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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위국(張偉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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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14년(1641년) 장헌충은 양양(襄陽)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양왕(襄王) 주익명(朱翊銘)을 포로로 잡아 죽인 후, 그는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를 돌아다니며 3개성의 많은 부현(府縣)을 점령하고 기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장헌충은 강남지역에서 세력을 키우고자 하지 않고, 천부지국(天府之國) 사천(四川)으로 가서 패업을 이루고자 하여, 사천으로 들어갈 것을 결정한다. 숭정17년(1644년) 봄, 장헌충은 군대를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육로와 수로로 진격하며 사천으로 향한다. 사천의 명군은 실력이 약했고, 게다가 이때는 천하가 대란에 빠져 있어서, 장헌충의 부대는 무인지경으로 진격한다.
이월에는 만현(萬縣)을 점령하고, 육월에는 부릉(涪陵)을 점령한다. 다시 병력을 둘로 나누어, 수로로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육로로는 남천(南川, 사천남부)으로 진격하여 중경(重慶)을 공격한다. 육월 이십일, 장헌충은 병사들에게 명하여 화약으로 중경성벽을 무너뜨리고, 일거에 성을 점령한다. 만력제의 아들 단왕(端王) 주상호(朱常浩), 사천순무(四川巡撫), 중경지부(重慶知府)등은 모조리 처형하고, 또한 장헌충은 명군수비졍사들의 손목 하나씩을 자르고 모두 풀어준다. 이를 통해 명군으로 하여금 그를 두려워하게 만든다. 장헌충은 조금 쉰 후에 성도(成都)로 진격한다. 팔월 성도성이 함락된다. 성도성을 점령한 후, 장헌충은 4명의 양자 손가망(孫可望), 이정국(李定國), 유문수(劉文秀), 애능기(艾能奇)를 보내 사천의 각부, 주, 현을 점령하게 한다. 각 지방에서는 장헌충부대가 온다는 말만 듣고도 모두 도망친다. 사천의 대부분을 장헌충이 접수한다. 장헌충은 사천성을 모두 점령한 후, 성도에 정식으로 정권을 건립한다. 국호는 "대서(大西)"라고 짓는다.
장헌충이 사천을 점거하고 건국한 것은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갖추었다. 소위 "천시"는 당시 청군이 산해관을 넘어 들어왔고, 이자성은 패배하여 서안으로 되돌아왔다. 홍광정권은 남경에 수립된다. 각방세력은 자신을 안정시키는데 바빴고, 다른 지방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장헌충이 사천에서 독립하였는데, 각방세력과 거리가 멀었다. 그리하여 이런 유리한 시기를 잡아 자신의 실력을 강화하고, 장래 대업을 이룰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소위 "지리"는 사천은 자고이래로 천부지국으로 불릴 정도로 물산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다. 재력, 물력 그리고 병력자원이 모두 풍부하다. 단지 장헌충이 일련의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정책을 취하여 많은 백성들의 옹호를 받으면, 사천을 나가 천하를 다툴 실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유방이 사천과 한중을 기반으로 하여 밖으로 나가 천하를 획득한 것처럼. 혹은 유비처럼 사천을 한 나라로 만들어 비록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삼분천하의 하나를 차지했었다. 유비이후 사천에 할거한 군웅은 수도없이 많았다. 이전 사람들의 누적된 성공경험이 있으므로, 장헌충이 정확한 정책을 실행하기만 했으면, 대업을 이루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장헌충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도 영원히 사천에만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사천을 근거지로 취한 것이고, 나중에 병력을 일으켜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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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장헌충은 한 지방을 다스릴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사천에서 취한 일련의 정책은 이 신생정권을 인민들과 대립면에 서게 만들었다. 그는 사천에서 엄격한 형벌을 실행한다. 백성들이 조금만 잘못하면 바로 죽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위험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대서정권에 대한 태도는 처음에는 받아들이는 것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바뀐다. 마지막에는 원한으로 다시 바뀐다. 예를 들어, 대서정권은 조금만 불만을 가지거나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일찌기 대서군에 저항했던 자들은 포로로 잡히면 귀와 코를 베고, 손목을 하나 베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명나라의 종실과 관신에 대하여는 장헌충이 더더욱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일찌기 사천의 사신(士紳)을 모조리 성도로 붙잡아 와서, 다 죽여버리기도 했다; 명나라종실로 사천에 있던 사람이 1만여명에 이르렀는데 장헌충은 모조리 죽여버리고, 한명도 남기지 않았다.
보통백성에 대하여도 장헌충은 마찬가지로 엄격했다. 그는 대량의 병사를 거지, 상인, 의사로 변장시켜 길거리와 주민주택으로 보내어 백성들의 언론을 감시한다. 대서정권에 불리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체포했다. 장헌충은 또한 백성의 인신자유도 엄격히 통제하여, 관민백성이 성을 나가거나 들어오려면 반드시 사전에 허가절차를 취해야 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성을 나가는 사람은 왼쪽 뺨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그래야 성을 나갈 수 있었다. 만일 돌아올 때 땀이 나서 도장이 모호해지면 그는 즉시 참수당한다. 만일 성을 나간 사람이 제 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가족을 체포하여 죄를 물을 뿐아니라, 이웃사람들까지 연좌로 처벌했다. 장헌충의 이런 고압적인 정책과 백성에 대한 잔혹함으로 농민반란의 본색을 잃게 된다. 그의 통치방식은 관민백성들의 강렬한 불만과 저항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속속 무장한 후 대서군을 습격하거나 교살해버린다.
특히 홍광정권이 성립된 후, 그들은 관리를 사천으로 파견했고, 사천의 잔명세력과 지주무장에게 대서정권에 대한 공격을 호소한다. 사천의 각지에서는 대서정권에 반격하는 사건이 빈발한다. 많은 보통백성들까지도 속속 대서에 반항하는 행렬에 가담한다. 대서정권은 점점 고립된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반란으로 장헌충은 사천을 포기할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의 곁에 있던 신하들은 주군이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을 보고 속속 찬동을 표시하고, 계속하여 장헌충에게 계책을 제시한다. 그중 승상(丞相) 왕조린(汪兆麟)은 이렇게 말한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차라리 먼저 성안의 인민을 모조리 도륙하고, 나머지 도부주현의 인민은 따로 나누어 소탕하며, 궁전과 주택은 초나라사람들을 본받아 불질러 버려, 천리적지(千里赤地), 만정무연(萬井無煙, 우물이 있는 집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 즉 사람이 살지 않는다.)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후 사천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면 나중에 사천을 점거하는 자도 땅만 남고 사람은 없어서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황상께서 중원을 수복한 후 다른 성의 인민을 사천으로 보내어 호구를 채우면, 일은 힘을 들이지 않고 공로는 쉽게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헌충의 승상 왕조린이 내놓은 아이디어이다. "총결제사(總决諸事)"의 승상으로서, 백성을 잘 대하여 민심을 얻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이렇게 악독한 계책을 내놓다니, 사천백성을 모조리 도륙하고, 궁전과 건물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다시 중원을 수복하여 천하를 통일한 후에 다시 다른 성의 백성을 사천으로 보내라고 하다니. 그건 치인설몽(痴人說夢)이 아닌가. 자고이래로 대사를 이룬 사람중에서 이처럼 공포스러운 정책을 실시한 정권이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왕조린은 스스로 '총명재지'하다고 혼자 즐거워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바로 그의 이런 정책이 장헌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게 될 줄은.
왕조린의 계책을 들은 후, 장헌충은 적절한 의견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왕조린이 의견을 제시한 다음 날 즉 순치2년(1645년) 칠월 십삼일, 장헌충은 먼저 성도에서 대도살을 실시한다. 먼저 남자를 죽이고, 다시 부녀들을 강으로 몸을 던지게 강제한다. 기록에 따르면, 죽인 남녀가 "사백만이상"이라고 했다. 얼마 후, 장헌충은 사천의 독서인에 대해 대거 도살을 감행한다. 다만 그는 빠트리는 사람이 있을까 우려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여, '특과'를 증설하여 과거시험을 추가한다는 명목으로 사천의 선비들이 성도로 와서 과거에 응시하도록 모은다. 선비들은 그것이 계책인줄 모르고, 희망을 안고 성도로 와서 대자사(大慈寺)에 머문다. 모두 5천여명이고, 수행한 종들까지 합치만 만여명이 넘었다. 선비들이 모두 도착한 후, 차례대로 성밖으로 끌고가서 죽여버린다. 시체는 강물에 던져넣어 강물에 흘러가게 만든다. 도살은 인시(寅시, 3-5시)에 시작하여, 신시(申時, 15-17시)에 끝난다. 가련한 선비들은 열정과 희망을 품고 과거시험에 참가하러 왔따가, 생각지도 못하게 이런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순치3년(1646년) 정월, 장헌충은 다시 한번 도살을 감행한다. 그는 이렇게 규정한다. 14살이하를 제외하고, 노약자와 성년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인다. 성도성밖에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도살이 실질적인 효과를 얻기 위하여 장헌충은 살인을 장려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매번 남자 1명을 죽일 때마다, 손목 2개, 귀 2개와 코를 잘라내서 검사를 받고 공로 하나로 인정받는다; 만일 여자를 죽일 때면 네 개의 손목을 가져오면 공로 하나로 인정받는다. 즉 여자는 2명을 죽여야 남자 1명을 죽인 것과 같은 공로를 인정받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죽일 때는 6개의 손목을 하나의 공로로 인정받는다. 즉 3명의 아이를 죽여야 남자 1명을 죽인 것과 같은 공로를 인정받는다.
이번 대도살은 순치3년(1646년) 정월에 시작하여 오월에 끝난다. 통계에 따르면, 남녀 사망자가 "천만명이 넘었다." 의문의 여지없이, 사서에 기록된 장헌충의 사천도살사실은 과장되었다. 상황이나, 숫자가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과장되었다. 다만, 장헌충이 사천에서 대거 살인을 저지른 것은 의문의 여지없는 사실이다.(물론 청군의 사천에서의 도살과 파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농민반란군의 수령으로서, 초보적인 성공을 거둔 후에 칼날을 자신의 형제자매에게 겨누었고, 수단은 지극히 잔인했으며, 마음씀씀이도 아주 악독하여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정도였다. 인간성은 모조리 상실했으니, 이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멸망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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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충의 정책은 대서정권으로 하여금 인심을 모두 잃어버리게 만든다. 고립되는 것은 필연적 결과이다. 사천의 잔명세력 및 지주관신은 속속 반기를 든다. 중경, 의빈(宜賓), 노주(瀘州)등지가 속속 함락된다. 순치3년(1646년) 오월, 남명총독(南明總督) 증영(曾英)이 대서가 내외로 곤경에 처한 틈을 타서, 군대를 이끌고 성도로 진군한다. 이때 장헌충은 예감이 좋지 않다고 여기고, 성도를 버리기로 결정한다. 팔월, 장헌충은 성도를 불지르고, 북방으로 퇴각한다. 1달후, 남충시(南充市) 서충현(西充縣)의 봉황산(鳳凰山)에 도달한다. 여기에서 근 이개월간 주둔한다. 그는 병사들에게 나무를 베도록 하여, 큰 선박을 만들어 호북(湖北)일대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역사는 장헌충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치3년(1646년) 정월, 청나라조정은 하오거(豪格)를 정원대장군(靖遠大將軍)으로 임명하여, 팔기병사를 이끌고 사천을 정벌하도록 보낸다. 그러나, 섬서(陝西)에는 대순군의 잔여부대와 잔명항청세력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청나라조정은 사천까지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오거의 대군은 사천까지 가지 못하고, 계속하여 섬서에서 반청세력을 소탕해야 했다. 순치3년(1646년) 하반기에 이르러 기본적으로 섬서의 문제를 해결한 후, 하오거의 대군은 비로소 사천으로 쳐들어간다. 다만, 하오거는 장헌충이 이때 서충 봉황산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하여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바로 이 때, 장헌충의 부장 유진충(劉進忠)이 장헌충을 배신하고 하오거에 투항하고, 청나라군대에 길안내를 한다. 그리하여 청나라군대는 손쉽게 대서정권을 소탕할 수 있었다.
유진충은 원래 섬서 한중 사람이고, 대서군의 박기영도독(駁騎營都督)을 맡고 있었다. 그가 한번은 남명군대와의 교전때 인신(印信)을 잃어 장헌충으로부터 엄한 질책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불안해 했다. 이때 군영에는 속속 장헌충이 사천출신병사들을 도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유진충의 부하는 대부분 사천사람이었다. 그래서 소문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속속 도망쳤다. 이런 상황하에서, 유진충은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결국 남명군에 투항할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불안감을 느껴 남명을 배신하고 다시 청군에 투항한다. 유진충은 백여기를 이끌고 청군의 군영으로 달려가 하오거를 알현한다. 그가 온 이유를 설명하자, 하오거는 매우 기뻐한다.
유진충은 장헌충의 소재지를 알려주고, 청병이 사천으로 들어와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주어야 하고, 빠를 수록 좋고 늦어지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길안내를 맡아 청군을 데리고 대서군을 치는데 앞장서겠다고 나선다. 하오거는 중요한 정보를 취득하고 유진충이 길안내까지 맡겠따고 하니, 전쟁에서의 승리는 손에 들어왔따고 여기고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신속히 군대를 움직인다. 그리하여 순치3년(1646년) 십일월 이십칠일 새벽에 서충 봉황산 아래에 도착한다. 장헌충은 이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초병으로부터 청군이 이미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아도 장헌충은 믿지 않았다. 오히려 광망하게 소리쳤다:
"어르신이 천병을 이끌고 여기에 있는데 누가 감히 와서 호랑이수염을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청군이 눈앞에 나타나서야 장헌충은 비로소 소수의 수행병력을 이끌고 군영을 나와 허실을 알아본다. 그때는 큰 안개가 끼어 있었다. 장헌충은 말을 타고 봉황산의 위에 올라갔는데, 온 산과 들판이 청나라병사로 가득했다. 병사들의 움직임이 물결같았다. 활시위를 당기려고 하는데, 벌써 청군에게 발견되었고, 가슴은 화살 두 발을 맞는다. 장헌충을 말을 몰아 달려나갔는데, 등에 다시 화살 두 발을 맞고 땅바닥에 고꾸라진다. 피를 흘리면서 고통 속에 죽어갔다. 원래 이때 유진충이 청군의 군영에 있었는데, 장헌충이 나타나자 급히 하오거에게 말한다. 저 자가 장헌충입니다. 하오거는 즉시 청군에게 화살을 쏘도록 명했고, 그리하여 장헌충은 화살을 여러 대 맞고 사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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