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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들에게 보내는 정초 덕담>
-인간은 지식을 가진 무서운 동물이다.-
비상계엄 이후 뉴스를 보며 떠오르는 것은 탄핵이라는 열매가 아니다. ‘이게 정말 사람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이 앞을 콱 막아선다. 울화가 치민다. 인간 도깨비가 우루루 몰려나오곤 한다. 권력을 잃은 저주의 화살이 증오심에 불타는 모습이다. 그러나 화살은 저들을 향해 날아가다가 곧 방향을 잃고 땅에 떨어지거나 나를 향해 날아온다. 윤석열도 비상계엄도 그렇고 트럼프와 네타냐후 그리고 푸틴도 마찬가지다.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게 틀림없다.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영혼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인간의 껍데기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토록 뻔뻔해질 수 있으며 자신이 살아온 찬란한 승리의 날들조차 저렇게 자신의 두 발로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비상계엄이라는 된서리를 맞고 고갱이에 남아있던 단 하나의 정단분열세포마저 죽은 게 틀림없다. 줄기와 몸과 뿌리를 만들 가능성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들 자신이 자가영양체의 능력을 잃은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저들은 진작 자가영양 생산의 에너지원인 태양을 버려야 했다. 그런데도 저들은 자신들의 오랜 디앤에이에 기록돼있는 영남학파의 우두머리가 전해준 태양을 하늘같이 떠 받들고 있는 것이다. 그 태양은 이제 인류역사의 박물관 수장고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테도 말이다. 이율곡선생과 정도전 그리고 토정비결의 주인공 이지함선생을 생각해 보라. 이제 하늘과 땅은 뒤집혔다. 그리고 태양은 땅바닥에 떨어져서 머슴이 되었다. 그걸 저들은 까맣게 잊고 아직도 태양을 끌어안고 살아가다가 저런 일을 저지르고 있는게 틀림없다. 이제 국가의 모든 권력은 타가영양생물체가 되었다. 아직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너무 한심하다.
이제 저들의 얘긴 그만하자.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다. 나는 시골의 영감태기다. 이럴 때는 덕담이 필요할 때다. 정월이니 정월의 덕담이나 하기로 하자. 수다 같지만 옛사람들의 정월덕담은 진짜 짭짤한 덕담이니 귀담아 들어야 이득이다. 저들을 앞세워 우리 모두에게 하는 새해 절값이라고 생각하며 들어보자.
우선 거울을 보아라 거기 사람이 있다. 사람의 얼굴이 세 개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거울 속에 얼굴이 있고 거울 밖에 있는 지금의 내 얼굴이 있고 얼굴 저쪽 뒤에 또 얼굴 바로 미래의 우리다. ‘우리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얼굴’이다. 그 세 가지 얼굴, 인간이 걸어가면서 보여주고 있는 얼굴 변화에 대한 사진첩을 열어서 점검해 보기로 하자.
인간은 동물이라는 과거를 밟고 인간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아직 인간의 본질은 여전히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성공했고 풍요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지금 우리 인간의 미래에 악마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아니 이미 그 악마는 우리 인간의 내면에서 자연분만의 날을 기다리며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의 뉴스가 출산을 알리고 있다. 그것이 인간의 미래다. 우리 인간이 악마라니! 이 슬픈 진화는 이제 분만실에서 대기하고 있다. 참으로 괴로운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새 해다. 좋은 얘기로 문을 열자. 해맞이 명소가 정초의 기운으로 지구의 자전이라는 인식을 밀어내고 곳곳에서 번창하고 있다. 허기야 뉜들 잠시일지라도 이 아수라장을 떠나고 싶지 않겠는가. 어쩌면 삶의 현장을 뚝 떠나 저 태곳적 우주생성의 순간에 이르러 시간과 공간이 분열하면서 보여주는 천지창조의 순간에 함께 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 초자연의 아름답고 성스러운 기운으로 힐링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아닐까
삶의 현장에서 해맞이를 했던 옛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하자.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런 바람으로 새 해 첫 날 해 모시기를 하는 것처럼 이미 우리의 옛사람들도 그렇게 해맞이를 했다. 재밌는 옛사람들의 요란한 해맞이 민속이야기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옛사람들의 해맞이는 좀 요란하다. 그리고 철학이라는 돛단배가 천지창조의 지평으로 저어가는 좀 독특한 해맞이다. 새로운 대륙은 삶의 현장과 마음 밭을 하나로 열었다. 허기야 우리 인간의 현주소는 원래 마음 밭이다. 그 곳에 인간의 생존과 삶의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짓는 인간농장을 개간하는 것이다. 설에서 보름까지 이어지는 한 간지의 기간은 인간을 농사짓는 인간농장의 세계를 여는 때다. 설 명절은 인간이라는 알맹이를 농사짓는 이벤트의 기간이다. 한 해를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설계하는 대장정이 시작되는 것이 정월이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 명절 설과 대보름의 의미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는 것을 상상하고 출발하자. 사실 어떤 인문학보다 더 수준 높은 내용을 담고 있다. 더구나 이 인간생성의 철학은 어렵기만한 철학이 아니고 진짜 재밌는 놀이라는 것이다. 설과 대보름은 그냥 명절이 아니다. 그냥 절하고 산소가고 선물하는 형식이 아니라 마을이라는 공간의 내용과 이 작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알맹이를 빚어내는 철학교실이다. 철학교실은 설날 시작해서 대보름까지 이어지다가 그 후 2월 초하루 까지의 나머지 보름은 삶의 현장으로 나가는 예행연습의 기간이다.
철학을 구성하는 뼈다귀와 살은 모두 삶의 현장에서 나오는 일상의 사물들이다. 다만 철학의 중심을 이루는 요소는 좀 까다롭다. 그러나 모른다고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무슨 순수이성 이니 자아니 하는 골머리 아픈 말은 단 한 개도 나오지 않는다. 잠시 그 관념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중심은 천지인 곧 하늘과 땅과 인간이다. 그 셋이 사람들의 마음 밭으로 들어가서 대동의 의미를 심고 수확하는 철학의 주인들이다. 그 중에도 하늘과 땅은 이 철학에서도 하늘과 땅이다. 스스로 바늘과 실이 되어 인문학이라는 촘촘한 그물을 짜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니 문자조차 모르는 까막눈이들의 철학교실을 놀이터로 만든다. 떠들고 재밌게 놀면서 행복하게 함으로서 그 즐거움 자체가 인간의 뼈가 되고 살이 되게하는 생명의 철학교실이다.
-정월은 ‘까막눈이들의 철학’ 교실이다.-
가장 먼저 준비하는 재목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다. 태양을 가져다가 철학의 씨줄로 삼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상의 사물을 모아서 열두 개의 날줄로 삼는다. 그리고 바늘에 실을 꿰어서 그물을 짜는 것이다. 이 때 태양은 하나가 아니라 열 개다. 하늘에는 날마다 하나씩 해가 뜨니 열흘이면 족한 수짜다. 참으로 기상천외한 발상이다. 그리고 그 열 개의 해에 각각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그런 다음엔 이 10개의 해 바로 밑에다 땅위에 있는 사물을 모아서 만든 12개의 재목을 밑돌로 놓는다. 그리고 그 밑돌의 각각에 이름을 지었으니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라고 했다.
우리 인간은 이 천지의 만남으로 지어진 그물로 된 구조물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존재다. 이 구조물이라는 공동체의 생태계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여기기 중요한 것은 이 그물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직 우리가 인간이라기 보다 짐승이라는 것이다. 이 짐승이 이 천지가 만들어 놓은 그물에서 재밌게 행복하게 놀고 살다보면 저절로 인간의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어울림에서 인간의 의미를 빚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 세계관은 생태세계관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이 생태세계관을 대대로 이어가면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해마다 설과 대보름 사이에 있는 철학교실에서 재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조금 더 이 철학의 구조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천지인 삼재는 우리 고유의 이 그물 세계관의 척추다. 10개의 태양을 철학의 실에 꿰어서 천간이라 하고 윗줄에 놓아 기준을 삼고 그 아래로 세상 천태만상을 12개로 구분해서 만든 간지를 놓았다. 다시 반복해서 말하면 천간 10개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와 그 아래 간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12개를 배치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10천간과 아래의 12간지를 하나씩 만나게 해서 이 만남을 한 바퀴 돌려 나오니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60갑자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음양의 기운을 띄고 천간과 간지로 만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담아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 촘촘한 생태의 그물에서 우리 인간이 즐겁고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설계한 것이다. 그리고 기억해 둬야 할 것은 이 세계관은 문자를 아는 잘난 사람들의 세계관이 아니라 못난 사람들인 까막눈이들의 세게관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환갑도 사주단자도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세차, 월건, 일진도 이 간지의 낱알들이다. 우리의 이름 역시 알고 보면 이 음양오행이 낳은 씨앗들과 무관치 않다. 우리 삶의 곳곳에 있는 가지가지 이름들과 말들과 생각들 그리고 민속들 속에 이 간지의 철학이 배어있는 것이다. 이 간지의 세계관은 우리 역사의 토양 속에 미생물처럼 보이지 않게 살아가면서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마을과 그 마을의 전통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덕성을 배양해 주었던 것이다. 이 미생물이야말로 우리를 고향으로 안내하는 에너지의 일꾼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친김에 철학의 용도에 대한 이야기도 짚고 넘어가자. 동양의 이런 생태철학은 우주와 자연과 생태와 인간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다. 특히 지금 위에서 말하고 있는 음양오행을 기반으로 한 까막눈이의 철학은 문자를 모르는 백성의 세계관이다. 성리학이나 도학이나 불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 점에서 세계를 오로지 인간의 입장에서 정복대상으로 보고 있는 서양철학과는 종자가 전혀 다르다.
서양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망치와 용광로를 가지고 분석과 환원을 통해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세계를 오로지 정복의 대상으로 보며 도구와 장비와 기술 그리고 일꾼으로만 보았던 그들은 이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지 오래다. 그것이 개인주의이며 자본주의이며 과학기술이라는 문명이다. 인간이기를 요구하는 철학을 그들은 과학으로 압도하고 무력화시켰다. 그들이 저 남미의 착한 부복 코기족들 앞에서 선언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1514년 6월 12일 이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와 만들었으며 이 세계의 너희나 우리 모두를 만드셨다.” 그러니 너희들의 것은 없다며 코기족이 가지고 온 문서를 찢고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땅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나라도 백성도 죽임을 당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에라 산속으로 들어가서 타이로나 문명을 만들고 500년 동안 숨어 살고 있다. 그리고 아메리카는 땅과 자연과 사람 모두 서구의 소유물이 되었다. 트럼프는 지금 그 시에라 네바다에서 파랗게 내려다 보이는 맥시코만을 미국만으로 이름을 고치겠다고 했다. 또 만에서 태평양바다고 빠져나가는 파나마운하를 빼앗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앞으로 나가는 전진과 그 앞의 적이 있을 뿐이다. 적을 물리칠 도구와 기술과 속임수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지구와 인류의 생존을 주도하고 있다. 이제 그들의 눈길은 지구를 완전히 수중에 넣는 것과 우주로 향하는 것뿐이다.
수다가 길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우리에게 더 깊은 생각을 요구하고 있음도 잊지말아야 한다. 마침 정월 대보름을 맞 이 덕담과 지혜로움을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주제넘는 수다가 되고 말았다. 어쨌든 나는 오늘의 위기를 우리 조상이 살아왔던 길에서 성찰하는 마음을 갖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야기의 본질은 우리 인간의 지나친 욕망과 풍요는 이제 이 지구와 그 지구가 살아가는 우주의 환경이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건 확실하다. 그래서 자연과 함께 소박하게 살아왔던 우리 조상의 지혜가 함빡 담겨 있는 민속의 대장정이 있는 정월대보름의 행사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읽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온갖 재미와 흥미로 꽉 찬 정월 대보름 얘기를 서둘러야겠다.
마침 오늘은 정월 대보름 날이다. 한 해의 첫날로 시작된 첫 보름은 그 하루하루가 그 해 열두 달의 의미를 담고 있는 모범과 스승과 철학이 담뿍 실려있는 날들이란 걸 기억해 두자. 거기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네 개의 계절변화는 삼백예순 다섯 날을 변화무쌍한 조화로 인간을 위협한다. 한 발 한발 걸어가며 “오늘은 이렇게 해야 한다.”, “오늘은 저것을 해서는 안 된다.”, “서둘러라‘, ’서둘러선 안 된다‘고 정월의 철학교실은 말한다. 어버이 같은 스승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동네 무당들의 세상이다. 온갖 무속신양이 살아 나와서 마을의 모든 행사에 콩 놔라 팥 놔라를 주관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많이 배운 사람이나 가진 사람들은 대개 뒷전에서 구경꾼인 듯 아닌 듯 빙그레 웃으면서 받아 넘겨주고 은근히 무속신앙의 흥미로운 언행들에 재미를 맛보는 특별한 관객이다. 그러나 이 특별한 관객들은 이 시끌벅적한 행사들이 말썽을 부리지 않고 잘 진행되도록 뒷전에서 술과 쌀과 떡과 안주 돈 등을 조달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후원을 절대로 내색하거나 앞에 나서지는 않는다. 무당은 모든 것을 천지자연과 그 영험한 사물에서 가져오고 간지를 따라 진행한다. 이 때 무당의 신명은 무지를 넘어 지혜가 바다를 넘치게 하고 하늘을 나른다. 정말 저들의 지혜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이 때 무당들은 마을을 대표하고 누구든 불러 호통을 치며 재산을 요구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마을의 어떤 사람을 지목해서 추방령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소원을 기원해 준다. 무당들의 기원은 마을의 태평과 부귀 안녕 그리고 올 해의 풍년이다.
정초는 온갖 촌락의 문화가 꽃피는 때다. 마을의 이쪽과 저쪽에서는 또 다른 오래된 문화가 튀어나오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아주 낮선 것들도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선을 보인다. 또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또 사랑방의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여인네들은 또 안방과 부엌에서 아낙네들대로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서 재밌는 이야기와 우정을 나무며 소소한 일들 속으로 들어가서 삼삼오오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이런 저런 망가진 가구들을 꿰매거나 새로 준비하거나 서로 주고 받으며 우정을 쌓는다. 누에치기나 길쌈나기 등에 필요한 기구들을 모여 앉아서 수리하고 기름칠을 하며 솜씨를 자랑한다. 큰사랑에서는 먹을 갈고 덕담을 나누며 입춘 글을 써서 집집으로 돌린다.
설날에서 대보름으로 가는 행사의 종류는 원래 간지를 따라 진행되는 게 원칙이지만 세월이 가면서 퇴색되고 또 나 역시 어릴적의 기억이라 거의 다 잊고 말았다. 대개 초삼일 까지는 객지에서 온 인척과 함께 동네 어른들을 찾아 뵙고 세배를 드리고 작은 선물을 드린다. 먼 친척과 어른들의 산소에 다녀오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 이렇게 가족중심의 정초세배가 마무리 되면 가족들이나 친인척들 간의 윷놀이가 하루 이틀 진행되고 나면 사람들은 점점 마을로 향하게 된다. 그러면서 마을 잔치는 점점 확대되며 여기저기 큰 마당에는 윷판이 벌어지고 황덕불이 오른다. 큰 소리가 마을 여기저기서 들리고 아낙네들의 널뛰기나 장년들의 씨름판 아이들의 자치기가 시작된다. 눈이라도 오면 장년패들은 토끼몰이와 둠벙푸기로 나선다. 토끼를 잡는다기보다 그런 핑계로 다녀오지 못한 어른들의 산소도 가보고 산골짜기 논배미에서 미꾸라지나 꾸꾸리 사냥도 한다. 한 두사발에 그치기 일수지만 금방 가마솥 걸리고 고깃국이 끓고 수제비바 떼어져 가마솥으로 들어가며 사람들을 모은다. 그러면 마당은 들썩이고 한편에서는 윷놀이가 벌어지고 댓들위에선 어른들의 에헴소리가 높아진다. 상일꾼들이 모이는 머슴방에서는 으레 새끼고기 시합이나 맷방석 만들기 가마니짜기 짚신 만들기가 술내기로 진행되고 가끔 승자들의 큰소리가 마당밖을 뛰어나가서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밤이면 대개 윷놀이와 화투 엿치기 그리고 옛이야기로 밤을 하얗게 패다시피 한다. 밤이 이슥하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방에서는 “그래 그렇구만 그래서 심봉사가 눈을 떳다니까!”하고 기쁨의 눈물을 닦아내는 얘기책 읽기도 한 몫 한다.
정월 시간은 그렇게 빠르게 간다. 보름이 가까워지면 이 집 저집 썩은 고구마로 엿을 고느라 분주하고 열나흘은 묵나물을 삶느라 집집마다 부엌이 바쁘다. 마을에서 외떨어진 약초꾼집에서는 온갖 약초와 쑥과 물곳과 열매를 넣고 과서 괌을 만드느라 하루 종일 연기를 피운다.
보름이 가까워지면 연날리기는 연줄싸움으로 번져서 연실 연들이 연줄을 잃고 비실비실 떨어져 내리다가 바람을 타고 언덕을 넘는다. 어쩌면 들을 지나 먼 곳으로 소원을 가지고 좋은 곳으로 갈지도 모른다. 마을의 가운데로 흐르는 개울가 모래밭에서는 그 씨름판이 벌어지고 주막거리에서는 한창 땅시세와 세상물정이 술잔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며 토지 거래를 부추긴다. 열 나흘 쯤의 초저녁은 이쪽 마을과 저 쪽 마을의 불 싸움이 벌어지는 때다. 동네마다 뒷동산 가장높은 곳이 불쌈질의 명당이다. 불쌈은 크기와 오래가기로 결판이 난다. 동네와 동네가 밤늦게까지 불쌈을 하다가 나무가 떨어지면 불앞에서 벌어지는 술판은 또다른 풍경이다. 모두 얼굴이 벌개져서 말소리까지 달라진다. 애들은 괜히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새로운 풍경에 신이나서 불놀이의 재미에 빠진다. 그러면 어른들은 애들보고 밤에 오줌싼다고 놀리면서 내일 이른 아침에 키쓰고 오라고 놀린다. 쥐불놀이는 애들의 잔치다. 마을 앞이 명당이다. 너도 나도 깡통에 불을 붙여서 빙빙 돌리다가 휙 날리기도 하고 불을 돌리며 달리기 시합도 벌어진다. 보름달을 기다리지만 보름달은 늘 구름 속에서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뭐니뭐니 해도 줄다리기는 정초놀이의 꽃이다. 대개는 추석때 열리지만 가끔은 대보름줄다리도 벌어진다. 줄다리기는 상금이 백미다. 어떤 마을은 소가 걸리고 어떤 마을은 쌀가마가 걸린다. 상품이 뭐냐에 따라 인근 군 단위 지경에서 그 마을의 인심과 마을의 위세와 인물나기가 평가되기 때문에 상품은 참여 수준과 더불어 마을의 위세를 높이는 소문과 규모의 핵심이 된다. 또 연극공연과 노래자랑도 배놓을 수 없는 화젯거리다. 공연이 있는 닐은 으레 마이크를 빌려다가 설치해 놓고 마이크를 구루마에 싣고 이마을 저마을로 다니며 자랑질을 한다. 낮부터 삑삑 소리를 내며 노래를 틀어서 흥을 북돋운다. 저녁이 되면 여기저기서 횃불을 밝혀놓고 사람들을 모은다. 연극은 정말 희한하다. 다 아는 장화홍련전이나 심청전, 계백장군, 춘향전, 낭낭공주 등 다양하지만 막상 공연은 엉망진창이다. 중간 중간에 마이크가 고장 나는가 하면 갑자기 배우가 바뀌기도 하고 발전기에 기름이 떨어져서 불이 꺼지고 전등을 수리하느라 소란을 떨기 일쑤다. 기다리는 동안 엉터리 장소팔 만담이 무대의 장막을 열고 사람들을 웃긴다.
아래 윗동네가 말싸움이 아니라 진짜 전쟁을 하는 동네싸움은 으레 뭔 일이라도 날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온다. 동네 싸움은 이슥한 밤에 벌어진다. 마차에 언 벼포기를 뽑아서 가득 싣고 마차대를 90도로 세워서 헌 멍석이나 가마짝을 방패막이를 두르고 앞으로 밀고 나가며 벼포기를 던지는 무서운 싸움이다. 벼포기만 던지는 게 아니다. 어떤 순간부터 돌맹이가 날기 시작하면 결국 으악 소리가 나고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가 나야 돌팔매질은 끝이 난다. 날아가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 으악 소리가 나면 반대쪽은 마차를 내버리고 도망질을 친다. 그 다음날은 누가 죽었다느니 다리가 부러졌다느니 눈알이 빠져서 도시의 큰 병원으로 갔다느니 온갖 소문이 난무한다. 어른들까지 나서서 ‘이 일을 너희들이 어떻게 처리 할거냐’고 핀잔을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런 소문은 한 동안 조용하다가 정월이 지나고 2월 초하루가 되면 다 사라지고 풀어진다. 그리고 중간 지점에 있는 주막거리에서 서로들 만나서는 형님 동생하고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 화해를 한다. 그렇게 대보름을 맞아 소원을 빌고 나면 비로소 해맞이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2월이 성큼 다가올 것이다. 밖으로 나가 농사일에 나서야 한다. 겨우내 매어 놓았던 소를 끌어다가 밭일을 가르쳐야 한다. 돼지 울짱을 고치고 닭장의 알 둥주리를 준비해 주어야 한다. 싸리가지를 꺾어다가 병아리 칠 집을 엮어 주어야 한다. 사랑방에서는 밤마다 모여서 겨우내 짜던 둥구먹이나 가마니 멍석 돗자리를 마무리하기에 바쁘다. 그러는 사이 봄은 벌써 앞산 비탈에 와서 마당을 내려다 볼 것이다.
우리의 세시풍속은 참으로 지혜로운 철학이 지어낸 삶의 예술이다. 이 예술과 철학이 살기 좋은 마을과 아름다운 사람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냥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고향에 어머니가 있고 아저씨가 있고 좋은 사람이 있고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빚어낸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창조의 예술이 임종을 앞두고 있다. 한편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악마화가 진행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잃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껍데기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알맹이를 찾는 것이다. 껍데기들의 세상이 두려운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농사를 지으며 소박한 삶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을 가꾸며 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길러내고자 했던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전통의 노력이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새 해가 시작되는 정월에 보름동안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며 온갖 삿된 것들과 자연재해를 물리치기 위해 그리고 그런 속에서 풍요를 가져오기 위해 마음 밭에 위로와 경고와 즐거움으로 다짐을 하며 우정과 자연에 대한 경외와 신뢰를 쌓으려 했던 인간다움의 숙성방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우리는 메말라가는 우리의 마음 밭을 복원시켜야 한다. 섬뜩하고 삭막한 뉴스가 우리를 인간의 껍데기로 만들고 있다. 이미 조짐은 있었다. 1983년 전두환 군부시절이었다. 서울시내 한 대학가 서점의 간판에 특별한 문장 하나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인간은 지식을 가진 무서운 동물이다>라는 어떤 선언 같은 문장이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경찰이 몰려왔다. 온갖 시비 끝에 결국 이 희대의 문장은 어둠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슨 뜻일까 인간의 지식이 악마의 왼손에 들린 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식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악마의 도구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이 악마의 칼을 가지려면 반드시 오른손에 방패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패가 바로 인문학이라는 주장이었다. 아마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만약 방패 없이 지식을 갖게 되면 이 지식은 악마의 무기가 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고 주인은 결국 붙잡혀 가면서 끝났지만 여기서 끝나지는 않았다. 주인은 정말 많은 선물을 받았던 것이다. 국가의 정책과 법과 문명만으로는 인간의 알맹이를 채워 넣을 수 없다. 아름다운 마을공동체와 멋진 사람들을 길러내서 인간답게 살았던 전통의 지혜로 돌아가자. 내 안에 인간이라는 종자를 채워 넣을 기반을 다져야 한다. 우리의 마음 밭을 건강한 토양으로 배양시켜야 한다. 인간의 마음 생태계를 복원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 밭에 인간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야 한다. 내가 나를 만들어야 한다. 옛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 해를 시작하는 정월에는 스스로의 마음 밭에 철학교실을 개간하고 가꾸는 것은 어떨까 혹시 악마의 왼손에 들린 도구가 작동하기라도 하면 나 역시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걸 상기하면 말이다. 그리하면 대보름의 쟁반 같은 달은 큰 복을 내려 주리라. 대보름의 덕담이 긴 잔소리가 되고 말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