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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16)】 ‘베드로는 베드로, 바울은 바울, 나는 나."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16
베드로는 베드로, 바울은 바울, 나는 나
왕양명이 보고 누가 그러지 않았어요? 자꾸 딴 얘기가 옆으로 나갑니다만, 왕양명이 보고 그 옆집에 누가 크고 작고 뭐 그런 얘기하니까, 금이 금대로이면 그 순금이냐, 아니냐에 있지. 한량중이면 뭐하고 한 푼 중이면 뭐하냐? 한 푼 중이라도 순금이면 금이요, 한량중이라도 순금이면 금이지. 금이냐, 아니냐가 그 순수하냐, 아니냐에 있지. 뭐 한량중이냐? 열량중이냐 하는 데 있지 않아. 그건 왜 그런가하니, 사람이 나는 데는 어쩔 수 없이 타가지고 나는 덴 분량이 있습니다. 이건 뭐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어. 그 점에도 또 믿음으로 생각을 하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라고. 믿음 말로하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지혜라고. 똑같이 내지를 않아. 그저 타고나는 분량이 달라요. 그 제 분이라는 거, 그러니까 믿음의 질로 하면 같은 믿음의 질이지만, 나 같은 건 백 번을 천 번을 뛰어도 바울 같은 믿음의, 베드로 같은 데 못 갈런지 몰라요. 그래도 좋아요. 그대로 좋다고. 그대로 베드로는 베드로고, 바울은 바울이고, 내가 그 앞에 종살이 하자고 하는 마음이, 나보다 크다고 해서 종살이하잔 마음이 나지 않는, 거기서도 큰 것은 큰 거, 적은 건 작다하고, 거기 높고 낮고 그저 능히 그럴 수 있지 않는 데가, 이 신앙이 뭔지, 믿음이 뭔지, 알게 되는, 찬송이 뭔지 알게 되는, 그런 자리 아니에요?
말로하면 헛갈리겠습니다만 아까 하던 그 얘기하면 믿음이 뭐냐? 하나 된다, 하나 된다는 게 그것도 말하기가 참 어렵군요. 그러니까 비유를 말해야 쉬운데, 비유로 해보면, 우리 몸으로 비유를 해보면 제일 나아요. 한 몸은 분명히 한 몸인데 머리터럭은 가서 만져도 별 감각이 내게 없어. 이것쯤 문제야. 이것도 내 몸일까? 누가 와서 나 모르게 머리털을 잘라가도 내가 모르지 않아요? 내 몸의 한부분이 잘렸건만 몰라요. 그렇게끔 하난 하난데 통치를 않아. 그러니 그 머리터럭도 내건 줄 알게 되는 데가, 내가 이 소위 정신이라 하는 게 있어서 사람노릇을 하는 거지 말이야. 만일 정신이라는 게 없다면 머리털쯤 잘라가도, 내 부분이 없어져도 몰라. 그러는 줄 아시오.
문둥이가 발가락이 여럿 떨어져도 떨어진 줄 모르지 않아요? 왜? 속에 신경이 죽었어. 그러고 나면 하나 된다는 게 이 몸뚱이가 이렇게 붙어있는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 뭐 정신인지 뭔지 이상한 게 있어서,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인격, 인격이라는 거. 그래 비로소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이 돼도 그 지체와 지체사이로 말하면 그렇게 멀어. 터럭과 터럭에서부터 발 끄트머리 발톱하고 둘 사이에 무슨 연락이 도무지 있는 것 같지가 않아. 분명히 산 하나에 속해 있건만, 머리털을 하나 잡아당겨 뽑아도 아프고, 발톱을 다쳐도 아프고, 아프건만 머리털과 발톱 둘 사이에는 하등 연락이 없는, 그건 하나 속하지 않는, 이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걸 하나로 만드는 무슨 그 원리가 거기에 뭐 있어요. 이 말씀은 내가 왜 하는지 아세요? 이건 그냥 내가 저기 나가 누구들 마냥 여기서 아이스크림 마시면서 한 생각이, 내가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나와 데모를 하는 학생과의 둘 사이에 이게 통하는 게 있냐? 없냐? 이거야 분명히 어쩔 수 없는 한 몸에 속해 있긴 있는데, 어쩌면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냐?
이 전체 속에서 여기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도 없을 수가 없고, 사먹는 사람도 없을 수가 없고, 사람마다 다 고려대 학생처럼 데모를 해요? 사람마다 다 나서서 그 싸움을 하겠어요? 그럴 수 없는 세상에서, 아무리 정성이 다 하늘에 닿기로서니, 이천만 삼천만이 다 데모 하는 재주 어디 있어? 그런 데가 이세상이 복잡해. 왜? 이게 뭔지, 이걸 하나로 묶어서 우리도 마음을 생각하면 그게 곧 내 일이다, 생각은 그렇건만, 실 환경이 거길 통하질 않아. 이런고로 이 세상이 어렵습니다. 하나는 하나인데, 분명히 살아있는 한 인격인데, 그것이 내게 하나로 이렇게 완전한 자각이 못돼. 아마 그런 점으로 바로 완전히 자기 삶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 몸에 관한 한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으면 몸에, 어떤 부분에 뭣이 와도 곧 알 수 있지요. 허지만 그것도 아마 신경이 아무리 예민한 사람이라도, 몰래 뒤로 와서 머리털 좀 잘라 간다면 알 수 없을 거예요. 누가 뭐 알 수 있어요? 더구나 잠깐 잠자는 동안에 와서, 물건 집어가는 것도 내 몸으로 알 수 없지 않아요? 그러면 깨 있기란, 깨 있으란 말 있습니다만, 우리 분명히 깨있기는 깨어있어야 그게 정말 참 하나 되는 겁니다. 그 사실로 하나 되어 있는 것과, 그 하나 된 것을 내가 분명히 자각하는 것과, 그 자각하는 것을 또 그대로 말해 발표하는 것과 달라요. 참 그 많이 다른 게 있습니다.
앉아서 아이스크림 팔고 사먹는 사람이라고 해서 비난할 수 없어요. 너는 지금 저 한편에서 학생들이 나라의 운명에 관계된다고 해서 데모들하고 있는데, 너는 이렇게 앉아 아이스크림 팔고 있단 말이냐? 가게 앉아 이러고 있단 말이냐? 나는 옆방에서 카바레에 들러 춤을 추는 사람보고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비난 뭐 참의미에선 하려면 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옳은 소리도 세상을 못 건진다
어떻게든지 뭐 그런 데가, 아유 저번에 나 부산에 가서 그 얘기했는데, 주일날인데 우리 이제 이 연구회 모임을 모이려고 그러는데, 조금 나가 복음병원에서 하고 큰길가에 송림이 있는데, 송림 사이에 조금 들어가서 여자들이 말이야, 빙글빙글 춤을 추며 장구를 치며 돌아가요. 그전 같으면 보고 내가 욕을 단단히 나가했을 거예요. “이 미친년들아,” 그러고 싶었겠지만 말이야. 그 소리가 나가다가 그만 뒀어요.(웃음) 왜? 어째 그만 뒀냐? 그러면 말이야, 늙어서 그런지 몰라요. 그렇지만 달라진 게 뭔고 하니 그전 같으면 그러지. 욕하지. 직접 가서 욕했겠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욕하고 싶은데, 내 마음속에서 욕을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이렇게 나요. 내가 보니까, 밖에서 보면 저것들은 날마다 저렇게 노는 것 같아서 욕을 하지만, 저 사람들 보면 일 년에 한 번 어떻게 나왔을 거야. 아마 가정에서 부대끼고, 부대끼고 하다가 말이야. 남편의 감시 밑에, 시어머니의 감시 밑에 인간노릇 하느라고 맘을 못 놓고 살아보는데, 한번 죄받아도 쭉 기를 펴고 한번 마음껏 놀아보자. 그래 나왔다 그런다면, 미쳐 돌아가는 꼴이 보기는 싫어도 용서를 좀 하고 싶은 마음, 그래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이 인생의 부대끼는 시간, 이걸 지고 갈 수가 없어. 거기 무슨 조그맣게 도덕을 가지고 뭘 잘했다, 못했다, 그건 너무 이 도덕 선생의 비난이지 말이야. 그런 게 아니야. 사람이 살아가려면 이 긴장을 가지곤, 그러니까 그 제발 이놈의 도덕인지 뭐인지, 규칙인지 법률인지, 있어가지고 사람이 어느 때, 이 주일날, 안식일이라고 하는 게, 이제 어느 의미로는 그래 있습니다.
생명이 이렇게 해야 소생이 돼. 그런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날 저녁에도 맘대로 뛰어도 좋다, 섣달 그믐날 저녁에도, 그게 뭐 다 잘한다는 건 아닙니다만, 이 죄악의 인간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데가 있는 점이, 그 점이 좋다는 거 아니라, 퍽 동정을 해서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럭하면 거 왜 그럴까? 따지고 들어가자면 그들도 사람 노릇하자는 노릇이 잘못돼서 그렇게 됐어. 소나 말은 그렇게 나가서 춤추고 미쳐 돌아가는 일이 없어요. 그런데 이게 인간인지라. 인간 다 말아먹어! 우리 기독교적인 말로하면 목적은 영원한 생명에 가자는 건데, 그 길이 잘못 들어가지고,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악이란 선한 선을 하자는 뿌리에서 안 나온 거 없어. 다 마음은 선을 하자는 건데 잘못 나오면 그렇게 돼. 예수님, 난 그런 그 점을 참 알아주는 분이라고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밉게 볼 사람이 없어. ‘남들은 널 밉게 보지만, 나는 보면 말이야. 네 속에 다른 혼이 있다, 하나님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네가 안으로 찾아가려고 애타는 건데, 잘못해 그렇게 됐구나.’
말하자면, 이게 그런 데가 요한복음 8장, 현장에서 잡힌 여인 알아주는데요.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 보고 알아서 그 사람 개심시키는데, 그 마음이 아니고는 거길 들어가서 건져 낼 수가 없지 않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옳은 소릴 하면서도 그 사람을 건지지 못하는 건 뭔가 하니, 도덕적으로 비난만 할 줄 알았지. 잘못한 걸 잘못했다고 지적할 줄만 알았지. 그 사람의 근본 마음, 무엇에서 그랬냐? 무엇에서 그래 하나님한테 가자는 게 잘못돼서 그렇지. 그러면 어떻게든 살려서, 중요한 건 그 마음이 억눌려 잘못되게 돼. 쥐 잡으려다 독까지 깨치지 말고 말이야. 쥐는 잡지만 독은 깨쳐서 돼요? 그런 모양으로, 죄악을 없애지만 죄악이 곧 타고나온, 그 나온 생명을, 생명이 있어서 그러니, 고걸 어떻게? 요걸 살려줘야 하는 건데, 공산주의 밉다고 죽이면, 사람들은 그거야 뭐 공산주의자들 그걸 한다, 어떻게든 죽이지 않고, 공산주의 할 생각을 안 하면, 그런 문제가 돼서 그러지. 공산주의자 다 잡아 죽이자, 기독교인조차도 그렇게 생각을 해. 그게 무슨 말, 공산주의와 똑같은 거, 어떻게 죽이지 않고, 나는 늘 하는 소립니다만, ‘애는 죽었어도 학질은 떨어지니까 시원하다’ 그러지만 그건 역설의 소리지. 애 죽었는데 학질 떨어지면 뭐해? 어떻게든 앤 안 죽이고, 약을 써보자는 데가 의사지 말이야, 병을 없애려면 쉽지. 분명히 죽는 앨 먹이면 병이 없어지지 않아요? 그렇지만 병과 사람이 다 없어지지 않아요? 소명이 뭐예요? 이 세상의 도덕이나 법률은 말할 것도, 도덕, 종교까지도 그 죄가 무서운 김에 사람까지도 죽여 버리는. 그런 점이 예수님은 아주 깊이 들어가요. 이제 오늘 얘깁니다만 그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긴 됩니다만, 아주 참 모순이죠.
죽고 살고를 같이하는 하나
아까 하던 말씀에 돌아가면, 하나인데 분명히 이게 하나는 하나인데, 저 사람도(강좌에 참석한 어떤 사람을 두고 한 말인 듯) 고대에서 뜰에서 오늘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며칠째 데모를 하는 그 사람도 이 나라 사람인 데는 틀림이 없는 거, 또 공화당 사람들도, 그것도 이 나라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는 거. 여당 야당 사람도 그래. 가게에서 아무 생각, 그거 다 모르고 상관 안하고 앉아서 장사를 한다든지, 장사하면서도 거저도 안하고 에누리도 하면서 한다든지, 심지어는 깡패 날치기하는 것까지도 이 나라 사람인 데는 틀림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몸에서 머리카락이 하나 빠져도 빠지면 우리의 손실인 모양으로, 그 또 없을 수 없는 것, 그렇게 생겼어. 다 전체가 그중에 그러니까 그 점을 알기 때문에, 이 사람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 아이라도 잘못 만드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모가지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들어가는 게 낫지. 그러지 말라, 그런 짓 하지 말라, 그런 말씀하셨지만, 지극히 작은 자라도, 거기에 크고 작고가 없습니다. 수에 많고 적고가 없습니다. 하나라고 하는 거 아는 것, 하나는 전체지. 하나란 전체지. 거기 뭐 다수 소수가 아닙니다. 그런 데가 우리가 지금 속고 있는 이 세상이야. 그런데 그게 다 하난데, 어쩌면 그게 어떻게 그렇게 통치를 못할까? 통하기만 하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머리칼에서부터 털끄트머리까지가 다 통하기만 하면 실 문제가 없을 건데, 그런 모양으로, 데모하는 학생으로부터 카바레에 와서 춤을 추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다 떨어질 수 없는 하나다, 죽고살고를 같이하는 하나의 하나인 일체다 하는 의식만 돌아간다면 문제가 없는데, 거기가 그렇게 어렵다 그 말이야.
그런데 나라 일이라고 하면 물론 어려운 줄 알지만, 내 몸 하나에서 조차 어렵지. 안 되지 안 돼. 분명히 이것도 내 몸이고 이것도 내 몸인데 거기에 완전한 맥이 통해서 참 서로 돌봐. 이쪽이 저쪽을 돌보고, 저쪽이 이쪽을 돌보고 하는데, 그런데 가기가 어렵다, 아마 절대 마지막까지 불가능할 런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우리의 문제는 아직 거기에 있다 하는 거, 그런 것이 이 육체라 하는 것만 있는 때에는 생각조차도 못해요. 우리 속에 생각이란 것은 정신이란 것 생겨서 그러면서부터 우리가 비로소 그런 걸 이렇게 내고 스스로 자각을 해서 있는 사실만을, 그러다가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라는 거, 사람치고 믿음 없는 사람 없지만, 그걸 깨닫는 게 중요하다 하는 게 그 말이야. 사실로의 믿음을 봐야지. 여기 지금 앉아있는 거, 앉아있는 이게 본질이지. 왜? 무서워요? 이 천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꽉 믿어요. 이 지구덩이가 이 당장 무슨 깨지지 않을 줄을 확실히 믿으니까 앉았지. 만일 거기 불안해서 이걸 혹, 회의가 여기 생긴다면 일순간을 어디 있을 수가 있어요?
옛날사람 하늘 무너질까 봐 근심했다고 그러지 않아요? 그럼 ‘그 따위 사람이 하늘 무너질까 봐 근심을 해’ 그러니까 누가 있다 ‘아, 걱정 없다, 하늘이란 기운이 뭐 됐는데, 떨어질 염려 없으니, 하늘 떨어져 죽을 걱정하지마라’ 하니, 옆에 한 사람이 있다 ‘쓸데없는 걱정도 한다, 남이 걱정을 하거나 말거나 너는 그 걱정은 왜 하냐?’ 또 한사람 있다 ‘너는 또 남이 걱정을 하거나 말거나 쓸데없는 걱정할 그 걱정은 왜하고 있냐?’(웃음) 장자는 또 그랬다고 하는데, 그런 데가 있습니다만, 사람은 어느 의미론 종교가가 걱정하지 않아도 사람은 믿고 다 믿고 살아요. 알지를 못해 그렇지 하나님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이란 뭐예요? 절대긍정인데, 아는 동안에, 알지 못하는 동안에 절대 긍정하는 것이 없다면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 단 믿음으로 인해 사는 거예요. 이러한 반면에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내속에 자각이 돼서 내적인 걸로 그렇게 해야 거기서 비로소 우리의 생명이 높이 올라가지 않아요?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의 방향은 그런 데로 가자는, 소위 정신이라는 거기로 가자는 거니까. 그전에 우리가 이렇게 생각이, 이렇게 복잡해지기전, 그전 같으면 그저 단순하게 하나님 믿고 그저 믿어서 죽어서 천당에 가면, 그렇게 믿었으면 그건 좋아요.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그렇지가 않아? 굉장히 지식이 발달이 되고 그랬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통해서 이 지식인으로서의 우리에게 마음에 수긍이 가도록, 내가 반성을 해서 여기 이렇게 하지. 설명을 해보지 않고는 될 수가 없어요. 그래 우리 문제가 지금 거기 있지를 않아요? 그래 난 오늘 오면서 느끼는 게 거기 때문에, 하나는 하나인데 어찌 이렇게, 나도 생각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닌데, 맡은 일이 어쩌면 이렇게 다르냐? 하나는 저기서 모르고, 오늘도 어제 (일어났던) 얘기로 한다면 최루탄 밑에, 곤봉 밑에 매를 맞고 그러면서라도 저희들도 뭐 속이 있어서, 자기넬 내 버려서 그러는지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옆에서 보기엔 저 자식들 미쳤지, 그러리만큼 그러고 있냐? 어째 저것들은 저 일을 맡았냐? 어째 또 나는 이 꼴에 이 일을 맡았냐? 어찌해 너는 또 카바레라는 걸 맡아가지고, 또 정신이 또 그렇게 날뛰고 있냐? 이 나라라 하는 걸 메고 가는 점에선 마찬가지.
어떻게 그렇게 됐냐? 거기 분명히 하나일 텐데 어찌 그렇게 통하는 게 없냐? 서로 이해가 없냐? 처진 달라도 있는 자리가 다르면 하는 일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면 생각도 다를 거지만, 될수록은 그 하나 자리가 뭔가 서로 통하는 그 자리에 가려고 노력을 해야 될 겁니다. 우리 몸에는 다행히 심령이라는 게 있어. 오로지 잘만해주면 여기와 제가 연락이 돼. 발 끄트머리에 있는 것도 여기서도 압니다만, 사람의 이 도덕살림, 종교살림, 이런 데서도 역시 그렇게 해서 뭐 그렇게 하나로. 각 직책이 달라. 하는 일이 다르지만, 그런 가운데 있어서도 서로 통하게 그렇게끔 될 수 있을 거다, 그 자리에 그러고 우리 하는 이런 것도 다 그런 델 가자는 노력이다, 그러니까 그래 이건 딴 얘깁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간다
이다음에 오는 뭐 무슨 교회 믿음이라는 건 얘기해도 돼. 나 기본적인 믿음에, 이제야 그렇게 말하는 믿음의 기본입니다. 그건 뭐 이제 지구의 인력처럼 사람이 낳으면 그게 다 없을 수 없어. 그런 의미에선 다 말하자면, 사람이 낳으면 본능 없이, 본능이 없인 살 수가 없어. 뭐 이 성인이거나 소인이거나, 학자거나 누구나 거나 간에 본능은 다 마찬가지로 있어. 학자란다고 본능은 없이 무슨 뭣 발달된 뭣이 그렇지 않아요? 역시 그 사람들도 숨 쉬는 거, 이제 혀 밑바닥에 돌아가는 거, 이제 뭣이 오면, 자극이 오면 거기에 대해서, 먹을 거 생기면 입에서 침이 질질 난다든지 그런 거. 그 본능은 다 아무리 훌륭한 신사나 스님이나 똑같지. 그 점에 더 발달이 된 거 있어요? 타고난 문제는 같이 기본적으로 너나 나나 다 같이 해. 다 같이 하기 때문에, 이 속이 육체적인 살림, 정신적인 살림이 그 후에 상부 건축으로 되는 게 그 가능성이 거기 있는데, 그러나 어떡하면 그걸 우리 정신이 깨달아서 인간의 가장 다른 차이, 뭣이 본능으로 있는 것을, 본능의 의미를 깨달아 가지고, 이제 목적에 맞도록 합리적으로 하게 되는 데가 소위 우리 문화생활, 문화라고 그럽니다. 무슨 가치창조라고 그러지 않아요? 그건 뭐 신앙에서도 마찬가지. 신앙에도 인간인 다음에 적어도 좋은 데로 나아가려면, 믿음이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이 전체에 대한 뭔지 알지 못하는 동안에, 믿고 들어가는, 그런 경우로 자기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이 모임에 오려고 집에서 턱 나올 때 믿고 나오는 거예요. 의심을 한다면 한걸음 가다 돌아봐. 한걸음 오다 보면 돌아보고 집을 나온 사이에 무슨 일이 없나? 나 나온 사이에 무슨 일이 없나? 발걸음마다 돌아보려기에 세월이 없을 거예요. 아무리 신경과민 된 사람도 그러진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다 믿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 기본 되는 그건 그대로만 가지고는 이 최단계의 이 살림은 하겠지만, 높은 상부의, 정말 올라가면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이 영광 그 자리까진, 거기가 그 정신적인 생명이 차단하는 곳입니다. 그러려면 그건 내 속에서 내부로 깨달아서 스스로 내속에서 정신적으로 자라지 않고는, 그저 넓은 의미의 자각이라, 자각이란 말 가지고 좀 부족합니다만, 그렇게 되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로마서에 있는 이제 “믿음에서 믿음으로” 간다하는 말, 요것만은 아니지만, 한번 그렇게 해석을 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아닌가? 그것은 믿음이란 건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 이렇게 단계로 올라가는, 그렇지 않아요? 믿음이란 고정된 게 아니야. 썩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 중에서 빠지기 쉬운 것은, 믿음이란 무슨 고정된 이것만 붙잡으면 틀림없다, 그런 그거 좋긴 좋은데, 그것만 가지곤 안 된다. 역시 믿음에서 믿음으로지. 그러니까 늘 자꾸자꾸 자라가는, 그래서 초보 단계 없이, 그 다음 우위 없이, 무시할 수 없어. 그 말씀은 그만하고.
오늘 읽은 대로 나사로 살리는 얘긴데, 28절입니다.
“이렇게 말한 후에 마르다는 가서 자기 자매 마리아를 불러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가만히 말했습니다.”(11;28)
아마, 실지 예수님이 가서 마리아 불러왔나?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요렇게 적히진 않았습니다만, 내 생각으로는 마르다 보고 ‘야, 너의 동생 가서 불러 오라’ 뭐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안 그랬지만 마르다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서, 그러니까 뭐 말로 해야만 하는 것 아니야. 이심전심으로 예수님 오셨으면 그 일로 부르고 있어. 그러니까 요거는 뭐 하지도 않은 말을 제 깐에는 나서서 까불거려서 선생님 말씀이라 하고, 거짓말 그런 거 아니야. 이건 직접 말씀했는지, 안했는지 물론 모르지만, 위에 그런 말이 없는데, 가서 ‘야,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이거는 마르다로서 하면 예수님의 뜻도 잘 더듬어 알았고, 또 동생의 마음도 잘 알았고, 셋의 마음이 서로 어느 정도 완전히 안에서 잘 통하는 지경이니까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께로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급히 왔다고 하는 데가 평상시에 늘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아.
“예수께서는 아직 동네에 들어가지 않았고 마르다가 마중 나왔던 곳에 그저 앉아계셨습니다. 집에서 마리아를 위로하러 다니시던 유대사람들,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울려고 무덤에 가는 줄을 생각하고 그를 따라 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가 계신 곳에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아래 엎드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11;30-32)
요건 요대로 믿는 고대로 믿는 것을 표시한 말이에요. 그 위에 마르다도 그랬습니다마는, 그러나 예수님 편으로 하면 물론 그렇지 않아요. 뭐 여기 있다고 안 죽고, 저기 있다고 죽느냐? 멀리 있다고 못하는 거 아녜요. 예수님도 거리가 머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이 역시 그저 마음에 고렇게 간절히 단순하게, 요렇게 솔직히 믿기는 믿으면서도 역시 그 마음에는 요런 정도 밖에 못되는,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이 왜 우셨을까?
“예수께서 마리아도 울고 따라온 유대사람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충격을 받으시고 안타깝게 여기셔서 그를 어디다 두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11;33-34)
이런 때에는 이걸 개인으로만 보지 말고 전체로 한번 생각을 해보셔. 여기 마리아라는 건 마리아로만 보지 말고, 인간의 무슨 이성이라든지, 우리의 이 심정이라든지 그런 걸로 보고, 나사로만 생각하지를 말고, 여기 인간 전체를 대표하고 “주님 와서 보십시오” 그런 말.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 성경에 눈물 흘렸다는 이 한 구절 아니에요?
“그래서 유대사람들은 보시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셨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이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실 수 없었겠소? 하고 말했습니다.”(11;35-37)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우셨고, 무엇 때문 분해 하셨나? 뻔히 다 알잖아요? 오시기 전에도 벌써 수 십리 밖에 있어서도 네 동생 나사로 죽는다, 잠잔다, 그건 뭐 죽는 줄 다 알고 그러고 모르는 것 아니에요? 그러는 이니까 새삼스럽게 슬퍼할 것도, 그럴 것 같은데, 역시 예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있고, 다 인정이 있는 사람인지라, 아니 그런 거 보면 동정을 하고 아주 인간적으로 퍽 이렇게 가까운 모습이 거기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꼭 그때 그 예수님의 그 심정을 그때 그걸 물론 알았으면 좋아요. 알았으면 좋지만, 그런 건 역시 알면서도 모르는 것, 말 못하는 겁니다. 그거야말로 말 못하는 거예요. 그건 참 느끼는 수밖에 없는, 가령 서로 가까운 친구 새에도 말이야, 누가 어떻게 돼서 운다든지 어째 그 왜 우는 가고, 왜 우는가? 자꾸 물어. 왜 우는가에 자꾸 물을 때에 반드시 어찌해 운다고 하는 설명을 듣고 싶어서 묻는 거 아닙니다. 그냥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왜 울어, 왜 울어, 왜 울어 한다고 또 설명을 설명하려면 설명이 되나요? 설명이 되지도 않는 거고, 그러니까 정말 까닭을 알려고, 왜 그래 하고 물으면, 거 어리석은 말이고. 또 그걸 설명을 해 볼라고 그래. 우는 사람은 그저 울기만하면 우는 게 대답이고, 보는 사람은 우는 걸 보고 있으면 보는 그게 또 대답이지. 만나면 왜 울어? 왜 울어? 울지 마, 울지 마! 그러지만 안 울고는 못 견디는 것을 뻔히 알아. 알면서도 울지 마, 울지 마 그러는 거고, 또 왜 울어? 왜 울어 해도 말이야, 대답도 안하고 울기만 하는 게 일인 거지.
그러니까 이런 거는 이 설명으로 할 수가 없어. 설명을 떠난 지경이라고 하는, 그래 그러면 그 점을 뭐라 할까? 그래 몰라도 그건 더듬어 보는 게 좋아요. 중요한 것은 이때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는 어떠셨을까? 도저히 우리로써는 차이가 너무도 심해서, 이렇게 높은 것 알 수가 없어요. 알 수가 없지만 필요한 건 그래도 우리 마음이, 예수님이 왜 우셨을까? 충격을 받으셨다니 어떤 충격을 받으셨을까? 그렇게 마음을 더듬어 보는 거 괜찮아요. 좋아요. 그런데 그걸 뭘 아는 듯이 분석을 해서 설교시간에 뭐 첫째는 이랬고, 둘째는 이랬고, 그것도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시라는 건 이건 역시 시보다는 더한 지경이지만, 시라는 건 그저 읽고 가만히 맛봐. 그러는 거지 설명을 못해.
어제 나 저기 크리스천아카데미에 가보았어요? 크리스천아카데미 거기 가면 그 뜰에다가 무슨 석고로 만든 조각, 이상한 거 세우지 않았어요? 그래 그게 뭐냐? 그게 뭔가? 그러니까 강원용 박사가 그랬나, 그건 묻지 않는 거라고 그랬나? 그런 겁니다. 그런 건 묻지 않는 겁니다. 나 여기 옆에 방에서 어제 그제 저녁에 아 참, 어제 저녁인가? 시간 다하고 나오는데 학생이 하나가 쓱 들어오더니, 안 박사님보고 “박사님, 질문할 것 하나 있습니다.” 뭐냐니까 “죄라는 거 뭡니까?” 이래서 안 박사님이 뭐라고 대답을 하겠어요? 그런데 그 다음 내가 옆에서 대개 짐작을, 안 박사 입으로선 그건 있긴 있지만, 그걸 뭐라고 대답을 해야 옳으냐?
그 다음 내 앞에, 그런 경우엔 짐작을 하고, 나도 많이 당해봤기에 옆에서 야, 그런 질문은 그건 우스운 질문이다, 고런 거는 정말 너 같으면 안 박사님을 이런 자리 말고 댁으로 찾아가서 조용히 만나서 여러 가지로 토론을 하는 가운데 알게 되는 거지. 이제 여기서 ‘죄란 뭡니까?’ 그러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냐? 그러니까 안 박사도 내가 벌써 다 말하지 않았어? 그러고 이번 잡지에 난 것 있으니까 가보라고 그러고 보내긴 보냅디다만, 이제 그런 데가 답답한 뎁니다. 답답한 덴데, 그래도 또 그렇게 묻는 사람을 멸시를 해선 못써.
나는 이제 내 이전 같으면 그것도 멸시라 할까, ‘어리석은 사람’ 뭐 그랬겠습니다만, 지금은 이제 그러지 않게 쯤은 됐습니다. 무슨 소리를 와서 해도 저건 역시 저대로 뭐 그런 것 있어서 그러지? 나로선 그걸 어떻게 해주지. 알게끔 해. 속담 말에 버선목이라면 들쳐 뵈죠. 버선목인 것 같으면 요렇게 뒤쳐보지만, 이건 뒤집어 보일수도 없어. 그럴 수도 없고, 그래도 또 그건 직접 대답을 해야 대답이 아닙니다. 안하고 저절로 대답이 되는 거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점은 뭐 설명을 할 필요도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점조차도 이게 생각을 못하는 분들이 있어. 그럴 때가 많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저번에도 그랬습니다만, 설교 이렇게 하고 말이야, ‘오늘 회개하고 죽기로 작정, 합쳐 드리시오!’ 그런 건 도무지 싫습니다. 그건 어째 그러냐? 어찌 그러냐? (녹음16, 3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