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의 ‘거북과 토끼’를 떠올리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교훈을 뽑아내는 이솝이란 사람이 정말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수년 전 토끼와 거북을 데려다 경주를 시켰는데 정말 거북이 이겼다는 해외 뉴스를 본 기억이 난다. 그게 경주인 줄 알 리가 없는 토끼가 어수선한 주변 환경에 ‘이게 뭔 일이야?’라는 듯 두리번거리며 가끔 내키는 방향으로 폴짝폴짝 뛰는 사이에 거북은 사람이 놓아준 방향대로 묵묵히 걸어가 결국 결승선을 먼저 다다랐다. 그 상황이 우스우면서도 토끼가 좀 안 돼 보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토끼와 거북이만 경주를 시킨 게 아니다. 1950년 호주에서는 토끼와 바이러스가 생존 경주에 들어갔고 그 경주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호주로 유입된 굴토끼(학명 Oryctolagus cuniculus)는 엄청난 번식력과 놀라운 적응력으로 호주 생태계를 초토화시켰다.
호주인들은 굴토끼 숫자를 줄이기 위해 사냥 등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소용이 없자 1950년 브라질토끼에 치명적인 점액종증을 일으키는 점액종바이러스 균주(myxoma virus SLS)를 풀기로 한다. 이런 엽기적인 발상에 동요하는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당시 연구를 이끈 바이러스학자 프랭크 페너와 동료들은 스스로 바이러스에 감염돼 인체에는 무해함을 ‘입증’하기도 했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호주로 유입돼 호주 생태계를 초토화시킨 굴토끼는 1950년대 치명적인 병독성을 지닌 점액종바이러스의 유포에도 살아남았다. ⓒ 위키피디아
병독성 약화된 균주 등장 예상
아무튼 점액종바이러스 투입으로 호주의 굴토끼 개체수는 6억 마리에서 1억 마리 수준으로 급감했다. 그러나 정작 페너는 이 시도가 ‘병독성 진화(virulence evolution)’를 검증할 수 있는 거대한 실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바이러스의 입장에서 감염한 숙주를 즉각적으로 100% 죽이면 결국은 자신도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병독성이 약하게 변이가 일어난 바이러스 균주가 생겨나면 이들이 결국은 우점종이 될 것이다.
실제로 페너와 동료들은 1960년대 초까지 호주 곳곳에서 바이러스 견본 수백 개를 채취해 분석했고 그 결과 치사율이 100%에 가깝던 원래 균주(SLS)에서 치사율이 70~95%인 변이 균주가 나왔고 심지어 치사율이 50%가 안 되는 균주도 등장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토끼 역시 순순히 바이러스의 처분만 기다리지는 않은 것이다. 즉 바이러스에 저항성을 지니는 변이 토끼가 등장하면서 한때는 치사율이 90%에 이르던 바이러스 균주가 7년 뒤에는 치사율이 26%로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이 보고됐다. 그 결과 1990년 무렵에는 토끼의 개체수가 2억~3억 마리로 회복됐다. 한마디로 토끼와 점액종바이러스 사이에 엎치락뒤치락 경주가 벌어진 셈이다.
호주의 저명한 바이러스학자 프랭크 페너. 1950년 굴토끼 퇴치를 위해 점액종바이러스를 유포하기로 했을 때 국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직접 바이러스에 감염돼 인체에는 무해함을 보이기도 했다. ⓒ 위키피디아
병독성 더 강한 바이러스도 등장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 8월 29일자에는 토끼와 바이러스 경쟁의 뒷이야기를 담은 논문이 실렸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와 호주 시드니대의 공동연구자들은 이제는 진화 관련 교과서에 실린 이 이야기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1980년대 초 이후 더 이상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 뒤 벌어진 일을 알아보기로 했다.
이들은 1991년부터 1999년까지 호주 각지에서 채취해 보관하고 있던 점액종바이러스 균주 15종의 병독성을 실험동물인 뉴질랜드화이트토끼를 대상으로 조사했다. 이때 비교를 위해 1950년 도입한 조상 균주인 SLS와 1950년대 발견된 병원성이 미미한 균주 두 가지(KM13과 Ur)로도 실험을 진행했다.
SLS는 감염된 토끼 여섯 마리를 모두 죽였고 이들의 감염 뒤 평균 생존기간이 12.6일여서 병독성이 가장 심한 1단계로 분류됐다. 반면 KM13과 Ur은 각각 감염된 토끼 여섯 마리가 모두 생존해 병독성이 가장 낮은 5단계로 분류됐다. 이는 당시 야생 굴토끼에서 관찰한 현상과 일치하는 결과다. 그렇다면 1990년대 바이러스의 병독성은 어떨까.
15가지 가운데 5가지 균주가 병독성 1단계로 분류됐고 이 가운데 1993년 채집된 BRK 4/93 균주는 SLS 보다도 강력했다. 감염된 토끼 여섯 마리가 다 죽은 건 물론이고 평균 생존기간이 11.4일에 불과했다. 더 놀라운 건 이들에 감염된 토끼의 증상이 SLS에 감염된 토기의 증상인 점액종증과 판이하게 달랐다는 사실이다. 점액종증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토끼의 눈과 코, 생식기 주변 등 점막과 피부의 경계 부분에 젤라틴 종괴가 생겨 발병 2주 내외에 죽는 질환이다.
반면 1990년대 채취한 균주에 감염된 토끼들은 즉각 무력한 상태가 되면서 면역계가 급속히 무너졌다. 특히 세균(박테리아) 감염에 대응하는 선천면역세포인 호중구의 수치가 급감했다. 그 결과 이들은 2차 감염으로 혈액에서 세균이 검출됐고(균혈증) 대부분 패혈증 같은 쇼크 증상으로 죽었다. 연구자들은 이들 바이러스에서 숙주의 선천면역계를 교란하는 유전자들의 변이를 여럿 발견했다. 그렇다면 1990년대 야생 유럽토기들 역시 이들 바이러스에 무력하게 당했을까?
당시 한 논문을 보면 실험실에서 BRK 4/93를 감염시킨 굴토끼 아홉 마리 가운데 다섯 마리가 죽었다. 반면 원래 균주인 SLS에 감염된 다섯 마리 가운데서는 한 마리만 죽었다. 즉 야생토끼에 대해서도 BRK 4/93이 병독성이 꽤 강했지만 이미 이에 대해 방어능력을 갖춘 토끼가 등장했음을 시사하는 결과다.
이번 실험에서 쓰인 바이러스는 1990년대 채집한 것이므로 벌써 20년이 지났다. 지금 바이러스를 채집해 비슷한 실험을 해보면 또 어떤 변이가 일어나 있을지 궁금하다. 아무튼 호주에는 지금도 여전히 굴토끼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하니 토끼와 점액종바이러스 사이의 경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