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CIS 학과가 발간하는 월간 '러시아CIS 토크' (Russia-CIS Talk)는 2026년 8월 호(https://ruscis.hufs.ac.kr)에서 한국의 공공외교(public diplomacy) 분야에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기여하고 있거나,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심층적으로 살폈다. Shin Nadezhda(박사 과정, 러시아·CIS 사회문화 전공)씨가 쓴 '고려인은 한국의 공공외교 자산이 될 수 있는가?'이다. 소개한다/편집자
**본 칼럼은 저자 개인의 의견이며, 학과와 바이러시아(www.buyrussia21.com)의 공식 견해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왜 중앙아시아 고려인인가?
한국의 공공외교(public diplomacy)는 외국 국민과 사회를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높이고, 이를 바탕으로 우호적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일련의 활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공외교는 정부뿐만 아니라 문화콘텐츠, 교육 교류, 기업, 시민사회 등 다양한 행위자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오늘날 국제 사회에서 국가의 영향력은 정부의 일방적 메시지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지 사회에서 신뢰를 쌓고 서로 다른 문화와 제도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사회적 행위자 역시 중요한 외교 자산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한국 공공외교 논의에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고려인은 한국 밖에서 형성된 한민족 디아스포라이면서도 동시에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시민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인은 단순한 재외 매개 집단이자 사회적 자산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고려인은 주로 강제 이주의 역사적 피해 공동체나 민족문화를 보존해 온 공동체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고려인의 의미는 과거의 기억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지역 사회에서 쌓아 온 신뢰와 경제활동 경험, 언어 능력, 제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새롭게 형성된 디지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한국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다양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려인이 공공외교의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현지 사회 안에서 신뢰와 연결성을 만들어 가는 주체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고려인의 역할은 특히 신뢰 형성, 경제 협력, 공동체 네트워크 구축, 그리고 청년 세대의 디지털 연결이라는 측면에서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 알다시피, 중앙아시아 고려인 공동체는 19세기 말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의 이주와 1937년 소련 (스탈린 시대)의 강제 이주를 거치며 형성되었다. 이후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중심으로 정착했으며, 오늘날 중앙아시아 전역에는 약 50만 명 규모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제 이주는 공동체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는 생존과 적응을 넘어 사회적 성취를 이루어 온 과정이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삶의 터전을 마련한 뒤 교육, 과학, 의료, 행정, 기업 활동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전문직 종사자와 지역 엘리트를 다수 배출하며 현지 사회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다져 왔다.
이러한 배경은 중앙아시아 고려인을 단순한 소수민족 집단이 아니라, 현지 사회에서 신뢰와 평판을 쌓아 온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오늘날 공공외교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국가 홍보가 아니라 현지 사회와 신뢰를 쌓고 관계를 넓혀 가는 일이다. 국가는 외부에서 메시지를 전달할 수는 있지만, 지역 사회 내부의 신뢰를 단기간에 얻기는 쉽지 않다.
반면, 오랜 세월 현지 사회와 함께해 온 공동체는 사람들의 일상과 언어, 문화는 물론 비공식 네트워크까지 깊이 이해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고려인의 역할이 주목된다.
◇신뢰 자본에서 경제협력으로
국가가 적극적으로 문화를 홍보하더라도 현지 사회가 이를 외부에서 전달되는 낯선 메시지로 받아들인다면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현지에서 이미 신뢰를 얻고 있는 공동체가 관계 형성에 참여한다면 훨씬 높은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고려인은 교육 수준이 높고 성실하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집단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아 왔다. 이러한 평판은 오랜 시간에 걸친 경제활동과 사회 참여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다. 따라서 고려인 공동체가 현지 사회에서 축적해 온 우호적 이미지는 한국과 중앙아시아를 더욱 자연스럽게 이어 주는 자산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신뢰는 경제협력의 현장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해외 기업은 현지 사회에 대한 이해 부족, 정보의 비대칭성, 제도적 불확실성, 네트워크 부재 등으로 인해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한다. 특히 중앙아시아는 이러한 문제가 두드러지는 지역이다. 행정 절차와 비공식 네트워크, 언어 환경, 지역별 비즈니스 관행에 대한 이해 없이는 시장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한국 기업이 중앙아시아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투자뿐 아니라 현지 사회와 연결된 협력 파트너와 중개자가 필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려인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고려인은 러시아어와 현지 언어를 사용하며 지역의 제도와 사회문화를 이해하는 동시에 한국과의 문화적 연결성도 갖고 있다. 이들은 한국 기업과 현지 시장 사이에서 통역과 협상, 행정 지원, 정보 제공, 네트워크 연결 등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는 이미 경제 협력의 중요한 연결 기반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카자흐스탄 고려인 협회(Association of Koreans of Kazakhstan, AKK)이다. 카자흐스탄 경제 전문지 포브스 카자흐스탄(Forbes Kazakhstan)에 따르면 고려인 협회는 단순한 문화단체를 넘어 기업 간 협력을 확대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협회에는 다양한 고려인 기업가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식품, 유통, 서비스업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한국과 중앙아시아 시장을 연결하는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는 고려인 공동체 내부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사회적 신뢰와 인적 네트워크가 실제 경제 협력의 자본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카자흐스탄 기업가 안드레이 신(Andrey Shin)이 운영하는 신-라인 그룹(Shin-Line Group)은 한국 편의점 브랜드 CU와 협력해 카자흐스탄 시장에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포브스 카자흐스탄에 따르면 신-라인 그룹은 알마티 인근 지역에서 푸드 클러스터(food-cluster) 조성을 추진하며 한국 식품 공급망과 현지 생산 기반을 연결하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이는 고려인 기업가가 한국과 중앙아시아 간 경제협력을 잇는 실질적인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중앙아시아 각국의 한국 교육기관과 의료기관, 통번역 분야에서도 고려인 전문 인력들은 한국과 현지 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는 고려인의 역할이 단순한 기업 활동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전문 영역에서 경제 협력의 토대를 넓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고려인이 중앙아시아 사회에서 오랫동안 쌓아 온 신뢰는 단순히 긍정적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과 중앙아시아 간의 경제협력이 현지 사회 속에서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자산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인은 경제협력의 직접적인 주체라기보다 신뢰 기반의 공공외교와 실질적인 협력을 이어 주는 사회적 매개자이자 전략적 사회 자산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도와 네트워크:이미 작동하고 있는 연결 구조
고려인의 영향력은 개인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중앙아시아 각국에는 문화센터, 한글학교, 언론기관, 극장, 협회 등 다양한 공동체 조직이 존재한다. 이러한 조직들은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하는 동시에 외부 사회와의 접점을 넓히는 역할을 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카자흐스탄 고려인 협회이다. 협회는 지역 공동체를 연결하고 교육·문화·청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편, 정부와 국제 파트너를 잇는 협력 창구 역할을 맡아 왔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문화 보존 활동을 넘어 청년 세대 육성, 국제 교류 사업, 공동체 네트워크 확장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고려인 공동체가 단순한 문화 보존 단체를 넘어 다양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일보』와 같은 공동체 언론은 분산된 고려인 사회를 하나의 상징적 공간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공동체는 공통의 이야기와 상징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인 언론과 문화기관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외부 사회와 소통하는 중요한 창구로 자리하고 있다.
종합하면, 고려인은 단순한 인구 집단이 아니라 이미 제도화된 네트워크를 갖춘 조직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한국의 공공외교가 현지 사회와 만나는 과정에서 신뢰를 높이고, 메시지를 현지의 맥락에 맞게 전달하며, 나아가 장기적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민족 보존을 넘어: 고려인이 여는 비즈니스와 디지털 협력의 미래
오늘날 고려인의 역할은 과거를 보존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미래 지향적인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제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단순히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넘어 투자와 지역 개발, 국제 비즈니스,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새로운 협력 주체로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카자흐스탄 알라타우 시티(Alatau City)에서 추진되는 케이파크(K-Park) 프로젝트이다. 케이파크는 카자흐스탄 고려인 협회가 주도한 문화·비즈니스 복합 프로젝트로,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한국 문화, 투자 유치, 도시 브랜드 전략이 결합한 상징적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알라타우 시티 공식 자료 역시 케이파크를 2025년 주요 성과 가운데 하나로 소개하며, 이 사업이 도시의 문화적 상징을 넘어 투자 유치와 도시 브랜드 형성에도 기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디아스포라 조직이 단순한 문화 보존 단체를 넘어 지역 개발과 국제 협력의 실질적인 주체로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시 말해, 고려인 공동체는 더 이상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 중앙아시아의 지역 발전과 한국의 대외 경제 협력 과정에 함께하는 파트너로 역할을 넓혀 가고 있다.
동시에 새로운 세대의 부상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년 고려인들은 전통적인 협회 중심 활동을 넘어 유튜브, 인스타그램, 텔레그램, 스타트업, 국제 유학, 글로벌 취업 등 디지털 기반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예컨대 카자흐스탄 고려인 청년운동(MDK)은 다양한 문화 행사와 국제 교류, 청년 네트워크 활동에 참여하며 고려인 청년 세대 간 연결과 협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고려인의 역할이 민족문화 보존을 넘어 청년 교류와 디지털 네트워크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은 오늘날 공공외교가 더 이상 국가기관 중심의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민간 네트워크, 그리고 청년 세대의 디지털 연결을 바탕으로 보다 다층적이고 지속 가능한 협력 구조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재외 동포나 강제 이주의 후손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은 현지 사회에서 축적한 신뢰 자본과 경제활동 경험, 제도적 조직력,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디지털 연결성을 함께 갖춘 공동체이다. 한국은 고려인을 통해 단순한 문화 홍보를 넘어 실질적인 협력과 장기적인 관계 형성이 가능한 접점을 마련할 수 있다.
나아가 고려인은 한국 공공외교의 주변적 요소가 아니라, 중앙아시아 전략의 중요한 협력 파트너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신뢰 형성과 경제협력, 현지 연결성, 그리고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전략적 사회 자산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려인은 일방적 지원의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한국과 중앙아시아 사회를 연결하며 신뢰와 협력을 함께 만들어 가는 중요한 사회적 파트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