霜月(상월) - 이행(李荇)
晩來微雨洗長天(만래미우세장천)
入夜高風捲暝烟(입야고풍권명연)
夢覺曉鍾寒徹骨(몽각효종한철골)
素娥靑女鬪嬋娟(소아청녀투선연)
저물녘 가랑비 내려 긴 하늘 씻어내고
밤 들자 높이 부는 바람 어둑한 안개 걷어내네.
새벽 종소리에 잠을 깨니 寒氣가 사무치는데
달빛과 서리가 아름다움을 다투네.
저물녘 가랑비 내려 긴 하늘 씻어내고
밤 들자 높이 부는 바람 어둑한 안개 걷어내네.
새벽 종소리에 잠을 깨니 寒氣가 사무치는데
달빛과 서리가 아름다움을 다투네.
빛나는 아침 초겨울의 용담정을 돌아들어
구미산 푸른하늘에 뜬 호랑이 구름이야
대신사 태묘로 가는 길에 서광으로 비치니
영남대로 삼랑사 옛터 어리는 수운의 그림자라
晩來微雨洗長天 (만래미우세장천)
入夜高風捲暝烟 (입야고풍권명연)
夢覺曉鍾寒徹骨 (몽각효종한철골)
素娥靑女鬪嬋娟 (소아청녀투선연)
晨光照山川木香(신광조산초목향)
霜重輕輩步寒行(상중경배보한행)
紅葉滿地黃花開(홍엽만지황화개)
心隨流水樂悠然(심수유수락유연)
晩來微雨洗長天(만래미우세장천)
入夜高風捲暝烟(입야고풍권명연)
夢覺曉鍾寒徹骨(몽각효종한철골)
素娥靑女鬪嬋娟(소아청녀투선연)
李荇은 가장 많은 辭賦작품을 남겼고, 官邊文學을 주도한 인물로서 한국한문학사상 주목해야 할 작가이다. 이러한 그에 대해 아직 그 사부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는 사실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아무리 그 작품 수준의 우열을 따져본다 하더라도 그 평가의 과정은 거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남긴 62편이라는 작품에는 다른 辭賦家들이 따르기 어려운 나름대로의 작품 세계가 있을 것이므로 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 연구는 李荇의 사부문학에 대한 전체적, 개략적인 이해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 지면관계로 방대한 양의 原作의 모습을 제시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여기면서, 부득이 그 내용만을 추출하여 편의상 -儒家道統 찬양, 慕人, 經世論, 修身, 慨世-로 나누어 그 내용의 개략을 소개하였다. 그의 사부작품을 통해서 얻은 결론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李荇은 철저한 儒家官僚요, 館閣文人이요, 人本主義者요, 現實主義者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었다. 철저한 유가사상으로 작품을 다분히 이념적인 수단으로 활용한 까닭에 작품의 양에 비해 그의 사부문학의 審美性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李荇의 사부작품을 개괄함으로써 한국사부문학의 주요작가인 李奎報, 徐巨正, 申光漢, 許筠, 張維의 사부문학에 대하여 거칠게나마 일별할 수 있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李荇 辭賦의 구체적 모습인 形式에 대해서는 아직 발표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본고는 조선전기 士禍期를 屈原 수용의 변곡점으로 판단하고, 이 시기 대표적 문인인 容齋 李荇(1478~1534)의 굴원 수용의 특성과 문학적 변용 양상을 고찰했다. 이행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충주-함안-거제도로 이동하면서 3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이때 쓴 시들을 3종의 詩錄으로 엮었는데, 이 가운데 굴원 수용 작품이 30편 가까이 들어 있다. 그중 「이소후발(離騷後跋)」은 새로운 논리로 굴원을 옹호한 글로서 사화기 문인의 굴원관(屈原觀)을 대변한다. 그는 또 시에서는 굴원에게 자신의 불우함을 이입해 공감하거나 위안을 얻기도 하고, 작품 전편에 굴원의 내면 또는 굴원 작품의 분위기를 구현하면서 동일화하기도 했다. 작품의 질적 성과로는 후자가 우위에 있다. 한편, 그의 작품에는 이해와 공감 한편으로 굴원과 거리를 두거나 차별화하려는 태도가 나타나고 있음이 유의된다. 그는 굴원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도 다른뜻을 비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굴원과 다름을 선언하거나 원텍스트의 구조를 차용해 도리어 정반대의 의미를 창출하는 패러디 수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메시지의 신선함과 강렬함, 문학적 개성면에서는 동일화 작품보다 이쪽이 돋보인다. 이 동일화와 거리 두기는 모순적인 것이기보다 선택적 지향에 의한 것이다. 이행은 굴원의 충심(忠心), 연군지정(戀君之情), 미정(美政)의 이상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했다. 그러나 그는 굴원이 세상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결국 자결이라는 자기 소멸의 방식을 택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고 적어도 그것을 자신의 길로 삼지는 않았다. 전자의 경우 굴원과 이행 사이에는 완벽한 동일화가, 후자의 경우에는 굴원과의 차별화 양상이 드러난다. 이 두 가지 태도가 긴장 속에 공존하는 것이 이행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이행의 굴원 수용 작품은 한편으로는 시대적 문제를 선창하는 역할을 맡고, 한편으로는 그 개인의 내면과 개성과 인생 태도를 담아내면서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굴원과 ‘다름’에 주목하면 그가 중종반정 후 정계에 복귀해 새로운 훈신(勳臣)이 되는 상황이 이해된다. 이행의 굴원 수용 작품은 사화기 문인들 중 독보적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배문학사에서도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