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법성게’ 제4구: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법성게와 의상대사(16)해주스님
| 16. ‘법성게’ 제4구: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
증분 법성은 깨달은 지혜로만 알 수 있는 부처님의 경계
법성게의 핵심이 법성이고
법성은 부처님의 지혜경계
증지는 부처님의 지혜이며
법성 성품이 일어난 마음
증분은 깨달은 이의 경계고
연기분은 중생교화의 경계
깨달음과 중생 위한 교설
둘이면서 결코 둘 아니다
증분과 연기분 서로 다르나
실제 근본에선 다르지 않아
법성이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일체가 끊어졌다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에 “증득한 지혜로 알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고 한다. ‘법성게’의 제4구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다.
의상 스님은 제자들에게 법성은 무주(無住)이므로 기준할 만한 법이 없고, 기준할 만한 법이 없기 때문에 무분별상이며, 무분별상이기 때문에 다만 증득한 자의 경계여서 아직 증득하지 못한 자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고 있다.(‘도신장’) 법성은 깨달은 지혜인 증지로 알 수 있는 부처님 경계인 것이다.
설잠 스님도 ‘법성게’의 핵심이 법성이고, 법성은 부처님의 지혜경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현재·미래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것이 이 법성을 증득하신 것이고, 역대 선사가 깨달은 것 또한 이 법성을 깨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경계는 일체가 끊어져 생각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니, 반야지혜로 천마외도의 사견 망상을 꺾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일체가 끊어졌다’는 의상 스님의 본래 의도와는 맞지 않다[咄! 再犯不容]고 한다.
앞에서 의상 스님이 제자들에게 강설할 때 일체가 끊어진 이 경계를, 굳이 말한다면 ‘오직 대장부가 마음을 잘 쓰는 곳[善用心處]’이라고 함을 보았다. 그러면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단적으로 거듭 말하면 ‘법성성기심’이다. 나의 5척되는 몸[吾五尺身]에 본래 구족되어 있는 부처님의 지혜마음인 것이다. 그 지혜마음이 증지이다. 의상 스님과 의상계 화엄에서 이 법성성기의 여래성기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래출현품’에서는 여래의 지혜가 중생들에게도 평등하게 다 구족해 있으나, 단지 망상 집착 때문에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고통 받고 있다고 한다. 아직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의 마음이 여래장이다. 여래장의 자성청정심이 불성이다. 이를 진함경권유(塵含經卷喩)로 보이고 있다. 삼천대천세계의 일을 다 담고 있는 삼천대천세계만한 경권이 있는데, 미세한 먼지[微塵]에 갇혀 있어서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비유이다. 그 미진을 깨뜨려서 경권을 꺼내어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여래출현이니 즉 여래성기인 것이다.
그래서 “만약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허공같이 맑혀라. 망상과 모든 집착을 멀리 여의어서, 그 마음이 향하는 바가 다 걸림이 없게 하라. (若人欲知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遠離妄想及諸取 令心所向皆無碍)”고 교설하고 있다. 망상 집착을 여의면 일체지(一切智)·자연지(自然智)·무애지(無礙智)가 바로 현전(現前)하게 된다고 한다.
‘화엄석제’에서는 원(元)의 천여유칙(天如惟則) 선사 법문을 인용하여 이 게송을 재해석하고 있다. 즉 ‘약인욕지불경계’는 ‘머리위에 머리를 올리는 것(頭上安頭)’이라고 한다. 이 말은 부처가 부처를 찾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당정기의여허공’에 대해서는 ‘누가 일찍이 더럽혔는가?(誰曾染汚)’, 그 마음은 일찍이 더럽혀진 일이 없다고 한다.
‘원리망상급제취’는 ‘파도를 헤치고 물을 구하는 격(拔波求水)’이라고 한다. 파도가 온통 그대로 물이듯이 망상 집착하는 중생 밖에 청정여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심소향개무애’에 대해서는 ‘눈앞에 가득 청산(滿目靑山)’, 중생의 마음이 본래로 자재하다고 읊고 있다. 이러한 경계 또한 여래성기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지혜를 일체지 또는 일체지지(一切智智)라고 한다.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서 돈독한 신심으로 발보리심하고 보살도를 구하려고 선지식을 역참한 것도 여래의 지혜인 일체지지를 얻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해탈문을 증득하고 입법계한 것이 바로 일체지지를 증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의상 스님은 ‘법성게’ 중 이상의 첫 4구(法性~非餘境)를 자리행의 증분으로 분과하였으니 증분법성을 보인 것이다.
스님은 이어서 자리행으로 증분 외에 연기분(緣起分)도 시설하였다. ‘법성게’ 제5구에서 제18구까지의 14구(眞性~大人境)가 이 자리행의 연기분에 해당한다. 증분이 법성원융이라면 연기분은 진성수연(眞性隨緣)의 경계이다. 진성이 연을 따라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 증분의 법성과 연기분의 진성은 무엇이 어떻게 같고 다른가? 증분과 연기분, 법성과 진성의 같고 다른 점을 잠깐 살펴봄으로써 증분법성에 대한 이해를 좀 더 도모해보기로 한다.
화엄경변상도. 돈황막고굴.
‘일승법계도’에서는 증분과 연기분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문] “위에서 말한 증분의 법과 연기분의 법은 무슨 차별이 있는가?”
[답] “차별되기도 하고 차별되지 않기도 하다. 그 뜻은 무엇인가? 증분의 법은 참모양[實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함이니 오직 깨달은 이만 알 수 있고, 연기분의 법은 중생을 위해 설함이니 연(緣)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차별된다. 연기의 법은 뭇 연(緣)으로부터 생겨나 자성이 없어서 근본[本]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차별되지 않는다.”
이처럼 의상 스님은 먼저 증분과 연기분이 서로 다름을 보인다. 증분의 법은 실상을 설한 것이니 깨달은 이만 알 수 있고, 연기분의 법은 중생을 위해 설한 것이니 연 따라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증분은 실상이고 연기분은 연생법이다. 전자는 깨달은 이의 경계이고 후자는 중생교화의 경계이다. 그래서 증분과 연기분은 서로 차별되어 다르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증분과 연기분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한다. 증분은 본[本]이고, 연기의 법은 연으로 생겨나 자성이 없어서 근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의 이익을 위해 언설로 교설한 연기분을 지말이라 한다면, 근본과 지말, 불가설과 가설, 깨달음과 중생을 위한 교설 등이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그리하여 근본과 지말이 주반(主伴)이 되어서, 중생을 깨우쳐 인도하여 이름 없는 참된 근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또 이법[理]을 기준으로 하면, 증분과 연기분(敎分)은 예부터 중도이고 무분별이다.
그러면 법성과 진성이 같고 다른 점은 어떠한가?
의상 스님의 뛰어난 4대제자로 일컬어지는 양원(良圓) 화상은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기로 추정되는 ‘양원화상기’에서 법성과 진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성은 진(眞)과 망(妄)에 통하여 원융을 취하며, 진성은 다만 참된 법만을 기준으로 한다. 왜냐하면 참된 법은 자재하기 때문에 능히 연을 따를 수 있고, 망법은 자재하지 않아서 능히 연을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증분 가운데 진망에 통하는 법성을 나타내고, 연기분 중에는 오직 자재한 진성의 뜻만 나타낸다. 지혜를 기준으로 하여 진실로 논하면 차별이 없다.” (균여, ‘일승법계도원통기’)
또 ‘일승법계도’에 대한 진수(新羅下代) 스님의 주석인 ‘진수기(眞秀記)’에서도 법성은 진(眞)과 망(妄)에 통하여 원융을 취하고 진성은 곧 오직 진(眞)이라고 한다. 또한 법성은 유정(情)과 비정(非情)에 통하며, 진성은 오직 유정문이다. 그러나 실제[實]를 기준으로 하면 진성이 곧 법성이라고 한다.
이로 볼 때 증분의 법성과 연기분의 진성은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다. 모두가 본래로 법성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법성의 성품이 그대로 일어난 것으로서 법성뿐이니, 진성이 법성과 다르지 않아 진성은 법성의 다른 이름이다. 법성이 유정·무정 일체 존재의 본래 그러한 세계라면, 진성이란 따로 유정문 가운데 증입분을 취하여 임시로 진성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고, 법성의 밖에 따로 일단의 진성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진성은 법성과 다르지 않으면서 다르다. 진성은 연기적 측면에서 말한 것이니, 유정이 연기를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인도하고 있다. 연기분은 불가설의 증분세계에 이르기 위한 가설의 수행방편이고 그 연기의 체가 진성인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어릴 때 먹었던 찐쌀이 떠올랐다. 혹 찐쌀이 뭔지 모르는 분들도 계신지 모르겠다. 찐쌀은 제때에 벼를 추수하기 전에 덜 여문 벼를 쪄서 말린 후에 찧은 쌀인데, 한 움큼 입에 넣어 침으로 불려서 씹으면 고소한 맛이 난다. 처음에는 딱딱해서 씹기도 어렵고 별맛이 없다가 씹을수록 점점 더 고소한 맛이 더해진다. 찐쌀을 오래 씹으면 고소한 맛이 진해지듯이, 불가설이기는 하나 언설에 담긴 뜻대로 오래오래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해보면, 증분법성의 경계가 목전에 현전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52호 / 2018년 8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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