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음악의 거장, 드미트리 티옴킨의 대표작 <하이 눈>의 테마음악
"Do not forsake me o my darling(그대여,나를 버리지 말아주오)가 흘러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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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하이 눈(High Noon)" ]
오늘은 4대 고전 서부극(역마차,황야의 결투,셰인,하이눈) 중 마지막 네 번째 <하이 눈>을 소개합니다.
1950년대에는 수입 영화의 70% 이상을 할리우드 영화가 차지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컸던 장르는 서부극이었죠. <황야의 결투>,<수색자>,<베라크루즈>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서부극들이 한국전쟁 직후부터 속속 개봉되어 대중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들은 서부의 광활한 평원을 배경으로 선량한 총잡이가 악당들을 쳐부수는 통쾌한 액션을 보여줌으로써 당시 우리 영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시원한 감동을 선사했던 것이죠.
그런데 동시대의 같은 서부극이면서도 그냥 액션물이 아닌 심리물로 받아들여진 영화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하이 눈>이었습니다. <하이 눈>은 정오를 뜻하는 말인데, 영화에서는 결투의 시간을 의미하지요.
영화는 헤이드리빌이라는 작은 서부 마을의 일요일 오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우선 불량해 보이는 세명의 총잡이가 평원에서 만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헤이드리빌 마을의 기차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한편 마을에서는 보안관 윌 케인(게리 쿠퍼)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는 5년간의 보안관 생활을 접고 에이미(그레이스 켈리)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평범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윌이 5년 전에 체포했던 악당 프랭크 밀러(이안 맥도날드)가 감옥에서 풀려나서 12시 기차로 이 마을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가 오는 이유는 자신을 잡아넣은 보안관 윌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윌 때문에 자신들까지 피해를 볼까 전전긍긍하며 윌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5년 전 윌은 마을의 안전을 위해 무법자를 체포했지만, 무정하게도 이제 그것은 윌 개인의 문제가 되고 맙니다.
게다가 신부인 에이미까지도 윌이 악당들과 무모하게 맞서는 것을 반대하며 12시 기차로 혼자 떠나겠다고 나섭니다. 그녀는 총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퀘이커 교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윌은 떠날 수가 없습니다. 당장 떠난다 하더라도 악당들의 추격에 그의 삶은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의 손으로 5년 동안 지켜온 마을을 그냥 내버리고 간다는 것도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는 10시40분경부터 정오까지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윌이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다니는 절박한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상영시간이 87분인데, 영화 속 시간이 상영시간과 동일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영화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삽입되는 시계는 결투의 시간이 바짝바짝 다가오고 있음을 관객에게 실시간으로 환기시킴으로써 긴장과 서스펜스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결국 프랭크 밀러가 마을에 당도하여 악당은 네명이 되고, 윌은 혼자 그들과 맞서게 됩니다. 윌이 정오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결투를 위해 홀로 걸어 나오는 모습은 이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장면에서 게리 쿠퍼의 큰 키와 진중한 얼굴은 윌의 불안한 심리를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가 개봉 당시 모 신문에서 “인간 심리의 드라마”로 불렸던 것에는 게리 쿠퍼의 연기가 큰 몫을 합니다. 여느 서부극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주인공의 승리로 끝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의 축하도 받지 못하는 고독한 승리는 이제 서부 영웅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그 쓸쓸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전후(戰後) 한국 관객에게 감동을 준 이유이기도 했지요. <하이눈>이 <셰인>(1953)과 함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서부극으로 꼽히는 것도 바로 일반적인 서부극 특유의 폼생 폼사 없는 고독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 감독 프레드 진네만(오스트리아 출생,1907∼1998) ]
1907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생의 유태인인 진네만은 처음엔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다 대학을 진학해선 법률을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 대학 시절 에릭 폰 스트로하임의 <탐욕(Greed)>와 킹 뷔다의 <대행진(Big Parade)>를 보고 영화의 매력에 빠져버린 그는 1927년 대학 졸업후 결국 파리의 사진 영화 기술학교의 1기생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영화수업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전 1년 반 동안 베를린에서 촬영조수 생활을 했습니다.
1928년 빌리 와일더, 오이겐 쉬프탄과 함께 로베르트 시오드마크의 <일요일의 사람들(Menschen Am Sonntag)>의 작업에 같이 참여했는데,이듬해 헐리웃으로 건너가 <서부전선 이상 없다>(30)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베르톨트 비어텔의 카메라 조수 겸 편집자로 일하다 <북극의 나누크>로 유명한 다큐멘타리 감독 로버트 플래허티에게 소개되어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플래허티는 그의 영화의 작품경향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록영화의 거장인 스승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작품들에는 사실주의가 짙게 배어 나옵니다. 감독으로서 최초로 일을 맡은 것은 멕시코 베라크루즈의 어촌을 세미 다큐멘타리 터치로 그린 <파도(Los Redes)>(35)였는데, 멕시코의 현지인들을 모집해 영화를 완성할 만큼 다큐멘터리적 요소에 강한 비중을 두었습니다.
그후 진네만은 1937년부터 MGM영화사의 극장용 단편영화를 찍는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1938년에는 아카데미 단편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장편 데뷔는 <벙어리 장갑 살인자(Kid Glove Killer)>(42)로 했는데 반골기질이 있어, 전속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회사 수뇌부와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프레드 진네만 감독은 그 뒤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1953),<수녀 이야기 The Nun’s Story>(1958),<사계절의 사나이 A Man for All Seasons>(1966) <줄리아 Julia>(1977) 등 많은 걸작을 남긴 그의 연출 패턴은 극히 고전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프레드 진네만은 총 22편의 극영화와 19편의 단편영화를 남겼습니다. 이중 <지상에서 영원으로>,<사계절의 사나이>는 진네만 감독에게 아카데미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프레드 진네만 감독은 인물묘사에 세심한 관심을 두고, 이와 관련하여 배우들을 발굴하고 적절하게 배치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가 이른바 스타제조기 감독으로 유명한 것도 바로 이런 재능 덕분인데,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경우 진네만의 48년 작품인 <추적 The Search>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남자들 The Men>의 주연을 맡은 말론 브란도 역시 진네만 감독의 수혜자에 속합니다. 이 밖에도 프랭크 시내트라, 존 에릭슨, 피어 안젤리, 존 에릭슨, 셜리 존슨 등을 발굴해 세계적 스타로 키워냈습니다.
수정주의 서부극의 물꼬를 텄던 진네만 감독은, 다양한 소재와 장르로 영화를 만들었고, 그의 진지한 영화정신은 미국개척사를 논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66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사계절의 사나이> 이후 진네만은 <자칼의 음모 The Day of Jackal>(1973), <줄리아>,<어느 여름의 닷새 Five Days One Summer>(1982) 등 단 세편만을 만들었으나 모두 걸출한 장인의 경지를 보여주는 수작들이었고, 92년에 자서전을 출간한 다음, 98년 노환으로 숨졌습니다.
[ 배우 그리고 왕비였던 그레이스 켈리(1929 - 1982) 이야기 ]
만일 그레이스 켈리가 없었다면 모나코라는 나라가 세계적으로 그렇게 많이 알려졌을까요?
그레이스 켈리라는 배우를 소개할 때 항상 따르는 단어가 모나코의 왕비였지요. 따라서 모나코라는 나라를 한번쯤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며 그레이스 켈리 덕분에 프랑스아래 쪽에 살짝 붙어있는 쪼그마한 나라 모나코 는 아름다운 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나라로 많이 알려져 왔다는 사실을 부인 못할 것입니다.
* <모감보>에서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
사실 그레이스 켈리는 이런 귀족 생활에 어울릴 정도로 어린 시절도 최상류층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올림픽에서 3회의 금메달을 획득한 조정 선수 출신이며 건축사업으로 큰 돈을 벌어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고 이런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그레이스 켈리가 영화배우로 성장할 줄은 상상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20살때 미국 TV 드라마의 조연으로 데뷔한 그레이스 켈리는 뛰어난 미모로 인하여 영화감독들의 일순위 캐스팅으로 올라섰으며 클라크 케이블과 에바 가드너와 함께 나온 1953년작 <모감보>로 스크린 데뷔에 성공하게 됩니다.
* <나는 결백하다>에서 케리 그란트와 함께
이후 그레이스 켈리는 탄탄대로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영화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수상은 물론이고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다이얼 M을 돌려라>,<이창>,<나는 결백하다>,<하이 눈>,<상류사회> 등으로 톱 여배우로 올라서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화배우로의 출세의 길을 막은 남자가 나타나는데 그건 바로 모나코의 왕자 레니에 3세였습니다. 1955년 칸느 영화제 초청으로 프랑스에 간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의 왕궁에서 사진 촬영 중 레니에공을 만났으며, 그레이스 켈리에게 홀딱 반한 레니에 3세가 이듬해 미국까지 직접 날아와 그레이스 켈리에게 청혼을 하면서 그레이스 켈리는 은막의 스타에서 모나코의 왕비로 올라서게 됩니다.
* <이창>에서 제임스 스츄어드와 함께
아름다운 미녀가 왕비로 올라선다는 동화같은 이야기가 현실로 이루어졌고 그레이스 켈리는 결혼과 동시에 영화배우를 은퇴하고 딸2명과 아들1명을 낳으며 모나코의 왕비로서 충실한 삶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1982년 충격적인 소식이 해외 톱뉴스로 전해지게 됩니다. 그건 바로 그레이스 켈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는 것입니다. 딸인 스테파니 공주가 몰던 자동차를 같이 탄 그레이스 켈리는 자동차가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며 안타깝게도 53살의 젊은 나이인 그레이스 켈리는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 모나코 레이니에 왕과 함께
그녀의 장례식 현장에서 왕의 체통을 뒤엎고 흐느끼는 레니에 공의 모습에 세계인들은 큰 감동을 받았으며 은막의 스타에서 비극의 교통사고로 돌아간 그레이스 켈리를 영원히 추억하며 레니에 3세는 평생 홀로 살다가 2005년에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영화배우로서 오랜 기간을 활동하지 못한 그레이스 켈리였지만 그녀가 남긴 영화와 사진 한컷, 한장은 지금까지도 많은 팬들에게 추억되고 있으며,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왕비하면 오직 한 사람, 그레이스 켈리라는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 레이니에 왕과 켈리 왕비
첫댓글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고, 주제가가 너무 마음에 들어 많이 콧노래로도 흥얼거리던 때를 떠오르며 추억에 빠져 봅니다.
이래서 추억의 영화음악 시리즈는 추억에 잠기기 딱 맞는 사이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이 눈>에서 나오는 게리 쿠퍼가 유난히 초췌한 표정이 인상
적입니다. 이는 영화가 요구하는 주인공상이기도 하지만 당시 게리 쿠퍼는
조강지처한테 이혼 소송을 당하고해서 더욱 이런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하네
요. 우리도 늙으막해서 이런 봉변을 안 당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