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1. 만주국(滿洲國, 1932년∼1945년)
만주침공을 주도한 일본관동군 고급참모인 이시하라 간지(石原 莞爾, 1889년∼1949년) 등은 애초에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에서 대만과 조선처럼 총독부를 설치하여 만몽에 대한 식민 지배를 구상했지만 국제적 역학 관계상 어쩔 수 없이 독립국 수립 구상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만주국은 비록 ‘독립 국가’의 형태로 출범했지만 실제상 일본관동군이 ‘독립국이라는 형식을 통한 독특한 지배 전략’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식민지 괴뢰정부, 즉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였다. 최봉룡, 만주국의 국적법을 둘러싼 딜레마(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69, 2011)
만주국은 1932년에 일본 제국이 중국 동북 지방(만주)에 세운 괴뢰국(傀儡國)이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약 13년간 존속하였다. 만주국은 만주족과 중국사의 명목상 마지막 군주국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주국은 실제로는 국가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에 불과했다. 일본군들이 일본인과 조선인들을 이주시켜 만주국의 토지들을 관리하게 하였고 일본인들이 모든 관공서에서 활동하였으며 중국인들과 만주인들은 철저하게 관직에서 배제되었다. 치안 또한 일본군과 조선인 출신들이 전부 맡았으며 중국인은 피지배 식민지인으로서 밖에 활동하지 못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이 만주국 시기를 앞에 ‘괴뢰’라는 뜻의 ‘거짓 위(伪, 僞)’ 자를 붙여 위만주국(伪满洲国), 줄여서 위만(伪满)이라고 부르거나, 중국 동북 지방이 함락되었다는 뜻의 동북윤함구(东北沦陷区), 동북윤함시기(东北沦陷时期)라고 부른다.(중국어에서는 함락(陷落)을 룬셴(沦陷, 윤함)이라고 한다.)
만주국 자체의 존속기간은 고작 13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주 자체는 만주국 수립 훨씬 이전인 1905년부터 일본의 식민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만주국을 수립하기 훨씬 이전인 1905년 러일전쟁 이후부터 만주를 지속적으로 침탈하며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즉, 만주국의 수립은 일본의 대륙정책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따라서 만주국의
역사를 논할 때에는 일제의 만주 침략에 앞장선 관동군과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또한 같이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으로 뤼순과 다롄을 점령했고, 포츠머스 조약 체결(1905년 9월 5일)을 통하여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이 지역의 조차권을 넘겨받고 이 지역 이름을 관동주라 정한다. 관동이라는 명칭이 산해관 동쪽을 일컫기 때문에 헷갈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요동 반도 일대에 러시아가 관동주라는 이름을 붙였고 일본은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 면적은 3,462㎢이고 주요 도시는 해군 기지 뤼순과 무역항 다롄이다. 그리고는 관동총독부를 신설(1905년 10월 17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만주국의 모태가 된다.
‘관동총독부(關東總督府)’는 이듬해 9월 1일 폐지되어 하급 부서의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총독’이 ‘도독’으로 바뀐 것이 전부이다. 이후 1919년 4월 다시 관동청으로 변경된다.
남만주철도회사(南滿洲鐵道會社)와 관동군(關東軍)
만주국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과 관동군이다. 만철은 1906년 11월 26일에 설립되어 1907년 4월을 기해 남만주철도를 관동도독부에서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경비하기 위해 새로 창설된 6개 독립수비대대가 관동군의 전신이다.
만철은 이름과 달리 일개 철도회사가 아닌 그 이상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의 만주 버전에 가까웠다. 실제 업무 범위는 철도 경영 외에도 광업, 해운, 항만, 부두, 발전, 숙박, 창고업, 제철, 조사 활동에 이르며, 출자회사, 조성회사, 지방시설, 교육시설까지 포함한 식민지 경영을 위한 일본의 실질적인 국책회사이다. 실제로 1923년 이후 패망까지 일본 제국 전체의 모든 법인 중에서 자본금 규모 1위의 법인이었다. 일본 3대 재벌 못지않은, 그보다 더한 영향력을 가진 기업이었다. 처음에는 일본 정부가 50% 지분을 가진 회사로 시작했다가 이후 100% 보유한 사실상의 국책기업이 된다.
이 때문에 만철 성립 당시부터 초대 만철 총재 고토 신페이 입에서 “만주는 영사, 만철, 도독부의 이른바 3두 정치가 될 가능성이 있어 통일성이 결여될 것이고, 여기에 육군과 해군까지 가세하면 5두 정치가 될 우려가 있다.”하는 말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일본 해군과 일본 육군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만주에 해군은 얼씬도 못했고 육군에서도 사실상 독립하여 대본영 직할이었던 관동군이 육군의 개입을 배제하고 만주를 지배하였다.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관동군의 폭주는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1857년∼1929년) 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영역이다. 결과적으로는 신페이가 예측한 영사(領事), 만철, 도독부에 관동군이 추가된 4두 정치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우려 때문에 ‘만철 총재는 관동도독 밑에 있어야 하겠지만, 동시에 도독부 고문으로서 외무대신의 감독 아래 도독부의 행정 일체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적극적으로 만주 경영 및 행정에 개입하게 되었다.
실질적인 만주 경영 외에 만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조사부를 통해 관동군의 씽크탱크 기능이었다. 만주 경영 초기에 만철은 ‘동아경제조사국(東亞經濟調査國)’을 설치하여 25년간 중일관계와 동아시아 전반, 나아가 세계 경제 전반의 동향 조사 및 연구를 맡았다. 이 자료들은 이후 만주국 성립에 없어서 안 될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성립과 함께 관동군의 정책 입안 부서 구실을 하며 ‘경제조사회’에 흡수 된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조사 범위는 유럽까지 확대, ‘대조사부’로 확대되었다. 조사부는 인원이 2천명에 달하는 방대한 조직이었으며, 예산 규모가 대폭 확대되면서 파격적인 대우에 매혹된 제국대학 출신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사실상 일본 제국을 대신하여 현대의 정보기관 및 씽크탱크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일본은 총리 산하에 내각정보조사실이란 정보기관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대기업의 정보네트워크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었다. 그 연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만철조사부에까지 이른다. 2차 대전 이후 만철조사부 출신들은 대부분 대기업 특히 종합상사의 정보계통으로 많이 흘러들어갔다.
관동군은 1919년 관동도독부가 폐지되고 관동청이 설치되면서 관동주 방위와 만철선 보호임무를 목적으로 하는 독립된 재만 군사기관으로 발족되었다. 철도 수비뿐만 아니라 일본의 만주권익 보호, 대소전략 수행의 주체로서 임무를 점차 담당해 나갔던 것이다. 이 병력은 만주사변 전에는 2년 단위로 교체 파견되는 주차사관과 6개 대대의 수비대대를 합쳐 약 1만 400명에 지나지 않았다.
1927년 일본군은 국민당의 1차 북벌로부터 일본 거류민과 권익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1차 산동파병을 단행했다가 외교적인 문제로 철수했지만,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진행되던 와중인 1928년에 2차 산동출병을 단행,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을 습격하면서 제남사건(濟南慘案)을 일으켰다. 제남사건 자체는 흐지부지하게 끝났으나 일본은 만몽분리정책을 추구하면서 만주와 몽골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일본의 권익 영역으로 삼으려 했다. 고모토 다이사쿠 등 강경파는 만주로 퇴각하던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 장쭤린을 암살하는 등 극단적 수단까지 서슴지 않았으나 봉천군벌(奉天軍閥)의 수장 장쉐량(張學良, 1901년∼2001년)이 동북역치(東北易幟, 1928년)를 선택하면서 날아갔고 만몽분리정책을 추진하던 다나카 기이치(田中 義一, 1864년∼1929년) 수상도 황고둔 사건(皇姑屯事件)을 처리하다가 덴노(天皇, Emperor of Japan)의 분노를 사서 날아갔다.
하지만 관동군의 일부 과격파 장교들은 여전히 이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과격파 장교들은 내부적인 문제로 당면한 경제 위기와 국내의 사회 혼란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바로 대외적 모험 정책을 통해 그 출구를 찾게 되었다. 이 때 대공황으로 도탄에 빠진 농민들에게 육군이 추진하고 있던 ‘국방사상 보급운동’을 통해 만몽의 기름진 드넓은 평야를 보라며 “국내에서 눈을 외부로 돌려야 한다.”,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을 칭찬할 수는 없지만,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마당에 그 만몽의 기름진 평야를 좀 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하고 선동했고, 국가적으로는 일본 농민 50만 명쯤 만주로 이주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1930년 말에는 만주 재류 일본인의 수가 22만 8,700명에 달해 해외에 거주하는 최대 일본인 집단이 되어 사실상 일본 내지의 과잉인구를 배출하는 배출구 구실을 하였고, 그들은 이미 만주의 절대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일본의 만주 점령 계획은 어디까지나 소련에 대한 일본군의 전반적인 작전계획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 중 하나일 뿐이였다. 이를 위해 관동군 작전주임 참모 이시와라 간지가 고급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결탁, 이미 침략 준비를 완료해 놓았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의 음모로 류탸오후 사건(柳条湖事件)이 일어났는데 육군 중앙부에 통보된 것은 18일 심야의 일이었고,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은 19일 아침 식사를 하며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건의 발생을 알았다. 관동군은 사건발생 18시간 만에 봉천(심양), 안동, 장춘, 우장 등 남만주철도 지대의 중요지점을 모조리 석권해 버렸다. 또한 관동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하야시 센주로의 조선 주둔 일본군은 국경을 넘지 말라는 중앙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21일 만주로 진입하였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사변불확대와 국지해결 방침안을 결의하였다가 사건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지경으로 진행되어버려 어쩔 수 없이 추후 승인하는 형태로 관동군에게 질질 끌려 다녔다. 당시 정부가 군에 대한 견제력을 잃은 것이며, 군 중앙에서도 관동군을 통제하지 못했다. 이렇게 군대가 정부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현상은 관동군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군대 조직에서 관습이 되어버렸고 이로 인해 일본의 졸전과 패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장 육군과 해군이라는 엄연한 한 나라의 정규군들이 서로 다른 나라 군대들처럼 적대를 한 끝에 육군에서 자체적으로 해군 전력을 키운다고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개발하는 미친 사례까지 등장할 정도이다.
1932년 1월 28일에 상하이에서 일본인 승려들이 습격을 받는 마옥산 사건(磨玉山 事件)이 발생했다. 이는 세계 각국의 관심을 만주에서 떼어내 상하이로 옮겨놓은 사이에 하얼빈 점령이나 만주국 건국을 촉진하려는 계략이었다. 관동군의 의뢰를 받은 상해주재 무관 보좌관 다나카 소령에게 매수당한 중국인들이 범인이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고 각국의 시선이 세계적인 경제 대도시인 상하이에 집중된 사이에 만주국 건국을 착수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부의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장악한 관동군은 정부와 군 중앙의 견제를 뿌리치고 만주 각처에서 이른바 ‘만몽(滿蒙) 신국가’의 건국 운동을 벌이도록 선동했다.
1932년 2월 창춘(長春)에서 이른바 ‘신국가 건설회의‘를 조직, 국호는 ‘대중(大中)’, ‘대동(大同)’이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최종안으로 ‘만주국’이 선택되었고 대동은 연호로 사용되었다. 또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패도정치와 대응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신국가의 정체(政體)를 두고서는 공화파, 군주파, 민주파로 나뉘어 격론을 하였는데, 일단 당분간 “형체상 공화국, 실질은 군주제에 의한 민주제를 채용”하여 국가원수의 명칭을 “집정(執政)”으로 하는 공화국으로 출발하기로 하고, 나중에 상황을 봐서 절대군주제나 입헌군주제로 바꾸기로 하였다. 그리고 집정에는 청나라가 망하고 폐위된 황제 선통제(宣統帝, 1906년∼1967년)를 앉혔다.
이리하여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성립을 선언하면서 신징(新京)을 수도로 삼았다. 신경, 지금의 지린성 창춘시(長春). 지금도 창춘에 당시 만주국 황궁(건국 당시에는 집정부)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연호를 대동(大同)이라 하였으며, 탕강자에 머물고 있던 푸이(선통제)는 3월 9일 장춘에 도착, 이 날 오후 시청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대전(大典)에서 장징후이로부터 순금의 옥새를 봉정(奉呈)받고 집정 취임을 선포하였으며,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오후 5시에 의식을 마쳤다.
신흥 만주국은 일본 이하 17개국에 대해 승인을 요구하는 대외통고를 발했다. 그러자 열국은 단지 통고를 받았다는 회답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마저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만주국을 승인한 것은 1932년 9월 15일이었지만 이에 이르기 위해서는 5.15 사건에 따른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1855년∼1932년) 총리의 암살이라는 불상사를 거쳐야만 했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日滿議政書)에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이어서 엘살바도르, 바이마르 공화국, 폴란드, 이탈리아 왕국, 코스타리카, 불가리아 왕국, 스페인, 헝가리 왕국, 도미니카 공화국 등의 일부 나라가 승인하였다. 당연히 국제 연맹의 승인은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곧 만주국(그리고 배후의 관동군)은 1933년 열하사변(熱河事變)을 일으켜 열하성(熱河省)마저 병탄했다.
미국 : ‘우리는 중국인을 동정하지만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는 없다.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자위를 위해 전쟁한다는 일본군의 명분과 달리, 일본군이 만주를 넘어서 진저우를 비롯한 중화민국 화북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이때부터 미국은 상당히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서 스팀슨 선언(Stimson Doctrine)을 발표하고 일본의 행동을 비난하며 만주국 불승인 정책을 고수했다. 왜냐면 당시 만주는 미국의 이익에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중국에 진출한 서구 열강들 중에서 비교적 후발주자였던 미국은 다른 열강들이 이미 이권을 선점한 화남 지역이라든지 산동반도 같은 지역보다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만주지역의 이권과 상품시장에 관심이 있던 상태였다. 19세기 후반 이후로 미국은 이미 중국에 석유(주로 석유 등을 밝히기 위한 연료. 등유라는 말의 기원이기도 하다.)제품 수출 등 상당한 교역관계가 있었고 일찌감치 스탠다드 오일과 씨티은행(화기은행) 등이 중국에 진출해 있었다. 만주지역의 상품시장 확보와 이권 확보에 있어서 만주에서 일본의 영향력 확대와 일본의 만주침략은 미국 기업들이 이익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일본이 실질적으로 미국의 만주에 대한 이권을 보장해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도 1920년대까지는 비록 2차 영일 동맹이 깨지고 점차 일본을 잠재 적국으로 인식하기는 했지만 미국이 결정적으로 일본을 적성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계기가 일본의 만주 침략이었다.
중화민국 : 굉장한 충격을 받았고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제3차 초공작전과 1차 양광사변이 중지되었으며 왕징웨이나, 후한민 같은 반장파들이나 반란 중이던 광시 파벌들도 잠시 총을 내려놓고 초계파적인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미 군사적 지원은 장쉐량이 거부했던 시점에서 더 이상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이고 섣불리 일본에 맞섰다간 전면전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국제연맹에 제소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여겼다. 이후로도 만주국을 인정하진 않아 러허사변(熱河事變, 1933년) 이후 일본이 산해관을 점령하며 내려오자 휴전을 위해 1933년 5월 31일 관동군 대표 오카무라 야스지 소장과 중국군 대표 웅빈 사이에 당고에서 성립된 이른바 당고정전협정(塘沽停戰協定)으로 사실상 만주국을 인정하게 되었다. 일본은 만주국 이상으로 더 확대하지 않고 중국은 장성 남쪽에 비무장 지대를 만들고 베이징 서남쪽으로 철수하여 상호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패배적 협정이다. 막상 협정을 맺고 나서도 일본은 내몽골과 화북을 계속 침략하여 몽골에서는 데므치그돈로브(德穆楚克棟魯普, 1902년∼1966년)의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를, 화북에서도 괴뢰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때서야 중국도 만주국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국가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예를 들면 한국 대통령이 북한을 정식국가로 인정하고 수교하려면 헌법부터 바꿔야 한다. 때문에 일본은 중국의 만주국 승인을 여러 차례 요구했고 중일전쟁 초기의 협상에서 일본이 내건 조건도 장제스의 만주국 승인이었다. 이후 중국의 방침은 힘을 길러서 빠르면 1939년, 늦으면 1943년 때까지 무력으로 만주를 되찾자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 : 당시 중국공산당의 세력은 확대일로(擴大一路)이긴 했으니 국민당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이 수립한 해방구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양자강 유역의 내륙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국민당에 포위된 상태였으므로, 일본군 및 만주국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이에 따라 장제스와 국민당이 조국을 침략해오는 일본군하고는 안 싸우고 오히려 내전만 격화시키고 있다면서, 자신들과 함께 항일전쟁에 나서자는 선전공작을 강화하였다. 국민당군과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을 벌이던 홍군은 장제스가 3차 초공작전(剿共作戰) 중지를 결정하자, 대외적으로 이것을 홍군의 위대한 승리라고 선전하면서 전력을 보강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어찌하던 국민당군의 공격을 버텨낸 홍군은 자신감에 차올랐으며, 병력과 물자를 보충해서 전력을 끌어올린다.
소련 : 만주사변을 미일 항쟁의 개막으로 보아, 당분간은 시베리아에서 육군력을 증강하기 위해 일대 국가와 화평상태 유지만을 생각했다. 1935년 3월 23일 사실상 만주국을 승인하였고, 1941년 4월 13일에 다시 조약을 맺으며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소련은 하얼빈과 만저우리에, 만주국은 블라고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와 치타(Chita)에 각각 영사관을 개설하였다.
영국 : 영국의 이권이 화중, 특히 양자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하이 쪽에만 관심이 있었다. 상하이 사변 이후에야 미국과 함께 움직이려고 하였지만 미국 스팀슨 국무장관의 강력한 공동 행동 제안은 거절하였다. 오히려 한다는 말이 일본과 같은 활동적 나라의 발전을 미개한 중국을 위해 방해하는 것이 어떻게 맞겠냐며 일본의 만주 침탈을 지지하다시피 했다. 다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1932년 국제연맹 총회에서는 일본의 만주점령 비난 결의안을 찬성하였다.
프랑스 : 영국과 함께 1932년 국제연맹 총회에서 일본의 만주 점령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때 같이 찬성하였다.
만주국의 국토는 앞서 말한 동북 3성과 열하성에 이르러서 면적이 한반도의 6배였으며, 영불독 3국을 합친 것보다 컸다. 그리고 인구는 3천만 명이 되었다.
1934년 1월이 되자, 당초 어정쩡하게 ‘집정(執政)’이라는 이름으로 봉합했던 국가원수 명칭을 만주국 건국 만 2년을 맞는 1934년 3월 1일부로 제정을 선포할 방침이 정해졌다.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칭제할 때와 비슷하게도 푸이를 황제로 세우라는 청원서를 조작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러면서 “절대 (청조) 복벽(復辟)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종전대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행하는 것이지 “전제정치(專制政治)을 꾀하는 것이 아님”을 달아두긴 했다. 아무튼 이 해 3월 1일 푸이는 “국호를 대만주제국(大滿洲帝國),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친다”는 조서를 반포하였으며, 이른 아침 현재의 창춘인 당시의 신징(新京, 신경) 교외에 설치된 제단에서 교제(郊祭)의 의식을 마치고 정오에 만주국 황궁에서 즉위식을 가지면서 정식으로 대만주제국 황제에 즉위하였다. 3월 2일에는 연회가 열렸고, 4일에는 신징에서 열병식, 5일에는 하얼빈에서 관함식(觀艦式)을 가졌다.
한편 일제는 내몽골에 역시 괴뢰정권인 몽강자치연합정부(蒙疆自治聯合政府)를 세웠다. 하지만 곧 왕징웨이 정권의 내몽골 자치구가 된다.
1908년 만주의 인구는 1,583만 명이었지만, 1941년에 가면 인구가 5천만 명으로 증가했다.
게다가 만주는 워낙 넓다보니 일본은 만주와 몽골 지역을 일거에 점령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동북 4성과 몽골을 영역으로 하고 푸이를 우두머리로 내세운, 일본 군부가 제조한 중국인 정권이 바로 만주국이었다. 따라서 이후 군부가 만주의 실권을 장악하는 상황으로 이어짐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만주국이란 관동군이 세운 그야말로 완벽한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만주국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뭐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일본이 겁도 없이 진주만을 공습해 미국과 전쟁을 치르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 간다. 미국에게 시종일관 밀리던 일본은 만주국의 병력과 물자까지 차출해가며 발악을 했지만, 전황이 악화되면서 만주국 방비를 위해 배치된 관동군 병력들은 하나둘 전선으로 차출되어 갔다. 이러다보니 그 빈자리는 현지 일본 주민을 징집하거나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부대가 대신하였기 때문에 대전 말기에는 만주국의 전쟁 대비태세가 상당히 취약해졌다.
결국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실시된 만주전략공세 작전으로 관동군은 소련군에게 일거에 괴멸해버렸다. 이미 관동군의 정예는 남방전선으로 빠져나간 터라 속 빈 강정이었다. 소련군의 진격으로 혼란에 빠진 뒤, 그대로 푸이가 체포되고 만주국도 무너졌다. 개전 7일만의 멸망. 그리고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지 2일 후인 8월 17일에 국무총리대신인 장징후이(張景惠, 1871년∼1956년)가 주재한 중신회의는 임시수도인 퉁화에서 만주국의 해체를 결정하였다. 이후 만주지역에는 소련군의 군정이 실시되다가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인계받았고, 다시 국공내전(國共內戰, 1927년∼1950년)을 거쳐 1949년에 최종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되었다. 만주사변 이전에도 중국에서 가장 유망한 지역에 일제가 설치한 막대한 산업시설이 소련의 점령 이후에도 상당수 남아있었기에 국민당과 공산당 둘 다 만주 탈취에 혈안이 되었다. 장제스가 “동북을 탈취하지 못하면 중국은 근대 산업국가로 발전할 수 없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할 정도였다.
만주지역의 마적 떼와 만주군의 잔당들은 알아서 국민당군과 공산군으로 제각기 갈아탔다. 한동안 국민당군이 주둔했으나, 소련은 그들이 점령한 북한 지역에 공산군의 피난처를 제공했다. 훗날 조선족으로 분류될 이들이 공산군에 편입됐다. 그리고 순조롭게 중국공산당은 만주를 점령하게 된다.
만주국 함락과 함께 거주 일본인들은 먼저 냅다 도망쳐버린 관동군에게 버림받고 소련군과 현지 한족들의 무차별 공격과 약탈, 강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포화 속에서 살아남아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귀국해서도 멸시와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탓인지 만주국 태생 일본인들 중에는 공산당이나 좌파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곳 출신 유명인으로는 성우이자 배우였던 토미야마 케이(富山敬, 1938년∼1995년), ‘내일의 죠’로 유명한 만화가 치바 테츠야(千葉徹彌, 1939년∼ ), ‘천재 바카본’ 시리즈의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赤塚 不二夫, 1935년∼2008년), 공포 만화로 유명한 히노 히데시(日野 日出志, 1946년∼ ),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小澤征爾, 1935년∼ ), 전자전대 덴지맨의 주제가를 부른 애니송 가수 나리타 켄(成田賢, 1945년∼2018년), 성우 후지타 토시코(藤田淑子, 1950년∼2018년) 등이 있다.
이렇게 해외에 체류하다가 식민지가 독립하면서 일본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히키아게샤(引揚者)라고 한다.
만주국의 최후는 한 나라의 멸망치고는 다소 흥미롭다. 소련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황제 푸이도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8월 18일 압록강 유역의 다리쯔(大栗子)에서 간단한 회의를 소집해서 만주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해산했다.
만주국 정부는 국가 원수로서 집정(執政) → 황제(皇帝), 자문기관으로서 참의부(參議府), 행정기관으로서 국무원(國務院), 사법기관으로서 법원(法院), 입법기관으로서 입법원(立法院), 감찰 기관으로서 감찰원(監察院)을 두었다. 국무원에는 총무청(総務廳)이 설치되어 관제상으로 국무원 총리의 보좌 기관이었지만 실상은 일본인 관리에 의한 만주국 행정의 실질적인 핵심으로서 기능했다(총무청 중심주의). 그에 대한 국무원 회의의 의결이나 참의부의 자문은 형식적인 것에 머물렀고 입법원은 정식으로 개설조차 되지 않았다.
만주국의 모든 권력은 관동군에서 나왔다. 구체적으로는 관동군 제3과와 제4과로 불리는 곳이 정무지도(政務指導) 등 거의 모든 지시를 내렸다. 종래에는 관동군, 관동청, 영사관, 만철이 4두 정치라고 불릴 정도로 파벌 대립이 심각 했다. 이에 32년 8월 8일 무토 노부요시(武藤 信義, 1868년∼1933년) 대장이 관동군 사령관, 관동장관,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삼위일체(三位一體) 지배권이 확립 되었고, 만철 총재도 실질적으로 관동군 지휘 아래 들게 되었다.
만주국은 정부조직법(1932년 3월 공포)에 따르면 군주가 아닌 집정이 통치하고 의외로 입법 행정 사법 3권 분립이 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법률과 예산안을 의결하는 입법원은 만주가 멸망할 때까지 결국 설치되지 않았다. 그 말인 즉 만주에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하는 것도 뭐하지만 집정의 자문기구인 참의부가 있었고 법률 대신에 칙령이 있었다. 물론 무슨 칙령을 만들고, 고치고, 없앨 건지 결정하는 것은 일본인 관리들의 손에 달렸다. 덕분에 내몽골처럼 순진하게도 중앙 정부에 “의회가 생긴다는데 대표 선출이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웃지 못 할 사례도 있었다.
또한 만주국에는 합법적인 정당이 없었고, 정치조직인 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가 사실상 일당제를 실시했다.
국무원은 집정의 명령을 받아 행정권을 행한다. 국무원에는 민정·외교·군정·재정·실업·교통·사법의 행정각부와 국부총리, 각부총장을 둔다.
법원은 민사 형사의 소송을 심판한다. 이외 기밀·인사·주계·수용에 관한 사항은 국무총리가 각부로부터 분리해서 직접 관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위해 국무원에 총무청이 설치되어, 이것을 총무장관이 맡아 처리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총무장관이라는 것이 국무원의 요체로서 반드시 일본인이 임명되었으며, 각부 장관은 바지사장 중국인이었지만 각부 차장, 부서별 총무사장 이하 일본인 관리를 감독하는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각 일본인 관리는 관동군사령관에게 임명권이 있었으니 집정(푸이)→총리(정샤오쉬, 장징후이)→각부 장관(민정 짱스이, 군정 마잔산, 재정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공식라인은 허울뿐이었다. 실제로 군벌출신 각부 장관은 성장을 겸임하기 때문에 국무원 건물로 업무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 결국 실제로는 관동청 3·4과→총무장관→각부 차장 혹은 총무사장이 실질적인 행정 라인이었다.
또한 중국계 장관들은 고의적으로 배제시키고 총무장관이 주재하는 일본인 고급관리회의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 장관들 대부분도 만철 직원 또는 식민지의 관리 출신이었다.
지방 조직으로는 각 성에 성공서가 있고, 성장 아래에 총무·민정·경무·실업·교육 등의 각 청을 두었다. 성급에서도 성장만 중국인이어어서 34년 이후 간도성만 조선친일파 김석범이 있었다. 그리고 청장 등 중요한 자리는 일본인이 차지했다.
동북 4성이라는 게 사실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에 1934년 12월 펑톈·안동·금주·리허·지린·간도·빈강·용강·삼강·흑하로 쪼개고 내몽골 동부에 흥안 동·남·북 성을 만드는 등 총 14개로 쪼개어 중앙집권화와 치안 유지의 용이성을 추구하였다. 면적이 넓기도 했지만 동시에 군벌출신(軍閥出身) 성장들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성 아래는 시, 현이 있고, 몽골인이 사는 서부 지방에는 현에 준하는 기가 설치되었다. 현에는 자치지도원이 파견되었다. 7월 자정국(資政局) 폐지 후, 현(現)·기제(機制)가 공포되어, 지도원은 현(기)참사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참사관에게는 현정운영에 있어 중요한 정무에 참여한다는 직능이 주어졌다.
만주국 성립 직후부터 치안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일단 만주국 건국 주체의 한 사람으로 군정부 총장(장관)까지 했던 마점산이 헤이룽장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외에도 구 군벌군, 중국공산당 계열 유격대(동북항일연군), 국민당 계열 부대, 유망민 농민집단, 대도회·홍창회 같은 정통적인 민중의 비밀결사, 간도지방의 조선인 집단 등 총수가 무려 32만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인적자원은 치안 대책을 위해 투입하였고 군, 경찰 등 치안관계비(治安關係費)가 매해 세출의 35% 전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구군벌에서 받아들인 10만 명으로 만주군을 만들었다. 만주군의 1차 임무는 만주국에 저항하는 항일부대의 소탕과 같은 치안유지였다. 관동군과 헷갈릴 수 있지만 일본군의 군사령부급 단위중 하나인 관동군은 대소전을 대비한 부대이고, 만주군은 만주국 관내의 중국인, 조선인들로 만주국내 치안유지를 주 목적으로 한다.
만주국 경찰은 비행기와 하천용 군함까지 보유하여 최대 10만 명에 이르는 무장병력을 거느린 또 하나의 군대였으며 각종 행정까지 관장하는 막강한 조직이었다. 관할 구역의 각종 현황파악(자동차나 수레 대수는 물론 넝마주이 숫자까지)은 물론 위생단속이나 자전거 타는 법까지 일일이 지도 및 단속했다고 한다. 지역마다 구성된 무장 자위단과 소속단원 수는 1935년에 241개와 7,146명이였으나 1936년에는 319개와 1만 8,131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경찰행정은 민정부 경무사가, 성에서는 경무청이 담당했으며 조직상은 민정부 총장(장관)과 각 성장, 현장에게 보고해야 하나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고 어느 경우에도 일본 예비역 헌병 출신자가 지도하였다. 경찰관, 특히 고위 간부급에는 많은 일본인이 채용되었다. 현급의 지도자인 일본인 참사관이 현경찰대를 지휘하여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과 교전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