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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피어나는 환한 문장
- 유계자의 시
오홍진(문학평론가)
1.
유계자의 시는 바닥에서 새로이 피어나는 삶을 그리고 있다. 시간이 흐른다고 바닥에서 새로운 삶이 피어나는 건 아니다. 바닥까지 찍고 올라오는 힘이 있어야 비로소 새로운 삶이 피어난다. 첫 시로 실린 「뭐 특별한 것 있습니까」에서 시인은 떨리는 손으로 누군가가 내미는 손을 잡는 존재를 이야기한다. “사다리가 높을수록 골짜기도 깊”은 법이다. 무성한 소문을 멀리하고 밖으로 나가려면 무엇보다 “바닥의 감정”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시인은 “추락이라는 변수가 숨어/ 오르고 내리는 일 모두 난관”이라는 시구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힘은 오로지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뻗어 나온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일은 추락이라는 변수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이를테면, 「인디언 치마」에서 시인은 “펄쩍펄쩍 망둥이 치마 입고/ 인디언 놀이 신나게 한바탕 하고 싶었다닝께”라고 고백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신나게 놀려면 그만큼 일을 해야 한다. 시인은 몇 년 동안 죽도록 일을 해 집에 돈을 부쳤지만, 귀가 얇은 여편네가 그만 사기꾼에 속아 그 돈을 모두 날려버렸다. 말 그대로 길거리에 나앉은 시인은 여편네와 새끼는 처가에 보내 놓고 낡은 텐트 하나 달랑 들고 갯바닥을 훑고 다녔다. “암만, 바다 땜시 살았지”라는 시구에 나타나듯, 바닥을 치고 간신히 땅을 밟은 시인을 드넓은 바다가 받아주었다. 삶의 바닥이란 이런 것이다. 깊이가 없는 바닥에 어느 순간 깊이가 생긴다.
「눈사람 에덴」을 참조하면, 깊이 없는 바닥은 죽음 이미지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햇볕 한번 뜨겁게 지나가면 눈사람은 물로 돌아가 바닥을 흐른다. 눈사람이 산 흔적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물로 증명될 뿐이다. 이 물이 마르면 눈사람이 살다 간 흔적은 과연 무엇으로 증명되는 것일까? 시인은 “등 뒤에서 누군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라는 시구로 이 시를 매조진다. 눈사람이 남긴 흔적은 여백과도 같은 것이다. 여백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우리 곁에 퍼져 있다. 여백이 깊이 없는 바닥을 낳는다. 깊이 없는 바닥에 깊이가 생기는 것은 바로 이 여백 때문이다.
푸른 소나무는 하늘이 박아놓은 못
산이 무너지지 말라고
푸른 못으로 고정해 놓은 것
사람들이 길을 낸다고 푸른 못들을 뽑아내자
그 틈새로 들어온 물이 산을 벽지처럼 찢는다
계절을 장식해 놓았던
층층나무며 팥배나무 뿌리가 산 아래까지 엎질러졌다
풀뿌리 같은 틈을 내주고
황토 같은 절망이 밀려들어 신뢰가 찢어지기도 했다
저녁나절 들려오는 딱따구리의 못질은
땅과 허공을 이어붙이던 바느질 같은 것이어서
못 이기는 척 마음을 꿰매기도 했었다
햇살 좋은 날
하늘은 헐렁한 구름 의자 하나 내어놓고 틈새에 못을 박는다
촘촘히 박아놓은 못들이 출렁거린다
가끔은 못을 박다 구부러지는 것들도 있다
양지바른 무덤 옆에 등이 굽은 소나무
굽었다고 함부로 뽑지도 않는다
저기 공원에 한 무더기 사람들이 간다
온통 구부러진 못들이다
- 「못의 용도」 전문
시인은 위 시에서 인생에 드리워진 여백을 ‘못’이라는 사물에 담아 표현한다. “푸른 소나무는 하늘이 박아놓은 못”이라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시인이 말하는 못은 땅에 뿌리를 박은 푸른 소나무를 가리킨다. 인간은 개발을 명분으로 푸른 소나무를 뽑아냈다. 소나무, 곧 푸른 못이 뽑힌 틈으로 물이 스며들자 온갖 나무가 뿌리째 뽑혀 산 아래까지 엎질러졌다. 시인은 “황토 같은 절망이 밀려들어 신뢰가 찢어지기도 했다”라는 시구에 그 상황이 제대로 드러난다. 푸른 소나무가 뽑히면 인간이 어떻게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인간이 개입하는 자리마다 여백이 사라진다. 마천루로 허공을 메운 도시 문명을 떠올려 보라. 여백이 사라지면 자연 사물이 들어설 자리는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하늘은 어김없이 틈새에 못을 박는 일을 묵묵히 수행한다. 못을 박으면 그나마 나 있는 틈새가 막히는 게 아니냐고? 깊이 없는 바닥을 온몸으로 느껴야 비로소 바닥에 깊이가 생긴다고 했다. 여백은 텅 빈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사방을 꽉 채운 공기를 떠올리면 된다. 하늘은 틈새에 못을 박음으로써 더 많은 틈새를 만들어낸다. “촘촘히 박아놓은 못들이 출렁거린다”라는 시구를 가만히 음미해 보라. 못들이 출렁거리는 자리마다 새로운 생명이 피어난다. 하늘이 틈새에 못을 박는 일은 이리 보면 숨이 막힌 곳을 뚫는 일과 다르지 않다. 문명은 하늘이 만든 이 숨통을 끊어낸 자리에 들어서는 거라고 보면 좋겠다.
여백이 없는 문명은 늘 사물의 용도를 묻는다. 쓰임새가 있으면 가치가 있고, 쓰임새가 없으면 가치가 없다. 자연은 쓰임새로 생명을 나누지 않는다. 때가 되면 피어난 꽃은 때가 되면 지는 일을 반복한다. 인간은 가치를 매기는 눈으로 꽃을 들여다본다. 꽃은 꽃만으로 아름다운 게 아니다. 꽃을 둘러싼 여백이 꽃을 더욱더 아름답게 한다. 이러한 여백이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구석에 핀 꽃을 보기 위해 많은 가치=돈을 낼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자연은 곧은 나무와 굽은 나무를 구분하지 않는다. 인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곧은 나무를 굽은 나무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 굽은 나무가 살 자리를 처음부터 막아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토란의 둥지」에 표현된바, 여백이 없는 곳에서는 생명이 피어날 수 없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낡은 고무통에 둥지를 튼 토란에 주목한다. 꽃밭을 채우던 꽃들이 하나하나 시들고, 산 너머에서 전동 톱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는 상황에서도 “토란잎은 뜨거운 파장으로 널따란 날개를 흔들어”댄다. 사람들 발길이 끊긴 빈집에서 토란이 왜 생명을 피우려고 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을까? 토란은 지금 지극한 한 생을 보내고 있다. 시인 또한 그 곁에서 토란이 “언제 고무통을 열고 나올까/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물음표가 팔을 당긴다”. 유계자의 시는 무엇보다 이러한 물음이 던져지는 지점에서 비롯된다. 사물의 가치를 따지지 않는 여백의 시학이 그의 시를 낳는 근원이라고나 할까?
2.
문명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자연 사물에 부여되는 가치는 자연을 문명화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분명히 보여준다. 욕망은 깊이가 없는 늪과 같다. 한 욕망이 실현되면 다른 욕망이 이내 일어난다. 욕망이 욕망을 낳는다고 표현하면 어떨까? 욕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러므로 욕망 자체를 끊어내는 길밖에는 없다. 시작(詩作)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시를 쓰는 시인은 늘 지독한 욕망과 분투를 벌인다. 욕망에 빠져들면 시인은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 욕망에 매인 문명인이 될 뿐이다. 시는 태생적으로 문명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꽃에 비유하자면, 시는 들판에서 자유로이 피는 바로 그 야생화에 가깝다.
한창 물오른 계절을 뚝뚝 잘라내
뼈를 탈골하고
인간이 정한 색을 입혔다
한 다발의 장미로 불릴 때
내 입술은 붉었던가
거꾸로 매달린 세상은 오금이 저리다
지나가던 바람이 슬쩍
마른 몸을 건드릴 때면
바스락 허방의 아랫도리에 통증이 돋는다
진초록인 질경이의 이파리가 탐스러워지고
개망초는 꽃잎을 피워 올리는데
모든 계절에서 지워진 나는
맘대로 죽지도 못한다
합당한 핑계를 탐스럽게 꽂는
사람들은 늘어가고
촘촘한 낌새를 멈추지 않는
남자의 거실 한편에 장식된 나는
환하게 울고 있는데
눈물은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 「프리저브드 플라워」 전문
시인의 말대로라면 ‘프리저브드 플라워’는 인간이 정한 색을 입힌 꽃을 의미한다. 꽃의 자연을 인위적으로 뒤바꾼 것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인위가 개입된 꽃은 질경이 이파리가 탐스러워지고 개망초가 꽃잎을 피워 올리는 계절과는 다른 시간을 산다. “모든 계절에서 지워진 나는/ 맘대로 죽지도 못한다”라는 시구를 가만히 들여다보라. 인간의 색을 입은 꽃은 1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그 모습을 유지한다. 프리저브드 플라워는 조화(造花)가 아닌 생화(生花)인데도 5년 넘게 화사한 빛을 뽐낸다. 물론 겉만 그렇다. 지나가는 바람이 마른 몸을 살짝만 건드려도 “바스락 허방의 아랫도리에 통증이 돋는” 걸 느낀다. 자연이 스러진 자리에 들어선 인위적인 사물을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생명은 시간을 거역할 수 없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때가 되면 꽃이 지는 자연 현상은 곧 생명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꽃이 피어야 꽃이 질 수 있고, 꽃이 져야 꽃이 필 수 있다. 말 그대로 자연은 피고 지는 일이 순환됨으로써 다음 시간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바로 자연에 부여된 이 시간을 끊어냄으로써 자연을 인간 삶을 장식하는 도구로 만들어버린다. 인간이 정한 색을 입은 꽃은 지금 남자의 거실 한편에 장식된 채 환하게 울고 있다. 서럽게 우는데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환하게 울수록 마른 몸속은 타들어 간다. 몸에 새겨진 인간의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꽃은 시간을 견뎌야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시간조차도 인간의 힘에 지배당해야 하는 꼴이라니.
장식품이 된 꽃은 그 속에 품은 “뜨거운 혈통”을 잊은 지 오래다. 「뜨거운 혈통」에 표현된 대로, 모든 생명은 “온전히 부서지고 나서야 드디어 단단해지는” 힘을 뜨거운 혈통으로 이어받는다. 이 힘이 없으면 생명은 또 다른 생명으로 거듭날 수 없다. “사는 것은 뜨거운 것이다”라는 시구에 서린 맥락을 깊이깊이 생각해 보라. 부서지며 단단해지는 생명의 힘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죽을 위기에 빠질수록 생을 향한 열망은 더욱더 커지지 않는가? 인간의 색을 입은 꽃은 바로 이런 열망을 상실했다. 겉으로는 화려함을 뽐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이미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 살았되 살았다고 할 수 없고, 죽었되 죽었다고 할 수 없는 꽃의 형상은 여기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마지막까지 그들은 자신을 숨기고 싶었을까
죽은 자 대신
창에 갇힌 냄새가 밖으로 기어 나와 부음을 알렸다
자꾸만 번져가는 죽음들
유서 대신 빈칸이 더 많은 이력서와
독촉장과 미납고지서가 쌓이고
외롭게 살다간
한 사람의 편도가 접히는 밤
죽음이 빠져나간 자리에 특수청소부가 들어간다
체념과 한숨이 먼저 수거되고 천장과 바닥에
단단히 눌어붙은 그늘을 긁어내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생의 바닥이 정리되는 것이다
한 사람도 서둘러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다
해외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예약해 놓고 캐리어도 준비해놓고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보라카이 해변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
인기척에 재빠르게 몸을 숨기던 벌레들
우르르 몰려다니며 저녁을 뜯는 습성을 치워도
영락없이 잠의 언저리에 붙어
부풀어 오르는 가려움
손톱을 세워 벅벅 긁어도 잡히지 않는
환촉幻觸에 시달리는 밤이 온다
- 「환촉幻觸」
사물의 등급을 매기는 기준은 그대로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위 시에서 시인은 “창에 갇힌 냄새”로 죽음을 표현하는 존재의 비극을 시화하고 있다. 죽은 자의 방문 앞에는 독촉장과 미납고지서가 쌓여 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가 남긴 흔적을 지우기 위해 특수청소부가 방으로 들어간다. 체념과 한숨이 짙게 깔린 방에서 특수청소부는 천장과 바닥에 단단히 새겨진 그늘을 벗겨낸다. 죽은 자의 눈에는 마지막으로 어떤 모습이 비쳤을까? “마지막까지 버티던 생의 바닥이 정리”됨으로써 죽은 자의 흔적도 겉으로는 완전히 지워진 듯 보인다. 살아 있는 존재에게도 등급을 부여하듯, 사람들은 죽은 자에게도 등급을 부여한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한 이 사람의 등급이야 굳이 말해 무엇 할까?
누군가의 비극을 뒤로 한 채 또 다른 누군가는 서둘러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다. 해외여행을 가려고 했는지 이 사람은 비행기를 예약해 놓았고, 캐리어도 준비해놓았다. 갑작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지금쯤 보라카이 해변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죽음이 가까이 있고, 부자라고 죽음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때가 되면 떨어지는 꽃처럼, 모든 생명은 때가 되면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에 들어선다. 산 자들은 자꾸만 죽은 자들의 등급도 나누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산 자들이 세운 허망한 기준에 불과하다. 역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자도 죽으면 여느 사람들처럼 흙으로 돌아간다. 등급을 나눌 수 없는 장소에 죽음은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시인은 이런 죽음이 피어나는 자리를 “환촉幻觸에 시달리는 밤”으로 표현한다. 문맥상으로 환촉은 환상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의미한다. 시체 주변을 서성이는 벌레들이 사라졌는데도 시인은 “영락없이 잠의 언저리에 붙어/ 부풀어 오르는 가려움”을 느낀다. 손톱을 세워 박박 긁어도 가려움은 누그러지지 않는다. 가려움은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밀려 나온다. 몸이 정말로 가려운 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가려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삶 주변을 서성이는 죽음이 바로 이렇다. 환촉에 시달리는 밤이란 이리 보면 삶의 언저리에 붙어 있는 죽음의 흔적을 가리킨다. 문명이 없애려는 자연이 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
「뿌리」라는 시에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뿌리보다 달콤한 열매에 현혹되는 세상에 주목한다. 땅속으로 뻗는 뿌리가 부실하면 당연히 열매 또한 부실할 수밖에 없다. “나무의 뿌리도 지하로 내려가고/ 삶의 뿌리도 바닥을 더듬는다”라는 시구에 표현된바, 시인은 삶의 뿌리와 바닥을 하나로 잇고 있다. 삶의 바닥이란 삶이 끝나는 장소가 아니다. 바닥까지 내려가야 비로소 달콤한 열매를 낳는 뿌리에 닿을 수 있다. 지상이 있으면 지하가 있고, 이쪽이 있으면 저쪽이 있으며, 날숨이 있으면 들숨이 있는 법이다. 열매의 달콤함에 빠진 사람들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이 힘을 모른다.
바다 쪽에서 꽃무늬 몸뻬 바지 할머니들 몇 올라와
당산나무 그늘에 젖은 바다를 말린다
바다가 내어준 한 끼 조촐한 찬거리를 손질하며
나뭇가지 닮은 손가락을 무디게 움직인다
관절들 삐걱대는 폐선의 노 젓는 소리 당산나무에 매어놓고 들고 나온 밀가루 반죽을 힘껏 치댄다
양은냄비에 바지락이 끓고 일흔다섯의 막내가 토각토각 밀가루 판을 썰고 물이랑 드는 입술을 오물거리는 팔순이 간을 본다
수십 년 지기 과부들 단단히 굳어버린 슬픔도 바지락칼국수에 풀어먹으며
꽃무늬 환한 문장 하나씩 되씹다가
서방 복 없는 년 자식 복도 없다며
어귀에 들어서는 노란 봉고차를 보고 막내가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킨다
당산나무 밑에 여자아이 하나 부려놓자
함마 함마
할머니도 엄마도 아닌 함마를 부르는 아이 손을 잡고
낡은 노구 한 채 기우뚱
당산나무 그늘을 털고 차례로 일어서는 오래된 꽃잎의 문장들, 폐선을 끌고 삐거덕 멀어진다
- 「꽃무늬 환한 문장」
몸빼 바지를 입은 할머니들이 당산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가 내어준 한 끼 조촐한 찬거리를 손질”한다. 나뭇가지를 닮은 손가락에 이 할머니들이 살아온 내력이 담겨 있다. 밀가루 반죽을 힘껏 치댈 때마다 “관절들 삐걱대는 폐선의 노 젓는 소리”가 당산나무 주변을 맴돈다. 막내인 일흔다섯 할머니가 밀가루 판을 썰면,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간을 본다. 오래전에 남편을 떠나보낸 여인들이 모여 “단단히 굳어버린 슬픔”을 가만가만 바지락칼국수에 풀어놓는다. 혼자서 견디는 슬픔만큼 아린 게 어디 있을까? 제 처지를 이해하는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위안을 얻는다. 할머니들은 그런 마음으로 당산나무 아래 모여 칼국수를 먹는다.
칼국수를 먹으며 할머니들 저마다 풀어놓는 삶의 이야기를 시인은 “꽃무늬 환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그들이 정말로 환한 삶을 산 것은 아니니라. “서방 복 없는 년 자식 복도 없다며” 몸을 일으키는 한 할머니는 지금도 “함마 함마” 부르며 달려오는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늙은 몸으로 손자까지 떠안은 이 삶에 그 누가 꽃무늬 환한 문장을 덧붙일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일어서자 다른 사람들도 나무 그늘을 털며 차례로 일어나 폐선과도 같은 몸을 부여잡고 저 멀리 사라진다. 시인은 그늘을 털고 일어서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다시금 “오래된 꽃잎의 문장들”을 엿본다.
할머니들이 살아온 삶이 그대로 문장이 되는 시 세계를 유계자는 그리고 있다. 시 문장은 관념으로 펼쳐지지 않는다. 감각이 없는 문장은 한 편의 시로 거듭날 수 없다는 말이다. “당산나무 그늘에 젖은 바다를 말”리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가만히 그려 보라. 시인은 바다를 통해 할머니들의 삶을 엿보고, 당산나무를 통해 할머니들의 삶을 엿본다. 바다와 당산나무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제 삶을 묵묵히 살아왔듯, 할머니들 또한 언제나 그 자리에서 제 삶을 묵묵히 살아왔다. 이런 삶을 꽃무늬 환한 문장이 아니면 어떤 문장으로 표현할까? 문장은 이미 삶 속에 깃들어 있다. 시인이라면 그것을 본능처럼 들추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물겹은 둥글다
번지고 번지는 동그라미들
헤아리기 전에 겹치고
겹치다가 흩어진다
부드럽게 돌을 쓰다듬어 휘돌고
물고기의 비늘도 깨진 병 조각도 핥아준다
백사장에 밀려온 물겹
갈매기 발목을 맴돌다가
모래밭에 둥글게 장문을 짓기도 한다
작년 여름
소(沼)에 살던 물겹
그 소용돌이에 휩쓸린 적이 있다
물겹의 완강한 고집을 꺾고
빠져나오기까지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물겹은 부드럽고 말랑한
물의 고리로 이어져 있지만
그 고리를 끊어내려면
죽을힘이 필요하다
- 「물의 고리」 전문
할머니들이 내보이는 “꽃무늬 환한 문장”이 위 시에서는 물결이 겹치고 겹친 “물겹”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물겹은 둥글게 번져 겹치다가는 이내 흩어진다. 물겹은 부드럽게 돌을 쓰다듬고, 물고기의 비늘을 쓰다듬으며, 깨진 병 조각을 핥아준다. 백사장으로 밀려와 갈매기 발목을 감싼 물겹은 모래밭에 둥글게 장문을 지어 자기를 확연히 드러내기도 한다. 물겹은 한 자리를 고집하지 않는다. 한 자리에 머물면 물겹은 더 이상 흐를 수 없다. 흐르지 않는 물이 어떻게 부드러운 힘으로 온갖 사물을 품어 안을 수 있을까? 물겹에 서린 이 부드러움에서 시인은 환하게 빛나는 문장을 본다.
물론 물겹이 마냥 부드러운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작년 여름 소(沼)에서 일렁이는 물겹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적이 있다. 물겹은 완강하게 시인의 몸에 들러붙었다. 한참을 허우적거리고 나서야 시인은 겨우 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물겹은 분명 “부드럽고 말랑한/ 물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 물속 생명은 그것을 알기에 아무런 저항 없이 물에 몸을 맡긴다. 하지만 물에 익숙하지 않은 생명이야 어디 그런가. 죽을힘을 다해 그 고리를 끊어내야 비로소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 당산나무 아래서 바지락칼국수를 먹는 할머니들이야말로 이러한 물의 고리를 죽을힘을 다해 끊어내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들의 몸을 환히 밝히는 문장이란 바로 이 지점에서 흐르는 물겹과 자연스레 이어지는 셈이다.
유계자의 시는 이렇듯 우리네 삶 곳곳에 스며든 물겹을 꽃무늬 환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목수」에 나오는 내장 목수는 “수십 년 못을 맞았으니 맷집이 생길만한데/ 박힌 데 또 못이 박힌다며” 한탄하듯 말하고, 「연출자」에 나오는 화자는 “사람의 히스토리는 한 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라며 “내가 모르는 각본”을 찾아 오늘도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다. 목수에게 환한 문장은 박힌 데 또 박힌 못일 테고, 연출자에게 환한 문장은 오늘 들은 누군가의 각본일 터이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물겹을 이루고 그 물겹이 하나하나 풀어지면 한 편의 시로 새로이 탄생한다.
4.
「탈피」에서 시인은 습관을 지우는 일과 죽음을 연결한다. 습관이란 일상을 형성하는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습관을 지운다는 건 그러므로 일상을 지운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다시 한번 생을 바꾸어 담는다”라는 시구에 나타난 대로, 시인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을 또 다른 생에 이르는 길로 표현한다. 암세포를 몸속에 품은 사람은 밤새 잠들지 못하고 “저 고요 속 적막의 깊이”를 맴돌고 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병든 자의 몸에서 이 아픔이 흘러나갈까? “나는 옆에서/ 주저앉은 어둠을 쓸어 창 바깥으로 밀어낸다”라고 시인은 쓸 뿐이다. 물겹을 이루는 고리(「물의 고리) 하나를 끊어내는 게 이토록 힘든 것이다.
오래 닫힌 낡은 수첩 속엔
한때 세상을 누비던 얼굴들이 평등한 숫자로 누워 있다
한 두릅 보리굴비같이 퀴퀴한 냄새로 익어가는 밤
숫자 하나를 누른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ⵈⵈ
- 「생의 숫자들」
병실마다 약병을 매달고 다니는 사람들
복도에서 슬며시 눈을 돌린다
전화기 너머 엄마 언제 오느냐고 재촉하는 울음 섞인 아이의 목소리를 주머니에 구겨 넣는 젊은 여자
절로 알게 되는 상련相憐에
몇 번 약을 쳤느냐고 묻지 않는다
- 「병동의 상련相憐」
길이 되지 않는 오리무중의 맹지를 빠져나와
고라니나 그녀나
더는 흔들리지 말고 길이 되는 길을 잘 찾아가기를
기도하듯 오래 서서 바라보았다
- 「고라니와 그녀」
「생의 숫자들」에 표현된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의 숫자들을 지니고 태어난다. 시인은 낡은 수첩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다. 없는 번호라는 말이 곧바로 저편에서 흘러나온다. 전화번호를 바꾼 것일까, 아니면 전화번호가 필요 없는 세상으로 간 것일까? 한때는 세상을 누비던 얼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흔적으로 남은 번호를 곱씹으며 시인은 지난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을 추억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인은 낡은 수첩에 적힌 번호를 더 많이 지우게 될 것이다. 생명으로 태어난 자라면 이 길을 벗어날 수가 없다. 생명은 그 속에 이미 죽음을 지니고 태어나는 법이니까.
병동에서 느끼는 상련(相憐)을 표현한 「병동의 상련」에도 죽음 앞에 선 존재의 아픔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병실마다 약병을 매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를 찾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든 시인은 개의치 않는다. 몸이 아픈 사람은 몸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잘 안다.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마음 깊이 꿰뚫고 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아픔만큼 서로를 이어주는 거대한 끈이 어디에 있을까? 불과 며칠 전에 일어난 이태원 참사를 가만히 떠올려 보라.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가?
인생이란 어쩌면 이러한 아픔을 곱씹으며 힘겹게 새로운 길을 여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고라니와 그녀」에 나타나듯, 누구나 “길이 되지 않는 오리무중의 맹지”를 헤매는 날이 있다. 도심에서 길을 잃은 이들이 어디 고라니와 그녀뿐일까? 시인은 길을 잃은 이들을 보며 길이 되는 길을 잘 찾아가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병자들을 향한 연민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누군가의 아픔을 마음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아픔을 넘어서는 새 길을 발견한다. 타자의 아픔을 온몸으로 끌어안아야 하는 시인이라고 다를까? 유계자의 시에 겹겹이 쌓인 물겹은 이로써 부드럽고 말랑한 문장으로 하나하나 풀리게 되는 셈이다.
눈꺼풀에서 풀려나오는 세상을 깜박이면
우수수 별들이 쏟아진다
숨겨둔 추억이 사라지고
받아 적었던 메모들이 자주 지워진다
방바닥을 기어 여름을 넘어가던 개미도
희미한 근황들
가까운 곳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자꾸 안경의 겹을 더한다
잃어버리고 놓친 것들은 어디선가
또 다른 외출로 생을 만들고
침묵도 까무룩 어두워지고 나서야 촘촘하게 박힌
생각들을 내려놓는다
한 남자의 등에 얹힌 오래된 풍경들
흉터를 찍어 넣은 문장 하나 생각나듯, 그제야
당신이 읽힌다
내 속의 또 다른 눈이 밝아지는 중이다
- 「시력視力」 전문
시간은 늘 추억을 남기고 저편으로 사라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물겹처럼 쌓이고 쌓여 어느덧 지워지고 또다시 새겨지는 일이 반복된다. 물론 기억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의식에 깊이깊이 숨은 기억은 계기가 되면 의식을 뚫고 뻗쳐 나온다. 잃어버리고 놓친 기억들이 또 다른 생을 만드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기억은 문득 현실 세계로 밀려와 지금까지 그것을 잊고 살던 사람의 마음을 들썩인다. 시는 그 기억과 마주하는 순간 펼쳐져 나온다. 일상을 놓치면 기억에 서린 맥락 또한 놓친다. 기억 속의 시는 일상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된 문장을 얻는 것이다.
시인은 “한 남자의 등에 얹힌 오래된 풍경들”을 상상한다. 오래된 풍경들을 보려면 “침묵도 까무룩 어두워지”는 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시적 사물은 함부로 자기를 내보이지 않는다. 사물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의 눈에만 사물이 가만히 펼치는 세계가 보인다. 시인은 “흉터를 찍어 넣은 문장 하나 생각나듯”이라는 시구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당신의 몸에 새겨진 흉터를 읽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시인은 “내 속의 또 다른 눈이 밝아지는 중이다”라고 쓴다. 의식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당신의 세계를 시인은 무의식의 눈으로 보려고 한다. 당신에 대한 통념을 내려놓지 않고 어떻게 무의식의 눈이 떠지길 바랄까?
유계자가 말하는 시력(視力)은 아무나 지닐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누구나 사물을 볼 수 있지만, 아무나 사물에 서린 시적 맥락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시인은 당신의 몸에 새겨진 흉터를 보기 위해 기꺼이 바닥까지 내려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바닥은 죽음이 펼쳐진 장소이면서, 동시에 삶의 여백이 펼쳐진 장소이기도 하다.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힘은 무엇보다 이러한 삶의 여백에서 뻗어 나온다. 유계자는 사람들 저마다의 삶에 드리워진 이 여백을 꽃무늬 환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데서 시작(詩作)으로 가는 길을 열어젖힌다. 당신의 흉터를 볼 수 없으면 환한 문장에 이를 수 없다. 타자의 아픔에서 상련(相憐)을 느끼는 시 정신은 이 지점에서 유계자 시를 가로지르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