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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소왕설역사(小王說歷史)
1856년,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天京, 남경)은 비바람이 흔들리고 있었고, 내우외환은 점점 더 격화되었다. 천왕(天王) 홍수전(洪秀全)의 위망(威望)은 점차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에 의해 약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양수청은 "천부하범(天父下凡)"을 빌어 점차 태평천국의 군정대권을 장악해 나간다. 양수정은 그의 기지와 정치수완으로 하층의 반란군에서 권력의 초고봉에 올랐고, 태평천국의 실제통치자가 된다. 그러나, 그의 권력욕이 팽창하면서, 그의 운명은 돌연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날 밤, 동왕 양수청은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의 면전에 끌려온다. 원래 자신만만했던 그도 마침내 두려운 표정을 드러내며, 당황하고 놀라서 소리쳤다: "나는 동왕이다.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그러나, 위창휘의 대답은 차가웠다: "너는 찬위를 도모했다. 나는 천왕의 명을 받들어 너를 죽이겠다." 이 권력과 원한이 교차되는 순간에 양수청의 운명은 철저히 끝장난다. 그리고 이는 태평천국의 쇠망에 화근을 심게 된다.
양수청의 본명은 양은우(楊銀友)이다. 광서(廣西) 계평현(桂平縣)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힘들게 살았고, 목수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운명의 전환점은 그가홍수전을 만난 순간에 출현한다.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창립자이다. 그는 청나라통치를 무너뜨리고, "천국"을 건립하여, 백성들이 압박없는 생활을 살아가게 하자고 주장했다. 양수청은 홍수전의 이상에 동감하여, 의연히 태평군에 가입한다. 그리고 초기의 중요한 지도자중 한명이 된다.
태평천국운동 초기에 양수청은 탁월한 군사재능과 정치수완을 발휘한다. 그는 작전지휘에 능했을 뿐아니라, 일련의 정교한 정치수단으로 자신의 지위도 공고히 한다. 특히 "천부하점"의 책략으로 그는 핵심역할을 하게 된다. 양수청은 여러번 "천부"의 명의로 홍수전을 훈계하고, 심지어 "천부"의 신분으로 홍수전으로 하여금 그에게 절하며 "만세"를 외치게 한다. 이를 통하여 양수청의 권세는 최고조에 이른다. 홍수전은 표면적으로 부득이 양수청의 요구에 따랐지만, 내심으로는 갈수록 불안을 느끼고 경계를 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양수청은 '천부하범'의 형식으로 점점 태평천국의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그는 태평군의 실질적인 총지휘관이 되었을 뿐아니라, 천경의 행정사무도 장악한다. 양수청의 독단적인 스타일과 팽창하는 권력욕은 태평천국내부의 다른 지도자들로부터 강렬한 불만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위창휘, 석달개(石達開)등 태평군 장수들은 양수청의 독재적인 행위에 분노와 굴욕을 느꼈다. 양수청은 여러번 사람들 앞에서 위창휘를 질책했고, 심지어 그를 핍박하여 친형제를 죽이게 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하여 위창휘는 그를 뼛속까지 미워했다. 언제든지 보복할 기회만 찾고 있었다.
그러나, 양수청은 자신이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반대로 그는 갈수록 자신만만해 한다. 자신이 "천부하범"의 신권으로 태평천국을 안정적으로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계속 천부의 명의만 이용하면 모든 사람을 자신의 발밑에 굴복시킬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천경사변은 태평천국역사상 가장 피비린내나는 내부투쟁이다. 그 원인은 양수청의 권력이 팽창한 것과 관련이 있다. 양수청의 권세가 날로 커지면서, 그와 천왕 홍수전간의 갈등도 날로 격화된다.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최고지도자이고, 전체 천국을 절대적으로 통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양수청이 계속하여 압박해 들어오자 결국 홍수전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 골치아픈 맹우를 해결하기로 결정한다.
1856년, 양수청은 다시 한번 "천부하범"의 명목으로 홍수전에게 그를 "만세"로 봉하게 압박한다. 이 행위는 철저히 홍수전을 격노시켰다. 홍수전은 부득이 표면적으로 양수청의 요구에 응했지만, 내심 깊은 곳에서, 그는 이미 양수청의 독단행위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결정한다.
이와 동시에, 북왕 위창휘와 익왕(翼王) 석달개등은 양수청에 대한 반감과 원한이 계속 축적된다. 특히 위창휘는 일찌기 가족간의 분쟁으로 양수청에 의해 강제로 자신의 형제를 처형해야 했었고, 이 일로 인하여 양수청에 대한 원한은 뼛속에 사무쳐, 보복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위창휘는 여러번 암중으로 홍수전에게 간언하며 양수청에 대한 불만과 우려를 토로한다. 홍수전도 그 기회를 틈타 양수청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로 결정한다.
천경사변의 도화선에 최종적으로 불을 붙인다. 천왕 홍수전은 비밀리에 위창휘, 석달개와 진일강(秦日鋼)을 부른다. 그리고 이들 태평천국의 중요장령들과 연합하여 일거에 양수청을 제거할 준비를 한다. 위창휘는 홍수전의 밀령을 받은 후, 즉시 삼천정예를 이끌고 천경으로 돌아와 이번 정변을 준비한다.
1856년 9월, 천경사변이 정식으로 발발한다. 위창휘는 천경의 남문 밖에서 몰래 올라가, 그가 이끄는 정예병이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천경의 핵심위치를 장악한다. 전체 천경성이 아직 대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위창휘는 이미 양수청의 동왕부를 포위한다. 그날 밤, 동왕부내는 고요했다. 양수청은 위기가 이렇게 돌연 닥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창휘의 군대가 동왕부로 쳐들어갔을 때, 양수청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그의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었고, "천부"의 신분으로 무수한 사람들을 무릎꿇게 하였지만, 죽음의 위협이 닥쳐오자 그는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체포된 후, 얼굴색이 창백해지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른다. 그는 이전의 신분과 공적을 내세워 살 길을 찾고자 했다. 그는 위창휘에게 소리친다: "나는 동왕이다.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그러나 위창휘는 차갑데 대답한다: "너는 모반을 꾀했다. 나는 천왕의 병을 받들어 너를 죽일 것이다."
그후 양수청은 위창휘의 명령하에 그 자리에서 처형된다. 그의 친적과 심복들도 모두 화를 면하지 못한다. 동왕부내의 천명이상이 잔인하게 도살당한다. 권력을 상징하던 저택은 핏빛으로 얼룩진다. 위창휘는 단순히 정적을 제거한 것뿐만이 아니라, 여러 해동안 누적된 원한을 보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수청이 죽은 후에도, 동왕부내의 도살은 멈추지 않았다. 위창휘는 양수청의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기 위하여, 동왕부내의 모든 친척, 종, 병사 및 양수청의 일당은 죽여버리라고 한다. 전체 동왕부가 짧은 하룻밤만에 인간지옥으로 변하고 피가 흘러 강을 이룬다.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인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동왕부내에서 도살된 사람만 수천명이었다고 한다.
위창휘의 보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양수청의 영향력을 철저히 제거하려면,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그리하여 그는 동왕부내에서 대거 도살을 진행했을 뿐아니라, 전체 천경성내에서 양수청과 관련이 있는 자는 모조리 수색하여 체포한다. 친척이든, 친구이든 부하이든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린다. 위창휘는 심지어 성안에 포고문을 붙여서 양수청을 지지하거나 비호했던 사람은 모조리 자수하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를 스스로 책임져야할 것이라고 한다. 이 명령으로 천경성은 공황과 불안에 휩싸인다. 많은 사람들은 부득이 자신의 친구와 관계를 끊고, 심지어 이전의 파트너까지 손절하며 스스로를 보호했다.
이런 대규모의 도살행위로 천경성내에서 짧은 며칠만에 수만명이 사망한다. 위창휘의 잔인한 수단은 양수청의 세력을 철저히 파괴시켰지만, 이와 동시에, 태평천국의 사기에도 크나큰 타격을 가한다. 천경성내의 사람들은 돌연한 도살에 공포를 느꼈고, 그들은 태평천국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신뢰를 잃게 된다.
양수청의 사망으로 그가 태평천국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자, 일련의 연쇄반응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태평천국내부에서는 권력진공상태와 지속적인 혼란이 나타난다. 양수청이 죽자, 일찌기 그가 이끌던 군대와 행정기구는 마비상태에 빠진다.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관리와 장령등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청군 혹은 다른 지방세력에 의탁한다. 이 국면은 태평천국 내부의 권력투쟁을 갈수록 더 심하게 만들었다. 각로의 군벌과 장령들이 권력쟁탈전을 벌인다. 그리하여 전체 정권이 심각한 분열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와 동시에, 홍수전은 비록 이번 기회로 태평천국의 통제권을 되찾았지만, 그는 내부안정을 유지할 충분한 능력이 없었다. 위창휘는 양수청이 죽은 후, 권력의 최대수혜자가 된다. 그러나 그의 수단은 너무 극단적이었고, 태평천국 내부의 반감을 불러온다. 또한 홍수전도 그에 대하여 꺼리는 마음이 생긴다. 홍수전은 위창휘의 존재가 마찬가지로 자신의 통치에 위험이 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천경사변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위창휘의 권세를 약화시킬 기회를 찾게 된다.
사실상 천경사변으로 태평천국의 내부투쟁을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어진 권력쟁탈전에 화근을 심은 셈이 된다. 익왕 석달개는 태평천국의 또 다른 중요한 장령으로서, 비록 천경사변초기에 위창휘와 같은 편에 섰었지만, 양수청이 죽은 후에는 석달개와 위창휘간에 점점 갈들이 심각해진다. 이 갈등은 금방 공개적인 충돌로 이어진다. 석달개는 위창휘가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여 태평천국 내부의 혼란을 야기했다고 질책한다. 그러나 위창휘는 석달개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권을 장악하려 한다고 여겼다. 쌍방의 투쟁은 태평천국내부의 분열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천경사변이 결과는 예상을 훨씬 초월했다. 그것은 양수청의 권력기반을 무너뜨렸을 뿐아니라, 태평천국내부의 핵심역량을 심각하게 약화시킨다. 이어진 몇년동안, 태평천국은 점차 외부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를 상실하고, 북벌군도 실패하며, 청군의 반박 그리고 내부분쟁으로 결국 정권이 붕괴되고 만다.
비록 위창휘가 성공적으로 양수청을 제거하고 개인적인 복수에 성공했지만, 그의 잔혹한 수단은 스스로에게 화근을 남긴다. 양수청이 죽은 후, 위창휘의 무고한 사람에 대한 마구잡이 살해는 태평천국내부의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홍수전도 위창휘가 양수청처럼 새로운 위협이 되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였다.
천경사변이 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홍수전은 표면적으로 위창휘의 행동에 관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실제상으로 그는 일찌감치 위창휘를 경계했다. 석달개가 계속하여 위창휘를 질책하자, 홍수전도 위창휘가 태평천국의 잠재적인 위협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홍수전은 결국 위창휘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얼마 후, 홍수전은 위창휘가 '살인을 너무 많이 한다'는 이유를 들어 체포하도록 명한다. 그리고 오마분시의 극형을 내린다. 위창휘의 시신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지고, 천경성의 성루에 걸려 사람들에게 전시된다. 이를 통해 천경성내의 민중들의 도살행위에 대한 분노를 잠재우고자 했다.
위창휘의 죽음은 비록 태평천국내부의 일부 동요를 잠재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미 붕괴하기 시작한 정권을 구할 수는 없었다. 천경사변이후, 태평천국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된다. 내부의 갈등은 더욱 복잡해진다. 정권의 붕괴는 이미 불가피한 추세가 되었다. 일찌기 휘황했던 태평천국은 결국 불가피하게 멸망의 길을 걷는다. 홍수전도 실패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천경사변후, 석달개는 태평천국내부에서 가장 영향력을 지닌 인물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위창휘의 폭력과 태평천국지도부의 내부투쟁은 석달개를 실망시킨다. 비록 그의 군대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석달개는 홍수전과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위창휘등의 극단적인 수단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천경성내는 이미 정치의 암흑과 무질서에 빠져버린다. 석달개는 점차 인식하게 된다. 태평천국의 이상은 이미 최초의 뜻에서 벗어나 버렸다.
1857년, 석달개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천경을 떠나 멀리 다른 곳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의 이 결정은 태평천국에 있어서 중대한 타격이었다. 석달개가 떠난 후, 태평천국 내부의 군사력은 다시 더 약화된다. 그가 데려간 부대는 태평천국에서 최정예부대중 하나이다. 그가 떠남으로써 천경내부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이는 직접적으로 태평천국과 청군과의 전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석달개가 천경을 떠난 후, 그는 부대를 이끌고 각지를 전전하며, 외부에 새로운 근거지를 설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청군의 포위소탕과 태평천국내부에서 고립되어 그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1863년, 석달개는 대도하전투에서 청군에 포위되고 어쩔 수 없이 항복한다. 그리고 청나라조정에 의해 처형당한다. 이 사건은 태평천국에서 마지막으로 능력있는 장수의 죽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태평천국이 실패할 운명이라는 것을 선고한 셈이다.
석달개가 떠난 후, 태평천국은 홍수전과 다른 왕야간의 균형을 이루어줄 마지막 군사지도자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때부터, 태평천국내부의 권력투쟁은 더욱 치열해진다.홍수전은 표면적으로 태평천국의 핵심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찌만, 실제로는 이미 효과적으로 국면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각지의 태평군이 궤멸하고 패배함에 따라, 태평천국의 영토는 날로 줄어든다. 외부압력과 내부갈등이 계속 교차하면서, 전체 정권은 만회불가능할 정도로 쇠락하게 된다.
홍수전의 집정스타일은 이때부터 명확히 변화한다. 천경사변이후, 그는 더욱 궁안에 틀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소수의 심복들에 의존하여 정무를 처리한다. 그리고 자신은 종교사무에만 관심을 둔다. 심지어 자신은 이미 완전히 '천부'와 소통했다고 말하며, 거의 국가대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통치방식은 태평천국의 행정시스템을 혼란에 빠트렸고, 각지의 장령들은 각자 알아서 자신이 지키는 곳을 다스렸다. 태평천국은 명존실망(名存實亡)한 것이다.
1864년, 청군은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등 한족장령의 지휘하에, 태평천국에 대하여 최후의 총공격을 가한다. 천경성은 몇달간 포위공격당한 후, 결국 함락된다. 홍수전은 성이 함락되기 얼마 전에 병사한다. 그의 사망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음독자살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천경성의 전염병에 병사했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그의 죽음은 태평천국이 철저히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경이 함락된 후, 태평천국의 잔여세력은 비록 몇번 저항을 해보지만, 결국 청군에 하나하나 소탕당한다. 한때 청나라를 뒤흔들고 만청통치를 뒤흔들었던 농민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난다. 홍수전의 가족과 심복들을 청군에 체포되어 하나하나 처형당한다. 극소수만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민간에 은거해 숨는다.
천경사변은 태평천국의 내부권력투쟁일 뿐아니라, 전체 태평천국을 전성기에서 쇠망기로 접어들게 하는 중요전환점이 되었다. 이번 사변에서, 동왕 양수청의 죽음은 태평천국 내부의 엄중한 권력투쟁과 통지구조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양수청의 죽음은 태평천국의 실제영도권이 와해되었음을 나타내고, 태평천국내부의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천경사변으로 드러난 내부분열, 개인야심과 복수심리는 태평천국이 원래 가졌던 응집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위창휘의 잔인한 수단은 비록 일시적으로 양수청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그 자신의 운명도 이로 인해 훼멸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번 사변이 태평천국 고위층의 통치구조를 파괴시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에는 태평군이 명확한 지휘를 받지 못하고, 내부소모가 너무 심했다.
그외에 천경사변은 태평천국의 종교권위와 현실권력을 갈등을 보여준다. 양수청은 '천부하범'의 신권을 빌어 홍수천의 위에 서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야심은 결국 홍수전과 다른 왕야들이 연합하여 반격을 가하게 만들었다. 이런 권력투쟁이 표명하는 것은 종교권위가 현실정치의 권모술수를 만나게 되면 장기적인 통제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천경사변후, 태평천국은 짧은 몇년만에 신속히 쇠락해버린다. 그 원인은 외부청군의 타격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의 분열과 권력투쟁의 통제상실에 더욱 큰 원인이 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천경사변은 역사비극일 뿐아니라, 정권내부갈등과 인간성의 약점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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