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사연구회에 올라온 자료를 읽다가 문득 태국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태국과 일본이 혹시 관련이 있지는 않은가? 관련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관련이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을 나름대로 재분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재분석을 토대로 가설을 세워보았습니다.
태국과 일본 그리고 대동아전쟁
태국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실
1. 태국은 서구세력의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다.
2. 일본은 태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철도 415km를 1942년에
건설하여 군용물자 수송에 사용하였다.
(이 철도에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가 있다)
3. 일본이 태국의 도로를 포장해 주었다.
명분은 ‘일본이 태국에 자동차를 많이 팔기 위함’이다.
4. 태국에는 군부의 세력이 막강하다.
쿠데타가 자주 발생하지만 주동자가 처벌되는 경우는 드물다.
분석1. 태국은 서구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거쳐 서구제국주의 국가는 전 세계에 앞 다투어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제국주의 국가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우리나라는 서구제국주의국가는 아닐지라도 서구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사실이 있다. 그러나 태국만이 동남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서구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식민통치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국이 식민통치를 받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태국 국민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들었다. 태국 국민이 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해서, 아니면 태국의 국운이 좋아서 태국이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을까? 위와 같은 낭만적인 이유 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필요해 보인다.
태국이 서구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식민통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서구제국주의 국가의 무력에 대항할만한 강력한 정치군사세력이 태국 내에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력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는 서구제국주의 국가의 무자비함을 견딜 수가 없다. 태국의 강력한 정치군사세력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세력이 태국을 서구세력으로부터 지켜주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서구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건설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인 18세기와 19세기에 태국 내에는 강력한 정치군사세력이 존재했다고 보여 진다.
분석2. 태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철도
태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415km의 철도(이하 ‘태국철도’라 한다)에는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가 있다. 태국철도와 관련된 자료를 보다보면 몇 가지 미심적은 사항이 있다. 콰이강의 다리와 태국철도에 관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으나 관광과 관련된 자료만 검색될 뿐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는 몇 개밖에 검색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태국철도 관련 자료이다.
- 태국 철도의 총 길이는 415km이다.
- 1942년 공사를 시작하여 1943년에 일부 준공이 되었다.
- 6만명 이상의 연합군 포로가 공사에 동원되었다.
20만명 이상의 아시아인 노동자가 투입되었다.
- 연합군은 1944년부터 콰이강의 다리를 폭격하기 시작하였다.
연합군은 1944년부터 콰이강의 다리를 포함하여 태국철도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는 태국철도가 정상적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일본군의 전투력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태국철도로 운송되는 물자는 일본군의 전투력을 유지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때문에 연합군은 일본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콰이강의 다리를 중심으로 태국철도를 폭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이라크에서는 미군이 사용하는 물자의 보급업무를 사기업이 담당한다. 민간인을 고용하여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사기업은 군수물자 운반과정에서 이라크 게릴라에게 피습당할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이 같은 위험을 면하기 위하여 사기업은 이라크 게릴라와 협상을 하고 필요할 경우 이라크 게릴라에게 반대급부를 제공하기도 한다.
일본의 본래 위치가 일본열도라면, 태국철도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본은 우선 태국을 무력으로 점령해야만 한다. 그러면 태국 국민들은 일본에게 반감을 갖게 되고, 일본이 건설한 태국철도를 공격하게 될 것이다. 공격을 받으면 태국철도의 기능은 상실되고, 일본은 태국철도를 이용하여 전투력을 향상시킬 수 없게 된다. 태국철도가 제구실을 못하면 연합군도 굳이 태국철도를 폭격할 이유가 없다.
태국철도를 연합군이 폭격하였다는 것은 태국철도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며, 태국철도가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415km 태국철도 전 구간에서 일본에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아야만하고 더나가 일본에 우호적인 세력이 존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태국철도는 일본이 건설했지만 태국철도 건설지역은 반일본정서가 조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태국철도를 건설하는데 2년 밖에 걸리지 않았고, 태국철도를 건설하거나 폭격으로 부서진 콰이강의 다리를 복구하는데 연합군 포로 6만명, 아시아 노동자 20만명이 동원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연합군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직후 일본군 전범을 재판하였다. 이때 태국철도 공사에 관여한 일본군 전범은 다른 일본군 전범에 비하여 무거운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통하여 많은 연합군 포로가 태국철도 공사현장에서 희생되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일본군과 2차세계대전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알고 있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계기가 진주만 공습이었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미군에 패한 이후부터 일본군은 연합군에게 밀리게 되었고 결국 일본군은 1945년에 항복하게 된다.
일본군과 연합군은 주로 해전과 섬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군이 대규모로 연합군 포로를 포획한 전투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일본군이 태국철도 건설에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일본군의 태국 침공과 점령 그리고 연합군 포로 6만명에 관한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제2차세계대전과 일본군에 대한 상식만 가지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어떻게 일본군이 태국철도 건설에 동원된 6만명에 달하는 연합군 포로를 포획했을까? 언제 일본이 태국을 침공 점령했을까? 왜 태국철도 인근지역의 주민은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제시된 자료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자료를 활용하여 위 질문 적합한 가설을 세워 보았다.
- 일본이 태국을 침공한 것이 아니라,
태국이 본래 일본의 본거지다.
- 일본은 1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아시아에 진출한 서구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 이때 일본이 내세운 명분이 ‘대동아공영권’이며 전쟁의 이름은 ‘대동아전쟁’이다.
- 일본은 1930년대부터 동남아시아에서 태국을 근거지로 서구제국주의 국가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 (참고 사항)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은 1930년대에 발생하였다.
- 일본의 대동아전쟁은 동남아시아인들로 부터 호응을 받았다.
- 대동아 전쟁결과 일본은 서구제국주의 세력을 대부분 추방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수 만 명의 연합군 포로를 포획하였다.
- 승리한 일본군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군사력 유지에 필요한 철도를 건설하게 된다. 철도건설에 연합군 포로를 동원하였다.
- 태국철도가 그 중 하나이며, 위와 같은 과정으로 건설된 철도였기 때문에 태국철도는 인근지역 주민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았다.
- 연합국가는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느라
1차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에 대한 감시를 할 여유가 없었다.
- 연합국가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독일은 2차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하게 된다.
- (참고사항) 미국이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제2차세계대전이 종전되고 60년 이상 지났음에도, 독일과 일본은 아직까지도 군사력 팽창에 제한을 받고 있다.
- 대동아전쟁의 결과 서구제국주의국가는 식민지국가를 통치에 필요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했다.
- 제2차세계대전이 연합국가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가는 대동아전쟁의 여파로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였기 때문에 식민통지를 포기하였다.
분석3. 태국의 도로 포장
최근에 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관광객은 포장이 잘된 태국의 도로에 놀라움을 표시한다. 태국의 경제력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도로 포장을 일본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더 많은 일본의 자동차를 태국에 수출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태국의 경제력은 일본 자동차를 대량으로 수입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노년에 자신의 고향인 북한에 많은 관심을 보인 사실과 태국의 도로포장과 유사한 점이 있을 수도 있다. 태국이 과거에 일본의 본거지였다면, 일본이 조건 없이 태국의 도로를 포장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진다. 현재 일본열도의 실력자 중 상당수가 태국에서 태어났고, 자기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그러한 향수를 도로포장과 같이 태국에 도움을 주는 형식으로 달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분석4. 태국의 군부의 힘이 막강하다.
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하는 빈도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매우 높은 편이다. 태국은 1930년 이후 지금까지 약 20여회의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쿠데타의 주체세력이 처벌을 받은 경우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쿠데타 세력을 처벌하지 않은 것은, 태국이 불교 국가로 쿠데타 주체세력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다. 태국은 군부가 너무나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군부를 대표한 쿠데타 주동세력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군부에 상응하는 세력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태국에는 그와 같은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쿠데타 주동세력을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태국과 인접한 대부분의 국가는 군부의 세력이 막강하다. 이는 태국이 일본의 본거지였고,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까지 막강한 군사력 유지하고 있었던 사실과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태국 인근에 존재하는 군부세력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벌 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일본은 애초부터 태국 지역에 존재했었으며
1930년대에 대동아 전쟁을 일으켜서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냈고
그 여세를 몰아 동아시아의 패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게 패망하여
일본의 주체세력은 일본열도로 쫓겨 갔다.
이상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태국과 일본에 대하여 분석하고 부족한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저의 가설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보완을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참고로, 일본은 네팔등에도 한국에서 자선사업하기 전부터, 꾸준히 신경을 쓰면서, 무료로 건물이나 병원같은 복지시설을 지어주곤 하였다는 군요... 인터넷에서 발췌한 한방의료-'네팔자원봉사팀'에서 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차대전 당시 태국은 일본에 협력했다고 나옵니다.
태국은 섬라국으로 임란때 왜노들을 돕지 않았던 나라로...대동아 전쟁이전...인도네시아와 캄보디아 베트남등지의 왜노들에 점령당했지 않나 싶습니다...물론 양이들이 같이 찍접댔었으나...요 기회에 동남아 원조왜들이 점령을 하였기에...양키들 포로들이 초기부터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태국을 양키들로 부터 지켜주겠단 명분의 전쟁였기에 태국인들도 협조를 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겠고여.
청조일통지도에 태국의 위치에 동경이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어쩌면 도오쿄오가 태국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또 태국이 일본이라는 많은 증거들이 있으나 서로 잘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의 역사를 현대문헌에서 찾아보면, 나라시대, 헤이안시대등으로 역사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처럼 한지점으로 고정시키기 보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탄력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찌 하였든, 조선후기에 동남아시아 일본은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 들의 이동 경로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접근일 것 같습니다... 아래 콰이강의 다리를 쭉 이어서 철도의 연결지점을 계속 추적해 보면, 이들의 물자수송이 어느지역으로 흘러갔는지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연합군 포로가 철도 건설에 수만명이 동원된 것은 사실입니다..그 와중에 기아와 전염병으로 수많은 포로들이 죽게 됩니다..일본이 철도 건설에 혈안이 되었던 이유는 미국의 참전으로 공중전에서 밀리자 물자수송에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걸핏하면 미국에 의해 수송기가 격추당하자 연합군의 눈을 피해 철도로 수송하기로 하고 일본 본국에서는 2년내에 철도를 완공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숲에 철로를 놓는다는 것은 연합군으로서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요..
여담입니다만 이 콰이강의 다리와 조선이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일본은 다른 나라의 시선을 의식해 책임을 회피하고자 포로감시원으로 조선 청년들을 이용하게 됩니다..말이 포로감시원이지 실제는 이들도 일본군에게 감시받는 존재였습니다..전범재판 때 일부는 전범으로 분류되어 연합군으로부터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지금은 두세분만이 생존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모두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현재 콰이강의 다리에는 당시를 기리기 위해 일장기는 있는데 태극기가 없는 것을 보면 분노가 솟구칩니다..대한민국에서 버림받고 일본에게 이용만 당하고 세상을 가셨으니...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NHK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이후에 KBS 수요기획에서 다룬 것을 본 적이 있어서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이와 관련해 정동주님의 콰이강의 다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콰이강의 다리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물자를 이동하는 주요 통로가 되겠군요.... 테마음악은 행진곡으로 운동회때 많이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만...ㅎㅎㅎ.....
<콰이강의 다리>에 삽입된 March From The River Kwai곡은 오늘날까지도 아주 유명한 음악이지요..^^
혹시 방송보실 분들은http://www.kbs.co.kr/1tv/sisa/wedplan/vod/1360060_1068.html에서 보시면 됩니다..예전 방송이라 화질은 좋지가 않습니다..
근데 피부색깔만 봐도. 그다지 지금의 일본인과는 닮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리고 우선 말이 다릅니다. 태국어와 현 일본어가 비슷한가요? 제가 알기론 태국은 서양이 그냥 완충지대로 남겨놓았다고 배웠습니다만..
일제시대엔 지금의 동아시아처럼 단일언어만 쓰지 않았습니다.
깊이 생각 한 후 쓴 글이라 고 봅니다 / 매우 유익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