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조사 가는 길에서 본 산신각
팔공산 거조사 / 전통사찰
거조사에 대한 글이 이 카페에 있다. 예전에 들른 적이 있어 절에 대한 설명을 접겠다.
영산전이 국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목조는 다섯 손가락 안이다.
구룡산 영지사 (九龍山 靈芝寺) / 전통사찰
- 경북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한국불교사찰사전』(불교시대사)에는 “신라 무열왕 때 의상(義湘)이 창건해 웅정암(熊井庵)이라 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603년(선조 36) 지조(智照)·원찬(元贊)이 중창하고 이름을 영지사(靈芝寺)로 바꿨다.
1992년 중안(重岸)이 대웅전을 중수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경상북도에서 발간한 『문화재대관』에서는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고 영지대사가 주창하여 영지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 1774년(영조 50)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라고 하는데, 두 기록의 내용을 고증할만한 문헌이나 유물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사찰 입구에 있는 「임자갑유공비(壬子甲有功碑)」에 의해 1774년에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건물은 모두 조선후기의 건축 양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주변의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배치하였고 새로운 구조 기법이 돋보인다.
전체 가람 배치는 대웅전과 요사채 등 최소 규모로 가람을 구성했던 조선 후기 소규모 지방 사찰의 일반 형태를 보여준다.
유물로는 삼층석탑과 역대 주지의 부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소형 삼층석탑은 본래 영천시 대창면 탑마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인데 기단부가 유실되었다.
대웅전의 신장탱화와 명부전의 지장탱화 하단에는 '광무사년(光武四年, 1900)'이라는 문구가 명기되어 있다.
현재 영천의 구룡산(九龍山)에 있으며 은해사(銀海寺)의 말사이다.
(인테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603~661), 김춘추. 김유신이 처남이다. 백제 멸망(660) 뒤 바로 사망하였다.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으로 신라에서 처음으로 왕이 되었으며, 최초로 묘호를 사용하였다. 시호는 무열왕, 묘호는 태종.
영천시 전통사찰이 팔공산 자락을 의지하고 있으나 이곳 영지사는 시내에서 떨어진 곳으로 경산에 가깝다.
피곤함이 몰려오는 중에 한적한 절을 찾았으나 잠시라도 쉴 수가 없다. 절은 보수 공사 중이다.
영천 영지사 범종각(永川 靈芝寺 泛鐘閣) / 경북 문화유산자료
수리 중이다.
명부전도 수리할 것 같다.
대웅전 마당에 삼층석탑은 대창면 탑마리에 있던 것을 옮겼다. 옮길 때 기단부를 잃어버렸다.
영지사 대웅전 / 경북 유형문화재
2015년 해체, 복원한 조선 후기 건축물.
영지사 대웅전 후불탱화 / 경북 유형문화유산
가로 207.7cm / 세로 209.1cm / 비단 바탕에 채색.
화기(畵記)엔 건륭(乾隆) 41년(1776)년에 취증(取澄), 정총(定聰), 도한(道閑) 등이 참여하여 그린 불화임을 알 수 있다.
부분적으로 안료의 변색으로 훼손이 심한 편이나,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영산회 도상으로 간결한 도상구성과 화려한 광배 표현, 선명한 색감 등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본존 법의의 장식 문양이나, 나한상의 환상 점묘식 문양 등은 18세기 전반기 양식을 이어받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려한 광배표현 등은 취징 등 화사집단을 연구하는데 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삼성각
심검당
영지사 가기 전에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옆에도 문화유산이 있지만 관심을 갖지 않았다.
2024년 4월 29일 월요일
영천 수도사..신녕향교..한광사...권응수 장군 유적..신녕 포교당..부귀사..거조사..영지사..경산 제석사..반룡사..집
2024년 5월 17일부터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바뀌었다.
유형문화재로 국보, 보물, 유형문화재, 문화재자료 등 명칭도 바뀌었다.
유형문화유산으로 국보, 보물, 유형문화유산, 문화유산자료 등으로.
이 글은 2024년 5월 24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