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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권제후... ”
아직 주은의 일로 괴롭지만 다른 일은 어느정도 매듭이 지어진 상태.
평소 원하던 대로 납골당의 주먹만한 흰 도자기 속으로 들어가버린 주은.
그녀를 뒤로하고 시원한 가을바람을 쐬었다.
이제 어느덧 겨울을 바라본다.
몇 년만 있으면 내 나이도 어언 스물다섯이란 말인가.
이젠 대학도 졸업하게 된다.
조금만 머릿속에 여유가 생기려고 하면 제후의 이름이 입에서 자꾸 맴돈다.
그 상처받은 표정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린다.
아무리 말이 막 나온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생각없이 내뱉는 게 아니었다.
“ 젠장. ”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고 제후의 집으로 뛰어갔다.
우리 집과 상당히 먼 거리이지만 두어번 지나쳐 본 곳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내 집처럼 호화로운 아파트까지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상류층이 살 만한 곳.
이 곳에 혼자 있겠지...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3분 후, 아주 산산조각이 났다.
내 눈앞에 있는 상황.
아... 몇 달 전 일이 또 떠오른다.
항상 제후의 패턴은 그랬다.
화냈다가. 미안할 정도로 약한 모습 보이다가. 또 화냈다가...
고로 이번에는 화낼 차례다.
봐라... 저 단호하고 무시무시한 눈빛을.
“ 미안. ”
“ 뭐가 미안하다는거냐. 키스하고 있는 거 깨서? 아니면 전에 한 니 말 때문에? ”
“ 둘 다. ”
제후의 옆에 앉아있는 한 여자.
딱 여우처럼 생겼지만... 실로 미인이었다.
감히 내가 견줄 수 없을만큼.
“ 제후씨. 이 사람 누구야? ”
“ 아는사람. ”
투.욱.
내 가슴으로부터 무언가 큰 덩어리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
한마디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해야 하나.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난... 지금 제후에게 ‘아는사람’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무런 관계없는. 얼굴만 알고 이름만 아는. 말 그대로 ‘아는사람’.
아는사람.
“ 니 취미가 그거냐? ”
“ 어... 어? ”
“ 유서씨. 나가 있어봐. ”
“ 그쪽. 잠깐 저 좀 보고 가세요. ”
제후의 말에 나가는 척 하며 내 귀에 들릴 듯 말 듯 한마디 빠르게 하고 지나가는 여자.
유서랬나..?
난 입을 꾹 다물고 이젠 제후를 응시했다.
“ 말해봐. 니 취미가 그거냐고. ”
“ 그게 뭔데. ”
온 몸이 바닥으로 내리앉을 것만 같았다.
저 시선.
화내는 것도 아니고, 기분 좋은 것도 아니고.
정말 ‘아무 표정 없는’ 시선.
“ 아무 생각 없는 행동과 말로 사람 상처줬다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는 거.
좀 뻔뻔하지 않냐? “
“ 미안해. ”
“ 변명해봐.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거야? ”
“ 변명할 것도 없어. 내 잘못이야. 미안해. ”
내 눈을 찌르는 듯한 따가운 눈초리에 고개를 숙여 피했다.
차라리 화를 내면 그걸로 끝이나는 것이지만... 이건 내가 견디기 어렵다.
정말... 힘들다. 저런 눈빛은.
“ 항상 우리의 분란은 너의 경거망동으로 인해 시작되었어.
조금만 더 주의깊게 살았어도 우린 그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었을거야.
안 그래? “
“ 미안. ”
“ 미안. 미안. 그런 소리 집어치우고 다른 말을 해 봐.
그래... 여기 온 목적이 뭐냐. "
" 사과하려고. “
“ 화해하려는 의도는 또 뭔데. ”
“ 다시 합치자. ”
젠장. 이건 또 뭐란 말인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그냥 해버렸다.
혹시 내가 이걸 바라고 있었을지도...
“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
또 바보같이 사랑 받을 생각도 안 하면서 너를 받쳐 줄 지지대가 필요해?
나 이제 그런 거 안 하기로 했다. “
“ 그게 아냐! ”
소리를 질렀다.
“ 계속 니가 눈 앞에 아른거려.
맞아.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 줄 지지대가 필요한거야. 나는.
근데! 그것보다 더 확실한 이유는... 보고싶었어. “
보고싶었다.
두 번의 사랑에 무참히 실패한 내가. 그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보고싶었다.
그것도 간절하게.
피식-
제후는 실소를 터뜨리다가 표정을 확 굳히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타악-
내 멱살을 잡아 벽으로 몰아붙였다.
“ 사람 함부로 갖고 놀지 마. ”
“ ... 숨막혀. ”
제후는 나를 한참 내려다보며 강하게 말했다.
“ 니가 준 상처는... 여태까지로도 충분해.
더 이상 그 어정쩡하게 이도저도 아닌 말로 날 현혹시키려 들지마.
그럼 이제 꺼져. “
쾅!
제후는 한 주먹으로 내 바로 옆을 쾅 쳤다.
놀라는 내 모습을 오랫동안 보더니 내 팔을 잡아 바깥쪽으로 내던지다시피 한다.
“ 다신 보지 말자. ”
콰앙-
문이 거칠게 닫혔다.
“ 젠장... ”
“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 ”
예쁘게 웃는... 유서였던가?
난 고개를 끄덕였다. 피할 필요 없다.
..
“ 이제 끝난거야. ”
제후는 혼잣말로 자신을 위로시켰다.
그녀를 자신으로부터 떨어뜨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 한 번의 괴로움만 지나가면 그녀는 행복해 질 수도 있다.
자꾸만 자신과의 마찰로 괴로워하는 그녀를 볼 수 없고,
자신을 보면 아프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녀와 마주할 수 없다.
“ 이번 한번만 아파라. 그러면 앞으로 주욱 괜찮아질테니. ”
자신이 왜 소해를 떨어뜨리려 하는지 솔직히 제후 자신도 몰랐다.
그냥... 마음이 말해주더라...
#23
“ 그냥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께요. ”
“ 뜻대로. ”
“ 이제 그만 제후씨랑 관계 끊으세요. ”
“ 이봐. ”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렀다.
예의바르고 절도있게 앞에 놓인 카푸치노를 한 입 마신 후, 본격적으로 입을 뗐다.
"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 “
“ 저기, 처음 보는 사이인데 너무 말씀이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
난 싱긋 웃었다.
어리석은 인간. 난 이런 게 제일 싫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필요 이상으로 남에게 간섭하는 거.
“ 정신이 제대로 놓여 있다면 지금 내 눈을 바라봐.
힘든 일 다 겪고 난 여자를 불러다가 귀찮게 하는 게 더 지나친 행동 아닐까 싶은데. “
“ 제후씨 당신 이제 쳐다봐주지 않을거예요. ”
“ 알아. ”
“ 그러면 제후씨를 위해서라도... ”
“ 이봐. ”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제후를 위해서라도...? 난 이래서 가식이 싫은 것이다.
남을 위하는 척 하면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
“ 제후를 위해서라고 방금 그랬는데 사실은 그쪽 자신을 위해서 그런 거 아냐?
누군가를 위한다는 말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거.
좀 보기 안 좋아. “
“ 지금 그 쪽 위험해요. ”
“ 난 권제후 만난 이후로 쭉 위험했어. 충분히. ”
“ 지금 내 말 안들으면 당신 죽을지도 몰라요. ”
“ 원래로 따지면 5년 전에 죽었어야 했어. ”
세후와 함께 죽었어야 했다. 만약 5년 전에 내가 죽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많은 것이 안정되었을 것이다.
제후는 조금 힘들어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주은은 그녀만큼이나 멋지고 엘리트한 남자와 연애하며 웃고 있겠지.
“ 내 말 들어요. 아니면 정말 당신 후회해. ”
“ 또 누가 보내서 왔나보네. 야쿠자 집단? 다카하시 일가 이야기라면 충분히 알아. ”
“ 나한테 하나만 약속해요. 제후씨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
“ 미안한데 불가능하겠네. ”
타악-
커피 잔을 비우자마자 난 테이블을 탁 치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 나한테 협박하지 마. ”
냉정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뒤돌아섰다.
“ 그쪽. 후회하게 될 거예요.
지금 제가 한 말. 저 좋으라고 한 소리 맞아요.
하지만 내 말 안 들으면 당신 죽어.
당신 죽게 내버려둘거야. “
" 뜻대로. “
그 한마디를 하고는 카페 문을 나섰다.
위험하다. 위험... 난 위험을 두려워한다. 거의 공포스러울 정도로.
겉으로만 태연한 척 하는 것이다.
적응이 되었다고 해서 무뎌진 건 아니니까.
..
내가 그 ‘위험’ 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난 다른 날과 여김없이 대학 강의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요즘 많이 빠지기는 했지만... 끝까지 좋은 모습으로 학교를 마치고 싶었다.
학이시습지 이면 불역열호하라...
공자가 한 말이다.
배우고 익히면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그래서 난 공부를 하는 것이다.
“ 저기. 소해야? ”
“ 네. ”
유진서. 스물다섯 4학년짜리 남자이다.
저번에 이 남자와 논문에 대한 논의를 실컷 하다가 뻗어버려서 집에 안겨 들어왔을 때,
제후의 오해를 한껏 샀었지.
하지만 음흉한 남자는 아니다. 훌륭할 정도로 매너 좋은 사람.
“ 밖에 누가 기다리는데... ”
" 그럼 가 봐야겠네요. 고마워요. “
“ 잠깐만. ”
진서는 내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작고 빠르게 말했다.
“ 널 기다리는 사람들 눈치가 심상치 않아.
저번 재판 일도 그렇고, 요즘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일단 조심해. “
“ 고마워요. ”
진서를 안심시키려고 한번 싱긋 웃고는, 문을 빠르게 나섰다.
늦게 질질 끈다고 해서 있을 위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피할 수 없다면 일찍 부딪혀보자는 게 내 인생 패턴.
“ Excuse me. "
내 팔을 강하게 붙잡으며 말하는 남자.
동양계 사람인데... 일본인 같은데 영어를 한다.
한국말을 못 해서 그런가...
[ 잠깐 따라나와보죠. 당신을 보고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따라갔다.
시선을 한번에 끌 정도로 독특한 무리.
한명은 기모노를 입었고, 나머지는 결코 평범치 않은 차림새이다.
피하려고 해도 절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 좌우전후를 다 막고 있는 그들.
날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는 교수님에게 손을 살짝 들어보이며 웃어주었다.
별 일 아니라는 듯이.
탁-
[ 타십시오. ]
난 군말없이 검은색 번쩍이는 승용차 뒷좌석에 올랐다.
내 얼굴과 종이 한 장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뒷좌석 한 남자.
[ 이쯤이면 신분을 밝혀도 되지 않을까요? ]
내 옆에 앉은 사람에게 물었다.
앞쪽 거울을 통해 나를 강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일본남자.
아무래도 이 사람이 우두머리인 듯 했다.
[ 말해줄 만한 게 아닌가요? ]
터억-
그 남자의 손이 내 왼 팔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엄습한 고통과 공포.
어느정도 예상은 하지만, 막상 직접 겪고 나면 예상이고 뭐고 소용없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내 왼손에 손가락만한 병을 건네주었다.
무슨 화학실험할 때 쓰이는 조그마한 관 같기도 하고...
“ Drink it. "
마시랜다. 뭘 믿고?
그 남자는 팔을 풀고는 또다시 거울을 통해 나를 노려보았다.
난 뚜껑을 열었다.
내가 먹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먹일 터.
[ 딴 건 모르겠는데 말야.
내 주변은 건들지 마. 아무리 다카하시 집안 야쿠자라고 해도 그럴 권리는 없으니까. ]
그 말을 마치고 약을 원샷했다.
그다지 쓰지도, 달지도 않은 맛이었으나,
그 어중간한 맛이 더 싫었다.
순간 내 머릿속이 꼬이는 듯 어지러워지더니,
세포가 점점 줄어드는 것 처럼 몸에 기운이 빠지더니 눈이 감겼다.
제발... 내 주변사람이 고통받지 않기를.
또한 이번이 마지막이 되기를. 내가 죽더라도.
#24
“ 이소해! 이소해! ”
나를 애타게 부르는 한 남자.
능숙하면서도 약간 부자연스러운 감이 없지않아 있는 독특한 말투.
츠카사였다.
“ 다카하시...? ”
“ 맞아. 일어나봐. ”
내가 있는 곳은 일본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곳의 넓은 방.
보통 사극에서 죄인 가둬놓을 때 쓰이는 창고가 아닌,
주인 안방마님 방처럼 넓고 깨끗한 곳이었다.
단지.. 거슬리는 게 있다면 내 팔과 다리를 묶고 있는 새끼 손가락 만한 굵기의 쇠사슬.
철컹철컹 거리는 것이 청각적으로 심히 고통스럽다.
“ 여기가 어디야? ”
“ 홋카이도. ”
“ 일본? ”
“ 우리집이야. 미안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
츠카사는 내가 다리 뻗고 앉아 있는 곳 옆에 와서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니가 미안해할 것 없잖아.
어차피 이런 일을 많이 겪었던 나야.
그리고... 이번에는 못 피할지도 몰라.
여기에 뼈를 묻을지도...
드르륵-
( 이 여자가 일어나면 즉각 연락하라하지 않았느냐! )
엄청 화난 듯한 어조의 일본어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딱딱해보이는 기모노 차림의 한 일본 남자가 보였다.
츠카사의 아버지인가.
( 하지만... )
( 변명따위를 듣고자 하는 게 아니다. )
( 아버지! )
몇 몇 단어밖에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라던가... 아니다... 뭐 이런 것 밖에는.
“ 지금! ”
내가 강하게 소리치자 옆에 있는 사람이 통역을 해 주었다.
“ 당신 뭐 하자는 겁니까? ”
그리고 잠시 후에 들리는 통역사의 말.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다.
“ 보이는 대로. ”
“ 날 해치기 위한 계략입니까? ”
“ 널 이용하기 위한 계책이다. ”
“ 나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 나를 도와라. “
“ 야쿠자를 도우란 말이라면 얼토당토 않아요. 당연히 거절합니다. ”
“ 너에게는 선택권이 없어. ”
내가 응하면 난 큰 일본 야쿠자의 부하가 되는 것이고,
응하지 않으면 죽는다.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권밖에는...
“ 차라리 죽고 말지요. ”
“ 너에게 부은 시간은 어마어마하다. 그냥은 안 돼. ”
“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도와준다는 약속입니까. 아니면 다른 증표입니까? “
“ 츠카사와 혼인해라. ”
( 아버지! )
옆에서 츠카사의 당황한 말이 들렸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아들을 이용해서 사람을 붙잡아 세우려는 얕은 수작.
하기사... 말 한 마디보다는 차라리 몸을 잡아 두는 게 나을테지.
사랑이 없는... 그야말로 비즈니스 적인 혼사를 원하는 것이다.
“ 거절합니다. 사랑 없는 혼인은 할 수 없어요. ”
“ 후회하지 않느냐? ”
“ 물론입니다. ”
야쿠자 두목이자 츠카사의 친아버지인 이 사람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깊은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어있다.
감정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는 것, 조폭 두목답다.
“ 약속한다. 반드시 닷새 안에 니 입에서 직접 혼인하겠다는 말을 들어보이겠다. ”
“ ...? ”
“ 주변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천천히 그 5일동안 즐겨보도록. ”
철컹철컹-
난 앞으로 나가서 저 사람을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건들지마! 불행한 건 나 하나만으로 족하잖아!
대체 주변 사람이 무슨 상관이냐고! “
거친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 소해야. 정신차려. ”
츠카사는 뒤에서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그제서야 내 발악은 잠잠해졌다.
딱딱하고 고요한... 절대 정겨울 수 없는 분위기의 이 방.
정말 선택권이 없다.
남을 불행하게 만드느냐, 내가 불행해지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 누워. 그리고 자. ”
두 팔이 허리 뒤로 가 묶인 채로, 츠카사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이 사람이 나를 친구로만 봐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분명 두목이 한 말은 츠카사에게 좋을 수도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츠카사는 상처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씩... 천천히...
“ 나는 걱정하지 마. ”
달콤한 츠카사의 음성을 들으며 정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 주변의 희생양... 부디 그것이 단순한 협박에 불과하기를 바라면서.
..
콰앙-!!!!!
현관이 거칠게 열리고, 유서와 쇼파에 앉아있던 제후는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 보이는 것은 뭔가 낯 익은 한 남자.
“ 뭐야. ”
“ 이소해가... 사라졌어요. ”
“ 언제부터? ”
제후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생각이 들어 표정을 바로잡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옆에 은근슬쩍 들러붙는 유서를 살짝 떼어내며.
이 앞에 있는 사람. 유진서.
소해를 끌어안고 나타나서 자신을 화나게 만든 장본인.
지금 그의 표정은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 심상치 않은 사람들에게 불려간 뒤로 연락이 두절되었어요.
제발 그런 냉랭한 눈 하지 마시고 찾아보십시오.
일본 계통 사람 같았습니다. “
정말 다급한 모습에 제후는 벌떡 일어서서 그 남자 앞으로 무섭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멱살을 잡았다.
“ 아는대로 말해. 아는 대로. 정확하고. 자세하게. ”
#25
“ 유진서. 서울대 물리학과 4학년. 스물다섯살.
그 여자의 행방을 전 남편에게 알려줬어요. “
타악-
어둠 속에서 전화를 끊은 여자.
유독 빛나는 눈빛은 긴장감과 사악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도 제지할 수 없을 정도로.
..
“ 소해야. 일어나봐. ”
내 팔을 조심스레 흔드는 츠카사.
눈을 떠 보니, 어두컴컴한 방에 은색 달빛만이 은은하게 비추어 올 뿐,
그 어떠한 빛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배가 고파왔고, 목이 말랐다.
그래서 죽어가는 표정을 지으며 츠카사의 무릎에서 머리를 떼었다.
“ 왜 그래? ”
잔뜩 굳은 표정으로 어느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츠카사.
난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보이는 것...
그 어두운 곳 중 유일하게 글씨마저 읽을 수 있을만큼 달빛이 들어오는 곳에는
유진서가 있었다.
“ 오빠? ”
“ ... "
아무런 대답이 없다.
몸이 다시 가늘게 떨려온다.
또 나 때문에... 이거 순 나 때문이잖아!
마치 판타지 소설 표지에 나오는 검은 날개 천사처럼
양 팔이 들린 채, 벽에 묶어있는 유진서.
철컹철컹-
달려가려고 오른팔을 심하게 잡아당겼다.
하지만 될 리가 없지.
확실히 난 쇠보다는 힘이 약했다.
“ 아으... ”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한방울 떨어졌다.
“ 제발... ”
제발 바란다. 이것이 꿈이기를.
내일 아침 일어나면 제후가 깔끔하게 외출복을 차려입은 채, 웃고 있고
난 귀여운 애들을 보면서 강의 갈 준비를 하게 되기를.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상이, 지금 와서는 너무 행복하게 여겨졌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야쿠자 우두머리.
“ Look... "
영어 한 단어 간단히 하더니 칼을 뽑아들었다.
스릉-
내 팔뚝 길이보다 긴 장검이 날카롭고 위협적으로 빛났다.
두목은 그 칼을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 No... 안돼! ”
예감했다. 엄청나게 불길한 기운이 내 안으로부터 치고 올라왔다.
스윽-
칼이 반지름 1m짜리 원을 그리는 그 짧은 0.2초동안.
나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빨리 이 저주받은 꿈에서 깨어나기를.
하지만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으윽... ”
안 그래도 상처투성이라서 의식도 없던 진서는 또다시 엄습해오는 고통에 신음을 내었다.
칼날을 타고 흘러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피.
팔을 그었으니 죽지는 않은 것이지만...차라리 그게 더 괴롭잖아.
치료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 이젠 건들지 마! ”
“ 두목님 대신 내가 말하도록 하지. 내걸었던 조건에 응해라. ”
“ 어제... 저 사람이 내게 약속한 게 있지.
닷새 내로 오케이 대답을 받아내겠다고 말야.
난 말야... “
눈물이 한방울 더 떨어졌다.
“ 괜찮아... ”
간신히 입을 떼서 고개조차 들지도 못한 채 내게 조용히 말하는 진서.
그리고는 완전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정신을 놓은 것이다.
“ 반드시 약속한다. 5일 버텨내고 나도 죽을거야. 알았어? ”
이미 여러개의 죽음을 보았다.
그냥 5일만... 120시간만 버텨내면 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미 1일이 흘렀다.
내가 한 일은 저 하늘에 가서, 그 때 나 때문에 희생된 그들에게 용서빌어야지.
반드시 저 악독한 인간의 심복이 되지는 않을거야.
츠카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절대 그러지 않을테니...
“ 이겨낼거야. 알았어? 당신들 조심하라고! ”
빠악-
그 심복 비슷한 남자가 와서 내 배를 세게 걷어찼다.
“ 으... ”
“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헛소리 하지 마라. ”
뒤로 묶여있는 손이 심하게 저려온다.
“ 쿨럭... ”
연신 기침을 해댔다.
고통을 참을 수 없다. 몸의 고통도, 마음의 고통도.
악으로 버텨내고야 말겠다.
단 한 사람만 이 젠장맞은 표적에 걸리지만 않는다면야.
..
" 이 자식... 어디로 간 거야. “
이틀 째. 일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미친듯이 막무가내로 소해를 찾아 달린 제후.
지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고 그 여자는 지켜내고 싶었다.
강한 척, 이길 수 있는 척 하면서 정작 도움을 받아야 승리할 수 있는 여자.
그래서 더욱 지켜주고 싶은 여자를...
제후는 간절하게 사랑했다.
“ 이젠 가란 소리 안 할거야! 그러니까... 돌아와줘. ”
#26
“ 으으... ”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을 놓았나보다.
일어나보니 난 한 침대 위에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 내가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빌었어. ”
츠카사가 내 머리 위에 수건을 얹어주며 미안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말했다.
난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츠카사도 나 때문에 희생된 사람이 아닐지...
드륵-
내 행동 일거수 일투속이 모두 감시되나보다.
내가 깨어난 지 5분만에 문이 드르륵 열리고, 이번에는 엄청 억세게 생긴 사람 10여명이 들어왔다.
그리고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들고 있는 것은 주사기.
전.혀. 주사와 어울리지 않는 외모에 그것을 들고 있으니
병을 치료하려는 것 보다는 병을 내려는 듯 보였다.
사실... 의도도 그거 비슷하겠지만.
( 그게 뭐냐. )
( 잠자코 있어주십시오. 무력으로 해결하기는 싫습니다.
두목님의 명령입니다. 저항하시면 아마 저 여자가 더 위험해 질 겁니다.
죄송합니다. )
알 수 없는 일본어가 들리고...
츠카사는 경계하는 눈초리를 했지만 몸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주사기에 몸을 맡겼다.
반항은 헛된 거라는 것을 잘 아는 것일테지.
드륵, 탁-
문이 닫히고 찰칵 소리와 함께 잠구어졌다.
( 젠장... )
팔에 놓인 주사기를 뽑아 냄새를 맡아보고는 끔찍하다는 표정을 짓는 츠카사.
아마 생명에 지장이 가는 것은 분명히 아닐텐데.
난 걱정이 되어 츠카사에게로 다가가 팔을 잡았다.
타악-
강하게 뿌리치는 츠카사.
표정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굳어있었다.
“ 다가오지마. 그냥 나한테서 최대한 떨어져 있어. ”
“ 응? ”
타악-
츠카사가 나를 밀쳐내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앉아서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대체 무슨 약이길래...
“ 대체 왜 그래? ”
“ 최음제... ”
아뿔사... 싶었다.
최음제가 무엇인가. 대부분의 성인남녀는 알 만한 것.
소위 ‘흥분제’ 라 하는 것이었다.
왜 있잖은가... 자신이 제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적으로 흥분하게 만드는 약물.
고등학교에서 화학 선생님이 애들에게 흥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며 설명하던 것.
물론 화학기호 등이 잔뜩 포함된 설명이었으나 워낙 인상적이었다.
내가 그런 류의 내용을 좋아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 ... "
난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가서 침대 위쪽 구석에 쪼그려앉았다.
복용도 아니고 ‘주사’ 를 한 것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효능이 좋다.
고로 난 위험하다.
셋째날 아침이다. 그 둘째 희생양이라는 게 나였던가.
그러고 보니 바깥에 커튼으로 가려져있어 어두침침한 것이 이상했다.
난 정녕 바보인 것인가.
“ 이소해... ”
“ 어, 어? ”
츠카사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비디오로 찍었다면 ‘느린재생’ 으로 착각할 정도로 느릿느릿 내게 다가왔다.
얼굴은 약물의 영향으로 살짝 붉어져 있었다.
대체 자기 아들한테 최음제를 놓는 아버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 나... 미치겠다. ”
“ 그건 미투이긴 한데. 엇...! ”
침대로 올라와서 그대로 나를 끌어안아버리는 츠카사.
이건... 너무 위험하잖아.
인내를 하는 중인지 몰라도 츠카사의 몸은 가늘게 떨려왔다.
“ 다카하시. 정신차려. 어? ”
“ 하아... ”
뜨거운 신음소리가 내 귀를 울려왔다.
내 머릿속에는 붉은 색 경보가 강하고, 뚜렷하게 울렸다.
난 두 팔로 츠카사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제발... 읍... ”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거칠게 갖다대는 츠카사는, 그대로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유지된 모호한 자세.
잠시 후에 내 블라우스는 그의 손에 의해 단번에 뜯어졌다.
“ 그만하라고! ”
내 쇄골에 고개를 묻던 츠카사는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잘못을 알았는지 떨리는 두 눈동자.
그 때문에 난 화낼 수 없었다.
화학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최음제의 효과.
대충 계산해 보면 츠카사가 이 정도로 참은 건 신이나 가능할 정도이다.
“ 좀 나와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 미안하다. ”
“ 미안할 거 없어. 일종의 화학반응이잖아. ”
츠카사는 내게서 떨어져 나왔다.
“ 미안... 근데... 아무래도... 너 그냥 이불 뒤집어써라. ”
눈을 꼭 감고 내게 말했다.
원래 체질상 약효를 잘 받는 스타일인가... 굉장히 괴로워보인다.
난 시키는 대로 군말없이 따랐다.
내 지식에 의하면 약효는 적어도 30분 이상 가는데...
“ 젠장... ”
“ 우, 운동을 해 보는 게 어때? 에너지소모를 하면 한결 나을 것 같은데. ”
“ 좋아. ”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이불 너머로 들려오고, 난 안심이 되었다.
눈을 감았다.
몰려오는 졸음과 이어지는 불안감.
이 언밸런스한 두 개의 감정이 뒤섞였다.
셋째날 두 번째 희생양은 실패로 끝났다.
네 번째는 또 어떤 무고한 사람이 된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며.
억지로 애써서 잠에 빠져들었다.
하루에 스무시간을 넘게 잔다는 사자처럼...
#27
위잉-
오후. 딱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을 즈음에, 이 방 천장으로부터 스크린이 나왔다.
난 창문 너머로 저 아름다운 세상을 쳐다보다가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츠카사는 가장 위험하고, 나를 가장 괴롭히게 될 희생을 막겠다고 나갔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 곳에는 나만 있다.
그리고 파박 소리에 뒤이어 나오는 한 넓은 홀.
무대 위 열정적인 동작을 보아하니 난타공연이 한창인 듯 했다.
스트레스를 확 풀어주는 소리가 이 방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이 영상은 내게 스트레스를 배로 안겨 줄 거라는 것을.
“ 몰래 카메라... 생방송이랄까... ”
한국말을 할 줄 알던 전에 그 야쿠자가 내게 와서 말했다.
저게 생방송이야?
그리고 곧 클로즈업되는 한 남자.
“ 이... 런... ”
내 입에서 굵직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눈에 들어온 아동모델 뺨치게 귀여운 사내아이는 바로 희소.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역시 잘 생긴 비소와, 그들에게 음료수를 건네어주는 클라우드.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아이들의 존재를 되새기게 될 줄이야...
“ 긴장해도 좋을거야. 이걸 직접 보여주지 못해 유감이군. ”
다시 화면은 멀어지고, 또다시 한 곳에 클로즈업 되었다.
그것은 가스 누출 경보기.
그냥 파란 불빛을 유지한 것이 2분...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귀를 먹먹하게 울릴 정도로 큰 소리에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피하세요! 위험합니다! ”
관리자의 다급하고 초조한 음성이 방송을 통해 들렸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콰앙-
닫히는 문.
허둥지둥 목숨의 유무를 놓고 1초라도 먼저 나가려는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어린이아들.
난 그 참혹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저 아이들 중 우리 희소, 비소가 섞어 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그리고 잠시 후...
퍼엉!!!!!
뭔가 크게 폭발하는 음이 들리자마자 붉은 색이 시야를 확 가리더니
영상이 사라졌다.
내가 이 10분만에 일어난 상황을 보았던 스크린은 아무것도 없는 흰색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우리 희소는... 비소는?
위치상 절대 빨리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었는데...
“ 끝에서 두 번째... 그러니까 세 번째 희생이다.
너로 인해 옛 사랑의 절친한 친구와 그의 아들, 그리고 니 전 남편의 아들이 죽었어. “
멍해져서 그냥 입을 살짝 벌리고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 자책해라. 마음껏 괴로워해라.
솔직히 난 두목님의 의견에 반대다. 너 같은 여자는 필요없다고 생각해.
그냥 마지막 가장 큰 하이라이트격 희생을 지켜보고는 죽어라.
너 때문에 죽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죽어버려! “
죽어버려!
죽어버려!
죽어버려!
야쿠자의 말이 마치 산 속에서 메아리치듯 머릿속을 울렸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주어가면서 죽어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행복이고 뭐고 없이 불행으로 인생을 끝마쳐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비극을 겪어야 하는가.
“ 으아아아악!!!!! ”
괴로움에 젖어든 내 비명소리가 내 마음처럼 비워져버린 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괴롭다. 그리고 아프다.
..
“ 소해야. 오늘은 어디갈래? ”
“ 오빠. 우리 오늘 영화보러가자. 그 베스트셀러였던 책이 영화로 나왔었잖아.
이틀 전인가? “
열아홉살.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재학중인 평범한 외모의 여학생.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역시 평범한 남학생.
두 대학생은 여느 연인들과 다름없이 나란히 서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곳은 시내 거리나 공원이 아닌, 대형서점이라는 것이지만.
두 사람은 독서를 즐겨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 년이 지나 가정을 꾸려가면서 자식들에게 독서를 권유할 것이다.
책 속에 쓰인 글의 아름다움과 내용의 경이로움을 강조해가면서.
“ 우리 영화는 심야로 보고, 밥 먹으러 가자.
진짜 근사한 곳 해 주고 싶은데 내가 돈이 많지 않으니까...
너 좋아하는 거 뭐 있지?
맞다. 스파게티. 그거 사 줄게. “
“ 오케이. 좋았어. 오빠. 가자! ”
남자의 팔에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걷는 여자.
남들이 시샘할 정도로 사이좋아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워보였다.
얼굴이 아름다웠다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감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 오빠. 난 정말 행복해. ”
“ 왜? 더 좋은 남자도 많잖아? 왜 나야? ”
“ 오빠, 지금 테스트하는 거지! 그치? ”
“ 당연하지! 통과 못하면 넌 짤리는거야. 빨리 말 해. ”
장난스럽게 여자를 다그치는 남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담겨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행복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빛낸다.
“ 일단... 오빠는 착하거든. 좀 못된 내 성격 고쳐 준 사람이 오빠잖아?
솔직히 고등학교 때 나는 거의 악마 수준이었거든.
너무 찌들렸었나봐. “
“ 하긴... 좀 적당히 하지 그랬어. ”
“ 아니야. 덕분에 오빠랑 같이 대학생활 할 수 있잖아? ”
“ 학교가 다른데? ”
“ 에이. 그건 상관 없다! ”
여자는 찰싹 소리나게 남자의 팔뚝을 쳤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 두 번째는 나한테 책 많이 빌려주잖아.
책은 마음의 양식! 오빠 덕분에 난 부자야. 부자.
돈만 많다고 부잔가? 일단 사람은 마음이 넉넉해야되는거야. “
여자는 손을 휘둘러 허공을 한 줌 잡으며 말했다.
넉넉한 마음을 지닌 여자.
“ 오빠, 나 하고 싶은 거 있다? ”
“ 뽀뽀? ”
“ 그거 말고. ”
남자의 짖궂은 대답에 여자는 예의 그 보기좋은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 우리 여행가자. 이 한 순간 한 순간을 소중하게 보내고 싶어. ”
“ 왜, 나중에는 안 볼꺼야? ”
“ 아니~ 오빠 몇 년 후에 직장생활하고... 나도 바쁘고...
혹시 알아? 애가 생겨서 여행은 꿈도 못 꾸게 될 지.
그러니까 일치감치 추억을 남겨두자구요. “
“ 오랜만에 귀여운 발상이다.
그럼 밥 먹고 도로 여기에 와서 여행잡지나 좀 뒤져볼까? “
“ 좋아! ”
남자는 꽤나 터프한 팔놀림으로 여자의 어깨를 턱하니 감싸안았다.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면서.
#28
‘ 케네스 리빈드의 의뢰인 여대생, 실종. ’
‘ 그녀의 측근들이 일을 내팽개치고 애타게 찾고 있는 모습 포착. ’
이런 기사들이 신문에 실렸고, 어떤 것은 1면에까지 실렸다.
소해에게 취재를 부탁하려고 하던 기자들은 아연실색하였지만,
오히려 이런 것이 더 특종감이라는 생각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 젠장... ”
제후는 분한 듯이 땅바닥을 주먹으로 쾅쾅 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옆에 있는 호진도 욕 비슷한 꼬부랑말을 중얼중얼 주저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다급함과 초조함이 가득 들어있었다.
게다가 소해의 부모로부터 걸려 온 전화는 제후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부모는 아직 소해의 이혼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소해가 말한 적 있었다.
‘ 우리 이혼한 거 알면 아빠가 너 죽이려고 할거야. 그러니까 말 안 해. ’
게다가 처제... 막 고등학교 졸업한 처제에게서 걸려온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 형부. 대체 무슨 일이에요? 우리 언니가 왜 실종이야... ’
별반 도움 안 되는 말로 오히려 제후의 심기를 어지럽히기만 했다.
제후는 전화를 끊다못해 박살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아마 심란함을 달래려 여행을 갔을 거라고...
그것은 그의 바램이기도 했다.
“ 여기들. ”
문에서 당당하게 들어오는 한 일본남자.
일본인 치고는 키가 꽤 큰 잘생긴 남자였다.
딱 ‘카사노바’ 하면 어울릴 것 같은 외모...
“ 뭐야. ”
쇼타였다. 하나자와 쇼타.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들 앞에 쪼그려앉아 빠르게 무언가를 말했다.
경악한 표정의 제후와 호진.
아마 소해가 지금 있는 곳과 더불어, 그녀가 처한 상황을 알려주었으리라.
휘익- 타악-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른 속도로 한 단도가 쇼타의 등에 박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쇼타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통을 참더니, 이내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쓰러졌다.
“ 젠장... 괜찮아. 급소는 피하지 않았어.
호진. 이 사람 좀 병원에 데려다 줘. “
“ Okay. Don't worry. "
제후는 베란다 문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닫았는데 어느새 열려있는 문.
왠만한 사람이 기어오르는 것은 엄두도 못 낼 거리에다가
이 아파트 경비 시설은 일류호텔을 방불케 한다.
“ 대체 어떻게 들어온거야. ”
제후의 물음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냥 저 문 사이로 들어오는 찬 바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
“ 오빠. 여기가 그 멋지다는 곳이야? ”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바닷가에 위치한 펜션.
저 파도치는 물살이 굉장히 시원해 보이는 한적한 바닷가였다.
노을에 비치는 가을바다는 왠만한 풍경사진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심지어는 신성한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 어. 괜찮지 않아? ”
“ 괜찮은 정도가 아니잖아. 이건... 감동적이다.
대체 펜션은 어떻게 구했어? “
“ 우리 아버지가 펜션 하시잖아. 친구분 꺼지. 이리빌고 저리빌어서 허락받은 거야. ”
그들은 발코니에 있는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가을바람을 만끽했다.
옆에 있던 단풍나무에서 붉은 잎이 하나 테이블 정 중앙에 떨어졌다.
“ 정말 멋지다. 오빠. 진짜 고마워.
이런 곳을 보게 해 줘서... “
“ 우리 몇 년 후에는 더 멋진 곳 보게 될거야. ”
“ 왜? ”
“ 시, 신혼여행. ”
평소답지 않게 얼굴을 살짝 붉히며 수줍게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여자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팡팡 쳤다.
“ 농담두... ”
“ 근데 솔직히 말하면 농담 아냐. 너도 그렇지 않아? ”
“ 맞아. 농담 아니야. ”
여자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스윽-
남자가 조심스레 그녀 앞에 내민 것은 책 한 권.
여자가 재미있다며 빌려 주었던 책이었다.
“ 왜 지금 돌려줘? 집에 가서 줘도 되는데... ”
“ 지금 줘야 돼. 꼭. ”
“ 왜? ”
“ 펴봐. ”
여자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폈다.
그리고 잠시 후, 황홀감에 사로잡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은색 반짝이는 반지 두 개.
노을빛에 빛나 약간 붉으스름하게 보여 더 매력적이었다.
“ 우리 약속하자. ”
“ 뭘? ”
“ 우리 영원히 사랑하기로. ”
“ 그거 당연한 거잖아. ”
여자는 행복하게 웃었다.
남자는 조용히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왼손을 들어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껴 주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걸린 은빛 시계와 멋진 조화를 이루는 반지를 보며
남자는 한층 더 기뻤고, 흐뭇했다.
마치 반지는 그녀를 위해 만든 것 처럼 꼭 어울렸다.
“ 나도. ”
“ 응. ”
여자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가락에 역시 같은 모양의 반지를 끼워주었다.
생전 반지 한 번 껴 보지 않았다는 그 손에 걸린 반지.
반지를 주고받은 그들은 깊고 진한 포옹과 함께 키스를 나누었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저녁 노을 아래에서 실루엣만 간간히 비치는 두 남녀는
행복하고, 미래가 기약된 키스를 나누었다.
영원히 함께할 거라는 그들 손가락 위의 징표가 유난히 더 빛이났다.
..
우리 영원히 함께하자. 소해야.
당연한 걸 뭐 그렇게 다짐받아. 정말 당연한 거잖아
아침마다 태양이 뜨고 저녁마다 달이 뜨듯이...
그런가? 우리 10년 후에는 어떻게 살게 될까?
아마 지금이랑 별반 다를 거 없을거야.
우린 여전히 행복하고, 여전히 웃고, 여전히 함께하고 있을거야.
혹시 모르지. 아이가 있을지. 후후...
난 이 부족함 없는 인생 중에서 널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기뻐.
학교에서 나를 알아준 너에게 정말 감사해.
이런게 운명이 아닐까 싶어. 오빠.
우리 진짜... 영원히 함께하자. 죽을 때 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쭉..
#29
“ 아아... ”
잠에서 깨어나 또다시 달빛과 마주하며 신음을 내뱉었다.
가슴을 한 손으로 감싸쥐었다. 그 만큼 괴로웠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왜 그토록 행복한 꿈을 꾸게 된 것인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정말 완벽한 꿈을 꾸고 난 후 느껴지는 허무함 같은 거.
“ 젠장할... ”
내가 겪었던 일이 아니었다.
단지 내가 ‘겪고 싶었던’ 내지는 ‘겪게 될 줄로만 알았던’ 일이었다.
그 날 사고만 없었어도 아마 그 일은 거의 그대로 실현되었을 것이다.
첫 번째 그, 최은호.
가장 내게 큰 안락을 가져다 주었던 사람이고, 평안함을 선사하였던 연인이었다.
지금 그가 살아 숨쉰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두 번째 그, 권세후.
그가 꿈에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내 앞에서 자신의 외조부로부터 총살당하였던 그 모습만 생각하면... 지금도 죽을 것 같은 심정.
만약 내가 이걸 꿈으로 꾸었더라면 괴로움에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침이 두렵다.
또 내일이 오면... 내일의 해가 뜨면 어떤 인물이 나로인해 죽게 될지...
마지막이다.
내일 아침만 견뎌내면 된다.
내가 죽던지, 살던지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단지 주변사람이 나로인해 피해를 입는지 안 입는지가 관건이 될 뿐.
하지만 야쿠자의 며느리는 정말 싫었다.
그 혼인은 ‘나와 은호의 사랑’ 과 ‘나와 세후의 사랑’ 을 모욕하는 일.
절대 그 황홀하고 아름다웠던... 그래서 지금까지도 슬픈 사랑 두 개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니까.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얼굴들.
내가 준 책을 보다가 사고를 당해버린 최은호.
나와의 사랑으로 완벽했던 인생과 자신의 목숨을 파멸로 몰고가게 된 권세후.
나를 목적으로 하는 무리에 의해 조롱당하고 이용당하다가 자살한 이주은.
부모 잘못 만나 뜨거운 불길에 목숨을 빼앗겨버린 권희소. 권비소.
나를 우정으로 좋아하고 보살핀다는 이유로 칼침을 맞아버린 유진서.
내가 대체 무엇이길래 다섯명의 목숨을 빼앗은 것인가...
그리고 극장에서 희소, 비소와 함께 죽은 사람들도 모두 내 탓이 아닌가.
난 살인자다.
총칼만 안 들었을 뿐, 살인자나 다름없다.
그것도 수십명을 죽여버린 악질 살인자.
“ 하루만... 하루만... ”
이 말을 간절하게 읖조리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멈춰버려 내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길 바라면서.
..
“ 뭐야, 대체...! ”
제후는 건장한 남자무리에게 잡혀 당황했다.
그의 앞에 쓰러져있는 대여섯명의 사내들은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려주었다.
입가에 묻은 피도 닦지 못한 채, 손발이 모두 의지와 상관없게 제어되어버린 제후.
그가 놀란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 유... 서...? ”
“ 제후씨. 미안. ”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전. 혀.’ 미안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의 잘못을 질책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 그 눈은 상황에 맞지 않잖아... 으... ”
제후는 가슴팍에 밀려오는 통증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잘못 맞았는지 꽤나 고통스러웠다.
“ 나 여태까지 쓰레기라는 소리 들으면서 힘들게 살아왔어.
아무 능력도 없고 잘난 거라고는 겉껍데기 밖에 없는 내가
인생 개선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요.
미안, 제후씨. “
“ 뭐야... 의도적이었다는 거네. ”
“ 맞아요.
나 그 이소해란 여자한테 기회를 줬는데 보기좋게 내팽개치더라고?
그래서 결심했어요.
그 여자가 어떻게 되던간에 그건 나랑 상관없어.
그 여자는 죽거나, 아니면 야쿠자 집안의 여자가 될 테니까. “
제후의 머릿속에 아뿔사...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건... 소해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수작.
자신이 이렇게 잡히게 되면 안 되는데...
그는 오직 소해의 걱정만 할 따름이었다.
“ 제후씨. 당신 목숨은 그 여자의 선택에 달려있어요.
그 여자가 Yes 하면 당신은 한국에 와서 다시 사는거고,
끝까지 No 라고 버티면 죽는거야.
만약 Yes 해서 돌아오게 된다면... 나와 살아요.
그 여자보다 훨씬 당신한테 즐거움을 줄 수 있어. “
“ 잘난 거라고는 껍데기밖에 없다고 했지?
그런 여자는 말야... 자기 자신부터 좀 즐겁게 하라고.
주제넘게 남한테 신경쓰지 말고. “
“ 그런 식으로 말해면 곤란해요. ”
“ 소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죽여버릴거다. ”
“ 이런이런. 그거 생각하기 전에 당신 자식들부터 생각해야죠.
폭발사고 알죠? 그 피해자 명단 좀 잘 봐 둬요. “
“ ... 뭐? ”
제후는 다시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느낌을 받았다.
멍- 해졌다.
또 뭐란 말인가.
아들들이...? 권희소. 권비소. 이 두 토끼같은 자식들이...?
“ 이 자식! 죽여버리겠어!!!!! ”
제후는 흥분해서 몸을 이리저리 틀며 고함을 질렀다.
이 무슨 할리우드 추리 영화에나 나올법한 일이란 말인가.
유서는 그러한 제후의 행동에도 아랑곳않고 웃기만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제후씨. 미안해요. 잘가요. ”
..
츠카사는 침대 위에 잠들어있는 소해에게도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괴로운 심정이 자는 모습에도 가득 담겨 있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 하루만 참자... 하루만... ”
츠카사는 현명했다.
소해에게 헛된 바램이나 기대를 갖지 않았고,
자신의 소유욕을 위해 그녀를 희생시킬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이미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지켜보았던 그이다.
소해가 더 이상 불행하지 않고, 웃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츠카사의 최종 목표였다.
비록 자신의 사랑은 무참히 깨어질지라도.
츠카사는 소해가 마지막 날만 버티면 살 수도 있다는 1%의 사실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 우리 이제 앞으로 보지 말자. 이소해. ”
소해에게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 나 때문에 괴로울 거라면 영원히 보지 말자. ”
츠카사는 소해를 꽈악 안았다.
그의 얼굴에서 절대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뜨겁게 흘러내렸다.
참회의 눈물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려는 각오에 대한 눈물일까...
그건 츠카사 그 자신도 몰랐다.
“ 니가 행복할 수 있다면야. 나 하나의 희생쯤은...
하지만 이건 꼭 알아둬라.
내 사랑은 짧지만 진실되었다는 것을. “
#30
눈을 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심결에 눈을 떴는지 모르겠다.
난 다시 잠들어야 한다.
지금 깨어났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드륵-
하지만 그 젠장맞은 카메라는 내 뒤척임을 보고 눈치를 챘다.
열리는 문소리.
난 몸을 옆으로 돌려 뉘인 채로 귀를 틀어막았다.
마지막 날이다.
죽기보다 괴로운 마지막 날.
“ 깨어난 거 다 안다. 일어나라. ”
난 천천히 몸을 일으키 침대 옆에 섰다.
어제 저녁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샤워를 하면서 감은 머리의 샴푸향이 코를 스쳐왔다.
“ 이번엔 또 뭐야. ”
“ 이번에는 나가보는 게 좋을거다. 그 사람과, 니 자신을 위해서. ”
그 남자가 나가자마자 츠카사가 들어왔다.
“ 미안하다. 난...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했어. ”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침울했다.
그리고 너무 어두웠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난 관자놀이에 손을 얹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극심하면 두뇌회전이 안 되는 법이다.
나를 위하여 내 주변에 있는 사람... 가족도 있고, 몇 남지 않은 친구도 있고,
교수님도 있고, 그리고 다른 몇몇의 사람들도 있다.
제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것은 오래 전이었다.
하지만 설마 이혼한 사이인데, 굳이 건들일 필요가 있겠냐고 생각했다.
근데... 제후밖에 맞는 사람이 없어.
“ 그 남자가 니 행복의 보증수표라는 것을 알면서도... 날 용서하지 마라. ”
츠카사는 그 말을 마치며 내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츠카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옆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저 반짝이는 거울에 있는 것은 바로 내 모습.
오른손이 떨리고 있자, 왼손으로 잡았지만, 왼손 역시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난 두려움에 젖어 있다.
“ 한... 유명한 일본 순정만화에 이런 비슷한 대사가 있어.
해피앤딩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 말에 상당히 공감해.
난 말야, 꼭 사랑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들 다 모아놓고 하하호호 웃으며 사는 것만이
해피앤딩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냥 자기 나름대로 행복을 찾게 되면 그게 바로 진정한 해피앤딩이야.
이소해.
난 해피앤딩을 찾았어. 그러니까 너도 찾길 바래. “
진지한 표정의 츠카사.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츠카사가 말하는 해피앤딩이 무얼까 궁금했지만... 그런 건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 권... 제후...? ”
“ 이소해... 미안하다. ”
“ 젠장. 내가 할 말을 왜 니가 하는거야! ”
내 앞에... 서 있는 제후.
서 있는 것 조차 위태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많이 맞았거나, 약물의 영향을 받았거나.
이 둘 중 하나였다.
양쪽에서는 두 사람이 그를 잡고 있었다.
“ 너 이렇게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
“ 미안하면... 잡혀오지 말았어야지... ”
“ 미안... ”
“ 이쿠조! ”
일본 사람 두명의 목소리가 들리고 제후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야 했다.
“ 멈춰! ”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 멈추란 말이야!!!!! ”
이번에 간 것은 내 고함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에 그 두 남자 중 한 명의 목으로 간 것은 소리 뿐만이 아니라 칼날도 있었다.
옆에 있는 장식품에서 뽑아든 칼. 하지만 진짜 칼이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아침햇살에 번쩍였다.
“ 조또... 맛테... ”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아무렇게나 지껄여 준 후에 난 제후에게 다가갔다.
“ 권제후. 미안해. ”
“ 니가 나한테 미안한 게 뭐가 있어. ”
“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알고 있었는데 아는 척 안 해서 미안해. ”
너의 그 숭고한 사랑을 무시해서 미안해.
항상 나만 생각해서 미안해.
나는 동화 속 심보 고약하고 욕심많은 악한 인물과 다를 게 없었다.
조금이라도 남에게 베풀어 줄 수 있었으면서, 내 자신의 부족함만 걱정했다.
그리고 그것을 불행하다 생각했다.
진짜 불행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 그리고 고마워. 알려줘서. ”
내가 그 5년... 어떻게 보면 길고, 또 어떻게 보면 짧은 그 5년이란 기간동안...
조금씩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줘서 고마워.
권세후. 고마워.
진심으로 고마워.
“ 사랑해. ”
난 그 상태로 제후의 머리 뒤쪽을 잡고 키스를 했다.
두 야쿠자는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로.
내 키스에 제후는 놀란 듯 하더니 곧 받아들였다.
이게 얼마만의 키스인가...
그리고 진짜 권제후란 인간을 사랑해서 하게 된 키스는 처음이다.
진하고, 부드럽고, 황홀한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아침햇살을 한껏 받으며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을만큼 아름다운 키스를 했다.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고, 1000년이 지나도 기억하고 싶은 이 감촉.
누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접촉은, 그 사랑을 확인시켜준다고...
“ 이소해. 사랑한다. ”
입술을 떼자마자 제후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 눈에서 뜨겁고, 기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건... 권세후 하늘로 가기 직전에 있던 상황과 너무 비슷하잖아...
그래서 또 그런 일이 일어날까 두렵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망통보를 받는 일이라면 두 번으로 충분하다.
“ 진심으로. 사랑해. 나의 그리트. ”
그리트... 나를 칭하는 말. 제후에게 있어서 난 변하지 않는 그리트이다.
변하지 않는다. 우리 둘 중 누군가가 죽더라도.
“ 이소해! 죽음과 사랑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것 따위의 소리는
식어버린 사랑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
잘 기억해둬라. 잘... “
난 미소를 지으며 답변을 간단하게 해 주었다.
“ 너 안 죽으면 충분히 기억해두도록 할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