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혜의 찬양 감사합니다.
오늘은 2025년 1월 셋째 주를 맞이했습니다. 주의 전에 오신 여러분들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오늘 말씀의 제목은 선택의 중요성이라는 말씀의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헬라클래스의 선택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헬라 클래스의 선택 어릴 적부터 남다르게 힘이 센 헬라크레스가 하루는 자기의 힘을 자랑해 보입니다. 그의 힘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놀란 아버지는 그를 키타론산으로 보내서 소떼를 돌보게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장차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의 앞에는 매우 아름답고 호화로운 옷을 입은 한 여인과 또 매우 수수한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는데, 아름답고 화로운 옷을 입은 여인은 젊은 헤라클레스에게 아무런 수고 없이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겠노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쾌락이었습니다.
두 번째 수수하고 흰옷을 입은 여인은 그에게 매우 많은 수고와 고통을 겪어야 하지만 결국 가장 합당하고 아름다운 삶을 제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미덕입니다.
결국 헤라크스는 잠시 고민을 해보다가 과감하게 미덕의 길로 선택을 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의 선택입니다. 짧은 내용의 글이지만 이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서 너무나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야말로 선택의 연속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것들을 선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중에는 잘한 선택도 있지만 잘못한 선택도 참 많이 있습니다.때로는 선택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해서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만 하지만 어찌하였든 간에 우리는 이 자리까지 선택을 하면서 이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우리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은 배우자를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보여주시면서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 니가 결혼해라 그렇게 말씀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도 저도 옛날에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한 적이 있었는데요.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분명히 제 배우자를 하나님께서 아실 텐데 하나님만 아시지 말고 저에게도 좀 가르쳐 주세요.
저는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많은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해야 하는데 잘못 선택함으로 후회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을 택하든 직업을 택하든 그 무엇이든 선택의 문제는 중요하고 그리고 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되기 때문에 굉장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도 우리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서 너무나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올 때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이 조카 롯을 데리고 왔습니다. 두 사람은 가나안에서 열심히 일한 덕분에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재산이 늘다 보니까 이 두 사람이 한 곳에 함께 머물기가 굉장히 힘이 들었습니다. 이 가축들의 물과 먹이를 두고서 아브라함의 식솔들과 이 로스 식솔들과의 충돌이 발생한 것입니다. 두 집안의 원수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 일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 롯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그 말씀이 8절 9절의 말씀인데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8절 9절의 말씀 시작,
바울라의 고생에 이르게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 나가 내 목자다. 내 목자가 서로 나누게 하나이다. 내 앞에 원하는 지 아니면 나를 말하라. 내가 잘하는 자는 내가 원하면 나는 사
아멘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니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내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니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여기에 선택의 문제가 나옵니다. 이 갈림길에서 지혜가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올 한 해도 우리는 많은 사연들을 직면하게 될 것이고 순간순간 중요한 것을 선택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두 사람의 선택을 통해서 우리는 지혜를 배우게 될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선택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먼저는 현실을 보고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뭘 보고 선택한다고요? 네 현실을 보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 눈앞에 직면해 있는 현실적인 상황 형편, 거기에 목적을 두고 선택을 합니다. 직업을 선택한다면 얼마나 많은 돈을 주는 곳인가를 먼저 따지고 생각합니다. 그 회사의 비전이나 능력이나 장래성을 별로 고려하지를 않습니다. 그저 어떤 현실적인 문제만 바라볼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 당장 좋고 편리하면 됩니다. 지금 당장 이익이 떨어져야만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운명에 맡기는 형이 있습니다. 어디에 맡긴다고요?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즉 도방을 하는 겁니다. 모 아니면 보라는 식입니다. 앞으로의 장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불도드처럼 밀어붙입니다. 잘 되면 내 탓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 그저 자신의 삶의 삶이 잘 되고 못되고 하는 것이 자신의 팔자인 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런 유형은 시작은 잘 합니다만 포기도 빨라서 이 고난과 역정이 찾아올 때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런가 하면 미래를 생각하며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현실에도 충실하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더욱더 생각하고 선택을 합니다.
그렇다면 한번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앞에 읽었던 롯은 어떤 유형일까요?
롯은 첫 번째 유형입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롯은 요단의 들판을 바라보았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 들판을 바라보니까 소알까지 물이 풍부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물이 풍부하다는 것은 그만큼 땅이 좋다는 말입니다. 강을 낀 곳은 땅이 비옥하고 기름진 땅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10절에 하반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만큼 이 롯이 선택한 땅은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롯은 그 땅을 선택했습니다. 정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땅, 가장 비옥한 땅을 선택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롯의 이 선택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롯이 성경이 말하는 그런 인물은 되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롯은 지금 삼촌과 같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삼촌의 도움을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선택권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먼저는 삼촌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삼촌이 그를 돌봐주었고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물론 삼촌이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다 할지라도 조카 입장에서 보면 아닙니다.
제가 우선 선택할 수가 없고 삼촌이 먼저 하셔야죠.
우선 선택권을 돌려주어야 맞습니다. 하지만 롯은 어떤 사람이라고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오면 물불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은 연장자요. 또 삼촌으로서 조카 롯에게 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먼저 롯에게 모든 자리를 다 양보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굉장히 놀랍습니다. 이런 여유 있는 마음, 여유 있는 믿음이 어디서부터 생긴 것일까? 만일에 제 같으면 저 같으면
너 어디 자리를 넘보냐고 넌 날 따라오면 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제가 그렇게 얘기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다 양보하지 않습니까? 이 여유 이 믿음이 어디서부터 생긴 것일까요? 창세기 12장 1절에서 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 4절 말씀 시작.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약한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내게 보여줄 땅으로 나라 내가 너로 민족을 이기고 내게 복을 넣어 죄인들을 상대하게 하, 너는 복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사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 땅의 모든 목소리에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을 따라하고 또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라함이 하나을 향할 때 75세입니다.
아멘 1절에서 3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4절 말씀을 보시면 이에 아브라함이 무엇을 따라갔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여기서부터 차이가 납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따라갔다고요?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근데 롯은 그냥 아브라함을 따라간 것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 성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간 성도 자신이 좋은 땅을 차지할 수 있는 특권도 있고 우선순위도 있지만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을 뭐 했다고요?
믿었기 때문에 할렐루야 이것 외에는 다른 게 나올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단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갔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 여유도 있고 조급한 마음도 다 사라집니다.
여러분 여유가 생겼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에게 여유가 있을까요? 아주 돈이 많은 부자가 여유가 있을까요? 아주 힘을 가진 사람이 여유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요. 부자가 힘 있는 사람 더 마음이 좁고 작아지고 악착같이 뭐 양보도 안 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힘이 있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오늘 이 아브라함이 이런 여유가 있었다는 것은 누구를 믿었다고요?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겁니다. 그 말씀이 그를 강하게 하였고 그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 앞에 있었던 유형의 어떤 유형에 해당된다고 볼까요? 세 가지 유형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렇죠 아브라함은 사실은 자기가 무엇을 선택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 이끄심대로 갔을 뿐이지 내가 이 땅을 갈까요? 저 땅을 갈까요?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하신 바를 하나님께서 그 인도하시는 바를 내가 따라간 것이죠.
저는 이 믿음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카 롯이 그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해 버렸기 때문에 정반대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이 그 길로 가도록 허락해 주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셨다는 거죠. 하나님이 동행했다는 겁니다. 누구와 함께 아브라함과 함께 사랑하는 여러분 올 2025년 한 해에 우리 앞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 장로님이 기도하셨습니다만 정말 나라에 이런저런 어려운 일도 참 많습니다.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일 정말 우리 인생도 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올 이 한 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줄 믿고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삶을 붙잡아 주신다는 사실을 여러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우리 주님께서 함께 가시는 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아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왜 두려울까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지도 모르고 자꾸만 내 혼자 가려고 내 생각, 내 고집, 내 아집대로 밀어붙이려고 하니까 안 될 때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되고 두려움에 빠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조금 전에 삶의 여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유는 내가 여유를 가지고 싶다고 해서 여유를 가지는 건 아닙니다. 그럴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계시니 나를 인도하시니 거기에 여유가 있습니다.
이롯이 좋은 땅을 차지해서 가버렸습니다. 그때 누가 찾아오셨습니까? 또 누가 찾아왔을까요? 하나님이 또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에 말씀합니다. 그 말씀이 14절부터 17절 말씀인데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무신은 을 하되 여호와께서 하나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있는 곳에서 조카 장족 그리고 조카 친족을 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하나 너와 내 자손에 대해 주 영원히 있어. 내가 내 자손이 땅에 뜻을 갖게 하여 사람이 땅의 그것을 부딪칠 수 있을 수 있는 내 자손도 되리라. 너는 그러나 나를 좋다 고 하였다. 내가 그것을 내게 주리라.
아멘 자 너는 일어나 14절 말씀을 보여주세요.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누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서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을 바라보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내가 어느 땅으로 가야 될까요? 내가 지금 어디 가면 잘 살까요? 내가 어디 가면 성공할까요?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그냥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눈을 들어 바라보라. 이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 선택권이 너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일로 갈까요? 절로 갈까요? 내가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중요하게 여길 것은 하나님이 나와 지금 함께하고 있느냐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느냐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느냐 여러분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는 어떠한 후회도 아쉬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선택하다 보면 잘될 때는 웃습니다. 잘 안 될 때는 후회하고 낙심합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절대로 후회도 아쉬움도 없습니다. 그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갈 뿐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과가 어떻게 됐겠습니까?
이 처음에 롯은 평탄하기 시작해서 어느 정도 정말 기반이 잘 잡았습니다. 잘 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문제들이 서서히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잘 되는 것 같은데 그 삶이 더욱더 복잡해집니다. 생활의 안정도 안 됩니다. 이런 일 저런 일 자꾸만 생깁니다. 주변의 강한 족속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배반하고 침략을 해 들어옵니다.
그때 롯은 재산을 다 빼앗기고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롯을 구하는 장면이 오늘 창세기 13장 그 뒷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악함을 보시고 유황불로 심판해 버렸습니다. 그때 롯은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못하고 오직 자기 몸만 나왔습니다. 자기 아내는 뒤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결과적으로 로의 선택은 잘못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탁월한 선택인 것 같이 보였고, 이 성공과 부귀 영화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이 보였는데, 가면 갈수록 꼬이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후에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로스의 모습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다 자기가 선택한 것들이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오히려 고통과 괴로움 속에 빠져가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중요한 한 말씀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 13절 말씀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3절의 말씀 시작
아멘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뭐 하며 악하며 큰 무엇이었더라 죄인이었더라.
여러분 아무리 좋아 보여도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이 죄된 환경은 과감히 포기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믿음의 선택이 그래서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포기가 잘 안 됩니다. 내가 선택한 것, 내가 화려하게 보였던 것 이 모든 것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포기를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하고 싶어도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그 환경이 믿음의 환경이 되지를 못하면 그 신앙을 지킬 수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여러분 나는 잘하고 싶습니다. 나는 잘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내 주변의 환경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를 못하면 결코 잘할 수 없습니다. 잘 믿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당장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를 잘 드리고 싶어도 혹 내 옆에 사람이 떠들거나 또 주의가 산만하면 말씀에 집중이 되지를 않지 않습니까?
아마 그렇게 느껴질 겁니다. 그럴 때는 말씀이 더 잘 들리고 집중할 수 있는 자리로 옮겨야 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자꾸만 머물다 보면 집중이 안 됩니다.
나도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2부 때 보면 우리 청년들이 청가대를 앉아 있는 분들이 많거든요.
지금도 청년들도 있습니다만 말씀을 전할 때 우리 청년들이 집중해서 아멘 아멘 이렇게 하면 이 본인한테도 큰 은혜가 되지만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도 굉장히 큰 은혜가 된다는 것을 제가 깨닫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말씀의 은혜는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같은 마음 같은 중심에 있을 때에 더 큰 은혜가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 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선택한 일과 삶에 있어서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과연 어떤 선택을 했는가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한 선택인가 아니면 내 마음대로 한 선택이었는가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내 임의대로 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계획하고 내가 밀고 나갔습니다. 입술로는 내가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말했지만 실제적으로는 내 뜻대로 살아갔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선택을 올 2025년도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가 있는 선택으로 바꾸어 보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부터 한번 바꿔보시면 좋겠습니다. 예배자의 마음 자세 태도 이대로 좋은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고 바꾸어 보십시오. 그 마음 자세 태도가 우리를 말씀 안으로 끌어당길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앞에는 수많은 선택의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오늘 이 아브라함은 그 선택의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가 이렇게 할까요? 내가 저렇게 할까요? 내가 이렇게 살까요? 저렇게 살까요?
그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주관해 주시고 복을 내려주셨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눈앞의 것을 어떤 상황 환경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말씀 앞에 있는가 말씀의 그물을 내리는가 여기에 집중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선택의 문제까지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십시오. 오직 우리는 말씀 앞에 집중하고 그 말씀 앞에 내가 순종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