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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의 은진중학교 26년 역사의 의미
나에게는 용정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뒤십자거리”에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여 용정시교회를 이루고 김계안 조사의 발길을 따라 간도 여기저기에 교회가 세워졌다. 1913년 영국더기에 캐나다선교부가 자리를 잡고 병원과 학교가 세워지는데 7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속에 1920년 2월에 세워진 은진중학교가 있다.
은진중학교는 그럴 둣한 비전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우는 학교”에서 배출된 진리의 사람들이 나를 고양시켰다.
선린촌 건설과 신협운동의 선구자인 최문환 목사, 크리스천아카데미를 세워 다양한 계층, 종교 간의 대화와 일치를 추구한 강원용 목사, 무명의 시인이자 학생으로 후쿠오카교도소에서 삶을 마친 윤동주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감사와 경이는 은진중학교에 대한 그리움이 되었고 용정에 대한 목마름이 되었다
연변대학교에서 잠시 머물렀을 때 용정에 자주 다녔다. 연길에서 용정까지는 대략 육십 리 길이다. 연길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모아산 종점에서 내려 용정행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해란강 다리를 건너 어디서 내리든지 차비는 400원이고 용정관광 일 번지 용정거리의 시작인 용두레 우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용정에서 가장 오래된 “용정거리(龍井街)”는 용정역 앞에서 시작되어 용두레 우물 앞에서 끝이 난다. 그 거리에 “뒤십자거리”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감리교인 이화춘, 이응현과 장로교의 안순영, 장재연이 캐나다선교부가 용정에 들어오기 전부터 함께 작은 서점 예수교서회를 열고 성경을 팔며 복음을 전하며 연합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 때 그들은 교파를 넘어 서로 협력하였고 나라와 민족을 넘어 서있는 중국인 싼진선생과 함께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1)
1902년 그리어슨 선교사의 용정 방문으로 고무된 그들은 1906년에 용정시교회를 설립하였다.2) 그 후 1909년 그리어슨 선교사는 인구가 급증하는 용정의 여러 교회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김계안 조사를 간도지방 순회전도사로 임명하여 파송하였다. 그는 용정에 들어오자마자 “뒤십자거리”의 서점을 근거지로 하여 여러 전도자들과 함께 줄기차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용정시교회는 1년 만에 새 예배당을 신축하게 되었다.3)
용정시교회가 자체 건물을 가지게 됨으로서 “뒤십자거리”의 작은 서점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곳은 용정에 복음이 처음 도착한 자리요, 감리교 교우들과 장로교 교우들이 함께 복음을 전하며 예배를 드린 곳이요. 훗날 감리교 교우들이 자신들이 개척한 교회들을 캐나다장로회에 넘겨준 공교회정신을 보여준 상징적인 자리이며 간도 최초의 상주 전도사의 전도 근거지로서 충분히 보존하고 기억해야할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이다. 그러나 “뒤십자거리”라는 지명은 있지만 그 자리를 아는 사람을 아직도 만나지 못하였다. 용정 복음 전파의 시발지! 처음 자리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처음 사람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용정거리”를 걸으며 그 자리가 나를 아는 체해주길 바라마지 않는다. 언젠가는 그 곳이 나에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 줄 것이다. 용정에서 복음 전파를 시작하였던 용감했던 신앙의 대선배님들과 북간도 일대를 순회하였던 김계안 전도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소설가 강경애가 빨래를 빨던 용문교 부근의 해란강에 서서 강경애를 그려본다. 소설가 박계주가 자부심을 가졌던 영신학교와 축구부를 생각한다. 같은 시기에 은진중학교에서 공부하였을 강원용과 윤동주가 당시 공산주의 흐름이 도도한 용정사회에서 겪었을 갈등과 고뇌를 생각한다. 용정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도백하에 가서 거기서부터 걸어서 백두산 등정을 했던 용정의 중학생들의 기상을 떠올린다. 일제의 침략 야욕으로 시작된 끝없는 토벌과 전쟁을 아파하는 용정 조선인들의 탄식소리를 듣는다. 그럼에도 영국더기로 올라가는 은진중학교 학생들의 모습이 활기차다.
1913년 캐나다장로회 선교부는 한국의 다섯 개 중심지역인 원산, 함흥, 성진, 회령, 용정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1914년 푸트 선교사가 자신의 오랜 선교구역인 원산에서 용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1919년 푸트 선교사는 용정일대에 남학생들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이 없는 것을 마음에 두고 캐나다해외선교부의 허가를 받아 중학교 창립 준비를 서둘렀다. 1920년 2월 4일에 영국더기의❰성경서원❱2층에서 개교식을 거행하며 교명은❰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다.❱의미에서恩眞(은진)학교로 명명하였다. 입학생은 27명이었으며 나이가 30세 전후의 청장년들로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는 강한 민족의식을 가진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푸트 선교사(Foote, William Rutus, 한국 이름 부두일,1920년 2월 ~ 11월)가 1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이태준이 학감, 이병하, 박례수 등이 고문을 맡았다. 학제는 5년제였으며 자연과학, 성경, 영어, 한어 등 교과목을 설치하였다.
개교한지 20여일 만에 조선❰3•1운동❱1주년을 맞이하게 되어 기념식에 배포할 격문과 삐라를 만드는 중에 일본영사관 경찰의 급습으로 학생 20명과 교사 2명이 붙잡혀 유치장에 갇혔다. 선교사의 항의와 교섭으로 교사와 학생들이 한 달 만에 석방되어 돌아왔다.
푸트 선교사는 용정동산 영국더기에 부지 3천여 평을 마련하여 학교건축을 시작하였지만 1920년 말에 안식년을 맞이하여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의 뒤를 바커(Barker, Archibald Harrison, 한국 이름 박걸, 1920년 12월 ~ 1922년 4월)선교사가 이어 받아 2대 교장이 되었다.
바커 (Barker, Archibald Harrison, 한국 이름 박걸, 1920년 12월 ~ 1922년 4월) 선교사가 교장으로 재직하는 사이에 캐나다장로회 지 교회를 근거로 하여 만들어진 간도국민회에 큰 분열이 일어났다. 1921년 12월 7일 고려공산당 상해본부에서 파견 나온 김하구가 간도국민회 중진이자 캐나다장로회 교회 개척자요 지도자들인 구춘선, 강우구, 염태익, 최원일, 강백규, 유찬희, 마진, 유례균을 고려공산당에 가입시킨 것이다. 그들은 2년 후에 세워지는 공산당 행동대인 적기단과 손을 잡고 공산주의 이론과 사상을 간도사회에 적극적으로 전파하였다. 또한 모금을 위하여 캐나다장로회 지 교회에 모연대를 파송하였다.
바커는 교장으로서 ❰간도대학살❱로 말미암아 불에 타버린 사립중학교 명동, 정동, 창동, 북일 등의 학교에서 밀려오는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공사에 박차를 가하여 1921년 4월에 180여 평의 새 교사를 완공하여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학교 건물은 선교사 사택 건너편에 자리 잡았으며 2층 건물로 밝고 환한 지하실까지 갖춘 건물이었다.4)
재학생 숫자가 150여명으로 늘어 교사가 모자라 학교는 서울 연희전문학교와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생 5명을 급히 교사로 초빙하였다.
바커는 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간도대학살❱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학교와 교회를 돌아보며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1922년 4월에 교장 직을 사임하였고 1923년 일찍 안식년을 받아 귀국하였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27년 12월 48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스코트( Scott, William A. 한국 이름 서고도, 1922년 4월 ~ 1925년 9월) 선교사는 1922년 4월 1일에 제3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학교 설립 3년째 되는 해에 은진학교는 3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는 연변 최대 규모의 학교가 되었다. 여러 가지 요인 중에 가장 큰 요인은 일본군의 ❰간도대학살❱로 지역에 있는 사립의 명문학교 건물들이 불에 탔기 때문에 캐나다장로회 산하에서 운영되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은진학교에 집중된 것이다. 둘째는 스코트가 교육가로서 자질과 능력과 경험을 두루 갖추었고 열린 자세로 교사들과 학생들을 잘 섬겼기 때문이다. 그는 1914년 12월 3일 한국에 도착하여 1915년 7월 원산에서 열린 제17회 연례회의에서 성진선교부에 배정됨과 동시에 단천남학교를 맡았고 그 뒤에 의원, 단천, 삼수, 갑산 등지에서도 교회와 남학교를 겸하여 섬겼다. 1917년 제 19회 연례회의에서 용정선교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는 여기서도 지역교회와 목회를 하면서 훈춘지방을 순회하였고 1918년에서 1919년까지는 지역 목회를 하면서 훈춘지방의 목회와 학교, 사경회, 사역자들을 맡았으며 권서들까지도 관리하였다. 1920년 안식년으로 귀국하였다가 1921년 복귀하자 캐나다장로회 제23회 연례회의는 그의 교육가로서 자질과 전문성을 주목하여 은진중학교 교장으로 발령하였다.5)그는 1925년 9월 함흥 영생중학교 교장으로 전근될 때까지 4년 5개월 동안 은진중학교를 연변 최고의 명문학교로 세웠다.
스코트가 은진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용정의 중학교들은 학생들을 타깃 삼아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의 침투로 대대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 이동휘 등은 지하선전물인 ❰새벽종❱잡지며 각종 단행본들을 용정 각 중학교에 보내어 마르크스-레닌의 혁명사상을 전파하였다. 1922년 12월, 상해 고려공산당인 임호 등이 용정에 와서 동흥중학교와 영신중학교 내에서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투쟁을 시작하였다. 1922년에 박윤서, 주청송 등이 연해주로부터 용정에 와서 동흥중학교 학생들 속에서❰사회과학연구회❱❰친목회❱를 조직하고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마르크스주의사상을 선전하였다. 1923년 3월 소련 연해주로부터 조선 사회주의 혁명주의자 김사국이 용정에 와서 방한민, 김정기, 이명희, 등과 협력하여 대성중학교 부설학교로 ❰동양학원❱을 세웠다. 학원은 대성중학교 1회 졸업생을 중심으로 하여 70여 명의 청년 학생들을 모집하여 개학하였고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이론을 가르쳤다. 민족의식을 강화하며 독립운동의 미래 지도자들을 양육하고자 했던 천도교의 동흥중학교와 대성유교의 대성중학교의 설립자들은 종교와 교육의 분리를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 교사들과 학생들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마르크스연구와 혁명에 대한 열망을 용정 학생사회에 불어넣었으나 은진학교 학생들은 태풍의 눈처럼 교사들의 배려와 신앙지도 속에서 평온하였다. 그러나 학교의 명망이 높아짐에 따라 기독교를 신앙하지 않는 학생들이 입학하고 조선, 북만주, 소련 연해주, 등지에서 오는 무종교 학생들을 막을 길이 없었다. 전 재학생 중에 연해주에서 온 학생들이 무려 10%를 차지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러시아 10월 혁명을 찬양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서로 돌려가면서 책을 읽게 하고 독서회, 친목회를 조직하여 열렬한 토론을 벌이는 중에 10여 명의 뜻이 맞는 자들끼리❰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용정에서 이름을 날린 공산주의자인 대성중학교 교사 이주화, 동흥중학교 교사 김봉익, 이인구 등의 주최 하에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강연회와 변론회가 자주 열렸다. 은진중학교 허원규, 이영근 등은 이런 모임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혁명사상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6)
그럼에도 학교당국은 그들의 활동을 엄격히 제지하거나 단속하지 않았으며 지지하거나 찬성하지도 않았다. 우선 그들의 활동이 학교당국과 직접적인 갈등을 초래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재학생들이 기독교인이었으므로 그들의 선동이 학생들에게 먹혀들지 않았고 또한 대부분의 교사들이 이미 서울과 평양에서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겪었으므로 진보적인 학생들의 선전활동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특별하게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일부 학생들은 제재를 받음이 없이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1923년 3월에 은진중학교는 5년제를 4년제로 고치고 6명의 학생들을 졸업시켜 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하였다.
1925년 캐나다장로회 간도노회 산하의 5년제 영신중학교와 소학교의 운영권이 4월 1일 자로 일본인 히다까에게 넘어갔고 영신여자중학교는 7월에 폐교되었다.
1925년 명동교회 산하의 명동중학교가 종교와 교육 분리를 요철청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방해와 1924년 흉년의 경제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1925년 9월 스코트 선교사가 함흥으로 전근되고 4대 교장으로 프레이저(Fraser, Edward James Oxley. 한국 이름 배례사, 1925년 10월 ~ 1929년 6월) 선교사가 부임하였다.
프레이저 선교사 (Fraser, Edward James Oxley. 한국 이름 배례사, 1925년 10월 ~ 1929년 6월)가 4대 교장으로 봉직하고 있는 동안 용정의 학생사회는 공산주의 조직과 영향권 속에 들어갔다. 청년이 공산당 운동에 관여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어려운 지경이 되었고 미션스쿨인 은진학교에서도 교과서보다 공산주의 서적이 더 열심히 읽혔다. 1926년 1월 이주화, 여남수 등은 용정 ❰시대일보❱사 사장 이인구를 회장으로 하는 ❰동만청년연맹❱을 조직하였고 같은 해 2월 23일에는 이인구가 동흥중학교 이신애를 회장으로 하는❰간도여자청년회❱를 만들었다. 1926년 8월에 조선공산당중앙에서 파견된 조봉암 등이 조선공산당 동만구역위원회을 만들었으며 그 산하에 9개구를 두었고 그 아래 16개 지부를 두었는데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에 4개의 지부가 있었다. 1928년 9월 당시의 동만도 조직은 군간부(郡幹部)가 6개소였고 그 산하 59세포가 있었는데 회원수가 230명이었다. 용정촌 군간부에 19개 세포가 있었는데 동흥중학교에 두 개의 세포가 있었다.
1926년 10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동만도 조직이 창설되었다.
1927년에는❰제1차간도공산당검거사건❱이 일어나 용정과 연변일대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과
교사들이 잡혀갔다. 1927년 4월 초에 이인구를 책임자로 하는 대성중학교 청년총연맹이 나왔고 4월 11일에는 이환을 책임자로 하는 대성중학교 소년회가 세워졌다. 7월에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국산하의 학교연합회지부가 대성중학교에서 구성되어 박재하교장이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8년 5월에❰제2차간도공산당검거사건❱이 일어났고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를 비롯해서 연변에서 많은 당원들과 청년남녀학생들이 검거되었다. 그 중 72명이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대부분이 마르크스-레닌을 신봉하는 청년학생들과 교사들이었다. 1928년 동만의 첫 중공공산당
이었으며 용정 ❰민성보❱사의 문예편집부였던 주동교가 대성중학교 한어강사로 초빙되어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중국혁명투쟁사를 강의하였다. 1928년 엠엘파(ML파)의 성원 박윤서가 대성중학교에서❰간민교육연구회❱조직하고 중•소학교 교사 강습소를 운영하였다.
1926년 용정에서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국이 설립됨에 따라 은진중학교에도 허원규, 이영근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지부가 건립되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당의 지도를 받으며 교내 행사를 빌미 삼아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각종 행사를 주도하였다. 매년 10월 1일 단군절에 존일행사(尊日行事)을 거행하였는데 전교생들이 강당에 모여 공개적으로 조선 국기를 걸고 “애국가”를 부르고 연설자들이 웅변을 토하여 일제의 침략해위를 성토하였다. 학생들의 투쟁은 차츰 교육을 종교로부터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용정 각 학교들에서의 반종교투쟁은 가장 먼저 대성중학교에서 일어났다. 학생들이 일제히 대성유교를 반대하여 학교를 공교회(孔敎會)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하여 학우회에서 자체로 운영해 나가게 되었다. 동흥중학교에서는 사회주의자 계열의 교사들이 교사단을 구성하여 천도교(天道敎)회로부터 학교를 인수하여 자체로 운영하였다.
은진중학교에서는 학교 개교 시부터 자발적으로 드리는 아침 예배와 성경과목의 수업을 사주 받은 학생들이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배에 참가하지 않거나 참가해도 괴성을 질러 소란을 피웠고 성경 수업시간에 엉뚱한 질문을 하여 수업을 방해하였다. 이런 소극적인 항거가 차츰 대담해져서 예배당에 낙서를 하고 반대 표어를 붙이고 “성경시험”에 백지를 내는 행동으로 노골화되었다.7)
학생들의 반종교투쟁은 1926년 가을부터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반발로 터져 나왔다. 4학년 성경수업 시간에 목사가 로마서 13장 1절과 2절의 말씀 “무릇 권세란 하느님께서 준 것이니 누구나 그것에 복종해야 마땅합니다.”를 해석할 때 여창빈이 “그렇다면 일본 놈들이 조선을 침략하는 권세도 하느님이 준 것입니까? 우리 조선 사람들은 일본 놈들의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입니까?”라고 거세게 몰아붙이자 목사는 말문이 막혀서 머뭇거렸고 학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질문을 한 여창빈은 문재린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명동소학교 출신이고 부모님들이 명동교회 교인이고 그의 이름은 “여창빈”이 아니라 “여창부”이다. 갑작스런 질문에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못하고 자리를 피해 나간 분은 이규숙 목사이다. 여창부는 훗날에 문재린 목사에게 “ 내가 은진에 다닐 때 공산주의가 마음에 파고들어 성경공부에 불만이 많았다. 졸업식에서는 내가 주동자 되어 행사를 못하게 하고 마음이 뿌듯하였다. … 성경의 교훈이 내 마음속에 뿌리내려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은진의 혜택이다.” 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였다고 한다.8)
학생들은 이 목사의 성경수업을 거부하기로 결의하고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동맹휴학을 하겠다고 학교당국에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학교당국은 학생들의 요구와 사회여론(종교와 교육의 분리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계열의 언론)에 밀려서 이 목사를 해임하였다. 학생들의 첫 승리 이후로 사회주의계열의 교사들은 종교와 교육의 분리를 지향하는 학생들의 각종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우는 학교❱는 종교를 아편으로 보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선언이나 폭동이나 요청이나 다수결의 법칙에 따르지 않기로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학생들과 학교당국의 갈등이 심해졌다.
1927년 3월 13일 제 5회 졸업식을 거행할 때 졸업생으로 예정된 최성희의 졸업이 취소되었다. 그가 성경 시험에 패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학교당국으로서는 그의 졸업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가 공산주의 세상이 되고 있는 용정사회에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성경과목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성희는 2월 4일, 4학년 졸업시험을 칠 때 답안지에 ❰졸업시험인데 문제를 이렇게 괴상하게 내서 학생이 해답을 쓰지 못한 그 점수를 선생이 가질 작정입니까?❱라고 써서 제출하였다. 학교 당국은 성경 점수 0점인 학생을 졸업시킬 수 없으므로 그의 졸업을 취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학생들과 그에게 동조하는 교사들은 ‘최성희가 학교당국을 모욕하였기 때문에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며 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학교의 처사에 분개하여 무조건 최성희 편을 들었다. 다수의 졸업생들이 학교당국의 처사에 항의를 하고 졸업식장에서 나갔고 2,3학년들도 최성희에게 졸업장을 수여할 것과 성경과목을 교과목에서 제할 것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선포하였다.9)
학감 이태준을 비롯한 학교당국은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4월 25일 명동학교 졸업생인 박기주, 김창걸 등 15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자퇴하여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로 전학을 갔다.10) 외부의 사주를 받은 학생들의 종교와 교육 분리투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은진중학교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1928년 5월 은진중학교는 상가 집처럼 쓸쓸하고 적막하였다. 그러나 학교당국은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학생들을 추가 모집하여 개학을 하였다. 그럼에도 과거의 활기와 역동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성경 교과목을 포기하지 않은 결과로 은진중학교는 문을 닫지 않았으나 ❰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우는 학교❱로서 공산주의자들의 극성스러운 공세와 일본 제국주의의 핍박의 틈바구니에서 외로운 길을 걸었다. 1928년 정재면 목사가 교목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전로한족중앙총회’에 김약연, 이중집과 함께 북간도 대표로 참여하여 노령 공산당 원호와 이동휘로 대표되는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여호와의 분열된 싸움을 목격하고 기독교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자신과 레닌을 추종하고 있는 공산주의 진영과 많은 차이가 있으며 연합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가 있어서 소신껏 은진중학교를 지도할 수 있었다.
1928년 3월에 최문환, 이준경, 등 11명이 졸업하였고 1929년에는 3월에는 고인수, 박원팔, 등 6명이 졸업을 하였다. 1929년 3월 15일 프레이저 선교사가 사직하고 브루스(Bruce, George Findlay, 한국 이름 부례수, 1929년 7월 ~ 1939년 )선교사가 5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11)
브루스 (Bruce, George Findlay, 한국 이름 부례수, 1929년 7월 ~ 1939년 ) 선교사는 1929년 3월 16일 5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1939년까지 10년 동안 교장의 직무를 감당하였다. 공산당 항일유격대와 일본 제국의자 군경들의 쫓고 쫓기는 전투가 치열한 북간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우는 학교’가 가는 길은 형극이었고 브루스교장은 일제 폭압적인 통치를 온 몸으로 방어하며 격동의 시대, 폭력의 시대를 견뎌내야 하였다.
1928년 6월 4일 장작림 폭살사건이 일어났고 동북삼성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1930년 5월 30일에 5.30폭동이 일어났다. 1930년 5월 30일 오전 대성중학교의 뒷마당에서 중공공산당의 지도아래 상해 “5.30 운동 5주년 기념보고회의” 가 있은 후, 밤 10시경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의 학생들이 “대륙고무”라고 쓴 광고판 밑에 모였다. 이들 중에는 용정 부근의 공산당원과 단원 수십 명도 들어 있었다. 그들은 두 패로 나뉘어 한 패는 발전소를 습격하고 다른 패는 동양척식회사를 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그룹은 각자 12시경에 맡겨진 임무를 다 해치웠다. 6월 6일 그들은 용정 영사관은 무장순경들에게 체포당하였다. 1930년 9월 일본영사관의 사복 경찰이 동흥중학교를 포위하여 학생들을 마구 체포하였으나 심문 후 증거 부족으로 석방하였다.
1930년 10월 동흥중학교에 최호림을 서기로 하는 지하중공지부가 세워졌다.
1930년 10월에 대성중학교에 중공대성중학교지부가 성립되어 서기는 임해갑, 조직위원은 최봉학, 선전위원은 김우봉이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여 장학량과 장개석의 부대를 격파하고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을 세웠다.
1933년에 일본은 만주국을 간섭하는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독일 등과 동맹을 맺었다.
1934년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가 강제로 합병되어 ❰민성중학교❱가 되었다.
1935년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는 저항 끝에 1년 만에 다시 두 학교로 돌아갔다.
1937년 일제는 만주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에 대한 치외법권을 취소하고 남북만 각지에서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모든 사립학교는 만주국교육부에 귀속시킨다고 선포하였다.
1937년에 일본은 중국의 본토를 침략하여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8년 8월 26일에 ❰사립학교 비준규칙❱만주국교육부지령으로 반포되었다.
1939년 6월 15일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는 강제 합병되어 ❰재단법인❱ 용정국민고등학교 ❰농과❱가 되었다.
1941년에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1927년 봄 150여 명의 학생들이 집단 자퇴사건이후 은진중학교의 신입생은 신원이 보증되는 교우들의 자제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공산주의 운동과 거리를 두었다. 공산주의 단체가 주도하는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제1차 간도공산당검거사건”과 “제2차 간도공산당검거사건”에 재학생 중에 체포된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연변 사가들이 쓴 글들은 당시 은진중학교를 보수적이라고 매도하며 비난 일색인데 결코 그렇지 않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단지 일본 제국주의뿐만이 아니었고 교회도 그들의 타깃이었다.
1932년 용정 캐나다 선교부 보고서를 보면 마적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교회를 대적하며 핍박하는 당시 정황이 한 눈에 보인다.
“특히 5월 이래로 불안과 소요가 계속되었습니다. 용정과 몇몇 큰 중심부에서 생활은 안정되고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그러나 6월 이래 선교사들은 목단에 있는 영국 영사로부터 만주국에서 여행을 하지 말 것을 지시받았습니다. 젊은 집사가 중국인과 일본인 싸움에서 총에 맞아 죽었고, 교회 지도자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네 교회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한 교회는 강도에 의해서, 모두 다섯 교회가 불에 탔습니다. 그 해에 그 지역에는 100개의 그리스도교의 공동체가 산재하고 있었지만, 많은 곳이 폐쇄되어 50여 군데의 공동체 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들 중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인이 감소하여 이들의 장래도 불확실합니다. 우리 병원은 공산주의자들이나 강도들에 의해 총에 맞았거나 또는 칼에 찔린 환자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강도들보다 공산주의자들을 더 두려워합니다.”12)
“또 다른 깊은 불안은 젊은 조선인 볼셰비키들이 기독교 지도자들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소문 때문에 몰려왔다. 이들 중 일부는 모스크바에서 교육을 받고 만주의 도시와 마을로 파견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여러 지역에서 예배 중인 교회를 습격해 목사를 강제로 끌고 나갔고, 그 뒤로 그 목사는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렇게 말했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었다. “우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기독교 교회뿐이다. 교회가 우리의 제1의 적이다.”13)
“어느 날 밤, 용정에서 스탠(마틴 선교사)과 마가렛은 병원 입국 근처의 교회에서 열린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마가렛은 오르간을 연주했고, 회중은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교회 뒤쪽 문이 벌컥 열리고 무장한 남자들이 고함을 치며 안으로 들이닥쳤다. 스탠은 즉시 벌떡 일어나 찬송가책을 들어 오르간 위에 달린 전구를 가렸다. 그 순간 회중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즉각 알아차렸다. 한 여성이 허리에 묶여 있던 앞치마를 벗어 목사의 머리에 덮어씌웠다. 당시 여성들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는 눈에 띄지 않았다. 다른 여성들은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만들며 찬송가 “구주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를 불렀다. 마가렛은 계속해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그 혼란 속에서 목사는 옆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고 무사히 피신했다.”14)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던 민족주의자들이 1930년 용정❰5.30폭동❱이후 공산주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은진중학교도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으로 정체성을 지키며 조선의 미래 지도자, 하나님 나라의 일꾼 양육을 고민하며 자기의 길을 걸어야 했다.
연변사가들의 표현으로 혁명사조에 관심이 없는 보수사상에 젖은 안이한 은진중학교가 훗날 대한민국 건국의 반공적 토대를 제공하고 1970년대에 민중신학과 민주화운동의 주역인 최문환, 강원용,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등을 길렀다. 뿐만 아니라 일본 유학 중에 독립운동을 모의했던 후쿠오카 옥중에서 사망한 윤동주와 송몽규를 낳았다.
1930년 1월 23일 은진중학교 학생들은 광주학생사건에 연대하여 항일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용정의 여러 중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전폐하고 ❰일본제국주의의 민족 기시를 반대한다
!❱는 플랜카드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학생들은❰일제의 노예화 교육을 반대하자!❱,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며 보무도 당당하게 용정거리를 행진하였고 행진 끝에 50여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의 10명이 은진중학교 학생들이었다. 순경의 저지로 해산된 1,000여 명의 학생들은 치외법권 지역인 은진중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성토대회를 계속하였다. 기마순경들이 은진중학교 담장 옆에 까지 따라와 호각을 불며 해산을 명하였다. 이에 분노한 남학생들이 담장을 넘어가 순경들을 말 등에서 끌어내리고 구타하였다.
1월 28일 은진중학교와 명신여자중학교를 중심으로 1,000여명 학생들이 다시 영국조계지 내에서 항일투쟁대회를 열고❰체포한 학생을 석방하라!❱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진출하였다. 여러 학교 학생들과 광명자중학교 학생들, 보통학교 고급반 학생들까지도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영신중학교 학생들은 순경의 저지선을 뚫지 못하여 시위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전과 다르게 일본영사관 순경들은 기세등등한 학생들의 시위를 감히 저지하지 못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를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파쇼통치가 가혹해짐에 따라 은진중학교에 대한 일본의 통제도 심해졌다. 선교부의 학교들은 만주국 교육부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은진중학교가 영국의 국적의 캐나다인들의 학교이므로 학교를 강제로 인수관리하지는 못하였다. 하여 모처럼 광주학생사건으로 피어오른 항일운동의 열기가 가라앉고 학교 분위기가 저조해졌다. 그러나 민족의식이 강한 교사들의 노력으로 항일운동 민족 교육이 계속되고 적지 않은 항일투사들이 배출되었다.
몇 권의 책들15)이 은진중학교의 역사 교사로서 민족주의 선각자이며 일본제국대학 특별과를 졸업한 명의조(明義朝) 또는 명희조 (明犧朝)를 소개한다. 그는 일찍부터 상해, 남경, 제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김구, 이웅, 등이 지도하는 혁명단체들과 연계를 취하면서 학생들에게 조선민족의 역사를 열정적으로 강의하였다. 그는 항상 한복에 두루마기차림까지 하고 교단에 올라서는 것으로서 학생들에게 강렬한 민족기개를 보여주었다.
“명 선생은 민족기개가 있고 반일정서가 농후한 학생들을 여러 차례나 관내의 조선인독립단체들에 알선하여 항일투쟁에 참가시켰다. 3학년 재학생 송몽규, 김성도 등은 학교를 떠나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는바 송몽규는 남경에 가서 김구의 수하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제남에 가서 이웅의 교육을 받은 뒤 서울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제국대학 역사학부의 연구생으로 있으면서 조선독립에 종사하다가 1943년 7월 10일에 교도 고등경시청에 체포되어 지방재판소의 판결을 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징역살이를 하던 중 1945년 3월 10일에 피살되었다.”16)
명의조 선생이 그 외에도 김덕근, 이익성 등을 ❰남경국민당군관학교❱에 보내어 군사교육을 받게 하였고 그들이 조선의용군에 참가하여 중조인민의 해방투쟁사업에 이바지하였다고 한다. 책들이 말하는 대로 그가 은진중학교 교사로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으나 그가 “민족주의 선각자”라는 것에 대하여는 더 많은 숙고가 필요하다. ⌜무정평전⌟ 200쪽에 의하면 그는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당시 주석단의 서열 14위이었다. 아래는 주석단에 자리한 31명의 명단이다.
“김일성, 김두봉, 김용범, 최창익, 허가이, 김책, 박창식, 김창만, 김교영, 박일우, 이동화, 박정애, 무정, 명희조(明犧朝), 임해, 김월성, 태성수, 한설야, 장순명, 김재욱, 오기섭, 주영하, 정두현, 홍성익, 오경천, 최정환, 김일, 김찬, 박훈일, 윤공흠, 김영태”17)
1946년 8월 30일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에서 명의조는 당 중앙위원 43명 가운에 하나로 선출되었고 서열 38위였다. 당시 중앙위원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김두봉, 김일성, 주영하, 최창익, 허가이. 박창식, 김창만, 허정숙, 김영태, 박정애, 김책, 무정, 이춘임, 안길, 김려필, 김일, 박효삼, 장순면, 김열, 김재욱, 윤공흠, 한일무, 김민산, 박훈일, 박일우, 태성수, 한설야, 최경덕, 강진건, 장시우, 정두현, 임도준, 임해, 왹섭, 김옥진, 이순근, 김교영, 명희조(明犧朝), 한빈, 이종익, 전성화, 김월송, 장종석 18)
1933년 신사참배 문제가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한국에 자리 잡은 모든 선교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 문을 닫거나 또는 국민의례정도로 인식하여 수용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하여야 하였다. 캐나다 선교부는 학교로서 역할을 중시하여 계속 학교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성경 교육은 교인 직원들과 교인들의 후원아래 학생들에게 가능한 만큼 종교수업을 지속하기로 하였다. 은진중학교도 신사참배를 국민의례 수준으로 받아들이고 교육을 지속하였다.
1934년 5월 브루스가 휴직하여 베이컨(Bacon, Ronald Cliton, 한국 이름 백훈, 1934년 5월 ~1936년 2월) 선교사가 교장대리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는 45평의 학생기숙사, 120여 평의 강당, 150여 평의 이화학실험실을 증축하고 수업기자재와 실험장비도 두루 갖추었다.
1936년 2월 은진중학교는 만주국 교육지령에 따라 공과학교로 체제를 바꾸고 토목과와 건축과를 두었다.
1936년 3월 브루스 선교사가 돌아와서 교장 직에 복귀하였다.
1937년 12월 1일 만주 교육국에 교육권 이양식을 거행하였다.
1938년 4월 4일 민주국 민생부로부터 ❰공과 은진중학교❱ 인가를 받으면서 종교교육이 정식으로 폐지되었다. 지원자에 한해서 하학 후에 성경수업을 받도록 허락하였고 매일 기도회도 매주 수요일 아침에만 허락이 되었다.
1940년 12월 8일 브루스 선교사 교장 직에서 강제 사임 후 이사장으로 업무를 보다가 이태준에게 학교사무를 인계하고 귀국하였다. 6대 교장으로 박종렬이 부임하였다.
박종렬(1940년 12월 ~ 1941년) 6대 교장 때 일본은 은진중학교의 실권을 장악하여 교장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1941년 말에 박종렬은 교장 직을 사임하자 채우병 선생이 교장 서리로 잠시 근무를 하였다.
1941년 4월 스코트, 프레이저, 머레이, 본스 선교사를 제외한 모든 선교사들이 한국을 떠났다. 선교사들이 귀국하게 됨에 따라 은진중학교와 명신여자중학교 관리는 김두식이 넘겨받았다. 그리하여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에 의하여 운영된 은진중학교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1941년 4월부터 은진중학교에는 일본 관동군 진규시부대가 진주하여 선교사들의 사택과 일부 교실들을 강점하여 병영으로 만들었다.
1942년 3월 만주국 교육부 지령으로 은진중학교는❰간도성립제3국민고등학교❱로 바뀌고 제 7대 교장으로 히다까 겐조가 부임하였다.
1944년 11월 새 단층 교사가 완공되어 본래의 3층 교사는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학생들이 새 교사로 이전하였다.
1945년 초에 마에다 유에몬이 제8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학교는 그나마 새 교사를 일본군 병영으로 빼앗기고 합성리 영림서 자리로 이사하였다. 학생들은 수업을 전폐하였고 군사훈련과 방공연습을 일삼았으며 근로봉사에 동원되었다. 토목과 학생들은 연길탄약창고 수비대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건축과 학생들은 조양천 삼봉동군부에서 강제노동을 하는 중에 해방을 맞이하였다. 19)
1945년 8월 은진중학교는 최시학(또는 최시익)20)선생을 9대 교장으로 맞이하여 개학을 하였고 동년 겨울에 학교 이름을❰흥민학교❱로 개명하였다.
1946년 2월 교사들과 학생들의 강한 요청으로❰은진중학교❱ 교명을 되찾았다.
1946년 9월 16일 용정의 다른 5개 중학교와 합병되어 ❰길림성 용정중학교❱가 되었다. 현재 ‘용정1중학교’이며 ‘대성학교’ 자리에 있다.
은진중학교는 1920년 2월에 개교하여 1946년 9월에 통폐합되는 때까지 26년에 걸쳐서 24회에 졸업생 983명을 배출하였다. 그러나⌜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1권⌟, 358쪽에 은진중학교 졸업생통계표가 나오는데 다 합하면 598명이다. 1년에 40명이 졸업했다고 가정할 경우 983명의 졸업생이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증거가 되는 자료가 없으므로 589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1)
에필로그
은진중학교가 소재한 영국더기는 결코 무풍지대가 아니었다.
은진중학교는❰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다.❱는 모토로 교육을 시작하였지만 짧은 26년 사이에 풍운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처음❰중화민국❱,❰대만주제국❱의 거센 파도를 헤치고 살아났지만 끝내는❰중화인민공화민국❱의 격랑 앞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밖에서는 마적의 위협, 일본 영사관 순경들과 군인의 위협, 친일한국인과 밀정의 위협,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따랐다. 안에서는 재정 곤란과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려는 학생들의 시위와 위협이 상존하였다.
1927년 이후 엄격한 입학사정으로 교우들 자제 중심으로 학생들을 선발하여 종교와 분리를 목적하며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은 더 이상 없었지만 학생들의 숫자는 급속하게 줄었다. 졸업생 통계에 보면 1928년 11명, 1929년 6명, 1930년 7명, 1931년 11명, 1932년 8명, 1933년 13명, 1934년 9명, 1935년 9명, 1936년 14명, 1937년에 14명, 1938년 20명, 1939년 20명이 나온다. 이 통계에 의하면 1928년부터는 전체 학년을 합한 숫자가 많아야 50명 정도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은 역사의 어둠을 헤치며 막대한 선교비와 열정, 기도와 눈물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는 학교를 빼앗긴 고통과 강제귀국이었다. 인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이었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 교육❱에는 반드시 살림의 열매가 있다.
용정 학생사회에서 보수라고 놀림을 받았던 은진중학교 시절과 교회 현장에서 경험한 공산주의 폭력성과 기만 그리고 독선. 해방 이후 공산주의 약탈과 음모를 체험한 졸업생 중 최문환, 강원용, 문동환, 안병무, 문익환, 정대위 등은 반공주의가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되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여기에 은진중학교 교사였던 김재준, 정재면22) 또한 함께 하였다. 그들의 반공주의는 이념과 이론이 아니었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나온 맹목적인 폭력과 파괴, 교회에 대한 핍박과 종교의 자유 박탈, 파쇼에 대한 저항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반공주의자이였던 그들이 70년대 중후반에 대한민국의 새로운 방향 설정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그들이 유신독재정권에 저항하여 민주화운동을 시작하였으며 통일운동의 물코를 텄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 반공주의자로 활동한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실로 자유를 억압하고 약탈하며 생명을 경시하는 공산주의의 위험을 일찍 체험하였기에 새로 출범하는 조국에 공산주의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 사람❱이기에 사람을 배타하며 죽이고 세상의 평화를 깨는 교조적인 반공주의를 넘어서 한국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으로 하느님 나라, 평화의 세계, 새 세계로 나가는 길을 제시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 교육❱은 낮은 곳을 지향한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은진중학교 교육이 새로운 교회를 출범시킨 화살의 촉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장에서 기장이 갈려 나올 때 은진중학교 교사이었던 분들과 은진학교 졸업생들이 그 산파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존재로 선교하는 현장, 존재로 교육하는 현장에서 배우고 익힌 그들은 ❰민중신학❱을 만들었다. 그들은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의 희생자가 되어 제 3의 인간으로 전락한 노동자와 농민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피난민들과 또는 보통 사람들과 또는 가난한 학생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나그네 된 자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들려주었다.
은진중학교는 역사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한민국의 기초 정립과 새로운 방향 설정에 알게 모르게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기장교회와 ❰민중신학❱을 선물하였다. 앞으로도 사라진 것이 존재하는 것들을 위하여 어떤 기여를 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은진중학교는 처음 출발 때부터 공산당에 가입하는 진보와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보수로 나눠지는 캐나다장로회 교회의 아픔 속에 있었다. 보수적인 교인의 자제인 학생들이 보수주의자라고 조소당하며 참고 견디면서 폭력이 아닌 믿음으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나라의 독립, 민족의 평화를 위해 절망 중에 희망하며 울부짖었던 그들의 기도를 기억하시고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건설의 도구로 써주신 것이 아닌가? 그들이 그 때 용정에서 겪은 고뇌와 고통, 소외와 조소, 아픔과 슬픔 그리고 울부짖은 기도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은진중학교에 대한 잘못된 기록 하나를 바로 잡고 싶다.
윤병석 교수가 쓴 ❰연변 용정3.13운동과 ❰조선독립선언서포고문❱이 나오는 69쪽을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내용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드디어 1919년 3월 13일은 왔다. … 용정시내의 한인들은 물론 극렬한 친일분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한인들에게 통지되여 태극기를 들고 회집하였다. 30리 밖의 명동학교 학생들은 악대를 앞세우고 모였다. 두만강가의 자동에 위치한 정동중학교와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비롯한 동흥, 대성 등 학교의 학생들도 모두가 서전벌의 식장으로 모여들었다.…”23)
용정의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3일에 일어났다. 은진중학교는 1920년 2월 4일에 개교하였고 대성중학교는 1921년 7월 11일에, 동흥중학교는 1921년 10월 1일에 개교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3월 13일 만세 시위에 은진학교, 대성학교, 동흥학교 학생들이 서전벌로 모여들 수 있겠는가?
현재 용정4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은진중학교의 옛터는 문이 굳게 잠겨서 들어갈 수 없다.
동남로를 타고 걸어서 후문 쪽에 가까이 다가가 운동장을 바라본다.
한 때 3백여 명이었던 은진 건아들의 힘찬 노랫소리가 들린다.
“발해나라 남경 터에 흑룡강 등에 지고
태백산을 앞에 놓은 장하다 은진
굳세어라 은진 비치어라 은진
저 동편 하늘 밝아올 제 너희 갈길 보이나니 은진
네 손과 발을 마주 잡고 발걸음 맞추어라
만세 만세 우리 은진 노래 부르세”24)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역사의 어둠에 잠긴 은진학교를 한국과 한국 교회를 위한 제물로 쓰셨다!
2026년 1월 19일 월요일 인시
우담초라하니
미 주
1) 양전백, 함태영 외⌜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678쪽,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서굉일 외⌜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 선생⌟, 237쪽, 고려글방, 1997
2) 차재명 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227쪽,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3) 위와 같은 책, 394쪽
4) 마가렛 마틴 무어 저 ⌜만주의 마틴 폭풍 속의 횃불⌟, 268쪽, 보고사, 2025
5) 내한선교사사전편찬위원회 편 ⌜내한선교사사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22
6) 허청선 외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1권⌟, 353쪽, 연변교육출판사, 2002
7) 김규철 편 ⌜룡정문사자료제 1집⌟, 46,47쪽, 룡정현문사자료연구위원회 편, 1986
8) 문영금, 문영미 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165쪽, 삼인, 2006
9) 박청산 편집 ⌜연변문사자료휘집 2⌟, 274,275쪽, 연변인민출판사, 2008년
10) 호이전 외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134쪽,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97
리태수 주필 ⌜륙도하⌟, 42쪽, 77쪽, 연변인민출판사, 2013
11) 박청산 편집 ⌜연변문사자료휘집 2⌟, 275쪽, 연변인민출판사, 2008년
12) 윌리엄 스코트 ,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256쪽,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13) 마가렛 마틴 무어 저 ⌜만주의 마틴 폭풍 속의 횃불⌟, 346쪽, 보고사, 2025
14) 앞의 책 347쪽
15) ⌜룡정문사자료제 1집⌟,⌜연변문사자료휘집 2⌟, ⌜중국조선족민족문화사대계 6 종교사 ⌟,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1권⌟
어떤 책은 그의 이름을 명의조(明義朝) 어떤 책은 그의 이름을 명희조(明羲朝) 라고 한 다.
16) 박청산 편집 ⌜연변문사자료휘집 2⌟, 277, 278쪽, 연변인민출판사, 2008년
17) 안문석 ⌜무정평전⌟, 200쪽, 일조각. 2019
18) 안문석 ⌜무정평전⌟, 203쪽, 일조각. 2019
19) 박청산 편집 ⌜연변문사자료휘집 2⌟, 280, 281쪽, 연변인민출판사, 2008년
20) 최근갑 ⌜시련의 열매⌟21쪽은 8대 은진중학교 교장 이름을 “최시익”이라고 밝히고 있다.
21) 허청선 외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1권⌟, 358쪽, 연변교육출판사, 2002
은진중학교 졸업생통계표가 나오는데 졸업생의 총수 598명이다. 그런데 연변사가들의 책 들이 한결같이 983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혼란스럽다. 그들이 근거 없이 쓰지는 않았 을 것인데.
22) 정대위 ⌜노닥다리 초록 두루마기⌟10쪽, 종로서적,1987
정재면은 해방 이후 “기독교 반공 총연합회장”으로 활동을 하였다.
23) 용정3.13기념사업회 외 ⌜룡정 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69쪽, 연변인민출판사, 1999
홍상표 ⌜북간도독립운동소사⌟, 32쪽, 한광중고등학교, 1966
24) 허청선 외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1권⌟, 357쪽, 연변교육출판사, 2002
참 고 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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