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리 편에 있는 거짓말 / 사무엘하 17:15-20
개인이나 단체에 있어서 좋지 못한 결과가 올 때, 우리는 흔히 그 원인이 남에게서 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다른 사람을 원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개인이나 단체에서 생겨지는 어려운 문제들은, 나 때문에 생길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됩니다. 나 한 사람 생각을 고치면, 나 한 사람 이해를 해 버리면, 나 한 사람 바른 행동을 하고 나면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런데도 나 한 사람은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서 허물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평안하던 교회나 가정들이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돌이키기 힘든 형편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의 결점이나 고집 때문에 여러 사람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나 한 사람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항상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조심해야 할 것 가운데서도 언어를 각별히 주의 해야 합니다. 인간 관계에서 언어의 위치는 가히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단체 생활을 할 때 언어를 통해서 해독이 많이 찾아 옵니다. 언제나 허탄한 말을 버리고 유익한 말을 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말이 많으면 평화가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분쟁은 말을 통해서 온다고 했습니다. 말은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가장 무서운 무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말은 남을 찌르는 칼이라고 했고, 칼로 찔린 상처는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속히 치유되지마는, 말로 찌른 상처는 마음을 상하게 하므로 일생을 사람의 마음에서 고통을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영어 시에 이러한 시가 있습니다. ‘노여움을 품은 말 한 마디가 친절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고, 부지 중에 나오는 한 마디 말이 밝게 사는 자의 앞날을 캄캄하게 하고, 생각없이 하는 말 한 마디가 남을 오래 번민하게 하며, 찌르는 날카로운 말 한 마디가 남에게는 일평생 찌르는 가시가 되어 괴로움을 준다. 그러나 친절한 말 한 마디에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를 받고, 동정의 따스한 말 한 마디가 약한 영혼을 구원하고, 기쁨과 소망에 찬 말 한 마디가 슬픔에 젖은 마음에 위로를 준다.’
사람이 가진 것 중에 말만큼 무서운 무기가 없습니다. 또 사람이 가진 힘 중에 말 만큼 무서운 힘을 가진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필요한 말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 말을 버리라고 했고 이치에 합당한 말은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거짓말로 유혹하여 죄의 굴레를 씌웠고,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그 자녀들을 구원하십니다. 거짓말일수록 달콤한 화장을 하고 진리일수록 입에는 쓰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신기하고, 이상한 광경들이 참 많다고 합니다. 요즘 TV 프로그램 중에서, 외국인들이 한국에 처음 여행 와서 겪는 일들을 보여주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히 여기던 익숙한 일이지만, 외국인들 눈에는 정말 이상하고 신기하게 보이는 게 많더라는 겁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졸업식 풍경입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요즘 졸업식 때 이 노래 안 부르지요? 그런데 졸업식 때 우리는 졸업생들을 어떻게 부릅니까? 보통 “졸업생 누구 외 몇 명” 하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졸업생 임남수 외 총 480명” 이런 식이지요. 불행하게도 실제로 제 이름이, 이렇게 졸업생 대표로 불려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졸업생들에게 상 줄 때도, “성적 우수상 누구 외 몇 명, 개근상 누구 외 몇 명” 이렇게 호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광경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데, 외국인들 눈에는 정말 이상하게 보인다네요. 왜일까요? 다른 때는 몰라도 졸업식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데, 졸업생들 이름 하나 하나 불러주지 못하고 “누구 외 몇 명”이냐? 상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성적 우수상 뿐 아니라 개근상도 얼마나 소중한데, 왜 “누구 외 몇 명”이라고 부르느냐? 그러려면 졸업식은 왜 느냐? 그냥 학교 와서 졸업장 받아가라고 하지. 이런 이유입니다. 듣고 보니 정말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졸업생을 “누구 외 몇 명.” 하고 부를까요? 물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지요. 졸업식 시간이 길어지면 서로 힘드니까요. 그런데 시간절약 한답시고 졸업생 이름은 그렇게 부르면서도, 정작 내빈 소개나 인사는 길게 합니다. 교장 선생님 훈화도 꽤 길지요? 뭔가 주인공이 뒤바뀐 느낌입니다. 졸업식의 주인공은 당연히 졸업생들인데 말이지요. 우리의 잘못된 문화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런 학교도 있다고 합니다. 그 학교는 졸업생 전원이 가운과 학사모를 쓰고, 학생 이름 하나하나 호명해, 앞으로 나오게 해서 졸업장 줍다고 합니다. 하나하나 선생님들이 다 안아주고 축복해 줍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시간 길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없고, 다 감격하고 감동하는 졸업식이었습니다. “야, 이게 진짜 졸업식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러고 보니 졸업할 때 제 이름은 단 한 번도 불린 적 없습니다. 공부 잘 했으면 불렸을 텐데 말입니다. 개근상은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 이름은 여전히 “개근상, 누구 외 몇 명.” 그 몇 명에 묻혀 불리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제 이름이 그 “누구 외 몇 명.” 속에 묻혀버린 게, 참 아쉽고 억울하더군요. 나도 소중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기꺼이 스스로 “누구 외 몇 명”이 된 사람들, “기타 등등”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아무개들 중 한 명입니다. 오늘 바로 이 스스로 아무개가 된 사람들중 그 한 명과 관련된 얘기를 하겠습니다.
사람들에게 거짓말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심어져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 중에 선의의 거짓말이 있음을 말하면서, 그러한 것은 나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거짓말은 하면 안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거짓말을 어떻게 보실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바로 거짓말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여러분께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는 여러분의 생각을 일단 보류해 두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존재한 채 저의 말을 듣게 되면, 결국 저의 말은 하나의 괴변으로 들릴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에는 자동차 운전면허처럼 제1종 거짓말에서 제5종 거짓말까지 있습니다. 제1종 거짓말은 도덕적인 교육용 거짓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당 아이 셋이 길 가다가 돈 한 푼을 주웠습니다. 나누어 가질 수도 없는 일이라, 거짓말 제일 잘한 아이가 갖기로 했습니다.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바람이 세어 지리산이 쓰러진다고, 지게 작대기 들고 받치러 갔단다.’ 이어 ‘우리 어머니는 날이 가문다고, 열 마지기 논에 오줌누러 갔단다’고 응수했습니다. 나머지 아이의 거짓말은 이렇습니다. ‘우리 누나는 장마가 길다고 바늘과 실 갖고 찢어진 하늘을 꿰매러 갔단다.’ 판결을 낼 수 없자 서당훈장을 찾아가 심판해 달라고 했습니다. ‘거짓말 내기를 하다니 이런 못된 버릇이 있나? 이 훈장은 평생 거짓말 한 적이란 단 한 번도 없단다’고 하자, 엎드려 있던 세 아이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야 훈장님이 이겼다. 한 푼은 훈장님 차지다’러고 했답니다. 평생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그 큰 거짓말이 제1종 거짓말인 것입니다. 소년시절의 조지 워싱턴이 벚나무를 꺾고서, 그것을 아버지에게 정직하게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는 이야기는, 미국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를 두고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일침을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사람은 글러먹었다. 미국에 예술이 발달하지 않은 것이 이같은 도덕적인 거짓말 때문이다’라고 말했답니다.
제2종 거짓말은 남을 즐겁게 해주고 근심 걱정을 덜어주는 선의의 거짓말입니다. 이를테면 암이란 병을 숨겨주는 거짓말은 제2종에 속합니다. 남을 즐겁게 해주되, 그로써 자신의 이득을 노리는 저의가 내포된 것은 제3종 거짓말입니다. 윗사람이나 권세있는 사람에게 하는, 속에 없는 아부말이 모두 이 3종에 속합니다. 무지개빛 공약으로 유권자를 잘 속이는 정치가들은, 거의가 제3종 기능의 보유자들입니다. ‘우리 집사람은 미인이다’는 거짓말도, 그 말이 집사람에게 전달되어 저녁밥상에 찬이 좋아질 것을 기대한 제3종 거짓말입니다. 사실을 빙자한 거짓말, 곧 통계적 거짓말이 제4종 거짓말입니다. 이 제4종 거짓말이 얼마나 가공한가에 대해 통계학자 다렐허프는 이런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미국과 스페인과의 전쟁 동안, 미해군의 사망률은 1천 명당 9명이었다. 한데 같은 기간 뉴욕에서 사고로 죽은 사망률은 1천 명당 16명이었다. 미국의 모병관들은 이 통계를 들어 해군에 입대하는 편이 한결 안전하다고 선전했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해치는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 제5종 거짓말로,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또 법률적으로 절대악이 되는 거짓말입니다. 미국사람들은 1주일에 평균 13번씩의 거짓말을 하고 산다는, 최근 조사통계 보도가 있었습니다. 예의, 도덕과 인정이 발달하고, 높은 사람에게 약한 우리 나라 사람들을 조사해 본다면, 아마도 더 많은 거짓말을 하고 살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아히도벨이 지금 당장 다윗을 쳐서 죽이겠다는 계략을 말하자,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이 좋은지를 거짓으로 투항한 후새에게 묻게 되고,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략은 좋은 방법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 후, 많은 군사를 모아 압살롬이 직접 다윗을 치라는 계략을 새롭게 제시하게 됩니다. 아마 후새는 압살롬이 많은 군사를 모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을 예상하고, 다윗이 도망할 시간을 주기 위해 이런 계략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15-16절 “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고, 나도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으니,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전하기를, 오늘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이렇게 말한 것처럼 후새는 사람을 다윗에게 보내어 성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17절 “그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가에 머물고, 어떤 여종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알리더니”
이 내용을 보면 당시 후새와 다윗과의 사이에서, 전달 책임을 맡은 사람은 사독과 아비아들의 아들인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직접 후새를 만나 전달 내용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들은 사람들이 볼 것을 두려워하여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가에 숨어 있었으며, 여종 하나가 이들에게 후새의 말을 전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한 청년에게 발각이 된 것입니다. 이 청년은 압살롬에게 가서 모든 사실을 고하게 되고, 두 사람은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 뜰에 있는 우물 속에 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은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구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어서 위장을 합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대답하기를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고 하게 되고, 결국 압살롬의 종들은 그 두 사람을 찾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분명 여인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거짓말이라는 죄를 범한 것으로 규정지어야 합니까? 아니면 여인의 말이 거짓말은 거짓말이되, 사람을 살리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선의의 거짓말로서, 죄를 범한 것으로 보면 안된다는 통속적인 말이 옳은 것입니까? 여호수아서 2장에 보면 라합이 여리고 왕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린 얘기가 있습니다. 라합도 분명히 거짓말을 하였으나, 성경이 라합이 거짓말을 하는 죄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합을 의로운 자로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약 2:25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러면 라합의 거짓말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라 의롭다고 여긴 것일까요? 거짓말이 죄라면, 아무리 선의가 개입되어 있다 하더라도 죄일 뿐입니다. 곧 선의라는 것으로 죄가 선으로 바뀔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이면 거짓말이고 참말이면 참말이지,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일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거짓말을 책망하기는커녕, 아브라함의 말을 믿고 사라를 아내로 삼으려고 한 아비멜렉을 책망하십니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를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을 하는, 어찌 보면 변변치 못한 남편의 모습을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라는 책망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거짓말에 대한 바른 의미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선의의 거짓말이란 없습니다. 오직 참말과 거짓말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은 분명 악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윤리를 기준하여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악함과 선함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준이 되어, 악함과 선함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고 있는 윤리가 기준이 되어 악과 선이 분별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윤리적인 나라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악인이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의인이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윤리를 선하다고 여깁니다. 이처럼 선하다고 여기는 윤리는 결국 인간의 윤리적 행동, 곧 선한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이 왜 지옥가야 하느냐?’는 항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말이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이되 선한 의도로 했다는 것으로서, 거짓말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까? 그러면 그 여인이 도망친 두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두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이 옳은 것이냐라는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을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윤리로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갈 수 있는 것이지, 윤리로는 절대로 가지를 못합니다. 천국에 갈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윤리 역시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윤리적으로 산다 해도, 천국과는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보면 윤리에 붙들려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외쳐지는 말들이 세상의 윤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외쳐야 하는 기독교가 윤리 종교로 전락돼 버린 것입니다.
여인의 거짓말은 윤리를 떠나서 생각해야 합니다. 윤리를 떠나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인이 두 사람을 숨겨 준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압살롬이 강자고 다윗은 약자에 불과했습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를 따라 흐르기 때문에, 정권을 잡은 압살롬에게로 사람들이 몰렸을 것입니다. 누구든 다윗 편에 선다면, 그것은 자신의 앞일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태로운 길을 가는 어리석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다윗의 정탐꾼을 도움으로써,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약자의 편을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도외시 한 채, 약자의 편에 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시각에서는 분명 어리석은 일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의로운 것이었습니다.
거짓말이란 자신의 이득과 유리함을 위해,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의 배후에는, 힘있는 자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악이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현실과 다른 말을 한 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세상의 현실은 인간이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아래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힘 아래 있는 것이, 세상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하나님만이 힘이 되는 것이지, 세상이 힘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세상을 힘으로 보는 그것이, 곧 현실과 다른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약자의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이 약자의 길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을, 세상에서 강자가 되는 길로 말한다면 그것은 참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하나님이 거짓말로 규정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에 위배된 것, 그것이야 말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기준할 때, 여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이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선 것이야 말로,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인의 말은, 오히려 ‘참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곧 참과 거짓은, 사실과 같은 말을 하느냐 다른 말을 하느냐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 편에 있느냐, 세상 편에 있느냐로 규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진리를 말한다고 하나, 실상은 거짓말에 열중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성공을 보장한 적도, 약속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을 믿으면 물질의 복을 받고,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이야 말로, 진리에 위배된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윤리를 붙들고자 하는 것은, 윤리가 무너지면 세상의 질서가 무너질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윤리 역시 악한 것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분명 반발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윤리가 무너지면 세상의 질서가 무너질까요? 세상은 그렇다 치고 교회를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에 윤리가 무너지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질까요? 오히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윤리는 무너져야 합니다. 윤리가 중심이 된 교회에서 나올 것은 어린 사람은 어른을 공경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식의 도덕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윤리가 말하는 어른 공경은, 어른이라는 것을 힘으로 삼고 있는 말입니다. 나는 오래 살았으니 적게 산 너희들은, 내 아래 있다는 생각에서 공경하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리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 역시, 많이 가진 힘 있는 자가 적게 가진 힘없는 자를 도와주는 차원일 뿐입니다. 이것이 윤리입니다.
그러면 윤리가 아닌, 진리가 살아있는 교회에서는 어떤 모습이 보일까요? 윤리가 없으니 어린 사람들이 어른들에게 함부로 하는 모습이 보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가 살아있는 교회에는 어른은 있으되, 어른을 힘으로 여기는 어른은 없습니다. 진리 앞에 죄인만 존재할 뿐, 어른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 사람들이 어른을 무시할까요? 아닙니다. 섬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연로하심으로 힘없는 어른들을 돕는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경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질서는 윤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굳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참된 것은 오직 진리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따라 사는 삶만이 참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착하고 양심 바르게 살았으니, 복 받고 천국가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야 말로, 거짓에 속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았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을 착한 자로 만들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자는 자신의 죄를 깊이 들여다보며,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인의 말이 거짓말이 아닌 이유를 이해가 됩니까? 여인의 말이 사실과는 다른 말이지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현실을 비춰 볼 때, 힘있는 자를 따르지 않고 약자의 편에 선 것이야 말로, 현실에 맞는 참된 말이 된다는 이 이치를 이해가 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힘있는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그것이야 말로, 거짓말이라는 그 이유를 이해가 됩니까? 윤리에 붙들려서 진리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윤리라는 굴레를 벗어나서, 진리 안에서 진리의 자유함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리 안에서 참말을 하며, 날마다 힘없이 죽으신 예수 편에 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세상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진리를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진리의 편에 서서, 진리만을 추구하는 자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