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추수 때를 위하여
룻기 1:15~18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여러분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에 나와 함께 하는 동반자는 누구입니까? 나와 함께 뜻을 나누고 목표를 함께 하며 정서상으로 잘 맞는다고 하면 그분은 외롭지 않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혀 나와 어울리지 않고 맞지도 않는다면 옆에 있는 사람은 분명 함께 있음에도 마음에 허전함은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본문에서는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이 모압 땅에서 죽고 이제는 나오미와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들레헴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미는 즉시 두 며느리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그러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책임질 수 없으니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를 듣고 첫째 며느리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어머니와 함께하겠다고 남아 있습니다.
어찌 보면 모것을 잃은 과부의 행진처럼 서글프고 애틋한 모습입니다만 룻의 고백에서 두 사람의 행로는 전혀 외롭지 않은 모습을 보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권면에도 룻은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룻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합니다. 룻의 고백 속에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모든 것을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오미와 일체가 되어 모든 삶을 공유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해관계에 의하여 함께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룻의 고백에서는 이것을 훨씬 뛰어넘는 마음과 뜻, 그리고 목표가 하나로 연결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독한 슬픔을 맞은 두 여인이 서로 보듬어주고 긍휼히 여기는 과정에서 하나가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미국 정신의학자「홈즈」박사(워싱턴 대)는 스트레스는 주로『생활의 변화에서 발생한다』고 정의하고,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사건은 자식의 죽음(74점)이며 다음은 배우자의 죽음(73)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남편과 두 아들마저 잃은 나오미는 극한의 스트레스로 인한 슬픔을 견디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제 일생에 큰 실수를 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 아내가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자궁에 물혹이 생겨 수술을 하고 병상에 누워 있을 때 함께하여 한 마음을 품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아이를 임신하고 5개월 되었을 때에 수술한 것이니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어요. 그럴 때 한 마음 되어 병상을 지켜주는 것이 마땅한데 저는 아내가 혼자 있어도 되니 집에 들어가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아침에 병원에 왔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때 제 아내가 얼마나 제게 섭섭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러워집니다.
이와는 반대로 제가 50이 넘어 탈장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은 간단하였지만, 대소변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때 제 아내는 24시간 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밤중에 몸이 불편하여 뒤척이며 어려움을 호소하면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어떻게 하든 저를 편하게 해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저의 아픔에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하는 아내가 그렇게 소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 제 마음에 아내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는 기쁨과 행복을 누렸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교감도 이런 것입니다. 나오미는 아픔을 겪은 사람으로 자기와 같은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룻을 껴안고 울 수 있었습니다. 시어미니 나오미의 품에서 룻은 자기의 아픔보다는 어머니가 얼마나 더 괴로움을 겪으셨을까를 생각하면 안에서 올라오는 오열(嗚咽)을 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여인의 울음이 들려지십니까? 그렇게 많은 날을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면서 그들은 하나의 끈으로 엮어져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도 십자가의 고통에서 이뤄졌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 예수께서 십자가에 벌거벗겨 양손과 양발에 대못에 찔려 못 박히시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고 수치와 육체의 고통이 극심할 때 과연 함께 고통을 느끼셨을까요?
어떤 분은 하나님은 영이시고 절대자이시기에 예수님의 고통과 무관하다고 말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예수님과 연결된 한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뚜렷하고 선명하게 예수님의 고통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영이기에 예수님이 느끼는 고통보다 훨씬 클 수 있고,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과 통증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 27: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분이 빛을 내지 못하므로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의구심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아들과 함께 수치와 고통을 겪으셨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고,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분이심에도 말입니다.
여기서 다시 나오미와 룻의 관계를 떠올리면서 의미를 살펴야 될 것입니다.
나오미가 며느리 룻의 고통을 안고 아파할 때 남편과 자식을 잃은 자기의 아픔은 사라졌습니다. 자기의 고통 보다 며느리의 고통이 더 커 보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룻 역시도 마찬가집니다. 어머니의 아픔을 자신 것으로 받아들였을 때 자신이 입은 상처는 이제는 그를 괴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얻은 것은 생명보다 소중한 사랑의 힘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 원리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성령을 통하여 얻어지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치와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아들에 대한 사랑이 차고 넘치게 임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아들은 아버지가 우선이었습니다.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의 이 절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기 고통당하는 모습으로 인하여 겪고 있는 아픔에 대하여 마음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 만드시기 위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음으로 내몰면서 겪는 하나님의 고통에 대한 것입니다. 이를 표현하자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세상에 보내셔서 아들을 잃는 고통을 겪으십니까?”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의 아픔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겪는 것을 넘는 깊은 사랑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사랑의 교류를 통하여 하나의 열매가 맺어졌다면 바로 예수를 믿은 저와 여러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의 열매가 자식이라면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깊은 사랑으로 이뤄진 결과입니다. 처음 사람 아담은 흙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가슴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낳았습니다. 마치 어미의 모태에서 자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 아이에 대한 사랑을 끊을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내던지는 아픔을 안고 낳으셨습니다. 창조와 낳았다는 의미는 아주 다릅니다. 히 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너를 낳았다’는 영어로 ‘today I have begotten you’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어는 ‘낳았다’라는 단어를 ‘겐나오’라고 합니다. 이는 ‘아버지에 의한 출생과 어머니에 의한 출산’ 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언약으로 맺어져 그 언약을 따르지 않으면 더 이상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말씀대로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잃어버리는 아픔에서 얻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고통이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음을 봅니다. 명예와 건강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때로는 재물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여 보십시오! 그분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극한 고통으로 나를 살려내기 위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때 내 슬픔의 눈물은 보석처럼 가치 있는 것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울 때에 나와 함께 우셨음을 인정할 때 내 영혼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고통을 겪으면서 슬픔의 나날들에게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영혼은 아픔의 눈물을 안고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으로 영혼의 상태로 벌거벗겨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은 인간의 필요가 전혀 채우지 못하는 곳입니다. 목이 마르고 타들어가는 고통을 겪지만 손가락에 찍혀 있는 물 한방울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나의 고통을 보듬어 주지 않는 철저하게 고립된 곳이 지옥입니다. 갖가지 욕망은 있으되 채울 수 없고, 세상에서 지은 수치스런 모든 죄들이 떠올라 고통 당하고 감정의 괴로움을 하나도 없이 하지 않은채 쉴 수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룻이 가진 신앙을 본받으십시오! 17절에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롯의 신앙을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대로 죽음에 넘겨졌습니다. 그 죽음의 현장에 예수님을 스스로 달려가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모두어 주님이 가신 십자가로 나가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저와 여러분을 추수하여 기쁨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