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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입니다. 새벽부터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아주 쌀쌀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3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두북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차로 4시간을 달려 오전 7시에 두북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두북수련원 인근 13개 마을에 살고 있는 어르신들을 초청하여 마을 잔치를 하는 날입니다. 두북수련원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의 집을 방문해서 청소도 해드리고, 반찬도 만들어 드리고, 말동무도 해 드리는 봉사 활동을 해왔습니다. 매년 이 지역 어르신들을 모시고 봄과 가을에는 어르신 잔치도 하고 있습니다.
마을 이장님의 방송이 마을에 울려 퍼졌습니다.
“아. 아. 아아. 오늘은 법륜 스님과 함께하는 마을 어르신 잔치 날입니다. 날씨가 쌀쌀하니까 옷 따뜻하게 입고 나오세요.”
정토회 대구경북 지부에서 30여 명의 봉사자들이 마을마다 찾아가서 어르신들을 모셔 왔습니다. 어르신 중에는 자전거나 전동차, 오토바이 등 자가용을 끌고 오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은 환한 미소로 어르신들을 맞이했습니다.
"아이고, 만날 욕봐서 우짜노."
두북수련원 운동장에 세워진 대형 버스 3대에 어르신들을 모두 태우고 경주로 출발했습니다. 버스로 40분을 이동하여 9시 50분에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식당에 도착해서 어르신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버스가 도착하자 식당 입구에서 어르신들을 맞이했습니다. 한 분 한 분 눈을 맞추고 손을 맞잡았습니다.
“어서 오세요.”
“아이고, 반갑다.”
어르신들이 모두 자리하자 스님이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어느 어느 마을에서 오셨는지 여쭈어보았습니다.
전체 마을을 대표하여 하활천 경로당 노인회 회장 어르신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오늘 법륜 스님과 함께하는 두북 어르신 가을 잔치에 이렇게 많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법륜 스님이 고향 마을을 엄청 살뜰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걸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일 년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 이렇게 여러분을 모시고 큰 잔치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돈도 품도 많이 들지요. 그러니 여러분도 스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어떤 보답을 어떻게 해야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정토회에서 우리를 대접하는 그 뜻을 잘 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음식은 마음껏 잡수시고, 또 잘 노시고, 아무 탈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어서 스님과 초등학교 동기이면서 두북수련원에서 행자들이 모내기를 하거나 추수를 할 때 항상 도움을 주셨던 이재욱 어르신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가방끈이 짧아서 초등학교만 나오고는 학교를 더 이상 다니지 못했는데요. 그렇지만 법륜 스님 같은 분과 함께 초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기가 안 죽습니다. 대단한 법륜 스님이 제 학교 친구라는 그것 하나만 있으면 되었지,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자랑할 건 없습니다.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그 대신 농사짓는 것에 대해 저만의 노하우는 많습니다. 두북수련원에서 논에 모를 심을 때라든지 그럴 때 한번 불러서 모르는 것을 물어봐 주시면 성의껏 모두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오늘은 행복하게 하루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은 20년 전에 두북수련원에 파견을 와서 마을 어르신들을 돕는 봉사를 가장 오랫동안 해오신 화광 법사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내와리 마을에서 활천리 마을까지 모두 13개 마을 어르신들이 많이 와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올 한 해도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어르신들의 인사말을 모두 청해 들은 후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오늘 날씨가 갑자기 추웠는데 아침 일찍 나오실 때 괜찮으셨습니까?”
“네.”
“오늘 날씨가 춥다고 해서 어르신들이 모이는 시간을 아침 9시 30분에서 10시 30분으로 한 시간을 늦추었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아침부터 어르신들이 서두르시지 않게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전달이 되다가 중간에 끊겨서 그 내용이 없어져 버렸나 봅니다. 그래서 일부 어르신은 아침 9시에 나오셔서 기다리는 분도 계셨습니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또 일찍 나오신다고 수고들 하셨습니다.
원래 가을에는 낮 시간이 짧으니까 멀리 가지 않고 두북수련원에서 잔치를 하고, 봄에는 낮 시간이 좀 기니까 여행 삼아 멀리 나들이를 떠나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가을 잔치에 참석하는 분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인원이 좀 많아지면 두북수련원 교실이 좁아서 다 못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이곳 경주로 장소를 옮기고, 음식은 뷔페로 주문을 했습니다. 장소를 옮기느라 어르신들이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고 오시도록 했습니다. 두북 수련원에서 가을 잔치를 했으면 이렇게 일찍 나오지 않아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콧바람 쐬니까 모두 좋으시지요?”
“네, 좋습니다!”
어르신들은 박수로 기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어서 스님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누구든지 손을 들고 스님에게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중에 한 어르신은 남편과 사별한 지 7년이 지났는데 이제 친구들도 하나둘씩 돌아가시고,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걱정스러운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친구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저는 아들은 없고 딸이 4명 있습니다. 남편이 죽은 지 7년이 됐고 지금은 혼자 지내고 있어요. 남편이 죽기 전에 자기가 죽으면 저한테 '딸한테 가서 살 거냐?' 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냥 혼자 살겠다고 대답했어요. 나이가 들어 친구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요즘은 저도 어떻게 죽게 될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아프다가 죽을지 아니면 자다가 죽을지 모르겠지만 아프다가 죽으면 자식들이 아픈 것도 알고 병원에도 좀 왔다 가고 해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다가 갑자기 죽으면 좀 섭섭할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엔 밤에 잠을 자면서도 대문을 잠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내가 넘어져서 애들한테 전화를 했는데 집에 들어오지 못할까 봐 그렇습니다. 또 혼자 지내다 보니까 낮에는 괜찮은데 밤이 되면 굉장히 외롭습니다. 옆에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딸 네 명 중에 어느 집이든 가서 같이 좀 살고 싶은 마음도 들고요. 그런데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100세 시대라고 했는데 요즘은 120세 시대라는 말이 들립니다. 아직 살 날이 많은데 이 나이에 어떤 마음을 갖고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요?”
“첫째, 자다가 죽는 것은 최고의 복입니다. 자식들과 남아 있는 사람들은 조금 섭섭하겠지만 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다가 죽는 일은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그다음에 문은 안 열어놓아도 됩니다. 급하면 다 뜯고 들어오거든요. 그런 작은 일까지 신경 쓰는 것은 질문자가 걱정이 너무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는 복은 받기가 쉽지 않아요. 우리 동네에서도 거름을 내다가 양지바른 곳에 지게를 받쳐 놓고는 죽은 사람도 있고, 가마솥에 불을 때 놓고 저녁에 방에 들어가 잠을 잤는데 아침에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으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섭섭해해요. 임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다가 죽는 일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걱정할 일입니다. 질문자의 경우에는 딸들이 걱정할 일이지 질문자가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둘째, 잠자듯이 죽는 것이 최고의 복이지만 그 복은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죽을 때 조금 아프다가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프다가 죽는 것도 그렇게 걱정할 일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잠을 자다가 죽으면 나는 괜찮은데 남은 자식들이 너무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아프다가 죽으면 나는 좀 힘들지만 자식들은 오히려 괜찮습니다. 부모가 아플 때 자식들이 간호도 하고 병원에도 모시고 가다가 조금 힘이 들면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아이고. 이렇게 아프면서 살아서 뭐하노. 이렇게 살 바에야 돌아가시는 게 오히려 더 낫지 않겠나.’
자식이 이런 생각을 할 때쯤 부모가 죽으면 죽은 날에는 슬피 울지만 그 슬픈 마음이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마음에서 이미 한번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슬픔이 오래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하다가 부모님이 갑자기 어느 날 잠자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자식들은 마음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잠자다가 죽으면 나에게 좋고, 조금 아프다가 죽으면 자식에게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조금 아프다가 죽게 생겼다면 애들이 간호하느라 힘들겠다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힘들어야 정이 끊어지기 때문이에요. 정이 끊어져야 애들이 오래도록 슬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시대가 예전과 많이 달라져서 자녀 입장에서 부모를 모시는 게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자녀를 일곱 명씩 낳았기 때문에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부모님을 모시는 게 가능했어요. 그러나 요즘은 자녀를 한두 명만 낳습니다. 각 집에서 자녀 한 명씩이 만나 결혼을 하니까 둘이서 네 명의 부모를 모셔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그래서 앞으로는 점점 더 자녀가 부모를 모시지 않는 것이 시대적인 흐름입니다. 자녀가 불효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요즘은 늙으면 요양원에 갈 수 있도록 제도가 잘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절대 요양원은 안 가겠다고 하면 자식이 힘들어져요. 혼자서 움직일 수 있고 밥이라도 챙겨 먹을 수 있으면 집에서 지내다가, 정신이 없고 똥오줌도 못 가리게 되면 요양원에 가는 것이 좋습니다. 자식이 꼭 모시겠다고 하면 못 이기는 척하고 같이 살 수 있지만 그건 자식을 고생시키는 일이에요.
저희 형님도 얼마 전에 요양 병원에 있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요양원은 병원이다 보니까 음식을 싱겁게 해 줍니다. 우리 세대는 음식을 다 짜게 먹고 자라다 보니 요양원에 가면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또 시골에 살면 밭에 가서 금방 고추나 가지를 따다 먹었는데 병원에서는 딴 지 한참 된 채소를 구입해서 주니까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몸이 불편하고 정신이 멀쩡하면 요양원이나 요양 병원에서 살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제일 좋은 것은 혼자 지내다가 요양원에 가는 겁니다. 딸네 집에 가는 것이 좋은 게 아니에요. ‘내가 딸네 집에 가는 걸 딸들이 싫어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딸을 불효녀로 만들게 됩니다. 딸이 집에 와서 지내시라고 해도 ‘아이고 됐다. 나는 안 간다’ 하고 말해야 딸이 효녀가 되는 거예요. 자녀가 부모에게 잘해야 효자 효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자녀에게 기대를 하지 않아야 효자 효녀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꾸 ‘왜 나에게 용돈을 안 주지?’, ‘왜 나를 안 모시지?’ 이렇게 생각하면 자녀를 불효자와 불효녀로 만들게 됩니다. 기왕 내가 낳은 아들딸인데 효자와 효녀로 만드는 게 나아요? 불효자와 불효녀를 만드는 게 나아요?”
“효자와 효녀를 만드는 게 낫습니다.”
“당연히 효자와 효녀를 만드는 게 낫습니다. 왜냐하면 자식도 자식이지만 손주에게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이에요. 엄마 아빠가 불효자식인데, 불효자식을 부모로 둔 사람이 잘 될 수가 없잖아요. 여러분의 제일 큰 관심은 자식보다도 손주일 텐데, 손주가 잘 되려면 그 손주의 부모가 되는 내 아들딸들이 효자와 효녀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기대를 하지 않으면 자녀는 저절로 효자와 효녀가 됩니다.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좋고, 안 모셔도 좋고, 나에게 와서 돈을 뜯어가지만 않아도 고마운 거예요. 사람이 보통 누군가에게 연락할 때는 무엇 때문에 연락을 합니까? 다 자기가 필요해서 연락을 합니다. 자식한테 연락이 올 때는 대부분 무언가를 달라고 연락 오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니 ‘연락이 없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녀들이 다 효녀와 효자가 됩니다.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 자녀들이 모시겠다고 해도 고맙게 생각할 수 있고, 모시지 않겠다고 해도 시대가 이러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내가 너를 키우는데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내가 늙었다고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면 나도 괴롭고 자녀를 불효자식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자식에게 기대를 갖는 것은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지금 우리나라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가고 있어요. 자식도 아닌데 나라에서 여러분에게 연금을 줍니다. 노인 연금이 지금은 30만 원 정도 나와요. 그런데 앞으로 노인 연금이 점점 더 늘어날 겁니다. 또 재산이 하나도 없어도, 지금 노인 연금이 이것저것 합하면 70만 원 가까이 나옵니다.
늙어서는 조그만 집 하나와 양식할 땅 한 마지기 정도는 최소한 가지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필요하다고 해도 절대 다 주면 안 돼요. 다 주고 늙어서 길거리에 나 앉으면 불쌍하잖아요. 젊을 때는 길거리에 나 앉아도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지만, 나이 들어서는 그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자식이 울고불고해도 논과 밭 몇 마지기와 살 집은 남기고, 죽은 뒤에 넘겨주는 것이 좋습니다. 죽고 난 뒤에는 자녀들이 n분의 1로 나눠 가지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어요. 딸이고 아들이고 구분이 없습니다. 다 똑같이 나누도록 법으로 되어 있어요.
재산이 많으면 자녀들 간에 다툼이 생기지만, 재산이 적으면 절대 싸우지 않습니다. 제일 좋은 건 재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싸울 일이 아예 생기지 않아요. 그런데 자녀들이 재산을 두고 다툰다고 해서 꼭 그게 자녀들 간에 사이가 나쁘기 때문은 아닙니다. 재산이 있으면 원래 싸우는 것이 정상이에요. 만약 유산이 10억 있다고 하면, 그 유산을 가질 권리는 자녀들에게만 있습니다. 경쟁 상대가 형제자매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히 형제자매 간에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왕의 아들이 왕이 되었던 시대에는 왕자들 간에 다툴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왕이 되려면 형제를 몇 죽여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재산을 많이 남기면 반드시 자식들이 싸우게 됩니다.
첫째, 죽는 것은 어떻게 죽든 아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잠자다가 죽든, 아파서 죽든, 다 좋은 일입니다. 둘째, 밤에 외롭다는 것은 영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괜히 딸들 찾지 말고 외로우면 영감을 찾으세요. 다 늙어서 영감을 찾거나 할멈을 찾으면 나쁜 것인가요?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젊을 때는 남자가 여자를 찾고 여자가 남자를 찾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면서 왜 늙어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할까요?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늙을수록 만나서 대화도 하고 서로 등도 긁어주고 해야 합니다. 남편이나 마누라가 살아있는데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배우자가 죽고 혼자 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질문자의 경우에도 남편이 죽었고 혼자 되었으니까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우리는 원래 누구나 다 혼자였습니다. 남편과 같이 살다가 남편이 죽자 다시 혼자가 된 것이에요. 앞으로 누구를 만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스님처럼 평생 혼자 사는 사람도 있는데 뒤늦게 누구를 만나서 같이 살 필요가 있을까, 그냥 혼자 살면 되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혼자 살아도 됩니다. 그게 아니라 ‘같이 살다가 하나가 없어지니 섭섭하고 외롭네’ 이런 생각이 들면 새로 남자를 하나 만나서 같이 살면 됩니다. 젊을 때는 지킬 것을 딱 지키고 살아야 하지만, 늙어서는 그렇게 움켜쥐고 살면 힘들어요. 나이가 들면 조금 열어놓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젊을 때는 돈을 모으면서 살아야 하지만, 늙어서는 베풀면서 살아야 하는 거예요. 젊을 때는 옳으니 그르니 따지더라도, 늙어서는 ‘옳으면 어떻고 그르면 어떠냐, 대강 하자’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스님 말이 맞습니다.”
어르신들이 큰 박수로 공감했습니다. 한 어르신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이가 팔십이 되면, 있는 영감도 버리삐고 싶은데 오줄없다. 아직 어려서 그런갑다.”(모두 웃음)
“그러니까요. 고생을 덜해서 그런가 봐요.”
다른 어르신이 말했습니다.
“스님이 하나 구해주소.”
“저도 같이 살 사람을 못 구해서 혼자 사는데 저한테 구해 달라고 하시면 안 되죠.” (웃음)
스님의 법문이 어르신들의 귀에 쏙쏙 박혔습니다. 스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맞장구를 치는 어르신들이 많았습니다. 어르신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눈 후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해서 점심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르신들은 마을에서 함께 온 분들끼리 모여서 앉기도 하고, 남자분들은 남자분들끼리 모여서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봉사자들은 어르신들이 식사를 편하게 하실 수 있도록 국을 떠드리고, 부족한 음식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스님은 어르신들이 식사를 다 시작하시기를 기다렸다가 밥을 떴습니다. 순식간에 식사를 마치고 어르신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음식을 많이 준비했으니 천천히 많이 잡수세요.”
식사가 끝나고 어르신들은 여유 있게 다과와 커피도 한 잔씩 드셨습니다. 어르신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강당에 오시자 본격적으로 여흥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스님이 안내를 드렸습니다.
“충분히 드셨어요? 뒤에 음식을 준비해 놓았으니 노시다가 시장하시면 언제든지 또 드시면 됩니다.”
첫 번째 순서는 가야금 병창 연주로 차분하게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어르신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용기 있게 첫 곡을 불러주신 어르신께는 따뜻한 조끼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다음은 봉사자들이 신나는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발랄한 언니들’이라는 이름으로 각설이 복장을 하고 멋진 댄스와 춤을 보여주자 잔치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습니다.
다시 어르신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르신들이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자, 스님은 내내 박수를 치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마지막은 풍물 공연으로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꽹과리, 북, 장구 소리가 점점 흥을 돋우자 팔십이 넘어 보이는 어르신도 두 팔을 가윗자로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장구 소리에 맞춰 어르신들은 '얼쑤!', '좋다!' 하며 장단을 맞추었습니다.
노래 자랑을 마무리하고,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어르신들이 가는 길에 드렸습니다. 화광 법사님이 마을 노인회 회장님에게 대표로 선물을 전했습니다.
가을 나들이를 마무리하며 스님이 닫는 인사를 했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셨나요? 노래도 마음껏 부르셨어요?”
“네!”
“오늘 공연팀이 많아 분위기가 더 흥겨운 것 같습니다. 여기 앞에 앉아 계신 어르신도 젊으실 때 농악패를 하셨잖아요. 고깔 쓰고 멋지게 춤도 추시고 흥겹게 놀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이가 없다 보니 동네 농악패가 다 사라져 아쉽습니다. 제가 부탄이나 인도 같은 곳에 가보면 여전히 마을마다 전통 음악패가 있어요. 우리나라도 동네마다 다 그런 게 있었는데, 지금은 젊은 사람이 없고 또 문화도 많이 바뀌었지요.
오늘 아침에는 조금 쌀쌀했지만 낮에는 날씨가 풀렸네요. 늦으면 더 추워지니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내년 봄에 해가 길어지면 버스를 타고 조금 더 먼 곳으로 나가볼까 합니다. 오늘 편안히 쉬시고, 내년 봄에도 많이 와주세요. 그때는 좀 더 멀리 나들이를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인사를 드린 후 기념사진을 찍고 어르신 잔치를 마쳤습니다.
봉사자들의 손을 꼭 잡고 행복해하시는 어르신들의 얼굴은 맑고 청아한 가을 하늘을 닮아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은 어르신들을 차로 집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스님은 다시 두북수련원으로 돌아와서 업무를 본 후 해가 저물고 저녁 6시에 울산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울산 상공회의소 대강당입니다. 많은 시민들이 강연을 듣기 위해 줄을 서서 입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울산 행복센터에서 온 봉사자들이 곳곳에서 강연장을 찾아온 시민들을 정성껏 맞이했습니다. 스님은 봉사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강연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발달 장애인 예술단 '차이' 단원들이 북춤 공연을 보여주었습니다.
박자에 맞춰 북을 연주하면서 도깨비 춤을 보여주었는데요. 아름답고 활기찬 연주로 마음과 귀를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지난달에 지진 피해와 전쟁으로 많은 고통을 겪은 시리아에서 4천 명이 다니는 학교 준공식을 하고 온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본 후 즉문즉설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45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폐교에 살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니까 전 세계로 여기저기 다닌다고 농사일을 많이 못 했습니다. 추수도 제대로 못해서 오늘 추수를 했습니다. 온 들판에 다른 사람들은 전부 추수를 마쳤는데, 우리 논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습니다. 보름 동안 계속 비가 와서 벼를 벨 수가 없었는데 드디어 오늘 추수를 마쳤습니다.” (웃음)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다섯 명이 먼저 스님과 대화를 나눈 후 현장에서 즉석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여덟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는데, 소송을 하면 과보가 따를까 걱정이 된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내 돈 떼먹은 놈을 생각할 때마다 열불이 납니다
“저는 가구 공장을 하고 있는데 공사 금액이 억 대가 넘을 때도 있고 몇 십만 원일 때도 있습니다. 제가 알던 사람을 믿고 1억 2천만 원짜리 공사를 했는데 돈을 한 푼도 안 주면서 준공 검사를 한다고 오히려 제 돈 2천7백만 원을 가져갔습니다. 대신 공사한 빌라에서 집 한 호수를 줬는데 나중에 준공 끝나고 보니까 그 집을 여러 사람한테 준 거예요. 제 돈을 들여서 준공까지 내줬는데 전화도 안 받습니다. 이건 누구한테 물어봐도 사기꾼이라고 하는데, 너무 괘씸해서 이걸 법적으로 소송을 할까 하다가도, 제가 법문이라도 조금 들었다고 ‘얼마나 없으면 저럴까’ 싶은 생각도 들고, 소송을 하면 저한테 과보가 따를까 걱정도 됩니다. 공사 대금을 안 준 건 민사 소송을 하고, 집 한 채를 여러 사람에게 준 건 사기로 형사 소송을 해버릴까 하다가도, 내가 고발해서 그 사람이 감옥이라도 가게 되면 내 앞길에 과보가 돌아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서도 자다가 일어나면 화가 나서 ‘이걸 감방에 처넣어야지’ 생각을 하다가도, 또다시 날이 밝으면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또 법문을 들으며 마음을 달랩니다. ‘내가 전생에 저 놈의 돈을 떼먹었나 보다’ 하고 마음 편히 있다가도, ‘이 자식이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내 돈을 다 떼먹나’ 하고 열불이 나는 걸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세월이 5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5년이 흘렀으면 공소 시효가 지나지 않았나요?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든, 범죄를 저질렀든, 공소 시효란 게 있잖아요.”
“공소 시효가 10년이에요.”
“공소 시효가 10년이면 아직 소송을 할 수가 있네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무효가 되니까, 소송을 하려면 그 안에 해야 됩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는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해결이 안 될 때가 더 많습니다. ‘내 돈을 떼먹다니 괘씸하다’ 하는 건 감정이죠. 떼인 건 기분이 나쁘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첫째, 그 사람의 재산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검토해 봐야 합니다. 내가 재판에 이겨도, 그 사람이 재산이 하나도 없으면 변상을 할 수가 없으니까 변호사 비용만 들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1억 5천이 아니라 10억을 떼었더라도 그 사람이 가진 게 없을 때는 소송을 해봐야 실익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감옥에 간다 하더라도 그게 나한테 무슨 도움이 돼요? 내 기분이 좀 시원할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복수나 응징의 개념일 뿐 나한테 실제로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나를 한 대 때린 사람한테 가서 나도 한 때 때리면 속이 시원할 수는 있지만 그건 복수일 뿐이에요.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먼저 그 사람의 재산이 있는지 알아보고, 내가 어떤 조치를 하면 받을 가능성이 있겠는지 먼저 점검해야 됩니다.
둘째, 변호사와 상의해서 법적으로 내가 소송을 할 수 있는 건지 알아봐야 해요. 제가 아는 어떤 분도 억울한 일이 생겨서 소송을 했는데, 소송 자격이 없다는 판결이 나서 변호사 비용만 날렸어요. 변호사가 보기에 ‘당신이 소송을 할 자격이 없다’ 이렇게 판단이 된다면, 소송을 해봤자 이기고 지는 게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런 점에 대해 먼저 변호사를 통해 법적으로 검토를 해봐야 해요. 재판을 한다는 건 법적인 문제니까 법에 어떻게 되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사실이 어떠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내가 땅을 살 때 명의를 이웃 사람이나 동생 이름으로 했는데, 세월이 흘러서 나한테 땅을 안 준다면 억울하겠죠? 그런데 재판을 해도 못 받습니다. 내 돈으로 땅을 샀다고 하더라도 등기가 다른 사람 명의로 되어 있다면, 토지 실명제에 따라서 등기된 사람이 소유주입니다. 여러 가지 증명을 해서 돌려받을 수도 있다지만, 90퍼센트는 소송에 질 확률이 높습니다.
첫째, 그 사람이 재산이 있느냐, 둘째, 변호사와 상의해서 소송이 가능한지 살피고, 셋째, 소송이 가능하다고 하면 승산이 어느 정도 있느냐를 판단해야 합니다. 소송해서 받는 게 5천만 원인데 변호사 비용이 5천만 원 든다면 별로 이익이 남는 게 없잖아요. 괘씸하니 버르장머리를 고친다거나 기분이 나빠서 복수를 하는 게 목적이면 괜찮지만 실익은 하나도 없죠. 실익이 없지만 그 사람이 앞으로 계속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소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사회 정의를 위해서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해볼 수가 있습니다. 꼭 실익만 따질 수는 없어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나쁜 놈이긴 하지만, 감옥에 보낸다고 사회 정의가 실현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점검을 해보니 승산이 있고, 이익도 남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의미도 있다면 소송하는 것도 검토를 해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소송을 해서 내가 5천만 원이나 1억 원이라도 돌려받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나와 가까운 관계라면 ‘공짜라도 해줄 일인데 소송까지 할 거 뭐 있나’ 이렇게 받아들이고 승산이 있지만 자발적으로 포기할 수도 있어요. 내가 자발적으로 포기하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화를 내는 일은 없어요. ‘네가 어려우니까 그렇지, 형편 되는데 그렇게 하겠나’ 이렇게 생각하고 딱 자발적으로 포기를 하는 겁니다. 아니면 검토를 해서 승산이 있으면 재판을 해보는 것도 괜찮아요.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종교적으로는 제일 좋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민을 보호하는 법에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에요. 과보를 받는 짓은 아닙니다. 얄미워서 복수를 하려고 그 사람을 해치고 싶은 마음에 소송을 한다면 거기에는 과보가 따릅니다. 그건 감정에 놀아나는 거예요. ‘소송에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니, 법에 한 번 맡겨 본다’ 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쁜 것도 아니고, 불교적으로 과보를 받는 일에 해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법이 어떻게 판결하는지에 따라서 배상을 못 받는다고 판결이 나면 ‘알았습니다’ 하고 포기하고,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받으면 됩니다.”
“그 사람이 재산은 마누라 앞으로 다 돌려놓고, 이혼을 한 후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에요.”
“그런 걸 변호사한테 물어봐야 돼요.”
“변호사의 말로는 형사 소송도 가능하고, 민사 소송도 가능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민사 소송은 자기 앞으로 가진 게 전혀 없고, 형사 소송은 해봤자 감방에 넣는 것 외에 내 돈을 돌려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변호사한테 승산이 있는지 물어보고, 감방 보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하면 소송을 안 하는 게 낫죠.”
“변호사는 자꾸 소송을 해보자고 합니다.”
“변호사는 변호사비 수익이 들어오니까 그렇죠.” (웃음)
“저는 남는 게 없는데 소송을 하면 뭐 하겠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화를 내면 안 되죠.”
“잊고 있다가도 한 번씩 생각이 나서 불쑥 화가 납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화를 내면, 질문자만 손해예요. 돈도 잃고 잠도 못 자고, 바보 아니에요? 숫제 돈을 줘버리면 돈은 잃지만 잠은 잘 수 있잖아요. 왜 돈을 못 줘버리고 계속 괴로워하고 있어요?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안 잊히고 자꾸 마음에 걸린다면 변호사비를 좀 들이더라도 내 마음의 한을 좀 풀기 위해서 돈을 좀 써도 됩니다. 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한을 풀기 위해서 한 번 소송을 해보는 겁니다. 소송을 해서 이기고 나서 돈을 포기해도 되거든요. 꼭 그 사람을 감옥에 보내려고 하는 게 아니고, 이기면 분은 풀리니까 돈을 못 받아도 이기고 나서 포기하면 되거든요. 소송을 하는 것이 꼭 최선은 아니지만 하고 싶으면 해도 돼요.”
“포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그런데 오늘 포기한다고 해 놓고 또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화가 나면 소송을 해도 좋아요. 돈을 좀 버려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현장에서 즉석 질문까지 받아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2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강연을 마쳤습니다.
곧바로 무대 위에서 책 사인회를 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서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책 사인회를 마치고 강연을 준비한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행복 시민, 울산!”
스님은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다들 수고했어요!”
강연장을 나와 밤 10시에 울산을 출발하여 두북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차로 한 시간을 달려 밤 11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한 후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하여 서울로 이동한 후 오전에는 INEB 사무총장인 무 님과 정토회와 INEB가 앞으로 어떻게 협력해 나갈 것인지 회의를 하고, 오후에는 스리랑카 JTS 활동가인 나만 님과 미팅을 합니다. 이어서 평화재단 사무국장과 다음 주에 있을 평화재단 20주년 기념 사업에 대해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금요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