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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검
찢을 듯 서쪽 밤하늘 걸려있는 저 단검
깊숙한 뱃속에 숨겨놓은 나의 궁극
어쩌다 혀를 잃어버린 마지막 나의 언어
가장 깊은 곳의 단단한 뼈 한 조각
품어서 지켜냈던 시간들의 붉은 응집
초사흘 초승달로 뜬 잘 벼린 저 단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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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
단청을 다 털어낸 팔작집 대웅보전
달까지 끌어내려 절집 온통 새하얗다
어쩌나, 오늘밤 내내 눈이 부실 달마산
삐거덕 어간문 열며 세 부처님 나오시겠다
무릎은 좀 어떠신지요 서로 살펴도 보고
나란히 돌계단에 앉아 달빛 나눠 쬐시겠다
주춧돌 속 게와 거북 자하루 밑 소 그림자
다 닳은 발 움직여 그 옆에들 와 앉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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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토너
생각보다 먼 데서 왔는지도 모른다
태고의 바람이 훌쩍 그네를 밀어
처음엔 그저 밀려서 출발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주저앉고 싶었으리
근육이 찢어지고 심장은 터질 듯해
공포의 혓바닥 위에서 콰르릉 우짖었으리
주문진 푸른 광장 완주 앞둔 저 파도
월계수 잎새로 튕겨내는 은빛 포말
흰 새는 그 속에서 태어나 하늘로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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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그릇
수없이 죽었고 수없이 태어난 봄 한 번도 죽지 않아 다시 태어나지 않은 봄 사실은 우주에 닿아 있지 내게도 닿아 있지
어부의 아내처럼 머리의 소금그릇 연두를 저장해 내게 또 건넬 테지 얼음길 걸어갈 때도 설렘을 앞세울 테지
반짝반짝 소금그릇 닦고 있는 사람아 조금씩 조금씩 내게로 스며들어 절대로 떠나지 않을 봄 같은 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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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동
땅 위로 오르기까지 오천 년 걸린 마을
움집의 화덕이 움켜쥔 온기를 놓고 박혔던 빗살무늬 토기가 제 몸을 다 뽑기까지
수수가 익어갔고 물고기가 구워졌고 둔덕 위 염소들이 물 많은 풀을 뜯던 그물 추 손질을 마친 남정네가 일몰을 보던
굽이치던 강물이 울컥 눈 붉히는 빈 배처럼 일렁이며 뒤를 돌아보는
온전히 강에 의지했던 육천 년 전 그 마을
* 서울 암사동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최대 집단 취락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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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조그만 꽃 뭉치에 산이 기대고 있다
꽃대 끝 매달린 보라 선명한 삼월 하순
말끔히 차려입은 제비도 이제 막 돌아왔다
잎자루 작은 날개 하늘로 오를 동안
산은 무릎을 접고 허리를 굽혔다
떠났던 그 여자애가 다시 온 듯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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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를 보다
지난 여름 목욕탕에서 두 노타를 보았네 탈의실 바닥에 앉아 서로에게 손을 뻗은 주름이 아래로 다 내려와 물결처럼 퍼졌네
한 손이 저쪽 허리에 파스를 붙여주니 또 한 손이 이쪽 발에 비닐을 감아주었네 제대로 감기지 않아 빨간 약이 슬몃 보였네
끙차, 두 노파는 간신히 일어났네 한 몸이 비틀거리자 한 몸이 붙들었네 허리가 또 삐끗했는지 둘이 함께 비틀거렸네
나는 눈이 뜨거워 다가가지 못하고 이월 매화 보듯 맘 졸이며 서 있었네 행진은 여름 해처럼 느릿느릿 이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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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
햇빛의 농담은 처음부터 언짢았다 새들의 긴 조롱도 갈수록 거북했다 해 뜬 후 마음의 절반 저절로 오그라졌다
모질기도 하여라 후두를 찢는 바람 시퍼런 핏덩이를 기어이 뽑아냈다 노래에 묻은 핏자국 선명한 요절의 예감
절명의 순간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오전도 겨우 아홉 시 풋감 하나 떨어지고 신문은 한 젊은 가수의 부음을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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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슬리퍼를 끌면서 공터에 나와 있다
낮 내내 먹은 게 없어 속이 텅 비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공터는 너무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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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든 남자
헝클린 머리칼로 문 앞에 서 있다
열지도 닫지도 않은 가방을 손에 들고
허기로 가득 채워져 가벼워진 큰 가방
수많은 이별들이 거기 담긴 게 보인다
한 번도 하늘에는 가 박히지 못하고
떨어져 녹슬어버린 별이 못 된 별들도
헐거운 톱니처럼 맞물리지 못한 날들
부러진 의자 위로 또 넘어진 남자가
어둠된 가방을 들고 문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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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라는 말
이윽고 어둠이 풀려 아침이 찾아왔다 밤새 지붕 위서 웅크렸던 송이눈 이제 막 비질을 마친 마당으로 떨어진다
퍽, 하고 눈 그림자 눈 보다 먼저 떨어진다 마음부터 먹고 보는 오래된 습관은 어디든 마음부터 먼저 보여주는 것이다
그도 그림자부터 내게 온 것이겠다 수많은 먼저가 그림자로 짙어질 때 가장 큰 마음 하나가 성큼 발을 내딛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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