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눈물"
우장춘(禹長春·1898~1959)은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가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5년(고종 22)에 일어난 을미사변은 국모 명성왕후를 시해한 사변으로, 협조와 방조를
한 이가 조선군 우범선이다. 우범선은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일본 수비대와 함께 경북궁에 침입
명성왕후 시해를 방조하였다. 이로 인하여 체포령이 내려져 일본군의 보호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을 하였다. 동경에 거주하며 일본 여성 사카이와
결혼하여 재기를 꿈꾸던 중, 1903년 조선에서 보낸 자객 고영근(高永根)에게 암살당하였다.
우장춘이 다섯 살 되던 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장춘은 생활이 어려워져 1년동안 고아원에 맡겨지기도 했다
어느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은 우장춘에게 어머니는 "길가에 핀
민들레를 보아라. 민들레는 아무리 짓밟혀도 끝내는 꽃을 피운단다. 낙심 말고 저 민들레처럼
어려운 일을 이기고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우장춘에게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좌우명이 되었다.
그후 우장춘은 힘들 때마다 민들레의 교훈을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했고
동경제국대학 농학부 실과에 입학하여 육종학의 전문 지식을 쌓게 되었다
그는 "나는 조선인이다. 아버지의 죄를 알고만 있을 수는 없다"면서 어머니와
처자식을 모두 일본에 남겨두고 대한민국에 환국을 결심하였 고국 국내에선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진다
동래원예고등학교 근거리 우장춘 박사
기념관에 들려 담은 사진 입니다
우장춘 기념관 앞에 세워져 있는 우장춘 흉상은
김태욱 과장의 딸인 김조미의 작품으로 그의
사후인 1971년 4월 8일 우 박사의 생일날 세운 것이다
이 흉상은 수원원예시험장에 처음 세웠는데
부산시가 요청하여 똑같은 흉상을 하나더 만들었다.
서거 60주기 추모제'에서 원우회 회원들이 묵념하고 있다.
우장춘 박사는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의 초대원장으로 재직하면서
1950년대 한국의 농업 부흥을 위해 일생을 바쳤으며, 우리나라
원예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다. (농촌진흥청 제공) 2019.5.20/뉴스
20일 전북 완주군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 열린 ‘우장춘 박사
하단 사진은 실무진에게
허락받은 사진 입니다
가죽가방 은 우장춘 박사가
아끼는 유품 입니다
부산 부두에 내린 우 박사는 유전 육종학 연구에 필요한 책
수백권과 현미경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1950년 3월 18일 부산 원예고등학교에서 열린 환영식장에서
"저는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대한민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께 약속합니다"라며
조국 발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 배추 무 양파 오이 등
대부분의 채소가 우 박사의 개량에 의한 것이며
연간 약 1만 섬(약 200억 원 어치)의 채소 종자가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와 구미 각국에 수출되고 있음은
우장춘의 공로라 할 수 있다
현재 일본에만 연간 2000섬이 수출되고 있으니 광복 당시와 비교하면
완전히 역전된 셈이며, 무 배추 등 씨앗에 관한 한 한국의
것이 세계적으로도 매우 우수하다고 한다.
동래 산저마을에는 수질 좋은 우물이 없었다
원예시험장은 예산 부족으로 수도시설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우물도 없어 먼 곳에서 물을 길어다 포장(圃場)에
뿌리는 등 고초가 여간이 아니었다
우 박사는 직원이었던
김태욱 과장에게 우물 팔 장소를 선정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 과장은 포장과 사무실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우 박사는 사무실의 반대편으로 3m쯤 옮겨
김 과장이 그린 원과 겹쳐서 그렸다
그리고 두 원이 교차되는 언저리에 우물을 파기로 했다.
우 박사는 일본의 종묘사에서 거액의
월급으로 초빙하려 했을 때나
이승만 대통령 시절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하려 할 때도
거절의 뜻만 내비쳤다
그는 "내가 가진 기술은 육종이다
이 육종으로 내 조국에 그 힘을 바칠 뿐
딴 생각은 없다"고 말하였다
조국에서 우 박사는 먼저 영남과 호남지방 농촌의 농작물 실태를 살폈다
그런데 그동안 일본 종자에 의존해 온 채소류가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우리나라와의 국교 단절로 일본에서 종자가 들어오지 못해 4~5년동안 반복된
연작과 잡종 씨받이의 자식약세(自殖弱歲) 현상으로 품질이 크게 퇴화되고 말았다
우 박사는 종자개량이 무엇보다 급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구미에 맞는
배추, 무의 우량종을 골라 연구소 포장(圃場)에 그물로 된 망실(網室) 50여 채를 짓고 씨를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