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나는 집필 중이던 ‘한국분단사연구:1943~1953’의 마지막 보완 작업을 하다가 문득 충남 예산군(禮山郡) 신양면(新陽面)으로 답사를 떠났다. 그곳은 박헌영(朴憲永)의 고향이다. 뭔가 부족한 듯한 원고의 마지막 작업에 대한 영감을 얻고 싶어서 갔다. 머리에는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Toynbee)의 충고가 맴돌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의 역사학은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이 책을 통해 얻은 것보다 더 많다. 그리스 역사의 기술은 더욱 그러했다. 역사학자는 현장을 가보아야 한다. 그곳에서 그는 책에서 알지 못한 영감을 얻을 것이다.” 이 충고는 나의 역사 연구의 중요한 등대였다. 그래서 나는 ‘전봉준 평전’을 쓰면서도 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을 ‘모두’ 밟아 보았다. 그리고 그 답사는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폭염 속의 신양면 옛 장터는 고즈넉했다. 동네 이름처럼 햇살이 맑았다. 나는 먼저 신양면사무소에 들러 박헌영의 제적등본을 신청했다. 개인 정보 보호가 없던 시절이라 면서기는 쉽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나는 박헌영의 제적등본을 받아들고 망연자실했다. 어머니 이학규(李學圭)의 직업은 ‘주막업(酒幕業)’이라고 적혀 있고, 그와 호주인 남편 박현주(朴鉉柱)와의 관계는 ‘첩(妾)’으로 되어 있고, 박헌영과 아버지인 호주와의 관계는 ‘서자(庶子)’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가혹한 호적등본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1922년에 조선호적령이 실시되었으니까, 박헌영이 22살 때부터는 이 등본을 들고 다녔을 터인데 그때 그 감수성 많은 청년 수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니 이념의 여부를 떠나 나는 연민과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면사무소를 나와 후손을 찾으니 삼종손 박대희(朴大熙)씨를 소개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77세인 그는 처연한 심정으로 박헌영의 소년 시절을 들려주면서 첫 아내 주세죽(朱世竹)과의 행복했던 시절 사진을 보여 주었다.
박헌영은 1900년에 충남 예산군 광시면(光時面) 서초정리(瑞草井里)에서 아버지 영해(寧海) 박씨 현주(1867~1934)와 어머니 신평(新平) 이씨 학규(1867~?) 사이에 출생했다. 제적등본에 따르면, 박현주에게는 이미 맏아들 지영(芝永·1891년생)이 있었고 박헌영 뒤로 두 딸(1905년생·1912년생)이 있었다. 이미 맏아들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자식을 얻기 위해 소실을 맞이한 것 같지는 않다. 아버지는 쌀가게를 경영하면서 약간의 농지를 소유한 중상의 재산가였던 것으로 보아 궁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헌영은 훗날 자신이 “봉건 양반 가정에서 출생했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이는 아마 열등감의 표현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신의주(新義州) 지방법원 검사국이 작성한 ‘박헌영의 피의자 신문 조서’(1925년 12월 12일)에는 “나에게는 부모님, 형님 내외분, 그리고 나와 아내, 이렇게 여섯 가족이 있고, 재산은 나에게 없으나 아버님께 약 1만원의 재산(동산·부동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난한 수재의 응어리진 삶
▲ 박헌영의 제적등본. 어머니 이학규의 직업은 ‘주막업’이라 적혀 있고, 이씨와 이씨의 남편 박현주와의 관계는 ‘첩’으로, 아들 박헌영은 ‘서자’로 적혀 있다.
박헌영은 소년 시절에 비만하고 키가 작았다. 그는 1910년에 서당을 다녔고 1912년에 예산군 대흥면의 대흥(大興)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15년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합격했다. 재학 중에는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책을 읽는 것이 취미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기 전이었으니 학비는 아버지가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1974년에 다시 편책한 박헌영의 호적등본에 따르면 무슨 연유였던지 1932년에 어머니 이학규는 박현주와 이혼했으며, 1934년에 박헌영은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호주를 상속했다. 1932년이면 박헌영이 이미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공산주의자로 활약하던 시기였다는 점으로 본다면 아마도 첩실(妾室)의 서출(庶出)로 기록되기보다는 일가 창립을 하는 것이 더 떳떳하다는 판단에 의해서 이혼했을 수도 있다.
어머니가 이혼하기 전에 작성된 호적에 직업이 주막업으로 된 것을 보면 이미 이혼 전에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주막을 경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우한 소년은 신양장터에서 주막집을 경영하면서 주정뱅이 사내들에게 시달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술심부름을 하는 동안 가진 자에 대한 분노와 적의(敵意)를 많이 느꼈을 것이다. 뒷날 박헌영이 인민 전선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그가 누구보다도 계급적 적의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리 민족의 해방이나 통일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지주를 용서할 수 없었는데 그 이면에는 강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토지 모순에서 해방 정국에 대한 해법(解法)의 교훈을 얻으려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에 참가했으며, 휴교로 인해 개별적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YMCA 영어반과 승동교회 성경반에서 영어 공부를 하며 미국 유학을 준비했으나 학자금을 마련해주겠다던 윤돈구(尹暾求)가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유학의 꿈도 사라졌다. 그것도 운명이었다. 역사에서의 가정이란 덧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윤돈구가 죽지 않고 박헌영이 미국 유학을 가 이승만(李承晩)에 못지않은 명문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했더라면 그의 운명과 한국 현대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교육 환경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박헌영은 수재로서 일찍부터 정규적인 영재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 열정의 배후에는 학업을 통한 신분 상승의 욕구가 강렬했다.
실의에 빠진 박헌영은 1920년 가을, 일본으로 밀항하여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濱)를 거쳐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그는 상과대학에 입학할 준비로 지나(支那)기독청년회 영어과에 들어가 약 6개월간 공부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공산주의에 입문했다. 그는 1921년 4월 상하이상과대학에 들어가 1922년 6월까지 다녔다. 박헌영은 영어·일어·러시아어·에스페란토어 등 4개 언어에 능통했다. 그는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평민 계급의 반역자로서 귀족의 노예이며… 제후와 영토를 옹호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변호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현앨리스와의 사랑과 헤어짐
▲ 박헌영을 연모했던 현앨리스. 박헌영과 함께 북한에서 간첩죄로 처형됐다.
박헌영은 1920년 11월~1922년 4월 상하이에 머물렀다. 그 기간에 운명적으로 한 여인을 만났다. 노동당 강원도당 부위원장이었던 강상호(姜尙昊)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청년동맹(共靑)을 조직하여 책임비서로 있을 당시 그곳에 망명해 있던 평남 출신 현순(玄楯) 목사 집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었다.
현순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계열이었다. 현 목사에게는 훗날 미국대사관 일등서기관(CIA의 한국 책임자) 노블(Harold J. Noble)의 부하인 현(玄)피터(대위)라는 아들과 현앨리스(玄Alice)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박헌영을 연모(戀慕)했다.
그는 박헌영보다 세 살 아래였으니까 17~18세 전후였을 것이다. 현앨리스의 평전을 쓴 정병준 교수(이화여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고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정도”였다고 하며, 전 남로당원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여 박헌영의 전기를 쓴 박갑동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증언했다. 현앨리스는 1922년 상하이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곧 이혼하고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화여대를 잠시 다녔다고 한다. 그들이 사랑했든 사랑하지 않았든, 꿈 많은 청소년기의 감정은 그들의 생애에 깊은 추억으로 남았으리라는 것은 그들의 그 후 행적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 무렵은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여 정착하는 단계였다. 레닌(V. I. Lenin)은 러시아혁명의 축제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었기에 ‘극동피압박민족대회’(1922년 1월 21일~2월 2일)라는 이름으로 극동의 공산주의자를 모스크바에 초치했다. 일행인 조선공산당 대표 가운데에는 현순 목사도 들어 있었다. 이때 박헌영도 좌익 지도자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여 레닌을 만났다. 다른 지도자들이 다 그랬듯이 그도 러시아혁명의 열기와 레닌의 지도력에 깊은 감화를 받은 듯하다. 귀국 후에는 주로 화요회(火曜會·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여 지은 이름)에 가입하여 활약했다.
모스크바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박헌영은 러시아 정부의 후원 밑에 조직된 고려공산당 당원인 김만겸(金萬謙)으로부터 100원의 여비를 받아 조선에 공산주의를 선전할 사명을 띠고 귀국길에 올랐다. 상하이에서 안동(安東)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으로 잠입을 기도하던 중에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대정(大正)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6월의 형을 받았다. 그는 1924년 1월 18일에 출옥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박헌영은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여 이끌어가던 중에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 술김에 친일 변호사 박유정(朴有楨)과 그 일행인 경관을 폭행한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이때 가택수색으로 조직이 폭로되어 체포되었으나 광인(狂人) 행세를 하여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미친 사람 행세가 어찌나 천연스러웠던지 수사관들도 속았다.
이때 박헌영은 운명의 두 번째 여인인 주세죽(朱世竹)을 만났다. 박헌영보다 두 살 연상인 그는 함흥(咸興) 출신으로서, 관북 제일의 명문인 함흥 영생고보(永生高普)를 마치고, 상하이 안정씨(晏鼎氏)여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이들은 허정숙(許貞淑)의 소개로 알게 된 사이였는데, 1925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 1면 하단에 광고로 게재된 화요회 주최의 전조선민중지도자대회 준비 회의 명단에 박헌영·허정숙·주세죽이 함께 경성 대표로 등재되어 있고, 1926년 제2차 공산당 체포 기록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그들은 이미 이념의 동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세죽은 3·1운동 당시 함흥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1개월간 함흥경찰서에 수감된 바 있다.
이후 주세죽은 서울에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 등을 주도하며 여성운동을 이끄는 한편,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에 있었다. 일제는 그를 “여성 사회주의자 가운데 가장 맹렬한 자”로 평가하며 요시찰인물(要視察人物)로 감시했다. 그는 1924년 5월 서울에서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듬해 1월 경성(京城)여자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했으며 4월에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박헌영이 일경에 붙잡힌 뒤 그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박헌영과 주세죽은 결국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딸(비비안나)도 낳았다. 결혼 연도는 1921년이라고 했다가 1924년이라고 했다가 법정에서 한 말이 다르다. 호적등본에는 1926년에 신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26년 6월 주세죽은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던 일경에 다시 붙잡혔으나 2개월 만에 풀려났다. 1927년 5월 근우회(槿友會) 임시집행부에서 활동하던 주세죽은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망명과 도피, 그리고 투옥 생활을 거치면서 그들은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박헌영이 아내를 만났을 때 그의 배가 불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아이가 아니었다. 박헌영은 김단야(金丹冶)를 의심했고 주세죽도 그가 아기의 아버지라고 시인했다. 이것을 불륜이니 치정이니 따질 일은 아니다. 궁핍한 혁명가의 삶을 살면서 비좁고 불편한 주거 환경 속에서 벌어진 ‘접촉 사고’였을 뿐이다. 어쨌든 둘은 이 일로 헤어졌다.
두 번째 여인 주세죽의 파란만장한 생애
주세죽은 소련으로 건너가 ‘한베라’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거기서 그는 1934년 김단야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소련에서도 주세죽은 ‘사회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박해를 받았다. 주세죽은 1938년 일본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주거가 제한되었다가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어 1946년 형기를 마친 뒤에도 그곳에서 살다가 1950년대 중엽에 죽었다. 한국의 좌파정권 시절인 2007년에 주세죽은 독립유공자 애족장(7등급 가운데 5등급)을 받았다. 좌익이라고 해서 서훈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공적으로 볼 때 그가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우익들은 다른 의견을 피력했다. 그가 박헌영의 아내였다는 후광(?)이 작용했을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1924년 4월에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그해 7월까지 있다가 8월 조선일보에 기자로 들어가 11월 중순에 퇴사했다. 동아일보를 퇴사한 것은 그가 동맹파업에 동정적이었기 때문이었고, 조선일보를 퇴사한 것은 그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조선 독립을 쟁취하자”는 글을 쓴 후 사회주의자를 내쫓으라는 일제의 강압 때문이었다. 1929년에 박헌영은 간도(間島),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떠난다. 그는 그곳에서 동방노동자공산대학(모스크바공산대학)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수학한 다음 1932년에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그는 1933년에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어 6년형을 받고 1939년에 출감했다. 그는 다시 광인 행세를 하면서 경성 콤그룹(Com Group)의 대표자로서 조직의 운영을 위해 암약했다. 박헌영은 이 무렵에 이득균이 경영하는 광주시(光州市) 월산동의 벽돌 공장에서 ‘김성삼’ 또는 ‘김추삼’이란 가명으로 직공 행세를 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이 되자 박헌영은 휘황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서울 종로에는 “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 동무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리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는 전단이 나붙었다. 9월 8일이 되어 서울 계동에서 개최된 공산당열성자대회에 나타난 박헌영은 “조선 인민공화국 만드느라고 동무들 만나기가 늦었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에 착수했다. 이때 잊을 만하던 운명의 여인이 다시 찾아왔다. 현앨리스가 군정 요원으로 자원하여 서울에 들어온 것이다. 물론 박헌영과 자주 접촉했다. 군정청은 영어와 한국어가 자유로운 그를 쓰면서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끝내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박헌영의 활약은 뜻과 같지 않았다. 그는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위조지폐사건(1946년 5월 15일)으로 체포령이 내리자 남한을 탈출하여 북한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미군의 수색을 피해 관 속에 숨은 채로 9월 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하다가 평양에 도착했지만 일제나 미 군정보다도 더 가혹한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조선정판사 사건은 조작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공산주의자 탄압을 위해 사건 자체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쓴 임성옥의 박사학위 논문(한국외국어대학·2015)이 최근에 통과되었다.
내가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글을 처음 발표했을 때 몇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그 주모자인 박락종(朴洛鍾)이 정치인 박지원(朴智源)의 할아버지인 것을 알고 썼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박락종이 박지원 의원의 할아버지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에게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느냐”고 물었더니 “향토예비군 교육장에서 들었다”고 했다. 나는 박지원 의원도 싫지만 그런 식의 우익도 싫다. 박헌영은 북한에서 재기할 꿈을 꾸며 1947년 12월 초에 그의 정치적 보루로서 혁명의 전위 계급을 양성하기 위해 강동(江東)정치학원을 창설하여 1948년 1월 1일자로 개원했다.
이 학원이 적어도 남한에서 그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힌 남쪽 출신 360명 가운데 강동 정치학원생이 200명이 넘었다. 남한 출신 학생들은 사석에서 박헌영을 ‘조선의 레닌’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추종했다.
박헌영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소련의 군부가 북한의 지도자로 박헌영과 김일성을 택일하는 문제를 결정한 무렵인 1946년 7월 말, 박헌영이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 스탈린이 두 사람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스탈린이 박헌영을 지명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이론적으로 준비된 인텔리였으나 1928년 해체된 조선공산당원으로 종파 활동을 한 경험이 있으며, 일제하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며 10여년 동안 세 차례 투옥 생활을 하면서도 살아남은 것으로 보아 그 과정에서 일본에 전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북한 대중에게는 박헌영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박헌영은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박헌영 관련 보도를 본 현앨리스는 우선 아들이 의사 생활을 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로 갔다가 거기에서 헝가리~러시아~울란바토르~베이징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다. 여정이 20일 정도 걸린 것으로 보아 아마도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했을 것이다. 앨리스가 평양에 들어간 것은 11월 말경에서 12월 초 사이였다.(정병준 교수의 기록) 동토를 통과하기가 몹시 추웠을 것이다. 그는 박헌영이 장관으로 있는 외무성의 타자수 겸 통역으로 채용되었다는 설(박갑동)과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했다는 설(박헌영 기소장), 그리고 박헌영의 비서였다는 설(피터현)이 있다. 그 어느 쪽이든 박헌영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왜 그 먼 길을 찾아갔을까?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아닌 바에야 이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1953년 2~3월경에 체포되어 1956년 8월 무렵에 처형되었으리라는 것이 정병준 교수의 추정이다.
경향신문(2002년 11월 9일)은 상자기사로 현앨리스의 사진과 함께 그를 “한국의 마타하리”라고 소개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가 과연 이중간첩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박헌영에게 씌워진 간첩죄와 그를 통한 공화국 전복 음모의 빌미가 된 것은 사실이다.
북한최고재판소의 ‘박헌영 기소장’에 따르면, 그는 “서울에서 활약할 당시 접선한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자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 정보 기관의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元漢慶)에게 고용된 간첩”으로서, “인민군대의 진격으로 단절된 노블(H. J. Noble)과의 간첩 연락선을 다시 회복할 목적으로 미군이 밀파한 최익환(崔益煥)·박진목(朴進穆) 등과 접선하였고” “1948년 6월 하지(John R. Hodge)의 지령을 받은 미국 간첩 현앨리스를 중앙통신사 및 외무성에 배치시켜 간첩 활동을 지원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고 1956년 7월에 처형되었다.
인생에서의 야망과 운명
이념의 선악을 떠나 박헌영의 생애는 불우한 시대의 한 지식인의 비극적 생애를 소설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서울로 돌아와 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은 전략적으로 실수했다. 그는 남한의 우익과의 투쟁에 몰두하는 동안에 이미 탈진해 있었으며, 신진 공산주의자인 해외파, 특히 코민테른과의 연계·배려를 소홀히 한 것이 실수였다. 고전적 공산주의자인 그는 이 점에서 순진했으며, 김일성을 너무 낮고 어리게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박헌영은 전술적으로 실수했다.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은 서울이 한국 정치의 중심지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서울에 집결했다. 그들이 이곳에서 생존하지 못하고 월북했을 때, 그것은 이미 늦었다. 현지 기반이 없는 그들은 국외자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꿈이나 야심은 중요하다. 더욱이 신분 상승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야심은 허물이 아니다. 당대에 일가를 이룬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러나 야망이 전략적으로 구체화되지 않았을 때 그것은 재앙의 단초가 된다.
현실정치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N. Machiavelli)가 인간의 성공 조건으로 세 가지를 뽑으면서 첫째는 운명이고, 둘째는 덕을 베풂이고, 셋째는 역사가 부를 때 너는 거기에서 준비하고 있었느냐고 물은 것은 그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한 결론이었다. 박헌영의 생애를 보노라면 그의 말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