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곧 지식의 끝..
진리란 무엇인가 구글에서 검색했더니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진리眞理 :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법칙이나 사실. "영구불변의 ∼"
진리란 무엇일까요? 진리는 항상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란 누구에게나 해당되어야 합니다. 내게는 해당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면 그건 진리가 아닌 겁니다. 그리고 진리란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난다고 해도 변해선 안됩니다. 세태에 따라서 변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리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언어로 표현 가능한 것은 상대적인 세계와 상대적인 세계 안의 일에 한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도달한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설명을 할 때 비유적이며 은유적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선문답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절대적인 세계에 대해서 말한 것을 상대적인 마인드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해하려고 하니 모든 말들이 수수께끼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노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이 말은 도道를 도道라고 말하면 그것은 도道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도는 진리를 지칭하는 말일 뿐, 그 말이 진리는 아닌 거죠. 이것은 마치 이니그마라는 닉네임이 이니그마는 아닌 것과도 같은 겁니다.
언어는 언제나 그 언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그 이면에 숨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야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이 언어의 이면에는 이 말을 함으로써 표현하고 싶은 혹은 알리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는 항상 직접적인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언어를 관찰해 보니 이렇더군요. 아마도 그래서 너무 많은 대화를 주고받고 나면 허전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언어가 직접적으로 그 알맹이를 전달해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만의 진리가 참진리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진리를, 불교는 불교만의 진리를, 그리고 천주교나 자이나교 그리고 이슬람교 역시 자기들만의 진리를 말하고 모두는 서로 타 종교와는 다른 자기들만의 진리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에 각각의 종교에서 추구하는 진리가 모두 같다는 것을 안다면 종교끼리 서로 반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각 종교에서는 진리가 무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뭔지 모르기에 타 종교를 배척하고 자기들이 믿는 종교만이 참 진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진리가 무언지 안다면 타 종교나 자기들이 믿는 종교나 형태는 다르고 의식儀式은 다를지언정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니 진리가 무언지 모르는 성직자들이 뭇 사람들을 이끌고 진리로 인도하겠다고 자신감을 갖고 진리를 설파합니다. 이건 마치 장님이 장님들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서 출발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도착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설사 우연히 도착한다고 해도 그 곳이 서울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을 겁니다.
365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부처님이 절간의 법당에 앉아서 웃고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바로 인간들의 이런 터무니없는 행동 때문에 항상 웃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말로 참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명확한 개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일단은 어딘가에 가기 위해서는 그 곳을 표시한 지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지도가 개념입니다.
진리에 도달했다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석가, 예수, 달마, 혜능, 임제, 오쇼 라즈니쉬,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유지 크리슈나무르티, 묵타난다, 무묘앙 에오, 경허선사, 백봉거사, 대우거사 등등.. 깨달았다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 열 세사람의 이름입니다. 이 정도의 사람들이 말한 것 중에서 공통적으로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을 찾으면 그것이 진리입니다. 즉, 정확한 진리에 대한 개념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혜해탈"을 했다고 말합니다. 참고로 여기에 나열한 분들 중 누구는 높고 누구는 낮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들이 본 것은 모두 공통된 "무엇"인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이고 또한 그것이 바로 자신들이었으며 또한 그것이 바로 당신의 본래 실체인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명확하고도 정확한 개념이 지도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개념을 탑재해야만 하느냐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확한 방편을 정확하게만 수행한다면 혜해탈을 건너 뛰어서 바로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깨달음에 들기 전에 불교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것으로 추정되는 백봉거사가 어떻게 해서 깨닫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백봉거사는 독립운동을 했던 분이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대략 56~57세 경에 깨달음을 얻고 설법을 하시다가 85년도에 육신을 벗고 가셨습니다. 수행 시작한지 불과 6개월 여만에 깨달았다고 합니다.
백봉거사는 불교가 뭔지도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농사를 짓던 어느 날, 친구에게 해가 지면 막걸리 한잔 같이 하자고 말합니다. 그러자 친구가 오늘은 절에 가서 참선을 해야 하니 막걸리를 마시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백봉거사는 놀랍니다. 아니 세상에 막걸리를 마시는 것도 마다할 정도로 중요하고 재미있는 일이 따로 있다는 말이야? 그날 백봉거사는 친구 따라 절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절에서 스님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다른 방편은 필요 없고 신통력이나 생길 수 있는 방편이나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스님은 신통력에 대해서 설명하고 왜 우리가 진리에 도달해야만 하는지 설명하면서 "무無자 화두"를 줍니다. 백봉거사는 이 때부터 약 육개월간 무無자 화두를 잡고 수행에 매진합니다.
무자 화두를 잡는다는 건 이런 것입니다. 자신에게 인식, 인지되는 모든 것은 없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수행을 하기 전에 여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설명)를 들었을 것입니다. 당연한 거고요. 왜냐하면 행동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이 먼저니까요.
백봉거사는 어느 날, 식당에서 친구와 막걸리를 마시다가 식당 한 구석에 불교를 수호하는 신장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친구에게 저기 신장이 서 있는게 보이느냐고 물었고 친구는 보이기는 뭐가 보이느냐고 반문하게 됩니다. 그러자 그 신장이 환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현상은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가 수행을 할 적에도 유사한 일이 발생합니다.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수행을 하던 중 신들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스승이었던 싣다라 메슈와르에게 말합니다. 그러자 스승은 "이 세상에는 너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스승의 말을 굳게 믿었던 니사르가다타는 즉시 신들의 말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백봉거사 역시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신장을 부정했으니 즉시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후 어느 해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 밤.. 절에 가서 참선을 하는 도중 몸에 열이 심하게 올라서 몰래 선방에서 나와 절 내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아서 수행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방광이 터졌다고 하더군요. 방광이란 수행자가 깨닫는 순간 빛이 폭발한다고 하는데 그 현상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이 때, 마을에서는 절에 불이 난 줄 알고 불을 끄기 위해서 산에 오른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시간이 지나도 백봉거사가 돌아오지 않자 선방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이 백봉거사를 찾기 위해서 선방을 나섭니다. 그리고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백봉거사를 보게 되었는데 온 몸이 눈에 덮여서 코만 빼꼼히 보였답니다. 그리고 삼매에 들어서 있는 상태라서 그대로 들어서 선방으로 옮겼답니다.
시간이 지나서 삼매가 풀리자 방편을 주었던 스님은 평상시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금강경 구절을 보여주면서 해설을 부탁하자 백봉거사는 그 자리에서 명쾌하게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백봉거사는 경전공부를 한 사람이 아닙니다. 금강경 해설을 듣고 난 스님은 백봉거사가 깨달은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스승에게 예를 올리는 삼배를 했다고 합니다.
이후 백봉거사는 제자들을 방편수행을 위주로 해서 진리로 인도하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백봉거사에게 머리만 깎으면 종정으로 추대하겠다는 제의를 여러번 했지만 그 때마다 거절했고 대신 일년에 한번씩 조계종에서는 백봉거사를 초빙해서 설법을 들었는데 설법을 할 때마다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냈다고 합니다. 이건 머.. 중이 중노릇 제대로 하지 않으니 중노릇 제대로 하라고 질타한 것일 겁니다.
백봉거사는 깨닫기 전에는 혜해탈이 뭔지 전혀 몰랐을 겁니다. 또한 교리나 이런 것도 제대로 몰랐을 거고요. 그러나 단지 방편 하나로 모든 것을 건너 뛰었던 것이라고 보아야죠. 다른 말로는 그만큼 순수했던 사람이었다는 말일 겁니다.
모든 지식은 먹고 살기 위한 것이며 행복해지기 위한 것입니다. 설마 굶어죽기 위한 지식, 불행해지기 위한 지식이 있겠습니까?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런데 심리 깊숙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원하는 행복은 일시적인 행복이 아닌 항구적인 행복입니다.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이 바로 인간은 항구적인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구적인 행복은 진리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진리에 대해서 명확하게 아는 것 즉 진리에 대해서 그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지식의 끝인 겁니다. 이것만 알고 나면 더 이상의 지식은 필요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는 것을 실현시키는 일만 남는 것입니다.
저도 당신처럼 온갖 뉴스를 보고, 유튜브를 봅니다. 그러나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엇을 찾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들 속에 행복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지 살아 있는 자로써 생명활동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궁극적인 행복에 도달하려면 깨달아서 진리에 안착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그 어떤 지식이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입니다. 많이 알면 조금 더 주딩이를 효율적으로 나불거릴 수 있을 겁니다. 모른다면 모르는만큼 투박하게 말할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 차이도 없습니다.
깨달은 모든 이들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말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을 찾고 알면 그것이 곧 진리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그것이 바로 진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게 되었다면 남는 것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되었다면 그는 온 우주를 그리고 우주를 생겨나게 한 원리를 자신의 몸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깨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난 것이 아니니까요. 이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냥 원래부터 스스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금강불사金剛不死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 : 먹고 살기 위한 지식이라면 끝도 없이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행복해지기 위한 지식이라면 그것은 진리에 도달하는 정확한 방법을 아는 것이 곧 지식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았을 때 그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진리 외의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방편을 소개하겠습니다. 방편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방편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나열하겠습니다.
새로운 날 맞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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