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제조 산업의 흐름을 느끼고 싶다면? 당연히 '을지로'로 가야 한다. 현재 '힙지로'로 불리며 젊은 세대들에게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잡은 을지로의 원래 모습은 한국의 제조 산업을 이끌던 곳이다. 1968년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며 70-80년 대 국내 유일의 종합 가전제품 상가로 호황을 누렸던 세운 상가를 비롯하여 목재, 가구, 철물, 타일 및 도기, 페인트, 공구, 아크릴, 조명, 미싱 등 다양한 공장과 가게들이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을지로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서울에 이렇게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나,라고 감탄하게 된다. 을지로에서 판매하는 물건들만 가지고 집 한 채를 뚝딱 짓는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아니, 을지로에서는 만들지 못하는 물건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동, 충무로, 동대문 거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을지로는 흡사 미로 같기도 하다. 거리마다 판매하고 가공하는 물품이 다르기 때문에 걷다 보면 분위기가 휙휙 변해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다.
한국 산업의 역군이었던 을지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번 변화를 겪었다. 제조 산업의 활기를 느낄 수 있었던 골목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을지로의 중심이었던 세운 상가도 강남권 개발과 용산전자상가 건설 등의 요인으로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었다. 서울시가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세운 상가의 모습은 아마 없었을 수도 있다. 이어 저렴한 임대료와 더불어 녹슬고 낡은 분위기에 흥미를 느낀 예술가와 청년 사업가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아 을지로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마치 신발 공장이 밀집해있던 곳으로 유명했던 성수동이 예술 감성이 더해져 '한국의 브루클린'이라 불린 것처럼 말이다.
쇠퇴한 거리에 더해지는 아티스트의 손길
개인 예술가와 사업가들이 을지로의 분위기를 변화시키고 있는 와중에, 대기업 또한 을지로의 분위기를 변화시키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그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곳은 '신한카드'이다. 이들은 '을지로 3가 프로젝트'를 통해 을지로 3가의 지역, 사람, 문화를 연결하며 지역 사회의 발전과 상생에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서울청소년수련관 1층 공간을 지역 주민과 인근 직장인, 청소년을 위한 북 카페 형식의 도서관으로 탄생시켰으며 서울교통공사와 협약을 맺어 을지로 지역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지하철 내 문화예술공간을 조성하기도 했다. 또한 을지로 3가에 있는 독특한 감성을 가진 가게들의 위치를 담은 '을지로 컬처 맵'도 배포하고 있다.
신한카드의 이 프로젝트에서 정점을 찍는 것은 바로 '히어로 프로젝트'의 '을지로 셔터 갤러리'이다. 이 프로젝트는 신한카드가 지역의 소상공인을 돕고, 거리 환경을 아름답게 개선하자는 취지에서 진행되었다. 을지로를 탐방한 이들이라면, 가게 곳곳에서 이 갤러리를 본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 갤러리는 가게가 문을 닫고, 셔터를 내리면 탄생하게 된다. 셔터가 자연스럽게 예술 작품을 품은 캔버스가 되는 것이다. 프로젝트에 초청된 아티스트 5명은 ‘을지로 타일, 도기, 공구’를 테마로 각자의 개성을 뽐내는 작품을 셔터 위에 아름답게 수놓았다. 또한 신한카드 임직원과 일반인들도 참여하여 거리의 풍경을 풍성하게 꾸미며 을지로만의 개성을 뽐내고 있다. 이를 통해 영업이 종료된 평일 저녁과 휴일에 을지로를 찾는 인근 직장인, 지역 주민, 그리고 관광객들은 독특한 거리 분위기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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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보다 무거운 것
정신없는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덩달아 어둑어둑해지는 골목길
오늘 하루 고단했던 아저씨의 눈꺼풀이 감기는 순간
지잉지잉 시끌시끌했던 철의 골목도 잠이 든다.
졸음 앞엔 장사가 없으니 모두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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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셔터 갤러리를 거닐다 보면, 낡은 건물 사이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이 눈길을 끈다. 이는 코오롱인더스트리FnC부문이 만든 멀티 플래그십 스토어 '을지 다락'이다. 이곳은 코오롱FnC에서 선보이는 '코오롱스포츠', '커스텀 멜로우', '시리즈', '에피그램', '래코드' 5개 브랜드를 함께 만나볼 수 있는 동시에 을지로의 고유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느끼기 위해 만들어졌다. 새롭게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을지로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20여 년 된 기존 건물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내부의 인테리어 또한 기존의 오래된 장롱과 나무 바닥을 사용해 새것과 옛것이 공존하는 모습을 이루어냈다. 그야말로 '뉴트로' 감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꾸며진 것이다.
전체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건물에는 카페와 쇼룸이 구성되어 있다. 1층은 올모스트홈 카페 '을지 다방'으로 꾸며져 손님을 반긴다. '내 집과 같은 편안함'과 더불어 '내 집에 놀러 온 좋은 사람에게 대접하는 차와 디저트'라는 슬로건으로 친근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다방에서 달달이 커피, 쌍화밀크티와 같은 레트로 감성 음료를 맛볼 수 있다. 또한 건강한 식재료로 만들어진 디저트 또한 입을 즐겁게 한다.
2층은 '을지 다락'으로 세 개의 방과 거실로 나누어져 있는데, 방마다 을지로 3가, 을지로 4가, 을지로 5가로 이름을 붙여 코오롱 브랜드의 제품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을지 다방과 달리 을지 다락은 전시장으로 비정기적으로 콘텐츠가 변경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에는 이형수 작가의 '피스 오브 라이프 (PIECE OF LIFE)'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치 작가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과 더불어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공간의 조화를 느끼며 다시금 뉴트로의 분위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독특한 분위기의 거리의 변화의 끝은?
쇠퇴하던 을지로가 새로이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고, 생기를 얻는 모습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이런 붐으로 인해 을지로를 개발하는 움직임도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오랜만에 을지로를 찾은 우리는 세운 상가 주변으로 거대한 공사판이 만들어진 것을 보고 새삼 놀랐다. 거대한 건물이 지어지면서 거리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에 찬성하는 이들도 있지만, 반대의 입장을 가진 이들도 있다. 일단 상가 주민들 및 예술가들은 발전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공사판 주변으로 이에 반대하는 현수막이 심심찮게 보였다. 재개발로 인해 그동안 사람들이 좋아했던 을지로 고유의 풍경이 사라질까 봐 우려하는 것이다. 우리는 경리단길, 가로수길 등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거리만의 독특한 풍경이 사라지고, 결국 이전보다 못한 상황이 된 것을 봐왔다. 그러기에 을지로의 변화가 이전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는 바람이다. 도시의 부흥은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롭게 무언가를 만들기보다는, 그곳의 전통과 함께 공존해야 가능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