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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과 1872년 지세포 표류왜선(漂倭船) 조사와 호송 과정 장계(狀啓)>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편에는 거제도 지세포에 표류한 왜선(漂倭船)의 조사와 호송 과정 그리고 일본 사절단의 동태를 보고한 「장계(狀啓)」 2건을 소개하겠다. 앞서 여러 편의 표류왜선(漂倭船)에 관한 문건들을 소개한 바가 있지만, 거제도에는 워낙 표왜선(漂倭船)에 관한 문건이 많아 다시 한번 더 소개한다. 아시다시피 거제도는 일본과 마주하던 최전방이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표류 왜선이 출몰했던 지역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독 표왜선에 관한 문건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편에는, 대마도에서 부산 왜관으로 향하던 일본 배 2척이 풍랑으로 거제도 지세포에 표류하자 이를 조사하고 호송하는 과정을 담은 「1862년 7월22일 지세포 표류왜선(漂倭船) 조사와 호송과정 장계(狀啓)」와 거제 지세포에서 초량 왜관을 통해 들어온 표류 왜선과 일본 사절단의 동태를 보고한 「1872년 6월9일 표류 왜선과 일본 사절단의 동태를 보고한 장계(狀啓)」 2건을 소개하겠다.
⇨<거제도 표왜선의 호송 경로> 거제도 가배량, 지세포 → 옥포 → 조라 → 장목 → 가덕도(천성) → 웅천(안골, 제포) → 김해 → 다대포 → 부산 초량(왜관)까지 릴레이식으로, 이어지는 해상 경로다. 대개 거제도에서 구호품을 전달한 후, 1차 문정(問情, 조사)를 실시하고 부산 왜관에서 2차 문정(問情, 조사)이 끝나면 상부의 결정에 따라 조치가 이루어졌다.
여기 마지막 인계지인 부산의 초량 왜관(草梁倭館)은 조선후기 한일 외교와 무역의 유일한 창구이자,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광복동 일대(용두산 공원 일대)에 있었던 약 10만 평 규모의 일본인 거류지였다.
1) 「1862년 7월22일 지세포 표류왜선(漂倭船) 조사와 호송 과정 장계(狀啓)」
이 문건은 거제도 지세포에 표류한 왜선(漂倭船)을 조사하고 그 호송 과정을 담은 1862년 7월22일자 「장계(狀啓)」다. 경상도 연해안(거제, 가덕, 다대포, 부산)의 방어 체계를 통해 일본 배(왜선) 2척이 표류해 들어온 사건과 그에 따른 조치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고한 내용이다. 이 사료는 조선 시대 경상도 연안의 군사 보고 체계인 ‘치통(馳通)’ 문서를 수록한 것으로, 대마도에서 부산 왜관으로 향하던 일본 배 2척이 풍랑으로 거제도에 표류하자 이를 조사하고 호송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고, 이어진 내용은 앞서 발생한 일본 배(왜비선) 2척의 표류 사건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는 과정을 담았다. 12일에 표류하기 시작한 배가 여러 포구를 거쳐 마침내 목적지인 부산 왜관(초량객사)에 안전하게 도착하고, 행정 절차를 마치는 내용이다.
○ 내용인즉, 1862년 7월 12일 유시(오후 5~7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배 2척이 거제도 지세포 앞바다로 떠내려왔다. 초동 조치를 위해 지세포 만호(魚得河)가 즉시 배를 타고 나가 확인한 결과 일본 소선(小船)이었으며, 이를 안전하게 포구로 끌어와 감시(수호)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가덕-다대포를 거쳐 부산첨사에게 전달되었다. 이어 거제부사 하겸락(河兼洛)과 거제부의 좌수, 옥포왜학(통역사) 등이 표류 선박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해 조사(문정)를 벌였다. 배의 정체는 대마도에서 부산 초량 왜관으로 가던 비선(飛船, 연락선)이었다. 승선 인원은 두왜(頭倭) 2명을 포함해 격군, 금도(단속관리) 등 총 30여 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통행증(路引)과 왜관 관리에게 주는 사적인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표류 원인은 12일 오전 대마도를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중, 수지(水旨, 거제도 인근 해역)에서 바람을 만나 지세포까지 떠내려온 것이 확인되었다.
* 상부에 조사결과를 보고하고 표류선박을 초량 왜관으로 호송하게 된다. 선박 이송은 이웃 수군 진영까지 릴레이식으로 인계하여 부산까지 이어진다. 지세포에서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16일 출발했다. 지세포 만호가 이들을 이끌고 옥포까지 호송했다. 19일 다시 출발해 조라포 만호에게 인계하려 했으나, 바람과 물살이 거세어 지체되었다. 결국 19일 저녁, 천성진(가덕도) 관할인 마거리(磨巨里) 앞바다에 임시로 정박시켜 놓고 계속 감시 중이라는 보고다.
*요약컨대 이 문서는 대마도에서 왜관으로 향하던 일본 연락선이 풍랑으로 거제도에 표착하자, 조선의 지방관들이 지침에 따라 신속히 조사하고, 영해 밖이나 목적지로 안전하게 호송하는 긴박한 행정/군사 보고 체계를 잘 보여준다.
*참고로, 이 사건은 1862년(철종 13년) 7월에 일어난 일이다.(동치 원년, 1862년) 결과적으로, 12일에 표류한 배가 지세포(거제) → 옥포(거제) → 마거리(가덕도 인근) → 청천(다대포 인근) → 부산진을 거쳐 20일에 최종적으로 부산 왜관에 도착함으로써 약 9일간의 표류 및 호송 여정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외교적 관례로는 당시 일본 사절단이 격식 차린 잔치 대신 실속 있는 물품(건물)을 요구하면 조선 정부가 이를 수용하여 지급하던 당시의 외교 관습도 엿볼 수 있다.
* 덧붙여 이번 「1862년 7월22일 지세포 표류왜선(漂倭船) 조사와 호송과정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동래부사(東萊府使) 엄석정(嚴錫鼎)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부계록(東萊府啓錄)』이다.
**「1862년 7월22일 지세포 표류왜선(漂倭船) 조사와 호송과정 장계(狀啓)」**原文
(1) 7월 15일 인시(새벽 3~5시) 보고 : 부산첨사 이남집(李南輯)이 보낸 보고에 따르면, 다대포첨사 정선용(鄭善容)의 보고를 받았고, 그것은 또 가덕첨사 강문창(姜文昌)의 통문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지세포 만호 어득하(魚得河)의 보고를 접수한 것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이달 12일 유시(오후 5~7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배 2척이 본 포구 경계로 떠내려왔습니다. 망군(초소병)의 보고를 토대로 만호(어득하)가 직접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확인하니, 그 배 2척은 왜나라 소선(小船)이었습니다. 같은 날 술시(저녁 7~9시)에 만나서 끌고 왔으며, 해시(밤 9~11시)에 본 포구 강어귀에 멈춰 정박시키고 수호하고 있습니다."라는 사유로 보고가 올라왔기에 이를 전달합니다.
(2) 같은 날(15일) 술시(저녁 7~9시) 보고 : 앞서와 같은 경로를 거쳐 지세포만호의 보고가 도달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 포구에 정박 중인 왜비선(倭飛船, 연락선) 2척에 대해 지방관인 거제부사 하겸락(河兼洛)이 직접 달려갔고, 순영문(경상감영)의 좌수 신석표(辛錫杓), 옥포의 왜학(일본어 통역관) 박교주(朴敎周), 통사 박희량(朴禧良) 등이 13일 사시(오전 9~11시)에 도착하여 사정을 물었습니다(問情). 조사 결과, 섬(대마도) 안에는 별다른 일이 없다고 합니다. 배에는 우두머리 왜인 2명, 격왜(노 젓는 인원) 10명, 교대 조인 중금도왜 5명, 소금도왜 4명, 공하대왜 3명, 하대왜 3명 등이 나누어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통행증(노인)과 왜관을 지키는 관리(관수대관)에게 전할 사적인 편지를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왜인들이 말하기를 '우리 배 2척은 이달 12일 사시에 대마도에서 함께 출발하여 (부산) 왜관으로 향하던 중, 수지(水旨) 앞바다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고, 같은 날 해시에 이곳에 정박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사를 마친 후 좌수와 왜학, 통사 등은 돌아갔으며, 해당 왜선은 여전히 머물게 하며 수호하고 있습니다."라는 사유로 보고가 올라왔기에 이를 전달합니다.
(3) 20일 술시(저녁 7~9시) 보고 : 역시 같은 경로를 거쳐 지세포만호의 보고가 도달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 포구에 정박 중인 왜비선 2척이 바람 때문에 계속 머물다가, 16일 사시에 출발하였습니다. 만호가 직접 이끌고 호위하여 유시에 옥포 강어귀로 옮겨 정박했으나, 다시 바람이 막혀 머물렀습니다. 19일 진시(오전 7~9시)에 다시 출발하여 조라포만호 신도철(申道喆)에게 인계하여 호송하려 했으나, 바람과 물살이 모두 역방향이라 유시에 천성보 경계인 마거리(磨巨里) 앞바다로 옮겨 정박시키고 수호하고 있습니다."라는 사유로 보고가 올라왔기에 이를 전달합니다.
(4) 21일 미시(오후 1~3시) 보고. 최종 왜관 도착 : 부산첨사가 보낸 보고에 따르면, 다대포·가덕첨사를 거쳐 천성진보 만호 조흥신(趙興信)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거리에 정박했던 왜비선 2척이 20일 진시(오전 7~9시)에 출발하였습니다. 만호가 직접 이끌고 호송하여 사시(오전 9~11시)에 청천별장 최석홍(崔錫弘)에게 인계하였습니다. 청천별장이 이를 이끌고 와서 술시(저녁 7~9시)에 본진(부산진)에 인계하였으므로, 이전선장(二戰船將) 강상문(姜尙文)으로 하여금 왜관(館所)까지 호송하게 하였습니다." 이어 호송관 강상문의 보고가 도착했는데, "해당 왜선들을 당일(20일) 사시(오전 9~11시)에 왜관에 무사히 인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5) 훈도와 별차의 확인 조사 (問情) : 뒤이어 도착한 훈도 이한기(李漢紀)와 별차 한기순(韓琦淳) 등의 보고서(手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표류했던 왜비선 2척이 왜관으로 돌아왔기에 즉시 사정을 물었습니다. 타고 있던 왜인들의 명수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 사정은 옥포 왜학(통역관)이 조사했던 내용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왜인들이 말하기를 '우리 배 2척은 16일 사시에 지세포를 출발하여 오늘(20일) 사시에 왜관으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해당 왜비선이 소지했던 통행증(노인) 2통을 거두어 상부(예조)에 보냅니다.“
(6) 일본 사절단에 대한 접대 및 대물 지급 : 이어서 훈도와 별차의 보고에 따르면, "신유년(1861년)분 만송원(萬松院) 송사왜(대마도 사절단) 일행이 배 위에서 여는 잔치(상선연)를 생략하는 대신, 마른 안주(건물)로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소망에 따라 잔치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이달 17일에 수량에 맞춰 계산하여 지급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7) 종합 보고 및 결론 : 이러한 사유들을 아울러 조정에 보고(치계)하오니, 차례대로 잘 살펴보고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치 원년(1862년, 임술년) 7월 22일.
[本月十五日寅時到付釜山僉使李南輯馳通內, 卽接多大浦僉使鄭善容馳通, 則卽到加德僉使姜文昌傳通內, 卽接知世浦萬戶魚得河馳報, 則今月十二日酉時, 朝倭未辨船二隻, 漂來于本浦境是如, 望軍進告據, 探知次, 萬戶乘船下海, 則同船二隻, 以倭小船 同日戌時逢曳, 亥時止泊本浦江口守護事馳報傳通據馳通爲有等以. 緣由馳通云云是白齊.
同日戌時到付同僉使馳通內, 卽接多大浦僉使馳通, 則卽到加德僉使傳通內, 卽接知世浦萬戶馳報, 則本浦止泊倭飛船二隻亦中, 地方官巨濟府使河兼洛馳往, 巡營門座首辛錫杓, 玉浦倭學朴敎周 通事朴禧良等, 十三日巳時來到問情, 則島中別無他事. 而頭倭二人, 格倭十名, 交代次中禁徒倭五人, 小禁徒倭四名, 公下代倭三名, 下代倭三名等分騎, 持路引及館守代官倭等了私書爲有矣. 同倭等言內, 俺等船二隻, 今月十二日巳時, 自馬島同爲發向館所, 及到水旨, 逢風轉漂, 同日亥時止泊此處是如爲乎等以. 問情後, 座首及倭學·通事等還歸, 同倭船, 仍留守護事馳報傳通據馳通爲有等以. 緣由馳通云云是白齊.
二十日戌時到付同僉使馳通內, 卽接多大浦僉使馳通, 則卽到加德僉使傳通內, 卽接知世浦萬戶馳報, 則本浦止泊倭飛船二隻, 阻風仍留, 十六日巳時離發, 萬戶領護 酉時移泊玉浦江口 阻風仍留. 十九日辰時離發, 助羅浦萬戶申道喆領護次, 交付之際, 風水俱逆, 酉時移泊天城堡境磨巨里前洋守護事, 馳報傳通據馳通爲有等以. 緣由馳通云云是白齊.
二十一日未時到付同僉使馳通內, 卽接多大浦僉使馳通, 則卽到加德僉使傳通內, 卽接天城堡萬戶趙興信馳報, 則磨巨里移泊倭飛船二隻, 二十日辰時離發, 萬戶領護, 巳時晴川別將崔錫弘處交付是如爲有旀. 同船同別將領來, 戌時交付本鎭, 故使二戰船將姜尙文, 護送館所是如爲有旀. 卽到同護送將馳報內, 同船當日巳時領付館所是如爲有旀. 追到訓導李漢紀, 別差韓琦淳等手本內, 漂右倭飛船二隻回館, 卽爲問情, 則所騎倭人名數, 逢風漂右事情, 與玉浦倭學問情無異. 而同倭等言內, 俺等船二隻, 十六日巳時, 自知世浦離發, 今日巳時回館是如爲乎等以. 同飛船所持路引二度, 捧上上送事手本據, 同路引輸送緣由馳通爲臥乎事爲等如, 馳通爲白有等以. 上項漂右回館倭飛船路引二度, 監封上送于該曹爲白乎旀. 節呈訓·別等手本內, 辛酉條萬松院送使倭員役等, 上船宴設行除良, 願受乾物是如乙仍于, 依其願同宴需雜物, 本月十七日照數計給爲白有等以. 緣由竝以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向敎是事. 同治元年七月二十二日]
2) 「1872년 6월9일 표류왜선과 일본 사절단의 동태를 보고한 장계(狀啓)」
이번 사료는 동치 11년(1872년, 고종 9년) 6월 9일에 작성된 것으로, 조선 후기 왜관을 통해 들어온 표류 왜선과 일본 사절단의 동태를 보고하는 장계(狀啓)다. 당시 부산 왜관과 경상도 연안에서 일어난 표류 왜인 처리 및 일본 대선의 입항 상황 등 후속 조치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내용인즉, 대마도 대선월촌(大船越村)에 사는 가평(嘉平) 등 4명이 탄 작은 고기잡이배 한 척이 1872년 5월 23일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거제도 지세포(知世浦) 경계로 떠내려왔다가, 5월 28일 사시(巳時)에 출발하여 이달 6월 1일 신시(申時)에 부산 왜관으로 돌아왔다. 부산첨사 김철균이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성책(명부)을 작성해 보고했다. 초기 조사(거제 옥포 왜학) 과정에서 이름과 거주지가 틀리게 보고된 부분이 있어 이를 바로잡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어 일본 대선 3척이 부산에 입항(6월 8일)했다. 처음 보고는 6월 8일 아침, 황령산 봉수군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배 3척이 수종(水宗) 너머에서 오는 것을 발견해 보고했다. 이에 부산진에서 전선(戰船)과 장수 변광탁을 보내 감시 및 정찰(초탐)을 실시했다. 확인 결과 이 배들은 왜관에 교대를 위해 들어온 정식 일본 배(대선)들이었다. 제1선에는 무오년(1858년)조 부특송사 수목선(배 이름). 격왜(사공) 20명과 교대용 중금도 왜인 등이 탑승했고, 제2선에는 기미년(1859년)조 제1선 송사 수목선. 격왜 15명과 별금도 왜인 등이 탑승했다. 문정 결과 대마도 내에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으며, 정해진 임무(교대 등)를 위해 입항했음을 확인했다. 이 기록은 당시 부산 왜관의 철저한 출입 통제와 표류민 조사 과정, 그리고 봉수와 전선을 활용한 해안 방어 체계를 잘 보여준다.
○ 당시(1872년) 조선의 정치 상황 : 흥선대원군 집권 말기이자 강화도 조약(1876년) 체결 직전의 긴박한 조일 관계를 보여준다. 당시 조선은 왜관의 일본인들이 서구식 복장을 하거나 격식에 어긋나는 문서를 가져오는 것에 매우 민감했다. 그래서 조선 관리들이 일본 측 로인(통행증)에 적힌 문구('각도각관방어소')를 문제 삼아 물리친 점은 당시 조선의 완고한 외교 원칙(위격 거부)을 잘 드러낸다. 또한 행정 보고 체계가 의정부뿐만 아니라 군사 최고 기관인 삼군부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일본 배의 입항을 단순한 무역이 아닌 군사적 경계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사건 이후 관리의 문책이 있었다. 조사를 소홀히 한 옥포 왜학 조정질을 통제사에게 보고하여 처벌하려 한 대목에서 엄격한 업무 태도를 볼 수 있다.
* 덧붙여 이번 「1872년 6월9일 표류 왜선과 일본 사절단의 동태를 보고한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동래부사(東萊府使) 정현덕(鄭顯德)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부계록(東萊府啓錄)』이다.
**「1872년 6월9일 표류 왜선과 일본 사절단의 동태를 보고한 장계(狀啓)」**
표류하여 왜관으로 돌아온 왜인 소선(小船) 한 척에 대해, 그 사정을 물어본 후 다시 형편을 보아 보고하고 처리할 사유를 이미 급히 장계로 올린 바 있습니다.
이달(6월) 초8일 자시(子時)에 도착한 부산첨사 김철균(金澈均)의 보고를 접하니, 즉시 가훈도(假訓導) 현풍서(玄豐瑞)와 가별차(假別差) 한인진(韓寅鎭) 등의 보고서(手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왜관으로 돌아온 표류왜선 한 척(漂倭小船)에 대해 가서 사정을 물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표류한 왜선의 선주 가평(嘉平, 39세), 사공 구삼(久三, 26세), 격왜(노 젓는 왜인) 안태랑(安太郞, 30세)과 구차랑(久次郞, 35세) 등 4명은 모두 대마도 대선월촌(大船越村)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사선(私船) 한 척에 낚시도구 등을 싣고 함께 타고서, 올해 5월 23일 본 섬 경계인 우도(牛島) 앞바다로 나갔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하였습니다. 24일에 귀국(조선)의 거제 지세포(知世浦) 경계로 떠내려왔다가, 28일 사시(巳時)에 출발하여 이달 초1일 신시(申時)에 왜관으로 돌아왔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왜관을 지키는 왜인(관수왜)이 말하기를, "이번에 온 본 섬의 표류인들은 이전 사례에 따라 왜관 안에 머물게 하다가 조속히 돌려보낼 계획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해당 표류 왜인들의 거주지, 성명, 나이 및 배에 실린 물건들을 목록(성책)으로 수정하여 올린다는 보고서에 근거해 해당 목록을 보냅니다. 이번에 조사한 내용을 보니, 이 왜인들의 이름과 거주 지명이 앞서 옥포 왜학(倭學)이 조사해 보고한 것과 서로 달랐습니다. 이에 다시 상세히 바로잡았으며, 옥포 왜학 측에서 조사를 소홀히 한 사유를 함께 보고합니다.
같은 날(同日) 진시(辰時)에 황령산(荒嶺山) 봉수군(烽軍) 김강이(金江伊)가 보고하기를, "당일 묘시(卯時)에 아침 안개로 왜선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배 3척이 수종(水宗)을 지나 건너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뒤이어 도착한 부산첨사의 보고에서도 사연이 같았으며, 정찰을 위해 본 진의 이전선(二戰船) 장수 변광탁(卞光琢)을 정해 보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같은 날 오시(午時)에 도착한 부산첨사의 보고에 따르면, 정찰 나간 장수의 보고를 접하니 "해당 배 3척은 일본의 대선(大船)으로, 진시(辰時)에 왜관 처소로 인도하여 도착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뒤이어 도착한 훈도와 별차 등의 보고서에는 "일본 대선 3척이 왜관에 도착하여 즉시 사정을 물어보니, 섬(대마도) 안에는 별다른 일이 없다고 합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중 제1선은 무오년(1858년)분 부특송사(副特送使, 부사절)의 왜수목선(倭水木船, 큰 목선)으로, 격왜 20명과 교대할 중금도(中禁徒, 상급 관리) 왜인 1명, 소금도(小禁徒, 하급 관리) 왜인 2명 등이 타고 있었습니다. 제2선은 기미년(1859년)분 제1선 송사(送使, 대마도 무역사절)의 왜수목선으로, 격왜 15명과 교대할 별금도(別禁徒, 임시 인력) 왜인 1명, 하대(下代, 잡무를 맡은 최하위 관리) 왜인 2명 등이 타고 있었습니다.
제3선은 같은 해(기미년, 1859년)조의 제2특송왜(二特送倭) 1호선입니다. 여기에는 격왜(노 젓는 왜인) 40명과 교대할 소금도(小禁徒, 하급 관리) 왜인 2명, 공하대(公下代, 최하 관리) 왜인 1명 등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공작미(公作米, 관례로 지급하는 쌀)를 실어 가기 위해 각각 로인(路引, 통행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당 왜인들이 말하기를, "우리 배 3척은 어제 새벽 대마도의 대풍소(待風所, 바람을 기다리는 곳)에서 일제히 왜관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수지(水旨, 물길의 요충지)에 도착했을 때 바람이 잦아들고 날이 저물어 바다 위에서 밤을 지냈으며, 오늘 진시(辰時)에 왜관에 도착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수목선(水木船, 큰배)의 로인(路引, 통행권) 2건(二度)은 앞면에 '각도각관방어소(各道各官防禦所)'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격식에 어긋나는(違格) 것이므로 꾸짖어 타이르고 물리쳤습니다. 1호선의 로인(路引) 1건은 받아내어 올린다는 보고서에 근거하여, 해당 로인을 보낸다는 사유를 급히 알렸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왜관으로 돌아온 일본국 대마주 대선월촌 표류 왜인들의 성명, 나이, 거주지 및 배의 집물(什物) 목록을 수정하여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 최고군사기관)에 올렸습니다. 이번 표류 왜인 조사 과정에서 옥포 왜학 조정질(趙廷耋)은 왜인들의 성명과 거주지를 상세히 보고하지 못하여, 왜관에 도착해 다시 조사한 내용과 서로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를 집행 과정에서 대조해 보니 매우 소홀한 처사입니다. 이에 엄중히 문책하여 다스리겠다는 뜻을 통제사(統制使) 측에 알렸으며, 일본 대선의 로인 1건은 봉인하여 해당 예조로 보냈습니다. 이러한 사유들을 아울러 장계로 올리니, 차례대로 잘 살펴 보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동치(同治) 11년(1872년) 6월 9일.
[漂右回館倭小船一隻, 待其問情, 更爲狀聞計料緣由, 已爲馳啓爲白有在果, 本月初八日子時到付釜山僉使金澈均馳通內, 卽接假訓導玄豐瑞, 假別差韓寅鎭等手本, 則回館漂倭小船一隻, 就往問情爲如乎, 漂倭船主嘉平, 年三十九, 沙工久三, 年二十六, 格倭安太郞, 年三十, 久次郞年三十五。所告內, 俺等四名, 俱以對馬州大船越村所居之人, 所持私船一隻, 捉魚次釣絲等物載持同騎, 今年五月二十三日向往本州境牛島前洋。逢風漂蕩, 二十四日轉漂於貴國巨濟境知世浦, 二十八日巳時離發, 今月初一日申時回館是如爲乎旀. 館守倭言內, 今來本州漂人, 依前留接館中, 斯速入送計料是如爲乎等以, 同漂倭等居住·姓名·年歲及船隻什物, 成冊修正上送事手本據, 同成冊輸送爲乎在果, 今觀問情, 則同倭等姓名及居住地名, 與玉浦倭學問情, 俱爲相左。故就加釐正, 而玉浦倭學段, 未免審問之失, 緣由馳通云云是白齊.
同日辰時荒嶺山烽軍金江伊進告內, 當日卯時朝倭未辨船三隻, 自水宗渡來是如爲白有旀. 追到釜山僉使馳通內, 辭緣一樣, 而哨探次本鎭二戰船將卞光琢定送是如爲白齊.
同日午時到付同僉使馳通內, 卽接哨探將馳報, 則同船三隻, 以倭大船, 辰時領付館所是如爲有旀. 追到訓別等手本內, 倭大船三隻到館, 卽爲問情, 則島中別無他事. 而第一隻段, 戊午條副特送使倭水木船良中, 格倭二十名, 交代次中禁徒倭一人, 小禁徒倭二名等同騎爲有旀. 第二隻段, 己未條第一船送使倭水木船良中, 格倭十五名, 交代次別禁徒倭一人, 下代倭二名等同騎爲有旀. 第三隻段, 同年條二特送倭一號船良中, 格倭四十名, 交代次小禁徒倭二名, 公下代倭一名等同騎. 公作米載去次, 各持路引爲有矣, 同倭等言內, 俺等船三隻, 昨日晨朝, 自馬島待風所, 同爲發向館所 及到水旨 風殘日暮 洋中經夜 今日辰時到館是如爲乎旀. 水木船路引二度段, 前面書以各道各官防禦所者, 係是違格, 責諭退却. 一號船路引一度, 捧上上送事手本據, 同路引輸送緣由, 馳通爲臥乎事爲等如, 馳通是白置有亦. 上項漂右回館日本國對馬州大船越村漂倭等姓名年歲居住船隻什物, 成冊修正上送于議政府·三軍府爲白有在果, 同船漂右問情也. 玉浦倭學趙廷耋段, 倭人等姓名·居住, 不能詳告, 致此回館問情之相左者. 揆以擧行, 極涉疎忽是白乎等以, 從重科治之意, 報于統制使處爲白遣, 倭大船路引一度, 監封上送于該曹爲白乎旀. 緣由竝以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向敎是事. 同治十一年六月初九日]
[주1] 수종(水宗) : 부산 앞바다에서 대마도로 향하는 물길이 갈라지는 지점을 의미함.
[주2] 가훈도(假訓導) : 조선 후기 왜관(倭館)에서 일본과의 실무 외교와 통역을 담당하던 임시직 관리다. 주로 언어(통역)와 문서 중심의 외교 실무 담당
[주3] 가별차(假別差) : 조선 후기 왜관에서 실무 행정과 물자 관리, 그리고 일본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담당하던 임시직 관리다. 주로 행정, 물자, 인원 통제 등 현장 관리 실무 담당.
[주4] 격왜/중금도/별금도 : 당시 왜관에 머물거나 배를 운용하던 일본인들의 직책이나 신분을 나타낸다. 노젓는 격군, 중간 관리, 임시 인력.
[주5] 무오/기미 : 각각 1858년과 1859년을 의미하며, 당시 외교 사절의 정기적인 교대와 물자 수송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주6] 각도각관방어소(各道各官防禦所) : 일본(대마도) 측이 통행증인 로인(路引)의 수신처를 기재하면서 쓴 표현으로, 직역하면 "조선 각 도, 각 고을의 방어소(군사 초소)들"이라는 뜻이다.
[주7] 황령산 : 왜관(현 용두산 공원) 바로 뒤편에 있는 산으로, 여기서 봉수군이 일본 배의 입항을 감시했다.
[주8] 초량 왜관(草梁倭館) : 조선 후기 한일 외교와 무역의 유일한 창구이자,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광복동 일대에 있었던 약 10만 평 규모의 일본인 거류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