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실습학교는 구한말에 제도화된 교육기관으로 나중에 조선총독부가 각 도에 공립실업학교와 간이실업학교로 나눠 관리하였다. 2년제인 실업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농작물과 토양, 산림, 양잠을 비롯하여 축산과 측량 등 기술과목과 수신, 체육, 일본어, 한문, 조선어, 경제 법률, 그리고 수학 물리 화학 생물 등 거의 모든 학문을 망라하는 교육이었다.
농업실습학교에 들어간 이현필은 많은 친구를 알게 된다.
독신전도단을 창설하였던 강순명목사가 광주로 와서 농업실습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며 독신전도단을 재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현필도 또한 독신전도단의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본래 독신전도단은 1928년 7월에 전주지역에서 설립되었는데 창립위원으로 강순명 배은희목사 등이 주도하고 단원으로 임완식, 문남칠, 백용기, 윤남하 등의 남자 단원과 임영자, 정순영 등의 여자 단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순명은 대원을 이끌고 익산군 춘포면으로 가서 교회를 세우고 활동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이들의 활동에 주목하고 칭찬을 하자 전북노회에서 이단성의 시비를 걸어 2년여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농업실습학교는 에비슨(Gordon W. Avison)선교사가 백운동에 세운 농업학교로서 전남일대의 교회에서 일하는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양계, 양잠, 양돈과 더불어 소와 염소 사육도 가르쳤다. 이렇게 농촌의 부흥을 위하여 농업실습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강순명은 1932년에 광주에서 독신전도단을 재조직하였다. 광주 독신전도단의 단원은 문남칠을 훈련단장으로 하고 이준묵, 윤남하, 고영노, 김석진, 이현필, 서화식, 박율룡, 문학영, 이남철, 최요섭, 성왕(홍)기, 이성일, 김영환, 조선구, 박철웅, 차남진, 여성 단원으로는 정봉은, 이정옥...등 20여명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광주의 운동도 또한 여의치 않았으며 곧바로 기성 교단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듬해 농업실습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요구하자 돈이 없던 이현필은 학교를 그만두고 신안의 압해도의 교사로 떠나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 YMCA 영어반에 들어가 생활하였다. 서울에서는 김현봉목사가 시무하던 신촌의 아현동 교회를 다녔던 듯하다. 서울에서 고학하는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또 혼담이 들어왔지만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집안의 핑계를 대고 물러나서 이내 고향으로 낙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