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위해 음악을 지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의 지휘에 따라 조화롭게 음정을 맞추어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이 감동적이고 보람찬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병이 들거나 직장을 잃거나 은퇴를 하여 쉬게 될 때 그 기간은 좌절과 낙담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와서 잠깐 쉬어라” (막 6:31)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싶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공연이 끝이 났으며 우리의 노래가 끝날 때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활동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사실에만 너무 신경을 쓰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부족한 점과 주위 환경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휴식 기간을 이용하셔서 우리의 음악이 좀 더 나아지게 하시려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위대하신 지휘자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시간을 잽니다. 편곡을 하는데도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화음을 낼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휴식을 즐기면 됩니다. 조용한 시간은 우리의 영혼을 진정시키고 다음에 연주할 음악의 소절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기회가 됩니다. 휴식 기간은 실수에 의한 것도 아니고 버림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작곡하시고 우리를 위해 매일 지휘하시는 교향곡의 필요한 한 부분입니다.
지휘하시는 그분이 가장 잘 아십니다. 주님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쓰시는 악보에 침묵하라고 쓰여져 있으면 침묵을 하십시오.
휴식을 취하십시오. 틀린 음을 연주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완벽한 화음을 해치지 마십시오.
어떤 목사님이 ‘예수의 사랑’이라는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한 청년이 찾아와 취직을 부탁했다.
목사님은 설교준비 중이어서 청년을 푸대접하여 보냈다. 얼마 후, 그 청년이 죽었다. 목사님은 청년의 죽음 앞에서 “그 때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생각을 했고 가슴을 치며 회개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주일, 목사님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고, 성도들은 그 어느 때보다 큰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설교 제목은 교회의 표어가 되었고, 성도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할까’라고 인사를 했다.
그 후, 그 교회 성도들은 교회, 가정, 사회에서 이기심이 발동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장 확실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갖게 되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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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생각] 다시 돌아온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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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까지 말썽 한번 피운 적 없고 성적도 좋은 모범생이었던 나. 3학년이 되기 직전 봄방학 때, 학원에서 이웃 중학교의 일진회 남자애들을 만나게 되었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것은 이미 일상생활이 된, 매너 좋고 싸움도 잘하는 아이들. 나는 그 애들과 급속도로 친해졌고 일진회 중 한 명과 사귀게 되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3학년이 되고 주위 어른들이 아직 내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학원 보충과 시험 공부를 핑계로 새벽까지 그 애들과 어울렸다. 친구 생일을 핑계 대며 술도 입에 댔다. 내 열여섯 생일날에는 주는 대로 마셨던 소주 덕분에 몇 번이나 속을 게워 내야 했다. 붉어지는 얼굴과 가시지 않는 술 냄새에 세수와 양치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내 친구들은 그만 돌아오라고 충고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성적은 절벽에서 떨어지듯 급하락했다.
충격을 받는 것도 잠시, 난 성적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다시 술로 풀었다. 7시 전엔 귀가하던 딸이 11시가 넘어 들어오고, 그때마다 벌건 얼굴로 정신없이 씻고 잠들어 버리는 것을 부모님께서 이상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6월 즈음에서였다.
어느 날, 남자친구의 학교에서 바다로 사생대회를 떠났다. 우리 학교 사생대회 때, 학교까지 빠지고 놀러 온 남자친구와 그애 친구들을 봐서라도 그곳에 가야 했다. 나는 친구와 함께 거짓말을 하고 조퇴를 했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담임 선생님에게 들켜 버렸다. 그날 밤, 아버지의 엄한 꾸중을 들어야 했지만 난 부모님께 거짓 눈물을 보이며 도리어 화를 냈다. 그리고 며칠 뒤 간부수련회 날도 여전히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경찰에게 들켜 도망까지 다닌 뒤에- 밤늦게 간부수련회에
참석했다.
그날 새벽 친구와 나는 학교 담을 넘다 남자애들을 만났고 인적 드문 새벽 거리를 오토바이를 타고 누비며 놀았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는 학생부 선생님들이 우리를 새벽 내내 찾아다닌 뒤였다. 우리는 교무실에 꿇어앉아 진술서와 반성문을 썼다. 새벽 6시에 학교로 불려 오신 부모님은 그동안의 나의 행동을 듣고 놀라 아연해하셨다.
그 뒤 다시 술을 마시다 부모님께 들키길 여러 번, 드디어 참다못한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평소에도 화가 나면 손찌검까지 하시던 아버지는 집 안 물건들을 던지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나 같은 자식 낳은 기억도, 키운 기억도 없으니 죽든 말든 마음대로 살라고 했다. 처음으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밤늦은 시각, 어머니가 내 방에 들어와 날 위로해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몇 개월 사이 난 그렇게 변해 있었다.
난 날 많이 아껴 주셨던 선생님을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 그 애들과 만난 이야기부터 자살하려 했던 것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그 분은 다른 선생님이나 부모님처럼 나를 나무라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당신께 털어놓은 것을 고마워하셨다. 이렇게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줄 몰랐다며 다른 말 없이 미안하다, 날 믿는다고만 하셨다. 변해 버린 내 모습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란 건 그때였다.
마음을 고쳐먹은 덕분일까. 보이지 않던 그 애들의 나쁜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이드신 할머니의 구멍가게에서 훔쳐 낸 술과 담배를 꺼내들며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더 이상 멋져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 마시던 술도 끊었다. 하지만 어울리던 아이들까지 끊을 수는 없었다.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그 애는 날 잡고 싶다고 했지만 난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는 수렁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내 꿈, 내가 원했던 미래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는 걸 이제 와 깨달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정신을 차린 그땐 3학년 생활의 반이 흘러가 버린 뒤였다. 다시 공부하려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예전의 성적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먼 마지막 시험 성적표를 놓고 울었다.
지금도 내 주위 친구들은 예전의 나처럼 일탈을 꿈꾼다. 하지만 난 친구들에게 말한다. 그런 모습은 결코 멋있지도 자랑스럽지도 않다고. 친구들은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년전, 고3 때였지, 나는 도서관에서 그래도 3류대학이라도 가봐야 겠다고 오랬만에 마음잡고 공부하고 있었지, 4반에 영창이란 놈이 있었지. 나보고 담배피우러 가자데. 나 안피우는거 뻔히 알면서....
그냥 옆에 서서 재밌는 얘기나 해달라데, 할 수 없이 유도실 뒤에까지 따라갔지.
그놈이 담배피우다 말고 신발끈 묶는다고 들고있으라고 담배를 나 한테주데.그때였어 학생주임의 요란한 함성이 들린건 "야! 너 그대로 있어"
주위를 둘러보니 영창이는 신발끈 매고있고 .나는 담배를 들고 있고,
학생주임의 지휘봉은, 정확히 나를 향해서 겨누고 있고,
대충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예측이 되더군, 결국 예측대로 됐어.
우리는 교무실에 끌려갔고, 영창이는 끝까지 자기는 구경만 했다고 우기고, ㅡㅡ''
나는 진실과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범행일체를 거짓 자백하게되었지.
(지금 생각해도 나는 착한 놈이야)
교무실에서 취조 이후 근신하며 앉아 잇는 나를 지나가는 선생님들이 출석부로 머리통을 한대씩 갈기고 지날때 모든 진술을 번복하고 싶었지만 난 착했다.
학생 주임의 협상이 들어왔어 문교부(지금 교육인적자원부)의 새로운 시책으로 금연학교란델 가면 정학도 안 받고(그땐 정말 담배피면 정학을 먹었다) 부모님도 안 모시고 와도 된다고 하더군.
결정했지 학교를 한군데 더 다니기로......
입학금은 육천원(당시 한달 용돈이 삼천원), 시집간 누나한테 꿔서 위생병원에 있던 그 학교를 갔지.
장안의 양아치들은 거기 다 모여 있더구만. 수업 끝나면 그 자식들이 모두 모여서 담배를 피우는데,
나는 못 피우는데 금연학교에 끌려왔다고 하면 얼마나 쪽 팔려, 그래서 억지로 매일 피웠지,
나는 결국 금연학교에서 담배를 배웠고 그후로 나는 절대 우리나라 교육행정을 믿지 않게 되었지.
가끔 그때일을 생각하면 당시 문교부장관을 대상으로 10억원의 손배소를 하고 싶지.
영창아 내 인생 망쳐 놓고 너는 지금 어디 있냐 ? ㅡㅡ..보고 싶다..짜쌰.. ~~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