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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 내내 잠을 설치는 하루하루입니다. 현장의 가장 깊숙한 일선에서 봉사하다가 급작스런 일로 심신의 어려움을 겪은 자매와 그 유사한 일들로 고통당하는 분들의 아픔을 공동체의 신비한 사귐 안에서 함께 느끼고 있음을 오직 주님만 참되게 증언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모두의 마음이 그러하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번 한주 사랑하는 자매의 일로 마음의 부담을 같이 느끼며, 글쓰기를 자제하고 늘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지난 주일예배(2013. 12. 22.) 설교비평은 '마리아를 닮은 가냘픈 여성 분께 - Magnificat!'라는 제목으로 게시한 바가 있습니다만, 지난 수요일 성탄축하예배(2013. 12. 25.) 설교비평은, 할말이 참 많지만, 아직 게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이 퍽 무겁고 아픈 한 주간을 보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우리의 마리아 같은 딸을 생각하니, 손이 부르르 떨리고 도통 글이 되지 않는 참담한 심경입니다.
이 새벽에 잠을 뒤척이다가 보니, 평소 존경하는 종려나무님의 게시글이 올라왔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여러 사랑넷 카페 회원분들께 담대하고도 감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종려나무님의 제안을 하나의 제안으로 기꺼이 받아주시되,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을 자극할 정도로 너무 지나친 원색적 찬반 표명을 하심으로써 행여나 불필요한 논쟁/논란이 유발되지 않도록 한번쯤은 숙고하시도록 부탁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사랑넷 카페의 운영자도 아니며, 더더욱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자격도 하등의 이유도 없습니다.
자매의 일도 그렇거니와 우리가 가슴 아픈 일들을 겪고 있는데, 이곳 사랑넷 카페만큼은 위로와 격려, 공감과 실천을 위한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저의 작은 욕심입니다. 이 부탁 말씀이 외람되다고 느끼셨다면, 한번만 용서와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머리 숙여 부탁드립니다. 이미 훌륭한 토론과 논의 및 소통을 하시는 분들께 쓸데없는 첨언이었다면 널리 혜량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 지나치게 논쟁적인 게시글이나 댓글을 만나셨다면, 아예 대꾸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여 봅니다. 이곳 사랑넷 카페에는 갱신위원회와 개혁측 성도들을 감시하는 눈들이 스며들어와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우리는 강렬한 토론/논쟁/논란으로만 치닫는 인터넷 카페 공간에서는, 솔직하고 투박한 개혁측 성도와 순수하지 못한 트러블 메이커(분열의 촉진자)를 구분하여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부디 절제된 소통을 하시고, 감정 상하게 할 요소는 미연에 방지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종려나무님의 제안에 대해서 개혁측 성도들을 대표하는 사랑의교회 갱신위원회는 섬세하게, 그러나 지나친 부담 없이 검토하여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오늘 종려나무님께서는 현 시점에서 '분립(새 교회 창립)' 주장을 아주 명확히 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보다 '상세한 분립 안'은 향후 구체적으로 제시될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절실한 필요를 느끼시는 일부 성도들이라도 분리하여 몇 분 은퇴장로님 및 협동장로님들과 함께 새 교회 또는 새 교회들을 세우도록 물꼬를 터주면, 오목사의 해임 이후에는 이 새 교회 또는 새 교회들이 여러 면에서 눈부신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종려나무님의 제안 설명이 마무리되는 대로, 사랑의교회 갱신위원회는 공사다망하심에도, 첫째는 성경적 바람직성(biblical desirability), 둘째는 행동계획(action plan)의 실행가능성(feasibility) 등 차원에서 여러 지혜로운 성도들의 의견과 소망을 수렴하셔서 검토 및 방향성 설정을 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숙의와 결정과정을 통하여 사랑의교회 갱신위원회가 더욱 발전하고 선한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제안서에 대해 논평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자격도 없고, 제 역할도 아닙니다.
다만, 제게 본능적으로 들어오는 생각은, 갱신위원회와 종려나무님 모두를 잃지 않고 싶다는 소망스런 생각뿐입니다. 갱신위원회는 법적 투쟁으로 대표되는 리더쉽 교체 운동과 더불어 주마다 두차례의 마당기도회를 훌륭하게 이끌고 있고, 반면, 종려나무님은 이러한 행동계획을 투트랙이 아닌 원트랙으로 보시고 계시며 현 시점에서의 교회분립(새 교회 설립)을 포함하여야 투트랙이라고 규정하고 계시는 것으로 읽힙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 안에서 궁극적으로 갱신위원회와 종려나무님을 모두 얻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현실에서 행동계획이 양립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각박한 현실에서 우리의 개혁갱신 운동과 그 동력이 나누어지지 않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갓 태어난 사랑의교회 갱신위원회에 몸담고 계신 분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임하고 계신 분들입니다. 갖가지 모욕을 참고 인내하시는 위원장님, 개구멍 같은 어둔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예배당 문을 따는 총무님, 여러 집사님들, 사랑의 어머니 권사님들, 도저히 함께 하지 못할 일들을 하시는 멀티플레이어들, 린치를 당하는 청년분들... 저에게는 과분한 분들입니다.
종려나무님은 저의 글쓰기를 기대, 권유해 주신 존경하는 장로님이십니다. 잠시 글을 쉬시기 전, 감사하게도 제 설교비평 글을 후하게 평해 주셨습니다. 아울러 당신의 바쁘신 일상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면서, 간혹 사랑넷 카페에 조연으로 등장하시겠다고 위트있게 말씀해 주셨고, 당신의 글을 기다리고 있었던 차였습니다. 참 감사한 분입니다.
이 훌륭한 분들이 서로 나누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어쩌나요? 기우일까요? 인간인지라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강하게 먹으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더욱 간절한 기도의 동력과 천상의 지혜와 연합의 정신이 필요해 보입니다. 오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글을 마무리하면서,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에 읽은 종려나무님의 글에서 제가 받은 신선한 충격이 하나 있었습니다. 종려나무님의 '내면의 피폐해짐'에 관한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놀람과 충격’으로 시작되었던 우리의 정서적 반응이, ‘실망과 좌절’의 단계를 지나 ‘미움과 증오’의 단계로 발전해왔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법철학의 격언처럼, 오직 그의 죄에만 집중하고 사람은 미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내 의지와는 달리 내 감정은 미움과 증오 사이만 왔다 갔다 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러나, 그를 향한 내 마음은 결코 긍휼과 사랑의 영역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이런 고백을 해 주심에 감사함을 표합니다. 존경하는 종려나무님도 오정현씨에 대한 미움/증오에서 긍휼/사랑으로 변화되지 않는 당신의 내면세계를 인해 몹시도 고통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일정 기간 동안 글을 쓰시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종려나무님의 이 고백은, 제 자신을 살펴보도록 도움을 주며, 원래 제 '초심'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기억해 봅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제 초심은 '사랑'이었습니다. 미움과 증오로 오정현씨의 설교와 행태를 비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오정현씨를 향해 소리쳤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오정현씨의 영혼을 염려했습니다. 이것은 제 양심과 영혼의 소리였습니다. 오직 기독교의 '사랑'만이 영혼을 든든하게 세우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만듭니다. '사랑'을 확보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승인을 얻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 내면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추동받으면서도 동시에 사임을 촉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마저도 오정현씨의 회개와 사임을 촉구한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설교비평이 사랑에 의해 추동된다는 진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종려나무님의 고뇌에 찬 고백에서처럼, 미움/증오의 영역에서 긍휼/사랑의 영역으로 옮겨져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강권하시도록 하는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설교비평도, 개혁과제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개혁갱신운동 안에 그 사랑이 임하고 그 사랑에 사람들이 고꾸라지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아시거니와 고백하겠습니다. 제 인생에 괄목할만한 일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죄를 각성하면서 밤낮으로 미친 사람처럼 죄를 회개하면서 침대 위와 방바닥 위에서 굴렀습니다. 완전히 엎드려졌습니다. 신의 영광을 거역하고 교회에 무관심하고 창조세계를 돌보지 않고 살았던 악하디 악한 저의 뿌리 깊은 죄악의 심연이 느껴지면서 갖은 악행을 토설하였습니다. 거룩하게 산 적이 한번도 없었음을 깨닫고 가슴을 쳤습니다. 말로만 듣던 성령님이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면서 저의 기도를 이끄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기이하고 거룩한 사랑에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아,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거룩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심장이 터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제 심장도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고꾸라지고 형언할 수 없는 예수님의 고통이 밀려오면서도 오직 그분만이 저를 살려주셨다는 감사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면 들풀보다 못한 저에게 주신 주님 은혜를 생각하면서 자다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주 예수님께 감사하고 경배합니다. 지나가다가도 들풀이 바람에 흔들리면 물끄러미 바라보는 습관이 그때부터 생겼습니다. 차라리 들풀으로 태어났으면 참 좋았겠다고 절규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저도 모르게 절로 가슴이 미어지곤 합니다.
그때 심하게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자연스런 금식으로 못먹고 못잤고, 복음의 진리가 도저히 제 영혼에 감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주님께 지은 죄악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통찰하게 되면서 바로 저때문에 예수님이 모진 고통과 모욕 속에서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욕할 것도 없었습니다. 창조세계의 악의 근원은 바로 저였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상하게 그 전에는 잘 짓던 습관적 죄악이 싫어졌습니다. 미움도 증오도 사라졌습니다. 저 때문에 돌아가신 '주님의 형상(Imago Dei)이 떠오르곤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의 기도를 하신 주님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꿈을 꿉니다. 곧 십자가 형틀에서 몸이 찢겨질 주님의 머리카락에 그저 입맞추고 싶어집니다. 그저 원수 노릇하던 저를 위해 하나님께 버림받는 형벌을 선택하셨습니다. 저는 깨어나서 미친 사람처럼 흐느껴 울곤 합니다.
저는 오정현씨를 위해 포기치 않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간혹 주시는 의분에 사로잡힐 때 말고는 그 사람이 전혀 밉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도 언젠가 죽게 됩니다. 언젠가 영혼과 영혼끼리 부딪힌다고 해도 후회없이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정현씨가 죽기 전에, 늦기 전에 회개한 사람의 행복과 기쁨 그리고 자유로움을 체험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저는 그분을 비난할 자격은 전혀 없지만, 그분에게 회개에 대해 말할 자격은 있습니다. 제가 회개로 새 사람되었고 영혼의 파멸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시거니와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부끄럽지만 담대하게 '사랑'을 강조하는 저의 초,중기 글 몇편을 재게시합니다. 변함 없는 사랑, 이런 은혜가 있다니요. 하나님은 우리를 예기치 못하게 습격(襲擊)하십니다. 울고 또 웁니다. 특별히 가냘픈 자매님과 고뇌하시는 종려나무님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오 주님! 오직 은혜로 습격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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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A. 사랑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오남용하지 말라
B. 권면에 앞서
C. 사임을 권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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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랑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오남용하지 말라
사랑이라는 거룩한 이름의 오남용은 오목사에서만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측근들에게서, 그의 추종자들에게서 발견되곤 한다.
교계의 일부 원로들과 인사들, 교회의 교역자들과 직분자들, 교인들 등등 많은 사람들이 그의 측근이나 추종자들로서 오목사를 여러 방식으로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는 줄로 안다. 그 동기도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을 위한다는 선한 동기로 오목사를 지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으로 본다.
이 글을 시작하는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해야 오목사를 사랑하는 것인가?" "그의 측근들과 추종자들은 정말 오목사를 사랑하는 것일까?" 나아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핵심강령의 한 축으로 제시하셨고, 사도들도 이 말씀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셨고, 사도 요한 역시 이 말씀을 토대로 여러번 권면하셨다.
십계명을 요약하고 있는 하나의 축인 말씀대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특히 성도의 공동체 안에서 뜨겁게 서로 사랑하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 주신 사랑을 본받아 형제자매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진실이다.
우리는 지금 특수한 지위와 상황에 놓여져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하며,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숙고해야 한다. 그 사람은 소위 대형교회의 목회자이고, 논문표절과 거짓말 등으로 추문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교회의 목회자이며 어찌보면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교회권징의 공적 문제에 연루되어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람이다.
혹자는 은연 중에 그 사람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듯 말하기도 한다. 그는 사기꾼에다가 거짓말장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한다. 아무래도 미혹의 영과 맘몬의 영에 붙잡혀 있다는 말을 듣는다. 심지어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의심된다고도 한다. 어떤 말을 해야 그를 온당하게 묘사하는 것일까?
다양한 각도에서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를 오랜 세월 동안 거짓말을 해 온 그리스도인, 그러면서도 목회의 길을 걸은 불쌍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어도 거짓과 많은 은밀한 죄악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를 빗대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린도교회에도 습관적으로 범죄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일부는 범죄 양상이 현저하고 노골적이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육체의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 사도 바울 역시 차라리 죽는 것이 유익한 성도는 영혼의 유익을 위해 사탄에게 육체를 넘겨주었다고 진술했다.
오목사와는 다른 종류의 죄악 언급이지만, 외국이든 한국이든 그리스도인 목회자가 음행에 연루되기도 하며, 이 글을 읽는 어떤 사람은 룸살롱이나 안마샵에서 음행의 경험을 했거나 교회에 출석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런 일에 은밀하게 묻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교활함의 정도 차이가 있을뿐 은밀하고 치명적 죄를 습관적으로 범하는 사람은 많은 경우 또는 일정 경우 우리 안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세속학문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논문을 표절하기도 하고, 교수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연약 혹은 완악하지만 오목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요, 형제자매들에게도 사랑받아야 하는 우리의 형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그 주장의 근거가 박약하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한일서 4장 20절)"
우리는 오목사를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하여 성령 안에서 십계명의 요구의 취지를 충족시켜야 하며, 특히 그리스도 자신과 사도의 명령과 같이 오목사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각자 오목사를 사랑하여야 한다(물론 오목사도 회개와 사임으로써 그러한 사랑의 일부를 나타내야 한다). 오목사가 사랑받아야 한다는 여기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성경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때로 동의와 수긍이 어렵더라도 이것은 그리스도와 사도의 호소이자 명령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오목사의 측근과 추종자들이 벌이는 오목사 감싸기는, 겉으로는 오목사에 대한 사랑 혹은 충성일지 모르나, 실제는 그 영혼을 사지로 모는 사냥행위일 수 있다. 오목사에 대한 사랑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해야 하며, 적어도 우리 자신이 오목사라면 갈구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그 상태를 양심과 신앙에 따라 확정하고서 그를 도와야 한다. 과연 (그 인생의 어느 순간과 비교하더라도) 회개의 절호의 기회에 처해 있는 오목사를 대형교회의 목사직에 존치시키고, 새로 지은 사치스러운 건물에 들어가서 더러운 인습들을 성장주의와 이벤트 목회의 또다른 이름으로 재현시키게 만드는 것이 온당하다는 말인가? 어째서, 어떤 근거로 온당하다는 말인가?
혹시 오목사와 (사회적, 심리적, 금전적 교환 등의) 거래관계에 있기에 오목사의 사임을 막아서고 그를 감싸는 것인 아닌가? 요한계시록에도 큰성 바벨론(Babylon the Great)은 음녀로서 그녀와 상업적 거래관계에 있었던 수많은 세력이 그 음행의 단죄로 그 결탁이 폭로된 후 울부짖는 광경을 보게 된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혹시 오목사의 회개와 사임을 막아서면서 오목사의 옛사람과 결탁하고,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리면서 사랑하신 오목사 우리 형제를 심판에 이르게 하려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위대한 왕의 이름으로 권면하노니, 당신이 오목사와 가깝고 그의 언로를 알고 있다면 오목사에게 직언하야 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면 당신은 오목사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오목사의 영혼을 당신의 영혼만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된다. 오목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대언하시라.
예수를 따르던 군중도 떡 맛을 보더니만 그를 왕으로 삼으려 했고, 제자들,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도 자신의 스케쥴과 계획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두려고 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걸림돌, 스캔들로 간주되었다. 우리 안의 죄성은 심지어 하나님과도, 예컨대 기복신앙과 소원성취 신앙을 표현함으로써, 모종의 거래관계를 유지하려 시도한다. 혹시 당신이 대형교회의 인맥과 자원 등의 맛을 보았는가? 교회권력 맛이 달콤한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죽은 자이다. 나아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이다.
죽음이 예정된 오목사의 옛사람과 싸우고, 그의 새사람을 도우라. 그의 옛사람을 십자가에서 멸하시려 하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시라. 그의 옛사람과 싸워 직장을 잃고 돈을 잃어도 훗날 그 영혼을 얻고 주님께 영광을 얻으시라. 거대한 마귀적 음모의 도식인 사랑이라는 이름의 오남용에서 자유하시고,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시라.
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속히 오소서!
B. 권면에 앞서
사랑은 죄의 용서로 표현되곤 한다. 용서는 강요될 수 없고, 구해질(부탁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제물로 인하여 용서를 강요받지 않으셨다. 아버지게서는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 피 제물의 용서 요청(부탁)을 기꺼이 받으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에는 처절한 죽음(아버지의 독생자의 피흘린 희생)이 전제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흘린 희생에 깊이 연루된 죄인임을 뼛속 깊이 자성하고 시인함으로써 그분의 용서를 받는다. 그 회개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내면서, 그 회개가 진실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겉으로 보기에 오목사는 용서를 구하였다
. 그런데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해서 거론하지는 않았다. 논문의 표절문제, 이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보인 거짓말의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하나님 앞에서, 회중 앞에서 구체적 죄를 자백하지 않고 어떻게 회개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가? 단순한 실수, 실언을 덮어달라고 구한 것이란 말인가? 오목사가 범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죄악이다. 성도의 죄의 자백은 항상 구체성을 띠고 꾸밈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직고하게 되며, 그 때는 두루뭉실 넘어갈 일이 없다.
오목사의 사과는 죄악의 문제에 대처하는 오랜 성도들의 체험에 위배된다. 부흥의 시기에, 특히, 성도들은 자신과 공동체의 죄악의 문제로 신음하곤 하였다. 성령과 영혼의 탄식이 얼마나 컸던지 침대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Charles G. Finney의 일기에 나온 성도들의 체험을 살펴보면, 죄악에 대해 다루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인간 영혼을 얼마나 정직하고 꾸밈없이 만드는지 알 수 있다. 한국의 부흥 역사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나는 오목사가 그리스도 피 제물 앞에서 얼마나 영혼이 신음하고 두려워했는지, 목자에게 맡겨진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생각하며 얼마나 벌벌 떨었는지 듣고 싶었다. 복음의 능력이 오목사를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알고 싶었다.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환도뼈(좌골)를 맞아 절면서 만나게 된 하나님의 사자에 대해 증언하는지 듣고 싶었다. 불행히도, 그런 이야기는 아무리 애써도 들리지 않는다.
하나님과 우리는 오목사가 단지 기죽은 모습, 애써 취하는 저자세, 심지어 눈물을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학위논문 표절과 거짓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이를 죄악으로 인정하고, 처분에 맞기니 할 수 있다면 용서해 달라고 청해야 한다. 심각한 수준의 학위논문 표절과 이를 자의적으로 덮는 거짓말은 그 동안 그가 살았던 세월안에서의 구조악과 동시에 그가 의존했던 허위와 편법이 가진 체계성, 고의성, 습관성을 폭로하는 증거가 된다.
학위논문 표절은 도둑질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가 허위(거짓)이다. 그 논문들은 그의 저자됨(authorship)을 전제로 출판되는 고로, 학문세계에 가면을 쓰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학계를 속였다. 논문표절을 부인했던 것은 거짓을 거짓으로 은폐한 것이다. 거짓이 거짓을 낳았다. 오목사가 두 대학에서 박사논문을 작업하였을 때, 그것이 거짓의 행동임을 스스로 알았을 것이지만, 나중에 그것 때문에 또다른 거짓을 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성경이 얼마나 진실한지 알 수 있다. 죄를 범하는 사람은 죄의 종이다. 죄는 장성해갔다. 누룩은 순식간에 퍼진다(내가 무교병이라는 착각은 버려라!). 그의 삶은 성경의 진실성을 웅변해 준다. 그는 반면교사이다.
그가 사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지금까지 보여준 거짓에 의존하는 태도 때문이다. 바로 거짓 때문이다. 회개하였다면, 그 거짓을 고해야 하며, 그럼과 동시에 스스로 사임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았다면, 교회지도자로 더더욱 자격이 없기에 더더욱 자기 자리가 아닌 줄알고 사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시대는 지금 스스로를 죄인의 왕초(괴수)로 고백하고 통탄해마지 않는 지도자를 원한다. 통렬하고 정직한 자기인식 속에서 죄인의 괴수였기에, 사도로서 무자격자였기에, 바울은 복음전도의 부채감을 가졌다.
주일학교 교사라도 그런 거짓을 가지고는 사역을 할 수 없어야 한다(주일학교 교사를 목사보다 낮추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일학교 교사였더라도 그는 사임해야 한다. 오늘 사랑의교회 주일학교 QT교재를 나의 아이가 가져와서 물었다. 사울왕이 거짓말을 했느냐라고(교재에 그런 문항이 나온다). 주일학교 교사라면, 거짓말이 나쁘다고 심령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평신도라도 그런 거짓은 제재받아야 한다. 과장된 말들과 거짓말, 자기자랑의 말들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무익한가?
더우기, 오목사의 회개는 그의 목사직의 소명에 부속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 주님은 의인목사가 아니라 죄인목사를 부르러 오셨다. 목사직은 성도와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고백해야 하는 직업이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가 공생애 첫 메시지로 회개하라 하셨고, 그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도 회개를 가르쳤다. 요한계시록의 많은 묵시적 재앙의 결과에도, 사람들이 죄에 연단되어 회개치 않음을 성령은 예견하셨다. 참된 회개는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회개한 자만 회개를 알고 가르칠 수 있다. 심지어 우리 주님도 마치 죄인의 모양으로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십자가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향후 검찰에서 횡령/배임으로 조사를 받아도, 만약 그 고의성을 부정하는 진술이나 한다면, 인간이기에 이해는 되지만, 또다른 거짓을 설상가상 만드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검찰조사에서 거짓말 안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까지는 거짓말 안하기가 비교적 용이했지만, 이제부터는 거짓말안하기가 더욱 어렵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아닌, 거짓의 길이 어디를 향해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거짓의 길은, 주님의 은혜로 봉쇄되기 전에는, 더 큰 거짓, 더 피하기 어려운 거짓으로 이어진다.
오목사는 사랑이나 용서라는 말을 오남용해서 안된다. 그 사랑은 기독교적인 냄새를 물씬 풍겨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계시되어 우리에게 드러난 것이다. 그 어떤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분의 생애와 말씀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계시된 것이다. 정말 "뜻밖에도" 또 놀랍게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갈보리에서 비참하게 몸을 비틀면서 죽어간 나사렛 예수를 우리는 하나님으로, 주님으로 고백하고 모신다. 빌라도 앞에서 참된 증거로서 증언하신 그분의 입술의 열매가 참되며, 그의 증언대로 우리는 그를, 참혹한 형틀에서 요절하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왕으로 모신다. 오목사에게 그분은 어디 계신가?
C. 사임을 권면하며
현재 우리교회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임'이 무엇일까 잠시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목사님의 사임은 두 가지 유형(종류)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가지의 사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사임, 둘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임.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사임 = 정신병리적 정죄의식으로 하는 사임 = 영혼의 사망으로 이어지는 사임
이런 유형의 사임은 극도의 죄책감, 두려움, 공포, 공황장애(패닉), 멘붕, 후회, 자포자기 등의 정서 및 심령상태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임입니다. 심각한 정신병리가 이러한 사임을 유도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사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영혼도 사망과 파멸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유형의 사임은 사탄이 노리는 사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깨끗한 사임(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임)을 목사님이 거부하는 것을 사탄이 지켜보고 있다가 자꾸 마음 속에 거부감, 반발감, 미움, 한스러움 등을 유발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때, 사탄은 그것을 근거로 마음 속에 온갖 더러운 일들을 벌입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고 싶은 말과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참게 됩니다. 성령의 사람은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리 찬양을 불러도, 자기최면을 걸고 자기 암시를 통해 성경구절의 믿음의 축복을 이야기해도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의 해결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말씀의 명확한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듣고 전해도 심령의 거룩함의 회복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고, 스스로도 자기 염장을 지릅니다. 하나님이 영혼의 대적자가 되십니다. 목사님을 대적하여 앞에 가로막는 이는, 놀랍게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탄의 참소? 사탄이 활동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부리시는 악령이 일을 벌일 뿐입니다. 사탄과 싸운다기보다도 하나님과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거짓말이 없습니다. 무너져야 하는 견고한 여리고성은 자기 자신의 허위의 성벽이며, 처벌 받아야 하는 거짓말장이 아간은 바로 자신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다가 결국 정신도 몸도 피폐해지고 결국 사임하게 된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사임, 정신병리의 정죄의식으로 자기를 탓하면서 하는 사임, 핑계를 다른 데로 돌리면서 영혼의 사망을 초래하는 사임인 것입니다. 이런 유형은 비자발적인 사임(해임)을 자발적인 것인 양 가장할 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임은 영혼이 패배하는 사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유형의 사임을 하셔야 할까요?
둘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임 = 복음의 정신으로 하는 사임 = 영혼의 생명으로 이어지는 사임
성경이 요구하는 회개에 부합하는 사임은 영혼의 생생함에 이르는 사임입니다. 목사님이 사임하셔도 영혼이 회복되고 생생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임을 하시도록 기도합니다.
이런 유형의 사임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위탁하는 사임입니다. 형사고소 건을 생각하여 보면, 당회장 현직에 있는 것이 현저히 유리하다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현직에서 물러나면 모든 것이 불리해 질 것이라는 초조함, 조급함, 걱정, 불안 등이 마음 속에 올라와도, 이것들을 일으키는 사탄의 역사를, 하나님의 사임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격퇴시키는 믿음과 회개의 사임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과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적으로는 성취하기 어려운 사임입니다만, 다행히 이런 사임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뜻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한국 최대규모의 메가처치 교회당 신축건물과 당회장 목사직? 이거 다 버려야 합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모든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를 따르도록 말씀을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께 그런 명령을 주시고 참된 회개의 징표로서 그 명령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추구했던 소위 기독교 사역이 성장지상주의 번영신학에 토대를 둔 이벤트 목회가 아니었다면, 이번 기회에 훌훌 털고 사임하셔서 참된 영성의 증빙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목회를 하셨다면, 더더욱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임해야 합니다. 그 사임은 회개의 열매(증빙)이자 회개의 진입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임을 통하여 목사님의 회개와 사랑이 모조품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뿐만, 아니라 그러한 신령한 사임을 통하여 더 깊은 회개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사임한다면, 더욱 순수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통회하고 애통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자들을 향한 원망도 완전히 사라지고, 그 동안 하나님이 뜻하시는 사임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선 사람들이 사실상 원수들이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을 불쌍히 보시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품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목사님께 놀라운 사랑을 확증해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임은, 회개의 열매일뿐만 아니라, 더 깊은 회개를 위한 관문(회개의 진입로)입니다.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에 입각한(복음적) 사임이겠습니다.
복음의 정신에 입각한 사임은 자기를 죽이고 주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자를 주님이 살리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임을 하셨는데도, 사람들이 도를 지나쳐서 목사님을 정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정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회개한 자를 부당하게 욕되게 하는 사람들의 대적자가 되십니다! 사임과 회개를 명령하시고 누르시는 주님의 손을 지속적으로 막아왔기 때문에 그 누적된 죄악이 합당한 사임과 회개를 더 어렵게 하였고, 지금도 몹시도 위태로운 순간들을 지나지만, 주님은 회개의 열매를 보이고 평생토록 참된 회개를 향한 결단으로 나아가는 자의 편이십니다.
많은 영혼들이 목사님의 영성과 사역의 부작용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하나님의 가슴이 얼마나 비통함으로 멍들었는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임을 결심하시면 더 잘 알게 됩니다. 견디기 어려우실 것이고, 평생 빚 값는 마음으로 살게 되실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복음의 빛이 함께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영혼의 생명이 거룩함으로 회복될 것이고, 초월적 은혜의 새 시대도, 혹시라도 우리 시대에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임을 권면합니다. 더 늦기 전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사임(해임)이 하나님의 뜻이 되기 전에 말입니다.
목사님을 위한답시고, 보호한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임을 막아서는 분들도 심각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정독 할 시간이없어 이제야 읽었습니다.
항상 생각 이상의 글에서 제 모자람을 봅니다 감사 합니다 ^^
하나님은혜의 예기치못한 습격=사랑. 감사합니다.
<ㅇ목사의 측근과 추종자들은 거대한 마귀적 음모의 도식=사랑이라는 거룩한 이름의 오남용에서 자유하여서...죽음이 예정된 ㅇ목사의 (옛)사람과 싸우고, 그의 (새)사람을 도우라! 그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멸하시려 하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시라! 직장을 잃고 돈을 잃어도 영혼의 쉼을 얻고 주님께 영광을 얻으시라! ㅡ본글 중에서>
p.s. 한편에서는 예기치 못한 습격으로 고통 당한 자매님의 샬롬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습격하십니다. 이 거대한 물결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