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 / 박선애
이번 주간 무얼 쓸까 궁리한 덕분에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릴 적 우리 집 부엌이 기억 속에서 점점 또렷해진다. 마당에서 널문을 밀면 부엌이다. 이 문은 마당에서 보리나 벼 타작을 하느라 먼지가 많은 날 빼고는 거의 열어 두었다. 문턱을 넘으면 바로 왼쪽으로 작은 가마솥이 걸린 모방(작은방) 아궁이가 있다. 이 솥은 제사 때 떡시루를 올리기도 하고 국도 끓였다. 비 오는 여름날 보리와 콩을 볶는 데 쓰기도 했다. 그때 어머니는 나무 주걱으로 젓고 나는 유챗 대로 불을 땠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 부뚜막에 잇대어 댓돌처럼 만들어 놓은 곳에는 물 항아리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그것은 나중에 뚜껑이 있는 고무통으로 바뀌었다. 거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모방 문이 있다. 쭉 따라 들어가면 안쪽 벽 전체에 살강이 있었다.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왼쪽은 자주 안 쓰는 그릇을, 두 배쯤 넓은 오른쪽은 자주 쓰는 것과 반찬을 넣어 두었던 것 같다. 설거지한 그릇은 물이 잘 마르게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렸다. 나무로 된 바닥에 물기가 남지 않도록 깨끗이 닦았다. 살강 아래로는 김칫독들이 있었다. 앞쪽에 헌 벌통을 놓고 그 위에 설거지통을 올려놓고 쓰다가 나중에는 목수가 나무로 짠 조리대가 놓여 할머니가 좋아했다.
다시 물항아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맞은편에는 큰방으로 들어가는 샛문이 있다. 외짝 문이었다. 마당에서 마루로 올라서 들어오는 앞문은 창호지 바른 문살이 예쁜 두 짝 문인데 부엌으로 통하는 문은 벽지를 붙인 자그마한 문이었다. 이 문으로 밥상이 들락거리고 어머니는 항상 여기로 다녔다. 문 옆으로는 큰 가마솥이 걸린 부뚜막이 있었다. 거기에는 식초 항아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겨울에 어머니가 밥 하기 전에 식구들 세숫물을 데워 양동이에 퍼서 덮어 놓던 곳도 이 부뚜막이었다. 그 옆에서 뒤쪽 벽까지는 땔감을 들여놓는 나무 청이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나무가 두는데 비가 오려고 하면 뒤안의 나무 벼늘에서 미리 빼다 채웠다. 거기서 살강 쪽으로 가면 바로 앙증맞은 아궁이가 있었다. 백솥이라 불리던 작은 알루미늄 솥이 걸려 있어 국이나 찌개 등 적은 양의 요리를 할 때 썼다. 그 옆의 뒷문은 뒤안에 있는 텃밭이나 장독대에 가는 통로였다.
우리 할머니는 들일을 일절 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우리를 키우고 집안일을 맡으셨다. 여름 부엌은 할머니의 공간이었다. 물론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하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가마솥에 가득 한 밥을 식구들 아침 밥그릇에 담고 할머니와 우리 남매의 점심밥을 뚜껑 달린 대바구니에 퍼서 걸었다. 또 들에 가져갈 도시락을 챙겼다. 오전 새참 때쯤이 되면 동네 할머니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부뚜막에 한 발을 올리고 엎드려 술을 거르고 나물이라도 무쳐 내어 그들을 대접하는 할머니는 부엌의 주인다웠다. 나와 동생에게 점심을 챙겨 먹이고, 저녁을 준비하는 것도 할머니 일이었다. 해가 긴 여름에는 우리 먼저 저녁을 먹고 어머니 얼굴도 못 보고 잤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부엌일을 다 해 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힘들게 일하고 와도 어머니의 일은 남아 있었다. 할머니가 해 놓은 밥을 차리고 치웠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어머니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냉장고가 없으니 밭매다 쉬는 틈에 명밭(목화밭) 고랑에서 뜯어 온 무잎으로 날마다 김치를 담갔다. 또 농사일이 한가한 겨울에는 할머니가 부엌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부엌을 가까이한 것은 열 살쯤부터였을 것이다. 물을 긷는 것이 내 일이었다. 큰고모는 작은 물동이를 맞춰다 주면서 어머니를 도와주라고 했다. 학교 갔다 오면 그걸 이고 물을 길었다. 조금 더 큰 다음에는 불을 때고 싶었다. 할머니는 불이 잘 타기 시작하면 내게 넘겨줬다. 그러면 부지깽이로 밀어 넣고 나무를 더 얹으며 활활 타는 불을 보는 것은 즐거웠다. 짚으로 만든 방석을 깔고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면 따뜻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두드리며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어머니가 상을 차릴 때 수저와 반찬 그릇을 놓기도 했다. 겨울에는 앞뒤 널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부엌 안도 추웠다. 상 위에 놓은 반찬 그릇이 미끄럼을 타는 날도 있었다.
부엌은 목욕탕 구실도 했다. 여름에는 냇가에서 멱을 감으면 됐는데 겨울에 부엌에서 목욕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큰 솥에 끓인 물을 고무 대야에 푸고 찬물을 알맞게 섞었다. 옷을 벗고 들어가 앉으면 물속에 담긴 아래는 따뜻하지만 물을 끼얹어 놓은 윗몸은 시렸다. 어머니의 손길이 간지럽다고 몸을 비틀다가 등짝을 맞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는 샛문 아래 댓돌에 대야를 놓고 세수했다. 물을 밖으로 흘리면 어머니에게 혼났다.
또 부엌은 간단하게 밥을 먹는 곳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할머니와 같이 있는 것보다 친구들과 노는 날이 많아졌다. 학교가 끝나도 친구들과 놀다 오곤 했다. 그런 날에 집에 오면 배가 고팠다. 늦가을 부뚜막에는 얇게 썬 무와 갓잎을 넣어 보랏빛 국물이 입맛을 돋우는 싱건지가 오가리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그것만 한 그릇 떠서 부뚜막에 앉아 먹는 밥은 달았다. 씹을 새도 없이 금방 넘어가 버렸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불을 때고 나면 나무 청을 정리하고 바닥을 깨끗이 쓸었다. 가마솥뿐만 아니라 전용 걸레를 두고 아침저녁으로 닦은 시멘트 부뚜막까지 반짝거렸다. 물행주를 꼭 짜서 부엌에 있는 모든 항아리 몸을 닦는 것으로 설거지를 마쳤다. 그래도 나무가 한쪽에 쌓여 있으니 먼지가 많고, 재와 그을음도 끊이지 않았다. 천장과 벽은 검댕이 붙어 새까맸다. 그 부엌은 이제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청결하지도 못하고 참 불편한 곳이었다. 그래도 그리워지는 것은 할머니와 젊은 어머니가 거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