설악산 적벽의 에코~독주길 자유등반이었다. 이 등반의 모티브를 제공한 이 코스를 자유등반으로 초등한 손정준씨였다. 그는 나와 함께 적벽을 오르며 충분히 완등할 수 있을 거라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선운산의 ‘때로는 힘들지만(5.13a/b)’을 오른 나는 그 여세를 몰아 2009년 9월 여성 최초로 적벽 자유등반에 성공했다. 트레이닝을 시작한 지 2년만에 이룬 성과였다. 나는 이 등반을 통해 클라이밍은 자신에 대한 통찰이며 나 이외에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걸 깨쳤다. 더불어 실패할까 두려워 나서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경험과 성취도 얻을 수 없다는 점 또한 마음에 담았다.
자유등반 능력 향상을 위해 2010년 미국으로 등반투어를 떠났다. 유타의 인디언 크릭과 자이언 국립공원, 요세미티의 여러 암장을 돌며 난 크랙등반을 다시 배웠다. 어떠한 꼼수도 부릴 수 없는 어려운 크랙을 오르며 나는 더욱 초심으로 돌아갔다. 인디언 크릭의 30m 크랙에는 볼트가 하나도 없었다. 종료지점에만 쌍볼트가 있었다. 자이언 국립공원의 한 루트는 확보지점이 아예 없었다. 등반가가 만들어야만 했다. 자연을 보호하는 새로운 등반문화에 충격을 받았다. 나의 부족함이 선명해졌고, 앞으로 어떤 등반을 해야 할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나는 2011년 알프스 펀(fun) 원정대를 한미선, 채미선, 서화영, 김영미와 함께 꾸렸다. 파타고니아 원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훈련등반 성격이었다. 후배들과 함께 알프스의 벽을 오를 수 있었던 건 분명 내게 행운이었다. 나는 이들과 벽을 오르며 공감하고 싶었다. 우리는 아르장티에르, 에귀 디 미디 남벽, 브레방, 그랑 카푸셍, 당 뒤 제앙을 차례로 올랐다. 그랑 카푸셍을 등반할 때는 37시간 동안 암벽화를 신은 채로 벽에 붙어있었다. 춥고, 배고프고, 힘들고, 위험했지만, 이런 고난들은 나의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 중의 하나이기에 기쁘게 맞아 올랐다.
1 삼세번의 시도로 기어이 정상에 오른 피츠로이.
2 친구들과 함께 피츠로이 정상에 섰다. 왼쪽부터 한미선, 필자, 채미선.
2012년, 삼세번의 시도로 피츠로이 정상에
파타고니아는 나에게 기다림이란 단어를 선사했다. 한국산악회 후원으로 한미선, 채미선과 팀을 이룬 나는 4년만에 다시 파타고니아를 찾았다. 2008년 강풍으로 쎄로토레 등정에 실패했기에 이번에는 꼭 올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하기 며칠 전 컴프레서 루트가 훼손되었다. 등반이 거의 불가능했다. 두 번째 등반지인 피츠로이 등반에 먼저 나섰다. 우리는 애를 쓰기는 하였으나 벽 상태와 날씨로 좋지 않아 등정에 실패했다. 3차 등정 시도에 나서기 전 실패를 분석해 철저히 등반 준비를 했다. 침낭과 텐트는 생략했고, 우모복과 비박색만 챙겨 무게를 최소화했다. 스프 한 개로 하루를 버티기도 했다. 1,000m 수직벽에 여자 셋뿐이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하늘이 열린 등반 4일째 기어이 정상에 선 우리는 환호했다. 삶의 지평이 넓어진 것 같았고,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의 의지가 차올랐다. 지난한 시간 동안 나는 한 번도 산을 변화시킬 수가 없었다. 산은 높이와 난도가 가변하는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 불변의 벽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오직 나를 더욱 성장시키는 방법뿐이었다. 등반이 어려운 건 오르는 행위보다 마음이 변하지 않게 꼭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흔들리는 마음이 변하지 않게 나를 도와준 이는 친구 한미선과 채미선이었다. 만약 이 두 친구가 없었다면 나는 피츠로이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원정대는 강한 사람만 모였다고 해서 강해지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약한 사람이 모였다고 약한 팀이 되라는 법도 없다. 나는 이를 파이네 등반을 통해 여실히 깨쳤다. 등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서로 격려하며 용기를 주고 받는 파트너라는 사실을…. 그들과 오른 벽이 새삼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이명희(40세)
타이탄산악회
경기지도자 2급
생활체육지도자 3급
1999년 요세미티 엘캡 노즈, 조디악 등반
2001년 카라코람 멀티4 등반
2006년 알프스 그랑드 조라스 북벽, 몽블랑 뒤 따퀼 삼각 북벽, 에귀 디 미디 북벽 등반
2008년 파타고니아 파이네 중앙봉 여성팀 세계 초등, 쎄로토레 등반
2009년 아이거 북벽 등반
2009년 설악산 적벽 에코~독주길 자유등반(여성 초등)
2010년 미국 요세미티 엘캡 노즈(16시간40분) 등반, 유타 인디언 크릭 등 등반
2011년 알프스 아르장티에르, 에귀 디 미디 남벽, 그랑 카푸셍 등 등반
2012년 파타고니아 피츠로이 등정
입상 2005년 전국빙벽등반선수권대회 난이도 여자부 1위
2007년 전국빙벽등반선수권대회 난이도 여자부 1위
2011년 전국빙벽등반선수권대회 난이도 여자부 1위
2004~2007년 익스트림 라이더 인공등반대회 여자부 난이도 1위
수상 2007년 사람과 산 산악상 스포츠클라이머상 수상
2012년 한국산악회 김정태상 수상
2012년 사람과 산 산악상 알파인클라이머상 수상
2013년 서울시산악연맹 우수산악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