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 외 4편)
이강하
손톱은 물의 모퉁이다. 누군가를 잊고 싶다는 생각이 극에 달하면 더 길어진다. 어제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 생각이 또 다른 물의 절망을 끌고 다닌다. 원고를 끝내고 조간신문을 읽은 후 당장 깎아버리고 싶은데 당신이 잘못될까봐 또 하루를 미룬다. 당신을 보지 못할까봐 여러 날 격한 일에 몰두한다. 그러다가 계속 내리는 봄비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 아트 브러시를 한다. 차오른 엄마를 지우고 싶다고 다시 살고 싶다고 물방울 섞인 나뭇잎을 엄지손톱에 그려 넣는다. 지울 수 없는 모퉁이여, 더는 아프지 마오. 지독한 병에 걸리면 손톱은 자꾸 물렁하다. 골짜기가 두렵고 가시 많은 울타리와 이별하고 싶고 내달리는 과학이 싫어지고 자신이 태어난 흙집도 싫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그들이 못나 보이고 신체적 안위에 욕심을 부린 나는 더 추악해 보이고 그런 뾰쪽한 시간을 매달고 그것을 즐기듯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는 뒷모습들이 슬프다. 더 절망하기 위해서 사과나무에 물을 뿌리는 물뿌리개가 되기도 하는 손톱은 더 슬프다. 사월의 손톱들은 물이 많고 아린 모퉁이들이다.
사과
사과가 사라졌다 사과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사과가 식구를 데리고 사라졌다 형은 내가 미워 떠난 게 아니다 동생도 내가 싫어서 떠난 게 아니다 우리가 서로 사과하지 않아 떠난 건 더더욱 아니다
불현듯 사과밭을 제대로 알아야 사과를 사랑할 수 있다는 아버지 말씀이 떠오른다 나뭇가지에 쌓인 바람을 뭉텅 자르던 상처 난 아버지 손등이 떠오른다 아마도 담장 밖 바람을 이해하지 못한 게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사과밭에 향기가 진동하는 걸 보면
찢어진 향기 속에 웅덩이는 왜 그리 많은지 우묵한 물음은 왜 그리 촘촘 박혀 햇살을 끌고 다니는지 아, 이제 보니 고양이 동산이 너무 많이 늘어났어
눈밭을 뛰어다니는 새소리가 하얗다 뽀얀 입김이 길 너머 모퉁이를 바라보며 가늘어진다 입을 열면 모든 비밀이 새어 나올까봐 고요히 한쪽 벽에 숨기는 것처럼 여전히 식구들은 보이지 않고 용감하게 살아남은 사과 하나는 사과 모자를 쓰고 사과밭을 걷고 있다 함박눈이 펄펄 날리는데
모란과 작약
작약이 한창 필 무렵
모란은 작약에게 편지를 썼다
친구들이 떠나고 친한 친구 한 명만 남았다고
눈도 어둡고 손발도 떨린다고
화사한 작약을 만나면 편히 갈 수 있겠다고
이별하기 전 밥 한번 먹자고
모란을 생각하면 설레고 슬프다
모란을 만나려면 준비할 것이 왜 그리 많은지
미용실도 가야하고 손톱도 깎아야하고
옷은 아무 거나 입을 수 없고
민낯이 못난 것도 아닌데
화장은 왜 짙게 해야 하는 건지
잡일은 왜 또 그리 많은지
모란은 산 너머에 산다
버스로 가면 멀고 기차는 없다
집을 빠져나가는데 쥐똥꽃 향이 코를 찌른다
버스운전기사는 신바람이 났는지
작약을 죽 훑어보다니 새색시 같단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씀하신 건지
도착한 모란요양병원, 셀럼인지 아픔인지
작약은 화장실부터 찾는다 작약은
어디 가나 아랫도리가 문제다
볼일을 다 보고 머리를 만지는데
화장실 거울이 말을 건다
저런! 얼굴색이 장난이 아니구먼
지금 모란을 걱정할 게 아녀
당신이 더 걱정이여,
이강하, 『파랑의 파란』, 시와반시, 2021년, 2
꽃기린
결국, 꽃기린이 퇴사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바람 불고 비 오는 한밤중에 꽃기린 아빠는 짠하면서도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마음이다 아, 그래 잘했구나 잠시라도 집에 와서 쉬었다 가렴 원치 않은 퇴사를 해야만 했던 꽃기린은 꽃잎을 혼자 떼어내느라 자주 밤을 지새웠겠지 또 얼마나 단단한 가시를 만들어가야 할까 방울방울 빗방울이 유리창에 피어난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일은 계속 일어난다 그것이 세상인 걸, 빗방울의 세계인 것을
마트에서 산 꽃무늬 이불 한 채가 빨랫줄에 흔들리고 있다 그 아래에서는 꽃기린과 함께 자란 다육이들이 웃고 있다 꽃기린이 빨리 보고 싶다고 내일부터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은다 온몸에 자란 가시들은 꽃이었을까 잎이었을까 모두 이불을 올려다본다 아, 그래 그동안 너희들도 겨울을 견디느라 고생 많았구나 나의 꽃기린이여, 나의 빗방울들이여
소설처럼
직박구리 우는 소리 가만히 엿들었다
검정 귀마개를 벗고
소설素雪처럼
나무야, 너도 밤새 추웠니?
삼촌은 굴거리나무 위 눈덩이를 스윽 스쳤다
새 울음처럼
삼촌의 카페는 오늘도 고요했다
손님이 드물다
누이가 역병으로 마을을 떠난 후 더 그렇다
누이가 두고 간 첼로의 의자
여전히 서쪽 하늘을 향해 사선으로 날고 싶다
소설처럼
먼저 핀 눈꽃, 좀 더 먼저 핀 눈꽃
떨어지는 자리마다 아름다워라
먼저 아파서
먼저 가벼워져서
먼저 기울어진 자세들이 부러워라
이미 문밖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장면
위태로운 발자국도 숨긴
봉분을 파묻고 있는 저 흰빛은 어디서 왔을까
저물녘, 나도 제대로 어둠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몸안의 슬픔을 내쫓으며
검정 운동화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소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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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하 시인
경남 하동 출생. 2010년《시와세계》로 등단.
시집『화몽花夢』『붉은 첼로』『파랑의 파란』.
2021년 울산문화재단 창작기금 받음.
uree776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