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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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지난날의 우리나라 력사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 고구려는 우리나라 력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모든 면에 걸쳐 높은 발전수준을 이룩함으로서 우리 민족의 영예와 존엄을 굳건히 지켰을 뿐 아니라 나라의 위력을 크게 떨친 동방의 대강국 이였다.
고구려사람들은 나라의 중요한 요충지들마다 유사시에 의거하여 싸울 수 있는 믿음직한 보루인 산성들을 수많이 쌓아놓고 강철제 무장을 갖춘 수십만의 무장력을 가지고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을 쳐 물리치기 위한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고구려사람들은 수적으로 비할 바 없이 우세한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언제나 빛나는 승리를 이룩함으로서 나라의 강대성을 남김없이 시위하였다.
고구려는 특히 4세기 중엽이후 국토의 통일을 실현하는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하였다.
고구려에 의한 국토통일위업의 추진과 그 성과는 고구려국가발전에서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력사발전 전반에서 참으로 거대한 의의를 가지는 력사적 사변이었다.
이로부터 고구려의 력사를 깊이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은 우리 력사고고학 분야 앞에 나서는 중요한 과업이다.
지난 기간 고구려의 유적유물에 대한 조사발굴과 연구사업이 심화된 결과 고구려력사 연구에서는 적지 않는 문제들이 새롭게 해명되고 과학적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력사연구에서는 보다 더 새롭게 심화시켜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다. 그러한 문제들 가운데는 고구려의 국토통일지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남평양문제도 있다.
남평양은 고구려가 국토통일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오늘의 평양 이남에 설치하였던 남방진출의 정치, 경제, 군사적 거점이었다.
고구려가 국토통일위업수행을 위한 투쟁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평양일대를 차지한 다음 그 이남지방에 남평양과 같은 전략적 거점에 의거하여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고구려의 남평양은 오늘의 서울부근에만 있었으며 그 시기도 475년(장수왕 63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한 이후부터 551년(양원왕 7년) 백제와 신라가 합세하여 한성(남평양)을 포함한 고구려 남부지역을 탈취한 시기까지로 국한시켜 보았다.
그러나 최근시기에 고구려 력사연구를 심화시키는 과정에 4세기에도 고구려의 남방진출의 전략적 저점인 남평양이 있었으며 그의 위치가 장수산 일대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였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연구를 더욱 심화시켜야 할 과업이 고고학분야에 제기 되였다. 이 문제 해명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은 장수산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다. 그러므로 최근에 장수산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전면적으로 조사 발굴하였다.
장 수산 일대 고구려 유적유물에 대한 조사발굴과정에는 산성, 도성, 건축지, 무덤 떼를 비롯하여 고구려의 강대한 력사와 우수한 문화전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가치 있는 유적유물이 수많이 드러났다.
장수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유물은 그 종류와 규모, 내용 등으로 보아 4세기 고구려 남평양과 결부하여 론할 수 있는 사료적가치가 적지 않다.
이 론문에서는 자신이 직접 진행한 장수산성과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에 대한 조사발굴 자료에 기초하여 장수산성이 4세기 고구려의 남평양성이였다는데 대하여 밝히려고 하였다.
론문에서는 먼저 장수산성의 구조형식과 성안의 유적유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에 기초하여 성의 축조 년대를 고증하려고 한다.
다음으로 장수산성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 장수산성과 주변의 고구려산성, 성밖의 도시유적, 안악지방 고구려벽화무덤과의 호상관계, 당시의 정치정세와 력사기록자료들에 대한 연구에 기초하여 장수산성이 4세기 고구려의 남평양성이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