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ilica di Santo Spirito, 성령의 성당
《역사》
초기 역사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교회와 수도원을 위한 부지는 스페치알레(Speziale)와 아콜티(Acolti) 등이 1250년에 아르체트리의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장이던 알데브란디노(Aldebrandino)에게 기부한 곳이었다.
1173년–1175년 당시 도시 성벽 내에 있었던 올트라르노 지구의 아르노강 남쪽 강변에 교회당을 지을 계획이 잡혔으나, 그곳은 인구가 너무 드문드문 있었다. 1252년에 삼위일체 다리 (산타 트리니타 다리)가 건설되면서 교회는 더욱 접근이 용이해졌다. 아우구스티노회는 산 로몰로 (San Romolo)라는 오래된 교회를 이곳에 통합하는 등, 1252년에 교회당과 수도원을 운영을 시작하였다.
산토 스피리토는 본래 성모 마리아, 모든 성인들, 성령에게 봉헌된 것이었으나, 13세기 말경에 성모 마리아, 성령, 마테오에게 봉헌된 것으로 바뀌었다.
탁발수도회들의 교회당과 수도원 등은 피렌체 정부의 재정적 지원으로 건설되었는데, 산토 스피리토는 1267년, 그리고 1292년부터 1301년까지 재정 지원을 받았다.
산토 스피리토의 수도원은 학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1284년에는 아우구스티노회의 스타디움 제네랄레로 인정되었다.
아우구스티노회의 규칙과 규약 등이 피렌체에서 열렸던 수도회 종중회를 통해 1287년에 승인되었다.
성당 앞쪽에 광장 (산토 스피리토 광장)을 만들기 위해 1301년에 주택들이 매입되었다. 1310년 쯤 산토 스피리토에는 제단 일곱 개와 다수의 가문 예배당들이 있었다. 더 많은 예배당들이 이어지는 수백년 간 건설되었다. 14세기 중반 산토 스피리토는 아주 넓은 클로이스터가 있는등 아주 거대한 규모의 종교 시설 단지이었다.
안드레아 오르카냐와 그의 공방의 '예수의 수난도와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화가 1360년대에 그려졌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산타 마리아 델레 라우데 (Santa Maria delle Laude)라는 신심회가 1322년 이전에 만들어졌다. 이 조직은 성령의 사도들에게 강림을 기념하는 오순절 연극을 매년 공연하였다. 또한 자선 활동에도 관여를 했었는데, 소속 수사인 시모네 피다티 다 카시아(Simone Fidati da Cascia)는 전직 매춘부들을 위한 주택 건설을 지시하기도 했다. 1333년, 그 주택에는 50명 이상의 여성들이 거주했다.
산토 스피리토는 피렌체의 초기 인본주의와도 관련성을 띠었다. 조반니 보카치오가 이끌던 단체들 중 하나가 1360년대 그리고 1370년대 이 성당에서 모였다. 1375년에 그가 죽을 때, 보카치오는 그의 서재를 산토 스피리토의 수도원에 유증하였다. 1380년대 그리고 1390년대 초에 또 다른 인본주의 단체가 루이지 마르실리 (1342–94년) 수도실에서 매일 모였다. 마르실리는 파도바 대학교와 파리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수학했다. 그는 1370년 파도바의 페트라르카와 접촉하게 되었고 이후 보카치오의 친우가 되었다. 이 무리에는 1375년의 피렌체 재상을 지낸 콜루치오 살루타티 (1331년–1406년)가 있었다. 그는 곧 이 무리의 핵심 인사가 되었다.[8] 살루타티가 이끌던 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레오나르도 브루니 (1370년–1444년)로, 장차 피렌체의 재상이 된 인물이었다. 또 다른 이로는 인본주의자이자 코시모 메디치의 친우인 니콜로 데 니콜리가 있었다.
산토 스피리토는 1370년대 정치적 불안기 기간 몇몇 극적인 사건들이 열린 곳이었다. 아르노강 건너편에 위치한 피렌체의 유일한 구역인 산토 스피리토는 물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피렌체의 나머지 지역과는 달랐다. 산토 스피리토 지역의 주민들은 카포니, 소데리니, 프레스코발디 등 피렌체의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가문들의 일원이었으며 또한 아주 가난한 비숙련 노동자들도 일부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폭발하기 쉬운 인구 구성은 이 지역에 폭동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가 된 곳 중 하나라는 이미지를 주었다.
피렌체 공화국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정치적 암살 사건 중 하나가 1370년 11월에 이 성당에서 미사가 끝난 뒤 벌어진 리치 가문(Ricci)의 유력 인사인 산드로 다 콰라타(Sandro da Quarata)의 암살이었다.
치옴피의 난 당시에 산토 스피리토는 1378년 6월 22일 폭도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시뇨리아 측 세력의 보호를 받았다. 7월 19일에 체포된 치옴피의 난 공모자들의 심문 (폭동을 진압하려는 피렌체 정부의 최후의 필사적 시도)에서 이 계획적인 폭동은 별도의 네 개 폭동이 마련되어 있으며, 가장 큰 규모(1천 여명)가 산토 스피리토 성당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제2차 밀라노 전쟁 중인 1397년에 밀라노에 승리를 거두고 성 아우구스티노 축일 (8월 28일)에, 피렌체의 시뇨리아는 아우구스티노를 피렌체의 수호 성인으로 지정하고, 또 그를 기리며 성당의 재건축을 결심했다. 이 결정에도, 1434년까지 아무런 일이 진행되지 않다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활동이 있었다. 새로운 교회에 대한 작업은 1471년까지 천천히 진행되었다.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의 방문을 기념해서 신심회가 조직한 '사크라 라프레센타지오네' '성령의 강림' 공연 동안에 교회에 불이 났고 수도원의 일부와 함께 많은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