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산 곡차 후일담
지난 연말에 거제 연초 와실 생활을 청산하고 창원으로 복귀했다. 설을 쇤 이월에 닷새 간 출근이 예정되어 있지만 그때는 대중교통으로 이럭저럭 때울 생각이다. 내 교직에서 남은 마지막을 그곳에서 마무리 짓고 돌아오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기본적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원룸이었지만 집을 떠난 바깥은 역시 고생임이 분명했다. 뒤돌아보니 잘 버티고 와 스스로 대견하게 여긴다.
부임 첫해는 대중교통으로 시외버스와 시내버스를 번갈아 타고 창원과 거제를 오갔다. 금요일 오후 퇴근 시각에 연초에서 고현으로 나가 시외버스를 타고 거가대교를 건너 창원터널를 빠져나오면 캄캄한 밤이었다. 일요일 점심나절 아내가 준비해준 닷새 간 먹을 반찬을 챙겨, 역시 왔던 경로를 따라 거제로 돌아갔다. 아침저녁에 더운밥을 지어 매 끼니를 건너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코로나가 급속하게 번졌던 재작년 봄부터 대중교통 차편도 줄어 주말에 오감이 무척 난감했는데 의외의 반전이 생겼다. 정초 토정비결에 삼월부터 서쪽에서 귀인이 나타나 도움 받는다는 운세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같은 아파트단지 이웃 동에 사는 지기가 거제 내 근무지 이웃 학교로 부임하게 되어 무척 다행이었다. 나는 지기의 승용차에 카풀로 동승해 아주 편하게 오가게 되었다.
지기는 내보다 정년까지 일 년이 남아 옥포에 정해둔 원룸에서 철수하지 않고 한 해 더 머물러야 한다. 창원에서 거제까지는 이동 거리가 상당해 자동차 기름도 기름이지만 거가대교 통행료도 만만치 않았다. 주유소에서 채우는 기름은 운전자가 부담하고 거가대교 통행료는 매번 내가 내기로 정했더니 서로가 마음이 편했다. 이렇게 이태를 잘 넘기고 내가 먼저 뭍으로 건너왔다.
카풀 운전자와 나는 서로 취향이 달라 창원에서 주말이나 방학을 보내는 여가 활동도 달랐다. 지기는 운동을 좋아하고 여러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조기축구회 운동만으로 양이 차지 않아 족구클럽에도 가입해 밤에도 회원들과 어울렸다. 반면 나는 산이나 들로 혼자 산행이나 산책을 즐겨 나가기 일쑤였다. 지기와는 이웃에 살아도 주말이나 방학에 얼굴을 마주 대할 일 없이 지냈다.
둘은 여건이 되면 술을 즐기는 공통점은 있어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태를 보내다 내가 창원으로 완전히 돌아온 뒤 한 번 가진 바 있다. 반면에 일요일 점심나절 거가대교를 건너가면 대금산 꼭뒤 주막에 같이 들려 할머니가 빚어 파는 농주를 두 병씩 마련해 원룸으로 향했다. 2리터 빈 생수병에 채워 팔았다. 둘은 애주가라 퇴근 후 저녁 반주로 들기 위한 곡차였다.
지기는 활동적이고 근무지 연배 동료들과 잘 어울리기도 했다. 나는 근무지에서 같은 연령대가 아무도 없고 교류할 만한 친구가 없어 퇴근 후 시간이 적적했다. 고작 와실 근처나 시내버스로 얼마간 이동해 산책을 다녀오는 정도였다. 와실에서 일찍 저녁을 지어 곡차를 반주로 들고 잠들면 한밤중 잠을 깨기 예사였다. 대금산 막걸리를 나는 수면제였으며 신경안정제로 삼아 장복했다
이렇게 내가 즐긴 곡차였는데 지난해 가을부터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민감한 부위에 염증이 곡차 탓인가 봐 끊었더니 탈이 날지 않아 자제하고 하고 있다. 창원의 같은 아파트단지는 도청에서 퇴직한 초등친구와 예전 근무지에서 인연이 닿는 퇴직 선배가 있다. 셋은 가끔 술자리에 같이 앉기도 해 서로 잘 아는 사이다. 내가 금요일 귀가할 때 몇 차례 대금산 곡차를 안겨준 적 있다.
뭍으로 완전 철수해 산천을 누비는 나에게 앞서 언급한 퇴직 선배가 숙제를 한 가지 안겼다. 퇴직 선배는 곡차 마니아로 풍미가 좋은 대금산 주막 농주 맛을 잊지 못했다. 내가 방학 중 연말정산 관계로 카풀 지기 차편으로 거제로 가는 걸음을 알고는 곡차를 받아와 주십사고 했다. 처음에는 다섯 병이라더니 곱으로 늘려 열 병을 가져오란다. 카풀 지기도 다섯 병이 필요하다단데. 22.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