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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lse Freedom of Self-centeredness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행위는 그릇된 자유 Christian freedom releases us from the futility of law-keeping as a means of pleasing God or as the way to give meaning and validity to life, a sense of personal worth and fulfillment. It no less frees us from the enslavement that comes with a self-seeking life. In urging fellow believers to defend their freedom, the apostle said their life should be one of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Christian freedom is founded in love, preserved by love, cannot exist without love, and “love is not self-seeking,” not selfish.71 Love must express itself toward others; it withers and shrivels without that expression. When we interest ourselves voluntarily in others, reach out to them, seek to benefit them (whether or not we are in turn benefited by them), the extent and scope of our freedom does not contract. It expands to its greatest dimensions, its full potential. In an imperfect world, it takes faith to believe and act on this. Those who free themselves from some form of religious enslavement simply to lay hold of an existence spent in daily pleasing themselves have only passed from one form of enslavement to another. To fail to use freedom to express love and faith is to lead a narrow life, to suffer a form of “tunnel vision” that can see, not a broad horizon, but only our own interests, pursuits and aspirations. It leaves us subject to inner and external forces that subtly dominate and slowly constrict both our personality and its potential. Rather than enhancing life, ultimately our self-pleasing only deprives and empties our life of its genuine worth and meaning.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수단으로서 또는 삶에 의미와 타당성을 부여하는 방법으로서, 개인적 가치와 성취감을 주는 것으로서 우리를 부질없는 율법주의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추구하는 죄의 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사도는 동료 신자들에게 자유를 수호할 것을 촉구하면서 그들의 삶이 '사랑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 속에 세워져 있고,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랑은 자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71 사랑은 타인을 향해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그런 표현이 없으면 시들고 오그라든다. 우리가 타인에게 자발적으로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에게 유익을 베푸려고 할 때(우리가 대가로 그들에게 혜택을 받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자유의 정도와 범위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큰 차원으로 확장되어, 자유의 잠재력은 온전히 내재된다. 불완전한 세상에서, 이것을 믿고 행동하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단지 매일 즐겁게 보내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떤 형태의 종교의 종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자유케 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 형태의 종에서 다른 형태의 종으로 넘어갔을 뿐이다. 자유를 사용해서 사랑과 믿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좁은 삶을 영위하고, 넓은 지평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익의 추구와 포부만 볼 수 있는 "좁은 시야"의 형태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성격과 잠재력 모두를 미묘하게 지배하고 서서히 수축시키는 내적, 외적 힘의 지배를 받는다. 삶을 향상시키기는커녕, 궁극적으로 우리의 자기 만족은 우리의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빼앗기고 텅 비어 있는 인생을 남길 뿐이다. Having embraced Christian freedom, we are happily not locked into a rigid system that dictates specific rules as to how our love may express itself. Our expression of it is a fruitage of God’s Spirit and can be given freely and spontaneously, for “there is no law dealing with such things as these.”72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받아들인 우리는 행복하게도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정해주는 엄격한 시스템에 갇혀 있지 않다.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 영의 열매이며, "이것들을 금지할 법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열매들의 표현을 나타낼 수 있다.72 The Elusive Quality of Balance 균형의 묘 Keep your head in all situations. Keep your mind sane and balanced. Always be steady. —2 Timothy 4:5, NIV, PME, and RSV renderings respectively. 모든 상황에서 침착하십시오. 정신을 맑고 균형 있게 유지하십시오. 항상 꾸준하십시오. —딤후 4:5, NIV, PME 및 RSV 에서 각각 번역됨. Balance indicates mental and emotional steadiness, calmness, the ability to resist pressures that sway, to avoid extremes both in thought and conduct. The word “balance” rarely appears in Bible translations.73 But it is implicit in the many Scriptural exhortations toward understanding, insight, perceptiveness, for it is a product of those qualities. I believe it is best exemplified for us in the life of God’s Son, in what he said, did and, above all, what he was as a person. His apostles reflect the influence of the balance they saw in, and learned from, their Master. 균형은 사고와 행동 양면에서 극단적 사고를 피하기 위해 정신적, 정서적 안정, 침착함, 압박에 저항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균형"이라는 단어는 성경 번역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73 그러나 그것은 이해, 통찰력, 지각력을 향한 많은 성경적 권고에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러한 자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삶, 그가 말한 것, 행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한 사람으로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우리에게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사도들은 그들이 보았던 균형과 그들의 주에게서 배운 균형의 영향을 반영한다. As discussed earlier, so much of life involves a matter of degree. What is it that changes a proper attitude toward food into gluttony, or a proper attitude toward money, and the earning thereof by work, into greed? It is the degree to which we focus our attention on such things. Obviously, it is much easier to see extremes, as between laziness and being a workaholic, or between a teetotaler and a drunkard. Yet, while it is difficult to draw the precise dividing line between the extremes and the particular point at which each begins, there is a reasonably broad area in between. Balance involves steering a course in all aspects of life that avoids both extremes; it involves sensing when one is passing over an invisible dividing line, in either direction. 앞에서 논했듯이, 삶의 많은 부분은 정도의 문제를 수반한다. 음식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식탐으로 바꾸고, 돈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일에 의한 수입을 탐욕으로 바꾸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그런 것들에 주의를 어느 정도로 집중하는가의 정도이다. 게으름과 일 중독 사이, 또는 절대 금주가와 주정뱅이 사이에서처럼 양 극단을 보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각각 시작되는 극단과 특정 지점 사이에 정확한 구분선을 긋는 것은 어려운 동시에, 그 사이에는 상당히 넓은 간격이 있다. 균형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양쪽 극단을 피하도록 행로를 조종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어느 방향으로든 보이지 않는 구분선을 통과할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포함된다. That quality seems sorely needed if we are to have a healthful view of Christian freedom and its exercise, and if it is to bring us to the goal of life everlasting we hope for. Particularly when having spent years in a religious system which is very absolutist— claiming to possess absolute truth on all important matters of belief and life—and thereafter separating from such system, one may feel not only uncertainty but also a sense of lacking stability and direction. It is easy to go from the extreme of believing that you have “the Truth” on everything, to feeling you have the truth on nothing, from almost automatically accepting everything taught you, to becoming critical of everything, doubting everything you have believed—almost a form of intellectual paranoia.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그 실천에 대해 건전한 시각을 가지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삶의 목표에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균형의 자질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특히 신앙과 삶의 모든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매우 절대적인 종교 단체에서 수년을 보낸 다음, 사람들은 불확실성뿐만 아니라 안정성과 방향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러분이 모든 것에 대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데에서, 어떤 것에도 진리가 들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극단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에게 가르쳐진 모든 것을 거의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모든 것에 대해서 비판적이 되는 극단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이 믿었던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은ㅡ거의 지적인 피해망상의 형태를 띠는 것이다. We are free to read what we will. But if we do not apply our powers of critical judgment in what we now read, we may simply fall prey to the same kinds of flawed argumentation that led us into error in the past. The things argued for may be very different, even opposite, but if the argument is flawed with mere assertion, unproved hypotheses, an appeal based solely on plausibility, slanted use of evidence, intellectual intimidation and the tyranny of authority (including scholastic or academic authority), it may simply conduct us from one mental enslavement to another, from being disciples of one set of men to being disciples of another set of men. I have been impressed to see among former Witnesses some clearly intelligent persons who were able to discern error and misrepresentation in Watch Tower publications but who cannot seem to discern essentially the same form of error and misrepresentation in material they now read. In some cases it has caused them themselves to develop argumentation that is every bit as slanted and biased as anything published by the Watch Tower. 우리는 우리의 의도대로 무엇이든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것에 비판적 판단력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에 우리를 실수에 이르게 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결함이 있는 논쟁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주장된 것은 아주 다를 수도 있고 심지어 반대일 수도 있지만, 만약 그 주장이 단순한 주장, 증명되지 않은 가설, 단지 신뢰성, 편향된 증거사용, 지적 위협 그리고 권위의 횡포(학술적 또는 학문적 권위를 포함한)와 같은 결함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정신적인 종으로부터 우리를 다른 형태의 종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뿐이다. 한 집단의 제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또 다른 집단의 제자가 되는 것일 수 있다. 나는 전증인들 사이에서 워치타워 출판물에서 오류와 잘못된 표현을 구별할 수 있었던 지적인 사람들이 지금 읽고 있는 자료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형태의 오류와 잘못된 표현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크게 충격을 받았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그들 스스로 워치타워가 출판한 그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모로 보나 편향되고 치우친 주장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
Similarly, there may be the tendency to go to extremes in the exercise of freedom by converting it into mere irresponsibility or licentiousness. In the first century, Paul labored among people who often fell into two extreme camps—some advocating the narrowness and ridigity of legalism, others using Christian freedom as an excuse for lawlessness, replacing the harshness of legalism with the insipidity of a standardless, anything-goes outlook. It took spiritual balance to avoid those extremes then and it does now. 마찬가지로,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무책임하게 되거나 방탕에 빠짐으로써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1세기에 바울은 두개의 극단적 진영에 빠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애를 먹었는데, 일부는 율법주의의 편협함과 엄격함을 옹호하고, 다른 일부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무법의 구실로 이용하여, 율법주의의 가혹함을 피하여 무엇이나 해도 좋은 기준이 없는 무식함으로 대체했다. 그 당시 그러한 극단적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균형이 필요했고 지금도 그렇다. Some who withdraw from an authoritarian religion—and there are a number of such religions—react like youths who have become free from parental control and who promptly proceed to do all the things they could not do during their dependence. Persons who exit from such religious systems may thereafter flaunt their freedom and independence by promptly engaging in any conduct or practices the religion prohibited, even though the practice itself, while not specifically condemned in Scripture, may nonetheless have negative aspects to it. There is no merit in that course; it betrays a childishness, a failure to realize that freedom must be responsibly exercised or it will only lead to some new enslavement or addiction.74 권위주의 종교ㅡ그런 종교들이 꽤나 된다ㅡ를 떠난 일부 사람들은 부모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진 젊은이들처럼 행동하고 그들이 이전 종교에 의지하는 동안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한다. 이러한 종교 시스템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그후에 성서에서 특별히 비난하지는 않지만 금지된 종교의 행위 그 자체가 부정적인 측면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어떤 행위나 의식에 참여함으로써 자유와 독립을 과시할 지 모른다. 그러한 처신은 결코 칭찬받을 만하지 않다; 그것은 유치함을 드러내, 자유가 책임 있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종이나 중독으로 이어질 뿐이다.74 Disenchantment with a very doctrinaire religion may create the attitude that doctrine itself is to be viewed negatively or as of minimal importance, that only love counts. Knowledge, reading and meditation on the Scriptures are, at least to some extent, depreciated. This may be because “doctrine” in the minds of many conveys the idea of official dogma, perhaps of a fairly involved or complex interpretative nature, whereas the term itself has the basic sense of “teaching.” In the Scriptures, it involves not simply teachings related to beliefs or concepts, but teachings about conduct, one’s way of life.75 To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s itself a doctrine or teaching of God’s Son. 매우 교조적인 종교에 대한 환멸이 교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그 중요성을 최소화 시키고, 오직 사랑만이 중요하다는 태도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자칫 성서에 대한 지식, 성서 읽기와 묵상이 적어도 약간은 평가절하되어 있는 태도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용어의 기본적인 의미가 "가르침"의 뜻을 가진 '교리'가 어쩌면 상당히 복잡한 해석적 성격과 관련된 공적인 신조라는 생각으로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에서는 신조나 개념에 관련된 것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방식인 처신에 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75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의 교리 곧 가르침이다. One can also go in the other direction and emphasize doctrine to the depreciation of love’s importance. To do this is to fail to realize that doctrine or teaching is a means to an end, not the end in itself. Jesus’ statement that the whole thrust of all the Hebrew Scriptures was to inculcate and promote love of God and love of neighbor would seem to justify the belief that this is also the ultimate end in view of all Christian doctrine or teaching.76 Jesus’teachings about the way of life we should live, our attitude toward, and our dealings with, our fellow man, are all “wholesome doctrine,” though they are not what many commonly think of as “doctrine.” 또한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는 일부의 사람들은 사랑의 중요도를 떨어뜨리는 데까지 교리를 강조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교리나 가르침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히브리 성경이 추진하는 바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고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예수의 진술은,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교리나 모든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사실을 추론하게 하는 것이다.76 우리의 삶의 방식,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대인 관계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들을 흔히 사람들은 "교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들은 모두 건전한 "교리"들이다. Knowledge can be, should be, of great value. Teaching aims at increasing and expanding our knowledge. But knowledge, too, is not an end in itself. The Scriptures are described as “useful for teaching, for reproof, for correction, and for training in righteousness, so that everyone who belongs to God may be proficient, equipped for every good work.”77 Knowledge can greatly increase our ability to benefit, not only ourselves, but others. And it is the use made of knowledge that determines the value of possessing it. As the apostle puts it: 지식은 큰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가르침은 우리의 지식을 늘리고 넓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지식 또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성경은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로잡고 의로 징계하는 데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전히 유능하게 되고"라고 기술되어 있다.77 지식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을 줄 수있는 능력을 크게 증가시킬 수 있다. 그리고 지식을 소유한 것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활용에 달려있다. 사도가 표현한 대로: If I have prophetic powers, and understand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ll faith, so as to remove mountains, but do not have love, I am nothing.78 내게 예언의 능력이 있더라도, 모든 비밀을 알고 모든 지식이 있더라도, 그리고 산을 치워버릴 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78 Of some who misused their knowledge, he stated: 지식을 오용하는 사람에 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We all have knowledge”; yes, that is so, but knowledge gives self-importance—it is love that makes the building grow. A man may imagine that he understands something, but still not understand anything in the way that he ought to. But any man who loves God is known by him.79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79 He warned that the misuse of knowledge could even have a destructive effect on those who are weak.80 In the fourteenth chapter of his letter to the Romans, the apostle discussed variant beliefs among Christians there, differing beliefs about foods and sacred days that were causing some to judge their brothers. Obviously, in such disputes, either one side was right and the other wrong, or both were wrong. Yet Paul showed that God had “welcomed” both those on the one side and those on the other side and that they were His servants to judge, and that He could maintain their favorable relationship with Him despite their varying scruples and views. What each was doing, whether partaking or abstaining, observing or not observing, he or she was doing as unto God and thus such issues did not provide basis for a critical, judgmental attitude on either side.81 Other scriptures indicate that one side actually was right and the other wrong in their understanding.82 Yet the apostle’s urging was not that they keep arguing the matter out until the mistaken side acknowledged error. Rather he urged: 그는 지식의 오용이 약한 사람들에게 파괴적이기까지 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80 로마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 14장에서 사도는 그곳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서로 다른 이해, 음식에 대한 다른 이해, 그리고 그들의 형제들을 판단하게 하는 종교적 절기들에 대해 논의했다. 분명히, 그러한 논쟁에서, 한쪽이 옳고 다른 한쪽이 틀렸거나, 아니면 양쪽이 모두 틀렸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한쪽과 다른 쪽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인정 하셨으며, 그들이 심판하게 될 종들이라는 것과, 그들의 양심과 견해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그들의 승인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참여를 하든 금지하든, 준수하든 준수하지 않든, 각자 하고 있던 일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들은 어느 한쪽에서 비판적이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지 못했다.81 어떤 성경구절들은 그들의 이해에서 한쪽이 실제로 옳았고 다른 한쪽이 틀렸다는 것을 나타낸다.82 그러나 사도의 권고는 잘못 알고 있는 쪽이 실수를 인정할 때까지 계속 논증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권면했다: Let us therefore no longer pass judgment on one another, but resolve instead never to put a stumbling block or hindrance in the way of another. . . .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food and drink but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83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마십시다. 다른 사람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 . . 하나님의 왕국은 음식과 음료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83 Some issues are crucial because of the effect they have. The same apostle fought tenaciously against, not those who still felt moved by conscience to observe certain features of the Law, but those who sought to impose lawkeeping on others as essential for salvation, knowing how destructive this would be of Christian freedom, how it would essentially nullify the effect of Christ’s sacrifice.84 He fought, not simply against that which was mistaken, but against that which was harmful, damaging, enslaving. In understanding scriptures, rightness and wrongness are always important, since they determine the degree of benefit we gain from our understanding. But that importance is always relative and in some cases simply not worthy of dispute, certainly not of division. Merely proving, by argument, something to be right or wrong does not of itself accomplish what Christianity is all about. We need to seek, then, not merely knowledge, but wisdom, insight, sound judgment, and thus gain the ability to use knowledge effectively and to good purpose. James asks, “Who is wise and understanding among you?” and says that such one should demonstrate it, not simply by manifesting his wisdom in an intellectual way, but by “his good life, by deeds done in the humility that comes from wisdom.”85 어떤 이슈들은 그들이 미치는 영향 때문에 중요하다. 이 동일한 사도는 율법의 특정한 특징을 관찰하기 위해 여전히 양심에 의해 움직여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위해 율법주의가 필수적임을 강요하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해 끈질기게 싸웠는데, 이 율법주의가 얼마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파괴할 것인지, 그리스도의 희생의 영향을 어떻게 무효화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단순히 실수에 의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해롭고, 상처를 주고, 노예화시키는 것에 대한 것이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옳고 그름은 언제나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옳고 그름이 우리가 이해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의 정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항상 상대적이며 어떤 경우에는 전혀 논쟁할 가치가 없고, 분열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단지 논증으로 옳고 그름을 증명하는 것 자체는 어떤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식뿐만 아니라 지혜, 통찰력, 건전한 판단력을 얻고자 해야 한다. 그래서 지식을 좋은 목적에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얻어야 한다. 야고보는 "여러분 가운데 누가 지혜롭고 이해력이 있습니까?"라고 묻고, 그러한 사람이 단순히 지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선한 삶, 지혜에서 오는 겸손함으로 행하는 행실"로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한다.85 Resisting the Crippling Power of Bitterness 비통한 파괴력에 저항하기 Our freedom will never be complete if we allow resentment over our past experiences in an unfree system to take root in our hearts, to create a spirit of bitterness that impregnates our thoughts, speech, and actions. 자유롭지 못한 시스템에서의 과거 경험에 대한 원한이 가슴에 뿌리내리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스며드는 쓰라린 영을 만들어 낸다면 결코 우리의 자유는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On the one hand, such feelings are understandable. Some of those thus affected had non-Witness parents, parents who possibly were members of another religion. Because of the Watch Tower organization’s indoctrination, for years they had relatively little to do with those parents, were distant toward them, treated them cooly because of their parents’ disinterest in, or rejection of, “the Truth.” The alienating process often began from the start, when they were told that their becoming Witnesses would be ‘opposed by God’s adversary’ and family members were cited as possible instruments in such Satanic opposition, if through nothing more, then through efforts at discouraging further involvement.86 Viewing matters in this light could not help but color their feelings toward parents who did not “buy into” their new religion with them. Now they have come to realize that the belief system they equated with “the Truth” is a system that, along with a measure of truth, also contains some very serious and fundamental errors, and moreover that it was the teachings built on those errors that were the very ones causing them to express such coldness toward others, their parents included. In some cases they could renew the expression of natural affection they owe those who were their source of life on earth, who fed them, provided for them, cared for them, loved them with parental love. In other cases they could not—their parents had already died. They are beyond their reaching to reconfirm their love for them. The sense of remorse this can produce is difficult to measure. 한편으로, 그러한 감정들은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 일부는 증인이 아닌 부모, 즉 다른 종교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부모가 있다. 워치타워 조직의 주입식 교리 때문에, 수년간 그들은 부모들과 상대적으로 관계가 매우 적었고, 그들과 거리를 두었고, 그들의 부모가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을 냉정하게 대했다.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과정이 흔히 처음부터 시작되는데, 그들이 증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적들에 의해 반대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가족들은 사탄의 편이 되어 그를 반대하는 도구로 언급된다.86 이런 관점으로 문제를 보는 것은 그들이 새로 믿게된 종교를 "인정하지" 않은 부모에 대한 그들의 감정으로 색칠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제 그들은 어떤 계기를 통해 그들이 "진리"와 동일시하는 믿음체계가 매우 심각하고 근본적인 오류를 포함하고 있으며, 게다가 그것은 그들의 부모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냉대를 표출하게 하는 바로 그 오류들에 기반을 둔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후,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이 지상에서 삶의 원천이었던 부모들에게 빚진 자연스러운 애정의 표현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을 먹여주고, 그들을 길러주고, 부모의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했다.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다른 경우도 있다.ㅡ그들의 부모는 이미 죽었다. 그들은 부모의 사랑을 재확인하기 위해 그들을 만날 수도 없다. 이러한 상황이 가져오는 후회란 이루 측정하기 어렵다. |
Those with marriage mates may have gone through comparable experiences. Many had basically good marriages but when they became part of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and their mate did not, at times the strain—a strain not attributable to their thereafter manifesting more fully the qualities exemplified by God’s Son, but instead due to their striving to respond to organizational pressures and submit fully to organizational rules and policies—resulted in a weakening or a dissolution of the marriage. In the latter case, the breakup of the family may have also adversely affected children. To realize that “it did not have to have happened that way” is not an easy thought to bear. What was broken in such cases can rarely be reconstructed. 결혼 배우자가 있는 사람들은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결혼을 좋게 시작했지만, 그들이 워치타워 조직의 일원이 되었으나 한쪽 배우자가 워치타워의 일원이 아닐 때, 때로는 긴장감이 조성된다.ㅡ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본을 보이신 자질을 온전히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조직의 압력에 대응하고 조직의 규정과 방침에 완전히 복종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이로 인해 결혼의 띠가 약화되거나 또는 파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후자의 경우, 가족이 산산히 부서지며 아이들에게까지 악영향이 미칠 수 있다. "그 정도까지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기란 참기 쉬운 생각이 아니다. 이런 경우에, 깨어진 가정은 좀처럼 다시 화합될 수 없다. I think of one woman who, during the many years of her marriage, though a loyal wife to her non-Witness husband, dutifully viewed him as “of the world” and also refrained from having children by him since “the end” was so near. Not long after she realized that the organization’s claims to, in effect, speak for God were not legitimate, and at a time when her appreciation of her husband’s good qualities had been renewed and heightened, he was suddenly killed in an auto accident. The thought of what their marriage might have been, and produced, had she not been governed by misconceptions increased her grief far beyond its normal reach, was crushingly depressing.87 결혼생활의 여러 해 동안 비증인 남편에 대한 충실한 아내였지만, '끝'이 가까웠기 때문에 그를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여기고 또한 그에 의해 아이를 갖는 것을 자제했던 한 여성을 떠올려 본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상 하나님을 대변한다는 조직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남편의 좋은 자질에 대한 그녀의 인식이 새로워지고 고조된 시점에서, 그는 갑자기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잘못된 관념의 지배를 받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결혼은 어떠했을지, 그리고 출산에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 그녀의 슬픔은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서 훨씬 더 커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너무나 우울하게 했다.87 Others reared their children within the organizational framework and inculcated in them the concept that the organization was God’s earthly “channel” and had exclusive claim to His direction and favor. When integrity to Biblical truth in time caused them to take a stand based on conscience, they found themselves cut off from their own children, had the devastating experience of seeing their children accept the organization’s labeling of them, their parents, as “apostates,” persons to be shunned. To hear of a son or a daughter getting married and then to be excluded from those invited to the wedding, to learn of the birth of a grandchild and not be invited, even allowed, to see the child, can produce enormous pain of heart. Hundreds, even thousands, of parents and grandparents have experienced or are yet experiencing that pain. For others, there is the realization of lost time that can never be regained, years of life spent pursuing goals that, though dressed up by terms such as “Theocratic goals” and “Theocratic careers” and described as “putting Kingdom interests first” and “making wise use of the yet remaining time,” were ultimately goals without true substance, true worth, true meaning. They thought, as I did, that they were working to bring people to God and to Christ, and for this they were happy to give all they had. In the end they realized that the organization appropriated the people to itself, subordinated them to itself, viewed them as obligated to it for whatever they had received. This has left those laboring zealously with the sense of having been “used,” induced to make sacrifices of time, strength, resources, and talents on an organizational altar, all for the furtherance of that organization and its interests. The sense of feeling “cheated” of unrecoverable assets, assets far more valuable than money, can result. 또 어떤 이들은 아이들을 조직의 틀 안에서 키우며, 그 조직이 하나님의 지상의 '통로'이며 하나님의 지시와 승인에 대한 배타적인 주장을 그들에게 주입시켰다. 성경적 진리에 대한 진실성이 양심에 입각한 입장을 취하게 되자, 그들의 부모를 '배교자'로 규정하는 조직의 꼬리표를 자녀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참담한 경험을 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자녀와 단절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들 또는 딸이 결혼하는 결혼식에도 초대받지 못할 사람들로 제외된다는 말을 듣게 되며, 손자의 탄생을 알게 되고도, 초대받지 못하게 되고, 심지어 아이를 볼 수 없게 된다는 점은 엄청난 마음의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 수백, 심지어 수천 명의 부모와 조부모들이 그러한 고통을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다. 다른 이들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을 결코 되찾을 수 없다는 회한이 있다. 비록 "신권적인 목표"와 "신권적인 경력"과 같은 용어로 치장하고 "왕국의 관심사를 첫째로 두"고 " 남아있는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라"는 말로 표현되지만 결국 진정한 실체나 가치 그리고 의미가 없는 목표를 가지고 수년간을 보내는 삶도 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인도하기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 일로 그들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바쳤다. 결국 그들은 조직이 사람들을 자신에게 순응하게 하고, 그들에게 종속시키고, 그들이 받은 모든 것에 대해 빚진 것으로 보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시간, 힘, 자원, 재능을 조직의 제단에 희생하도록 유도하고,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으로 열심히 일하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조직과 그 조직의 발전만을 위해서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회복될 수 없는 자산이나 돈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자산에 대해 "속았다"는 느낌이 들게 될 수 있다. Thankfully, many, including some who have lost the most, do not allow bitterness to gain a foothold in their hearts. If they love freedom they cannot afford to do so. Bitterness, rancor, vindictiveness are crippling emotions, not liberating emotions. Along with the constant striving for retaliation they foment, they are evidence that one is still a prisoner, still shackled to the past. Years ago, a friend gave me a copy of material appearing in an article in Time magazine. Among other things it contained these penetrating and beautifully expressed thoughts on the power of forgiveness: 감사하게도, 가장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포함하여, 자유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씁쓸함이 디딜 곳을 얻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자유를 사랑한다면 그들은 그렇게 할 여유를 가져서는 안 된다. 쓰라림, 원한, 앙심은 감정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해치는 것이다. 그런 감정들이 조장하는 보복심에 계속 몰두한다면, 그것들은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있고, 여전히 잘못된 관념에 갇힌 포로라는 증거이다. 몇 년 전, 한 친구가 타임지의 기사에 실린 자료 사본을 나에게 주었다. 무엇보다도 용서의 힘에 대해 마음을 관통하는 아름답게 표현된 생각을 담고 있었다: The Old Testament view of forgiveness was contained in a verb that dominates its penitential literature, the Hebrew word shuv, meaning to turn, to return. The doctrine implies that man has the power to turn from evil to good, to change, and the very act of turning will bring God’s forgiveness. Those who do not forgive are those who are least capable of changing the circumstances of their lives. . . . 용서에 대한 구약성서의 관점은 그 참회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히브리어 동사, 슈브(shuv)가 보답하기 위해 돌아선다는 뜻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의미는 인간이 악에서 선으로, 전환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 전환행위가 하나님의 용서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환경을 바꿀 능력이 가장 적은 사람들이다. . . . The psychological case for forgiveness is overwhelmingly persuasive. Not to forgive is to be imprisoned by the past, by old grievances that do not permit life to proceed with new business. Not to forgive is to yield oneself to another’s control. If one does not forgive, then one is controlled by the other’s initiatives and is locked into a sequence of act and response, of outrage and revenge, tit for tat, escalating always. The present is endlessly overwhelmed and devoured by the past. 용서하는 심리적인 사례를 보면 압도적으로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과거에 의해,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오래된 불평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지배에 굴복하고 있는 상태이다. 만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용서해야 할 사람의 계획에 의해 주도되어지고, 일련의 행동과 반응, 분노와 복수 등에 의해, 항상 격앙되고, 고조되는 일련의 행동과 대응에 갇히게 된다. 현재가 과거에 의해 끝없이 압도되고 삼켜진다. Forgiveness frees the forgiver. It extracts the forgiver from someone else’s nightmare. “Unless there is a breach with the evil past,” says Donald Shriver, “all we get is this stuttering repetition of evil.” . . . Forgiveness is not an impulse that is in much favor. It is a mysterious and sublime idea in many ways. . . . Forgiveness does not look much lik e a tool for survival in a bad world. But that is what it is.88 용서는 용서하는 자를 자유롭게 한다. 용서는 그외 다른 사람의 악몽에서 용서자를 끌어낸다. 도널드 슈라이버는 " 과거의 악과 단절되지 않는 한 우리가 얻는 것이라곤 이 더듬거리는 악의 반복뿐". . . "용서는 큰 인기를 끄는 충동적인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것은 여러 면에서 신비롭고 숭고한 생각이다. 용서하는 미덕이 악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게 바로 그것이다.88 Back in 1982, I first began personal correspondence with Carl Olof Jonsson, in Sweden.89 In an early letter, after mentioning some among former Witnesses who seem to “feel obliged to take an opposite viewpoint of everything” they had previously stood for or believed, he added: 1982년, 나는 스웨덴에서 칼 올로프 존슨과 처음으로 개인적인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89 전 증인들 중 그들이 이전에 지지했거나 믿었던 잘못된 점들에 대해 반대되는 관점을 취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을 언급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They have not really left the Watch Tower movement. They are still as fixed to it as ever—inversely fixed to it. Often they spend the rest of their lives in attacking it. I could understand if they kindly tried to help the Witnesses—but very often they are filled with bitterness. 그들은 실제로는 워치타워 조직이 추구하는 운동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그것에 고착되어 있다.ㅡ 거꾸로 고착되어 있다. 그들은 흔히 여생을 그것을 공격하는데 보낸다. 그들이 친절하게 증인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ㅡ그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자주 쓰라림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다. I can understand the sense of indignation, often motivated by compassion for others, felt by many at the destructive hurt that certain organizational policies have produced, even one’s having a burning desire to try to bring an end to that hurt. I also believe, however, that it is a grave mistake to think that the end justifies the means. There is nothing dishonourable or unloving in refutation of falsehood. Nor does it inidicate animosity toward anyone to disagree with him or to place before him the evidence of the erroneous nature of beliefs or practices he may hold. It can be a loving act. But the way in which it is done, the spirit in which it is done, is the determinative factor. I cannot personally view some methods employed as genuinely reflective of the approach and spirit of God’s Son and the tenor of his message to his disciples. 나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인해 동기부여를 받는 분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조직 방침들이 만들어 낸 파괴적인 상처에 대해서, 심지어 그 상처를 잊어 버릴려고 애쓰는 불타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실수라고 나는 믿는다. 거짓을 반박하는 것이 부끄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그에게 동의하지 않거나 그가 가질 수 있는 신념이나 실천이 잘못되었다는 성질의 증거를 그에게 내놓는다고 해서 적대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사랑을 나타내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식과 영이 결정적 요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몇몇 접근 방법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과 그의 제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의미를 진정으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채택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
Some who have terminated their affiliation with the Witness organization have engaged in picketing of Kingdom Halls or assemblies of Jehovah’s Witnesses, have engaged in unusual tactics evidently designed to gain the attention of the news media. This is nothing new. Persons opposed to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have been doing this from the time I was a child half a century ago. In the case of some involved, I know that their sole motive is to bring certain injustices and misrepresentations to light. I cannot answer as to the motive of others. In either case, I am not attempting to pass any judgment on them themselves in saying that I personally view such methods as not only counterproductive but also as reflecting unfavorably on the one we are committed to serve, Christ Jesus. There can be a difference between publishing and publicity. It is always good to publish truth. But to seek publicity for publicity’s sake does little or nothing as far as publishing truth is concerned. It frequently only publicizes the unusual antics, the more extreme and sensational slogans used, and the dissidence existing, while any worthwhile message that comes through is usually infinitesimal. 증인 조직과의 연합을 끝낸 일부의 사람들이 왕국회관이나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서 피켓 시위에 참여했으며, 뉴스 매체의 관심을 특별히 끌기 위해 고안된 비상한 수법을 구사했다. 이것은 처음으로 시작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워치타워 조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반세기 전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일을 해왔다. 일부 관련자들의 경우, 나는 그들의 유일한 동기가 어떤 부당함과 허위 내용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외의 다른 사람의 동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어느 경우든, 그런 방법들은 역효과를 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고 믿음을 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부정적인 반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의 시위에 대한 어떤 판단도 나는 하지 않았다. 출판과 홍보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진실을 공표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다. 그러나 홍보를 위한 홍보 활동은 진실을 공표하는 것에 관한 한 거의 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흔히 터무니 없는 행동, 더욱 극단적이고 물의를 일으키는 듯한 슬로건, 그리고 생각의 불일치를 널리 알릴 뿐인 반면, 그로부터 오게되는 가치 있는 메시지는 대개 극미하다. Interviews by the news media have the potential for accomplishing considerable good in bringing facts to the attention of a large number of people. I have, in the past, acceded to interviews requested by the news media. At the same time, I have never solicited a single interview, and I have turned down far more requests than the few I accepted. My personal experience has been that the results are rarely satisfying. All too often what is sought is something of a sensational nature—which does little for the advancement of the good news. In one radio interview that I accepted (originating in Florida) the interviewer employed continual sarcasm and exaggeration in his references to Jehovah’s Witnesses and their beliefs and conduct. I spent virtually the entire program in defending them, expressing my conviction as to their overall sincerity and decency, and in pointing out to the interviewer the way in which his remarks distorted matters and unfairly cast them in a false light. I was happy to make those expressions and found that the only satisfying part of the experience. Basically, then, I sympathize with the concern, even the indignation, some feel and I feel a similar concern. But I do not necessarily sympathize with the methods that are sometimes used to express those feelings. I am convinced of the rightness of the apostle’s counsel: 뉴스 미디어의 인터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 있어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과거에 뉴스 매체가 요청한 인터뷰에 응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인터뷰를 요청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내가 받아들인 몇개의 인터뷰보다 훨씬 더 많은 요청을 거절했다. 내 개인적인 경험은 결과가 좀처럼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게 요청된 것들이 흔히 선정적인 성격의 것들이어서ㅡ'좋은 소식'의 진행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받아들인 (플로리다에서 있었던) 라디오 인터뷰에서 인터뷰 진행자는 여호와의 증인과 그들의 신념과 행동에 대한 언급에서 끊임없는 비아냥거림과 과장된 표현을 사용했다. 나는 사실상 프로그램 전체를 증인들을 옹호하는 데 사용했고, 그들의 전반적인 성실성과 품위에 대한 소신을 표현하고, 인터뷰 진행자에게 그의 발언이 사안을 왜곡하고 거짓된 시각으로 부당하게 캐스팅하는 방식을 지적하는 데 썼다. 나는 그런 표현들을 할 수 있어서 기뻤고, 유일하게 그 경험에서 오직 만족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기본적으로, 나는 그 우려에 공감한다. 심지어 분개심까지도, 어떤 이들은 같은 우려를 느끼고 나 역시 비슷한 우려를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때때로 사용되는 방법들에 반드시 동조하지는 않는다. 나는 제자 야고보의 권고가 옳다고 확신한다: Each of you must be quick to listen, slow to speak, and slow to be angry. For a man’s anger cannot promote the justice of God.9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90 The easy way is all too often not the best way. In human relations, when one is indignant because of a perceived injustice the easiest thing in the world is to lash out at the source of the hurt. It is also a sign of weakness rather than of strength. To exercise self control, to maintain a measure of calm, to take the time and the effort to seek out the true cause of the problem and the most effective means of dealing with it takes far more strength and resolve than simply to vent one’s feelings. 쉬운 길은 거의가 최선의 길이 아니다. 인간 관계에서, 사람이 불의에 대한 인식 때문에 분개할 때, 세상에서 가장 빈도높은 방식은 상처를 준 근원을 맹렬히 비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강함의 표시라기보다는 약함의 표시이다. 자제력을 발휘하고, 침착함을 유지하고, 문제의 진정한 원인과 가장 효과적인 대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이야말로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발산해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과 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A very large quantity of material has been published (in print and on the Internet) by former Witnesses and others about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I do not question that many so engaged are sincerely motivated, feel that they should not be simply passive but should “do something.” But I honestly believe that a great amount, perhaps even the majority, of what is put out does more harm than good. Christian freedom does not mean license to say whatever we want. We are called to follow closely in Christ’s steps, and of him we read: 워치타워 조직에 대해 매우 많은 양의 자료가 (오프라인의 인쇄물과 인터넷 상에서) 전 증인들과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 출판되었다. 나는 그렇게 참여한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동기 부여를 받았다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수동적일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나는 느낀다. 하지만 솔직히, 그중 많은 양, 어쩌면 출판된 대다수의 양이, 득보다 실이 더 크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우리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면허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발걸음을 잘 따르라고 초대 받으며,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을 읽는다: He was insulted and did not retaliate with insults; when he was tortured he made no threats but he put his trust in the righteous judge.91 그분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셨읍니다.91 Vindictive speech, ridicule, name-calling, magnifying minor faults far out of proportion, refusing to give persons the benefit of a doubt, to admit the possibility of their being sincerely, even if mistakenly, motivated, making no allowance for their wrong actions being the product of victimization through erroneous conceptions—none of this does anything for the cause of truth. Unfortunately such things are often found in much of the “anti-Watch Tower” literature put out. They are also found in Watch Tower literature in its expressions regarding any who do not agree with its pronouncements, those it labels as “apostate.” So the matter often comes full circle with the same dismal repetition of wrong being met with wrong. To the contrary we are urged: 앙심을 품은 말, 비웃음, 욕설, 사소한 오류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 비록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되었더라도, 그들이 성실하지 않다는 의심의 여지를 없애는 것, 그들의 잘못된 행동이 잘못된 관념을 통한 희생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ㅡ 이중 어느 것도 진리의 명분이 될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이 종종 안티들에 의해 출판된 "반워치타워" 인쇄물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또한 그러한 자들은 워치타워 간행물에서 워치타워의 선언한 것들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인 "배교자"라는 꼬리표를 붙여 언급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문제는 종종 잘못이 잘못으로 음울하게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와 반대로 다음 말씀과 같이 촉구한다: Call down blessings on your persecutors—blessings, not curses . . . . Never pay back evil for evil. Let your aims be such as all men count honorable [let everyone see that you are interested only in the highest ideals, JB]. If possible, so far as it lies with you, live at peace with all men. My dear friends, do not seek revenge, but leave a place for divine retribution; for there is a text which reads, “Justice is mine, says the Lord, I will repay.” But there is another text: “If your enemy is hungry, feed him; if he is thirsty, give him a drink; by doing this you will heap live coals on his head.” Do not let evil conquer you, but use good to defeat evil.92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 . .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92 In this the apostle was faithfully reflecting the teaching of God’s Son: 이점에 있어서 사도는 충실하게도 하나님의 아들을 반영하였다: You have learned that they were told, “Love your neighbour, hate your enemy.” But what I tell you is this: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your persecutors; only so can you be children of your heavenly Father, who makes his run rise on good and bad alike, and sends the rain on the honest and the dishonest. If you love only those who love you, what reward can you expect? Surely the tax-gatherers do as much as that. And if you greet only your brothers, what is there extraordinary about that? Even the heathen do as much. There must be no limit to your goodness, as your heavenly Father’s goodness knows no bounds.9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선하심이 무한하심 같이 너희도 선함이 경계가 없어야 하느니라93 There is an effort on the part of the Witness leadership to make it appear that any publicly made expression of disagreement with them, and any presentation of refutational evidence of their teachings and policies, is a “persecution” of them. If that were actually the case then there is no question that their own course would mark them as among the worst persecutors today, for they regularly and constantly publish their disagreement with other religions and endeavor to prove their teachings to be false. They are quick to seize upon news items reflecting negatively on other religions and publish these. They must expect to be judged by the same standards with which they judge others.94 But by such misrepresentation of matters they can justify their use of harsh expressions towards any questioning their claims and views. 증인 지도부측에서는, 그들과 공개적으로 의견 차이를 표명하고 그들의 가르침과 방침에 대한 반박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박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는 노력이 있다. 만약 실제로 그렇다면, 그들은 다른 종교들과의 의견 불일치를 정기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발표하며 그들의 가르침이 거짓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행로가 오늘날 가장 나쁜 종교 박해자의 기록으로 남게될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다른 종교에 부정적으로 비친 뉴스기사를 재빨리 포착하여 이를 게재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기준으로 평가되기를 기대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94 그러나 그러한 문제의 잘못된 표현으로 그들의 주장과 견해를 의심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거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그들은 정당화한다. My own experiences with the men heading the Witness organization were, ultimately, unpleasant. I did not believe it possible that the men I had known and worked with for years, before whom I had expressed myself, my convictions and concerns, in hundreds of collective discussions, could take the kind of actions or employ the type of methods they did. 증인 조직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과의 내 경험은 궁극적으로 불쾌했다. 나와 함께 몇 년 동안 알고 일했으며 수백 번의 집단 토론에서 내 자신과 나의 소신 그리고 나의 관심의 표명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조치를 취하고 자신들만의 방식을 채택하여 내게 가하리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Yet I can honestly say that I do not now, nor have I in the past, harbored any sense of rancor. There was an obvious initial shock, but since then I have wasted no time in moody review of those events, in brooding over the past. The abrupt change that resulted, the difficulties of beginning life anew when approaching sixty, have left no scars that I am aware of, no reason for feeling self pity. I feel and believe that the experience has had an improving effect for me; I sincerely hope so. Moreover I can say that there is not one of those men with whom I would not be willing to speak, calmly and dispassionately, to whom I would not be willing to provide food, lodging or whatever else he might need. If enmity exists, it is not on my side. I can even believe that at least some among them might express a similar attitude toward me—though feeling compelled not to do so because of the organization to which they belong. 그러나 나는 지금은 그렇지 않으며 과거의 사태에 어떠한 원한도 품고 있지 않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다. 초기 충격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 이후로 나는 그 사건들에 대해 과거에 대해 곰곰이 집착하면서 감정적으로 검토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나타난 갑작스러운 변화, 60세가 되었을 때 새롭게 삶을 시작해야 하는 어려움이 오히려 내가 겪고 있는 상처나,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이유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한 나의 경험이 나에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고 느끼고 믿는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게다가 나는 그들 중에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말하고 싶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음식, 숙박, 그 밖에 무엇이 필요할지 모르는 어떤 것도 기꺼이 제공하고 싶지 않을 사람도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적의가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내 편이 아니다.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이 속해 있는 조직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나에게 나와 비슷한 태도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 Summing up the liberating breakthrough Christianity brought, one source gives this effective presentation: 한 소식통은 그리스도 정신이 가져온 자유의 돌파구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 . . there is a new liberty towards God, which dispels fear and leads to freedom in his presence of a most intimate kind (Rom. 8:15-18; Gal.4:1-7). . . . This results in service to God which is quite free in character (Rom. 1:9). It also leads to a new freedom toward others. This includes freedom from the fear of others’ judgments as well as from one’s own attempts to manipulate them. It also includes freedom in the communication of one’s thoughts, expression of one’s emotions, the opening up of one’s life and the sharing of one’s possessions. Indeed the free service of others, the voluntary giving of oneself in love to them, is at the very heart of this conception of freedom (1 Cor. 9:19; 1 Thess. 2:8) . . . . So this freedom granted by God not only transfers men and women out of a broken relationship with God, and a defective solidarity with men, into a new community with both, but also inclines them to live the kind of life that will extend and deepen that new community itself.95 . . . 하나님을 향하는 새로운 자유가 있다. 이 새로운 자유는 두려움을 쫓아내고 그분과 가장 친밀함을 누리는 종류(롬 8:15-18; 갈.4:1-7)의 자유로 인도한다. . . . 이것은 인격적으로 꽤 자유로운 하나님에 대한 봉사로 귀결된다. (롬 1:9)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 준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판단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그들을 조종하려는 자신의 시도로부터의 해방도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생각의 소통의 자유, 자신의 감정 표현, 자신의 삶의 개방, 그리고 자신의 소유물을 나누어 쓰는 것도 포함한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섬기는 것, 자발적인 사랑을 베푸는 자유라는 개념의 핵심에 있다. (고전 9:19; 살전 2:8). . . . 그래서 하나님이 부여한 이 자유는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서 벗어나게 하며, 결함이 있는 인간의 연대를,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옮겨가게 할 뿐만 아니라,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공동체 자체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그런 삶을 살도록 부추긴다.95 Ways in which these benefits of freedom can be shared and enjoyed in communion with others certainly merit our serious thought and consideration. 자유가 주는 이러한 혜택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감 속에서 공유되고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배려할 가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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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Galatians 5:6, NIV; 1 Corinthians 13:4.
71 갈 5:6, NIV; 고전 13:4.
72 Galatians 5:24, NEB; compare 2 Corinthians 1:23, 24.
72 갈 5:24, NEB; 고후 1:23, 24과 비교하라.
73 The Greek term (nepho) rendered “steady” or “sane and balanced” at 2 Timothy 4:5 literally relates to sobriety in place of intoxication, but figuratively carries the sense of what is “the opposite of every kind of fuzziness. Sober judgment is highly valued in both individual and public life.”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Abridged Edition, pages 633, 634.)
73 디모데 후서 4장 5절에서 "꾸준한" 또는 "정신이 맑고 균형잡힌"이라는 단어로 번역된 그리스어(네포)는 문자적으로 취기 대신에 맑은 정신과 관련이 있지만, "모든 종류의 불투명한 것과 반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신이 맑은 판단은 개인적이거나 공적인 생활에서 모두 높이 평가되고 있다.(신약사전, 요약본 633, 634면)
74 Compare 2 Peter 2:17-20.
74 벧후 2:17-20 비교
75 The terms “doctrine” and “teaching” often become interchangeable between one translation and another. After describing wrong conduct—including murder, lying, perjury, immorality, sodomy—the apostle speaks of this as “contrary to sound doctrine [Greek, didaskalía]” (RSV; NIV) or, in other translations, as behavior that “flouts the wholesome teaching” (NEB; PME) of the good news. (1 Timothy 1:8-11; compare 1 Timothy 4:1-6.)
75 "교리"와 "가르침"이라는 용어는 한 번역과 다른 번역 사이에서 종종 상호 호환된다. 잘못된 행위ㅡ살인, 거짓말, 위증, 부도덕, 소도미ㅡ 를 설명한 후 사도는 이를 건전한 교리[그리스어, 디다스칼리아](RSV;NIV)에 반한다거나, 또 다른 번역에서는 좋은 소식의 "건전한 가르침에 어긋나는"(NEB; PME) 행동이라고 말한다.(딤전 1:8-11;딤전 1:11 비교)
76 Matthew 22:35-40.
76 마태 22:35-40.
77 2 Timothy 3:16, 17.
77 딤후 3:16, 17.
78 1 Corinthians 13:2, 3, NRSV.
78 고전 13:2, 3, NRSV.
79 1 Corinthians 8:1-3, JB.
79 고전 8:1-3, 개정
80 1 Corinthians 8:10, 11.
80 고전 8:10, 11.
81 Romans 14:1-12.
81 롬 14:1-12.
82 Compare Mark 7:19; Colossians 2:16, 17.
82 마가 7:19; 골 2:16, 17 비교
83 Romans 14:13, 17, NRSV.
83 롬 14:13, 17, NRSV.
84 Galatians 5:1-4.
84 갈 5:1-4.
85 James 3:13, NIV.
85 약 3:13, NIV.
86 Compare the statements in the Watch Tower’s study books The Truth that Leads to Eternal Life, page 16; You Can Live Forever in Paradise on Earth, pages 23, 24.
86 워치타워 서적의 설명 비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16면; <당신은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23, 24면.
87 Though no longer associating, she nonetheless had a “Witness funeral” conducted by a local elder. Many of her husband’s friends and business associates, like him not Witnesses, attended. The elder’s funeral talk consisted entirely of argument in support of the organization’s teachings on the subject of death. Of her husband, the person he was, what could be learned from his life, the qualities he manifested— nothing was said. That was the final touch, both confirming her decision to withdraw and causing her sense of regret to overflow.
87 더 이상 연합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현지 장로들에 의해 "증인 장례식"을 치렀다. 증인이 아닌 남편 친구나 사업 동료들이 대거 참석했다. 장로의 장례식은 전적으로 죽음에 관한 조직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주장으로 이루어졌다.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나, 그의 사람됨에 대해서나, 그의 삶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나, 그가 보여준 자질들에 대해서는ㅡ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 접촉이었고, 그녀는 탈퇴하기로 결심했으며, 후회감이 넘쳐 흘렀다.
88 Italicizing mine. Quoted from the January 9, 1984 issue of Time magazine, reproduced with their permission. Copyright 1984 Time Inc. All rights reserved.
88 이탤릭체는 내가 한 것임. 1984년 1월 9일자 타임지에서 인용한 것으로, 허락하에 복제되었다. 저작권 1984 타임 주식회사에 모든 권리는 유보됨.
89 He is referred to in Crisis of Conscience (page 141) as having sent to the Governing Body the material later published as The Gentile Times Reconsidered. He is also the co-author of the book The Sign of the Last Days—When?
89 그는 <양심의 위기> (141면)에 <이방인의 때에 대한 재고>라는 제목의 자료를 통치체에 보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는 또한 <마지막 날의 징조 - 언제인가?>라는 책의 공동 저자이다.
90 James 1:19, 20, NEB.
90 약 1:19, 20, 개정
91 1 Peter 2:23, JB.
91 벧전 2:23, 공동
92 Romans 12:14, 17-21, NEB.
92 롬 12:14, 17-21, 개정
93 Matthew 5:43-48, NEB.
93 마태 5:43-48, NEB.
94 Matthew 7:1, 2.
94 마태 7:1, 2.
95 Paul’s Idea of Community, Robert Banks (Eerdmans-Anzea Publishers, 1988 reprint), page 27.
95 로버트 뱅크의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생각>(에르드망-앤지 출판사, 1988년 재판),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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