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이자
우리 나라 최초의 저항 동요로 알려져 있다.
일제하의 민족의 처지를 울밑의 봉선화에 빗대 노랫말을 만들고 곡을 붙여
일제 말기 전 국민의 가슴을 어루만진 최고의 애창곡
우리 가곡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 곡은 알고 있는 곡이다.
이 '봉선화'는 일제에 국권이 유린된 얼마 후부터 갑자기 불리기 시작했는데,
우리 겨레의 슬픈 얼의 화신으로 붕숭아가 망국한의 넋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 말기에는 금지곡으로 묶이기도 하였다.
이 곡의 작곡은 1920년 '애수'라는 바이올린 곡으로 선보였고 가사는 이웃집 살던
여류 피아니스트 원로 대가인 김원복의 딸 김형준이 쓴 시를 붙여 1926년 가곡으로 발표된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노래는 '학도가'정도 창가뿐이었는데 '봉숭아'의 출현으로 음악의 수준이
한 단계 상승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바이올린 연주자 출신 작곡가의 서구적인 악곡이지만 부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민족적인 선율과
악상으로만 느껴지는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당시의 녹음으로 듣다보면
창법 또한 민요적인 특성이 다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래가 얼마나 민족의 예술성과 민족의 사상을 깊이 이끌고 표현하는 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기도 하다. 더구나 홍난파의 처녀작이 바로 이 '봉선화'이고 보니 더욱 놀랍기도 하다.
봉선화의 순우리말은 봉숭아이다. 과거 한자로 표기하던 시기에는 '봉선화(鳳仙花)'로 쓰였다.
문일평의 '화하만필' 등에서도 봉선화가 사용됨을 볼 수 있는데, 초기 '봉선화'로 발표되어
불리던 것이 대중들 사이에서 봉숭아와 혼용되어 불렸다. 해방 후 국어 표준화 운동으로 '봉숭아'로
불리어지지만 아직 봉선화와 봉숭아 둘 다 표준어로 허용하고 있다.
이 노래는 알음알음 조금씩 불리다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은 1940년 김천애가 이 곡을
성악발표회(콘서트)에서 부르면서였다.
김형준 시 홍난파 작곡 소프라노 김천애 노래 '봉선화(1940)'
https://youtu.be/d0ElJJ1xuOY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 간에 여름 가고 가을 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이 예 있나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초창기 소프라노였던 김천애가 일본 유학시절 이 곡을 처음으로 부르고
6개월이라는 긴 기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는 곡이기도 하고
마음이 여리던 작곡가 홍난파도 핍박을 받았던 곡이다.
1972년 공연 중에서
https://youtu.be/q58oe4HKErQ
김천애 은퇴공연 중에서(이 동영상은 아쉽게도 유튜브에서 내려졌다)
https://youtu.be/GzFoUzLZU_E
김천애는 1919년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감리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서양음악을
접하고 음악성을 나타내 기독교계통인 평양의 정의여고에 진학하면서 독창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나와 후생악단의 일원으로 이인범 등과
전국 순회공연을 하였다.
1942년 일본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전일본인신음악회에서 '봉선화'를 불러 주목을 받았고
전국을 돌며 순회 독창회를 열며 '봉선화'를 불러 거국적 민족의 노래를 전파하는데 기여하였다.
해방 후에도 음악발전과 독창회와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72년 은퇴공연과 함께 도미하였다.
1990년 제자들의 요청으로 귀국독창회를 가진 바 있으머
1940년대와 50년대를 대표하던 소프라노 김천애는 1992년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민족의 설움을 가득 안아 일제 말기 가창 금지곡이 되기도 했던 '민족의 노래 봉선화'를 만들고
불렀던 홍난파와 김천애는 일제 말기 친일의 행적이 발견되면서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며 과오를
남긴다.
홍난파는 1937년 '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친일 문예단체인 '조선문예회'에 참여하여
사망할 때인 1941년까지 친일행적을 남겼다. 그는 미국유학 시절 '흥사단'에 가입했던 것과
이 '봉선화' 때문에 일제에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병약하고 심약한 홍영후(홍남파)가 견디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그는 전향을 하겠다는
글을 쓰기도 한다. 이후 그는 친일음악가로서의 활동만 하다 지병이 악화되어
1941년 휘경동 요양원에서 사망한다.
이 시기 4넌간 홍난파는 서정가곡과 동요 등을 작곡하지 않는다.
그가 남긴 우리 가곡과 동요는 그의 마음이 애국심이 가득할 때의 것들로
그의 모든 한국 가곡과 동요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 작곡된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친일이라는 마음이 없고 나라와 겨례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였다.
그가 친일 음악가임에는 틀림 없지만,
이런 초기의 곡에도 친일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으로써 친일행적을 마친 병약한 홍난파, 울밑에 선 '봉선화'를 보는 듯하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가을 찬바람 아름다운 너를 침노하니
낙화로다 처량하다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이
환생키를 바라노라
출처: 천향박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