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말씀본문은 시편 60편 6-12절인데, 어제 시편 60편을 통째로 올려서
오늘은 교회전체 말씀일기 본문인 ‘잠언 6장 6-11절’을 정리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면
11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이 말씀을 읽으면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자! 그렇지 않으면 가난해진다.
열심히 일하자!
뭐 이런 식으로 적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수많은 지혜서들과
잠언이 같은 글이 되고 맙니다.
어거스틴의 ‘게으름’에 대한 설교 내용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의 개미를 보십시오.
그는 일어나면 날마다 서둘러 하나님의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들은 바를 음미하며 모든 것을 마음속에 새깁니다.
그는 탈곡장에서 모아들인 곡물을 안에 차곡차곡 쌓습니다.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들은 다음 교회에서 돌아오면 책을 골라 펴 들고 읽으십시오.
이 모든 것을 행할 때에 그것은 눈에 보입니다.
개미는 자기를 지켜보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길을 걸으며 나르고 쌓습니다.
때가 되면 겨울이 옵니다.
겨울이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손실이나 사별이 있기 마련입니다.
개미가 먹을 양식을 안에 저장해 놓은 것을 모르는 이들은
아마 개미를 가련하게 여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개미의 부지런함’을 ‘생명의 말씀을 구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도 이 땅에 사는 동안 마땅히 부지런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썩을 양식’을 준비하는 일에 누구나 부지런합니다.
그런데 ‘썩지 아니할 양식’에 대하여 얼마나 부지런하게 준비합니까?
썩어질 것에 대한 부지런함의 백분의 일이라도 썩지 아니할 것에 대한 열심이 있습니까?
무엇에 부지런하고, 무엇에 게으릅니까?
잠언에서 게으른 자들에게 개미에게 가서 보고 배우라고 합니다.
문자로만 보면 ‘게으른 사람들이 개미를 보고 부지런해지라’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영적인 일에 게으른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부자가 많은 재물을 쌓아두고서 하는 말이
내 영혼아 평안히 먹고 즐기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그 쌓아둔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부요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한 자’가 이렇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에게 부요하고 하나님께 인색하다는 말씀은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살리려고 하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들의 삶의 목적이
自强(자강) 自生(자생) 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악이며 고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것은 죄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한 없이 게을렀습니다.
죄 짓는 일에는 한없이 부지런하였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열심을 내었지만
그 마음 안에는 도둑의 심보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나라를 심판하시는데
하나님의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이들을 다시 돌이켜 주시고
이들에게 복을 주시고 떠나지 않으시려고
영원한 언약을 세워주셨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이러한 영원한 언약이 바로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게으름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하나님의 열심과 부지런함이
새 언약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심히 이루어 내신 그 결과가 ‘십자가의 다 이루심’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지자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안에도 싸움이 일어납니다.
고린도후서 11:1~3절. “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고린도교회를 위해 열심을 냅니다.
사도의 이러한 열심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종교사업이 아닙니다.
중매쟁이로서의 열심입니다.
바울의 열심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를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복음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내용’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게으르고, 무엇에 부지런한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헛된 일(썩어 없어질 일)에 분요하지 말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일’에 열심을 내는 성도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썩지 아니하는
하늘의 것을 위해 열심을 내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돈’과 ‘건강’은 없어질 것입니다.
‘생명’과 ‘하늘의 것’이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오늘도 부지런을 내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