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5일 연중 제14주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착한 아이’와 ‘덜 착한 아이’
‘선한 아이’는 마음 씀씀이가 이쁘고 선한 기운을 느끼게 해준다. 특별히 해주는 것이 없어도 그 ‘선함’이 느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 ‘선함’은 어쩌면 ‘평가적이지 않고’, ‘차별적이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느낌’ 그리고 낙천적이고 개방적이며 활발한 느낌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리라. ‘선함’은 ‘자유로운’, ‘해방된’ 것과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반면 ‘착한 아이’는 그 행동이 규범적이고 흐트러짐이 없으며 칭찬받을 만한데 왠지 안쓰럽다는 느낌이 든다. 아이가 철들 때가 되어 철들면 좋으련만 뭐하러 벌써 철든 거지? ‘착한 아이’를 보면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아 좋아하고 있지만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뭘까?
아이에게 있어서 ‘착한 일’이란, 보통은 자신의 욕구를 유보 또는 억제하고 ‘수고’를 해야 하는 일이다. 어른의 눈에는 이 ‘수고’함이 대수롭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어린 자아의 처지에서 볼 때 자기의 욕구를 유보 또는 억제한다는 것은 하나의 ‘희생’이다. 어른에게 ‘희생’은 ‘의미 있는 불쾌’ 정도가 될지 모르지만 어린 자아에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는’ 견디어내야만 하는 조건적인 ‘불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부모를 비롯한 주위 어른들이 아이를 사랑해주고 관심을 가지고 존중해준다면 아이는 특별히 ‘칭찬받기 위해서’ 견디어내야만 하는 일 없이 사랑과 관심 속에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아이는 칭찬(조건부)을 사랑과 관심으로 착각하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 ‘조건적인 불쾌’를 견디어낸다. 이렇게 하여 ‘착한 아이’가 탄생한다. 반대로 칭찬받기를 포기하고 ‘조건적인 불쾌’를 회피하면 ‘덜 착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착한 아이’가 좋을지 몰라도 정신건강 차원에서 볼 때 ‘덜 착한 아이’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착한 아이’는 ‘선한 사람’이 되기 어려워도 ‘덜 착한 아이’는 ‘선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깨어 있는 사람-Mindfulness’라면 어린 시절 ‘착한 아이’였든, ‘덜 착한 아이’였든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멍하니 살아가는 사람-Mindlessness’라면, 무의식적 내적 역동으로 ‘착한 아이’는 칭찬받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착한 어른’이 될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착하다’라는 칭찬을 듣고 자란 아이는 곧 어렸을 때부터 ‘자기 욕구’를 억제하며 살아온 아이라고 봐도 좋다. 다시 말하면 ‘착한 사람’의 내면에는 억압된 욕구와 그에 비례하는 불만이 쌓여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덜 착한 아이’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적어도 이런 욕구 불만이 쌓이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착한 아이’는 처음에는 가벼운 욕구 불만 정도로 견딜 만하지만, 점차 불만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커진다. 환경에 따라 불만은 외로움이나 서러움을 동반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불만이 분노로 확장되어 갈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이 철저하게 억압되면서 ‘착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그의 내면은 매우 조심스럽고 위태롭다. 저명한 사회 인사가 엉뚱한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현상이 이렇게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는 매우 단순한 논리의 이야기다. 우리의 삶은 매우 복잡하고 사회적 관계는 다양한 ‘욕구 불만-불쾌’를 만들어낸다. 물론 살아가는 동안에 발생하는 ‘욕구 불만-불쾌’는 우리의 내적 욕구를 ‘스스로(착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가능성이 크다.)’든, ‘강제(못된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가능성이 크다.)’하든 ‘억압’하도록 한다. 중요한 것은 둘 다 모두 내면에 분노를 키울 가능성이다. ‘깨어 있는 사람-Mindfulness’라면 자신의 정서 상태를 보살펴주어 분노감정이 지나치게 커지지 못하도록 관리할 것이다. 그러나 관리되지 않은 채 분노나 억울함이 커질 대로 커진다면 어떻게 될까?
‘착한 아이’로 살아온 아버지의 아들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 그 아들은 아버지의 ‘이중성’에 놀라고 혼란스러울 수 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정도는 아니어도 아버지의 내면에 있는 무의식적 억압된 욕구와 분노가 일관성을 상실한 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면 그 아이들은 매우 혼란스러운 양육환경에 처할 것이다.
‘착한 아이’로 살아온 사람이 직장 상사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직원들의 스트레스 지수는 매우 높게 올라갈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도 있게 된다면 직원들 간의 관계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다. 사무실의 분위기나 조직의 신뢰 관계가 깨지게 되는 매우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착한 아이’로 살아온 사람이 ‘억울함’이나 ‘피해의식’을 갖게 되면 내면의 분노가 어떤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날까? ‘착한 아이’로 살아온 사람이 ‘열등감’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지킬박사와 하이드’ 이야기에서 충분히 설명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10,9) 보통 방어기제란, 위협적인 상황이나 어떤 어려움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사용되는 생존 기제다. 그래서 방어기제는 불안, 두려움, 긴장 등 다양한 감정들을 동반한다. 그래서 어떤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정서적 동요가 없다는 것은 ‘내적 충만’, 또는 ‘강력한 자아’ 상태임을 말해준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누구에게 끌려가든, 협박을 당하든 이러한 상황을 대처하는 것이 우리의 방어기제가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시며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우리가 방어기제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한, 우리는 살아계시는 그분을 만날 수 없으며 그분을 영접할 수 없다.
(병리적) 방어기제와 ‘참된 자아’ 사이에 중간지대란 없다. 그 사이에는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마태 10,21) 하는 일이 일어난다. 방어기제에 의존된 사람이 가정 내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어떠한 파행적 형태를 띠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방어기제에 의존하는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매우 민감한 나머지 타인의 평가에 취약하다. 그런 사람은 ‘끝까지 견디는’ 힘이 약하다. 버티어내는 힘은 내적 능력으로서 건강한 자아의 능력이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 5,3-4) 착한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억압하며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다. 거기에 있는 고통은 인내를 자아내는 고통이 아니다. 사랑과 관심이라고 착각한 ‘칭찬’이라는 ‘보상’을 얻으려는 처절한 시도일 뿐이다. 그러나 ‘덜 착한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기 위하여 외부로부터의 고통(훈육)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엄격한 현실 사회’를 배워(사회화)간다. ‘덜 착한 아이’는 때가 되면 철이 들면서 내적 규범을 따르기 시작하고 건강한 자아를 형성해간다.
‘착한 아이’는 이중적 내면 구조물(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을 형성하겠지만 ‘덜 착한 아이’는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역대하 24,20) 갈 가능성이 오히려 열려있다. 그야말로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마태 20,16)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