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히터' 송진우(宋津宇)
1983년 필자가 재학중이던 동국대 야구부는 팀 창단 37년만에 봄철연맹전서 감격의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82년 부임한 국가대표 투수 출신(한일은행) 김인식(金寅植. 두산 감독) 감독의 지도 아래 투-타에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며 6승1무 득점 63 실점 21의 파워야구를 과시한 동국대는 4강팀 건국대와 고려대, 동아대를 차례로 누르고 정상에 오른 것.
당시 봄철연맹전서 보여준 동국대의 팀타율은 0.332로 압도적 1위, 방어율은 2.86으로 선동열(宣銅烈)의 고려대와 동률 1위였다. 1946년 야구부가 창단한 이래 준우승만 7차례에 머문 동국대 입장에선 감격의 정도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70년대 중반이후 이광국(李光國. 전 국가대표) - 정구선(鄭求善. 전 롯데-한화 코치) - 이광렬(李廣烈.전 대전고 감독)로 이어지는 '공포의 트리오'에다 김형운(金炯雲. 전 실업 롯데), 최정기(崔正基. 전 LG코치), 고연기(高連基.전 한국화장품) 등을 앞세워 '강팀에는 강하고 약팀에는 약한' 도깨비팀이었던 동국대가 서서히 신흥 강호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배성서(裵聖瑞. 전 빙그레 감독) 감독이 부임하고 부터.
영남대에서 무명선수 김재박(金在博. 현대 감독)을 당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로 조련하며 영남대를 강호로 키웠던 배감독은 동국대를 맡아서도 기존 선수 외에 김성한(金城漢.기아 감독), 장호연(張浩淵.전 OB, 신일고 감독), 한대화(韓大化. 동국대 감독), 김민호(金旻浩. 전 롯데. 동의대 감독) 등을 영입하며 내실을 다져 나갔고, 동국대를 강호의 반열에 올려 놓은 뒤 1982년 감독 바톤을 김인식(金寅植. 두산 감독)감독에게 넘겼다.
★1983년 당시 동국대의 첫 우승 멤버는 대회 MVP로 뽑힌 김민호(金旻浩. 동의대 감독. 1루수)를 위시하여 김봉근(金奉根. SK 코치. 투수), 김영신(金榮伸.전 OB. 작고. 포수), 이건열(李建烈.기아 코치.1루수, 대타), 백인호(白仁浩.기아 코치. 유격수), 김평호(金平鎬.두산 코치.중견수), 민문식(閔文植. 전 빙그레.세광고 감독.투수), 이문한(李門翰. 삼성 스카우트.투수), 강정남(姜政男.전 해태.좌익수), 황종선(黃鍾先. 전 한일은행.2루수), 임동구(林東求.전 한국화장품. 3루수), 이일용(李日鏞. 전 한국화장품.3루수), 류우석(柳佑錫.전 한일은행.우익수), 이중화(李重和. 전 빙그레), 박철우(朴哲祐. 기아 코치) 등이다.
1984년 김인식 감독의 동국대는 전년도 첫 우승의 여세를 몰아 대통령기대회에서 동아대를 8-6으로 누르고 또다시 우승을 거머쥐었다. 1학년생 투수 송진우(宋津宇. 한화)가 대학무대에 첫 선을 보이며 스타로 발돋움하는 대회였다<위쪽 사진>. 83년 세광고를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이끈 송진우로선 2년간 고교-대학 마운드를 내리 제패하는 가슴 벅찬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끝이었다. 대통령기대회 이후 송진우는 동국대 마운드에서 자취를 감췄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은 '왼쪽 팔꿈치 수술' 때문이라고 했다. 투수가 공을 뿌리는 팔에 칼을 대다니.....그것은 투수로서 끝이 아닌가? 송진우가 빠져 나가자 동국대 마운드도 비상이 걸렸다.
국가대표에 뽑혔던 민문식도 시원찮았다. 세광고 출신 에이스급 선후배가 흔들리면서 그 뒤를 강대호(姜大浩.전 한일은행), 곽현태(郭玹泰.전 삼성), 이동석(李東錫.전 빙그레), 김정수(金正洙.심석종고 출신) 등이 어렵게 막아 나갔지만 우승까지 이르기에는 힘겨운 전력이었다.
송진우는 가끔씩 1루 베이스 코치로 나섰다. 동대문구장 1루측 스탠드에서 송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팬들의 입장은 싸늘했다. "송진우 어디갔나 했더니 1루 코치가 됐네...쪽팔리겠다..."하는 비아냥도 들렸다. 그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필자는 김인식 감독의 배려였다고 생각한다.
투수 출신인 김 감독은 자신이 직접 스카우트한 송진우가 수술 후유증을 딛고 재기할 수 있도록 경기감각도 되찾고 정신무장도 더욱 단단히 해줄겸 1루 베이스 코치로 내보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당시 언론은 김인식 감독의 지도력에 대해 "투수들을 철저히 보호하면서...선수의 개성을 최대한 살린다"고 찬사를 보냈다.
김인식 감독은 투수 운용에서 절대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우승만을 위해 무리수를 두었더라면 오늘날 송진우, 이강철(李强喆. 기아)이 여전히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지금 두 선수는 여전히 한국 프로야구의 살아있는 전설들 아닌가? 송진우는 프로야구 최다승 기록을 그려나가고 있고, 이강철 역시 마무리로 보직을 바꿔 최다탈삼진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85년 동국대 김인식 감독은 송진우가 이탈한 마운드에 광주일고 출신 이강철을 스카웃하였다. '고교스타' 박준태(朴俊泰.전 LG)와 함께 입단한 이강철은 대학무대에 데뷔하자마자 봄철연맹전에서 7게임 출전 5승 무패 방어율 0.64의 '강철 어깨'를 뽐내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2만여 관중이 몰린 잠실구장에서의 결승리그 마지막 경기 동국대-성균관대전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국대는 이날 1년생 새내기 이강철의 호투(6안타 1실점 8삼진)와 백인호-박철우-이건열-김평호-임동구-이상철(李想鐵. 전 한일은행. 포수)-한경수(韓京洙.전 제일은행)-박준태-이중화 등 전원 국가대표급인 방망이들이 맹위를 떨치며 한희민(韓禧敏)의 성균관대를 8-1로 대파했다. 이강철의 전면 등장은 송진우가 부담없이 재활하며 타격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986년 동국대 야구부는 5점을 주면 10점을 뽑는 가공할 타격을 앞세워 '리틀 타이거즈'란 닉네임이 붙어 있었다. 그해 4개의 전국대회(봄철리그 준우승,대통령기 우승,백호기 준우승,가을철리그 준우승)에서 모두 결승에 오르는 진기록을 낳으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어느덧 송진우의 재활도 마무리되었고 가을철리그서 보여준 투구내용도 안정감있는 모습이었다. 87시즌이 오픈되자 송진우는 중견수겸 마무리 투수로 그라운드에 본격적으로 컴백했다. 그리고 그가 맡은 보직은 팀의 주장이면서 4번타자.....
송진우의 진가는 87년 백호기대회에서 여실히 보여줬다. 4게임 출장 14타수7안타 홈런2 타율.500에 10과 2/3이닝을 던져 1승 방어율.84 자책점은 1을 기록했다. 특히 마지막 결승전 부산산업대(현 경성대) 경기에선 백스크린을 넘기는 135m 초대형 홈런을 날려 팬들을 열광시켰다. 파워히터 송진우의 등장. 그는 또 9회말에는 이날 11 탈삼진을 뺐어낸 선발 이강철을 구원 3명을 내리 삼진으로 돌리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3년 가까이 함께한 마음고생을 훌~훌~ 털어내는 순간이었다.
당시 하일성 KBS해설위원은 "송진우는 투수면 투수 타자면 타자 어느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무엇을 해도 프로에서 성공할 선수다" 고 칭찬했다. 필자 추측에도 송진우는 프로 입단을 앞두고 투수냐 타자냐를 놓고 조금은 고민했을성 싶다. 그만큼 그의 타격은 훗날 등장한 이병규(李炳圭) 만큼이나 부드러웠고 힘이 있었다.<2003.9.15>
★송진우가 모르는 대학시절 에피소드 하나 : 87년 봄철리그 결승전은 동국대와 연세대가 맞닦뜨렸다. 동대문구장서 야간경기로 치러진 경기에서 송진우는 중견수로 출장했다. 당시 필자는 동국대 응원단과 함께 외야 우측 스탠드 중견수 바로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1루측과 외야 우측 스탠드는 동국대 응원단으로 꽉 들어찼다. 조계현(趙啓顯)을 앞세운 연세대와 이강철(李强喆)의 동국대는 0-0으로 팽팽한 투수전을 전개했다. 중견수 송진우는 힐끔힐끔 외야 스탠드의 동국대 응원단에 눈길을 보냈다. 필자가 보기에 외야석 응원단에 신경을 쓰는 듯 보였다.
1루에 주자가 있는 상황. 바로 그때 연세대 선수가 친 타구가 중견수 앞에 떨어졌다. 히트앤드런. 송진우는 부랴부랴 공을 주워 3루수에게 공을 뿌렸는데 자세가 다소 헝클어져 있었다. 경기에 집중했더라면 충분히 잡을 수도 있는 타이밍이었지만 송구가 나빴다. 결과는 세이프. 0-0 박빙의 상황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에러를 범한 셈이었다. 결국 연세대는 후속 타자의 희생플라이로 1점을 뽑아 1-0 승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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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송진우 선수 타격폼도 인상적이고, 투수환호하는 뒷모습의 구름관중도 정말 인상적이네요~~ 대전야구장 언제쯤 만원될런지....
앙~ 회장님....ㅠ_ㅜ 멋지세요... 어쩜 그렇게 멋지신거예요~ㅜ_ㅠ
세광고 황금사지기 우승은 83년도 아니고 82년도 당시 송진우선수2학년때 입니다 참고로 제가3학년 때지요 그때 잠실야구장난리났었고 청주에서는 카퍼레이드하고 덕분에 고교졸업엘범에 칼라판 우승사진 몇장 더 담게되었지만... 테클아님? 82년도 사실보도하는것임
전 회장님을 88년도 세일통상이란 실업팀(제일동포가 운영 - 88년 한해만 존재)에서 당시 계명대 출신 유명선 선수와 함께 동대문에서 첨 뵈었습니다. 야구 좋아하는 촌놈이 첨 야구장을 찾은 날이었습니다. (봄철 실업연맹전쯤 되나보다). 그때의 설레임을 생각하면,...... 아직도 야구를 하고 있는 회장님이
자랑스럽습니다. 인제 얼마나 더 야구를 하게 될까 라는 생각을 할때, 구단에서 아주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해 아쉽습니다. 무리하지 않아야 200승을 남길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