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끝까지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스탈린의 마수에 걸려들어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부분을 그당시 유행했던 공산주의를 오늘날 유행하는 다문화주의로 바꾸면
그는 사실은 다문화주의 아니라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끝까지 다문화 정책에 거부했습니다. 결국 아베와 시진핑의 마수에 걸려들어 그는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습니다.
아래 것은 현재 국회와 보훈처에 계류 중인 '김경천 장군' 관계 서류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잊혀져버린 무장독립운동가 김경천장군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 이야기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하겠습니다.
1970년대 그러니까 ‘공산당’의 ‘공’자만 말해도, ‘김일성’의 ‘김’자만 말해도 공안당국에 잡혀가는 무시무시한 냉전 반공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친지분의 어머니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고 평생 집안에서 살아온 칠순 노인이었답니다. 친지분이 어머니께 살아계실 때 나들이 한 번 시켜드리려고 아산 이순신장군 현충사로 모시고 갔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성웅화’ 작업으로 그러니까 ‘이순신은 예수, 석가, 알렉산드로스, 나폴레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인’이라고 선전하기 위하여 엄청난 예산을 들여 아산 현충사를 꾸며놓았습니다. 평생 집안에서 살아온 칠순 노모가 그런 현충사를 둘러보았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노모가 이순상 상을 보고 감탄하는데 아들에게, “저분이 바로 김일성장군이냐?”고 묻더랍니다.
그렇습니다. 1930 ― 1950 년대 한국 사람으로서 이순신장군은 몰라도 김일성장군은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론 그 김일성장군은 북한의 김일성은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 중고등학교 교과목에 반공(反共) 과목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북한의 김일성은 가짜 김일성장군이다. 진짜 김일성장군은 김경천장군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김경천장군은 안중근, 안창호, 이승만, 김구를 넘어서고 이순신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 시대에 정부에서 그런 논거를 세워놓았습니다. 그래놓고는 김경천장군에 관해서 은근 슬쩍 넘어가버렸습니다. 즉, 김경천을 ‘북한의 김일성은 가짜’임을 밝히는 논거로 사용한 다음 폐기시켜버렸습니다.
김경천장군과 함께 만주와 소련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후에 귀국하여 이렇게 증언했다고 합니다. “소련군 극동지구 총사령관 우보레비치가 김경천의 군사적 재능을 존경했다. 김경천이 모스크바 공산당에 의해 극동지역 한국인, 소련인 유격부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나중에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소련 지역은 1980년대까지 철의 장막이 드리워진 사회였습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외부에서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거하면, “김경천이 스탈린의 왼팔이 되었을 수가 있다. 김경천의 죄과가 북한의 김일성의 것보다 클 수가 있다”는 추정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에 한국사회에서 김경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은연중 금기시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최고의 무장독립운동가는 김좌진, 홍범도, 김경천이었습니다. 김좌진은 독립운동 공으로 최고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습니다. 홍범도는 공산당에 가입한 탓으로 다음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습니다. 김경천은 ‘수수께끼 인물’이라는 이유로 어떤 훈장도 받지 못했습니다.
해방 후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독립운동 유공자들이 샅샅이 발굴되어 삼일운동 때 만세 몇 번 부른 사람도 독립유공자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도 독립운동 공은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김경천의 경우에는 그도 독립운동 유공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에 국민이 김경천의 독립운동의 공은 삼일운동 때 만세 몇 번 부른 사람만도 못한 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1930 ― 1980 년대, 김경천장군에 대한 진실은 철의 장막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소련이 마침내 그 장막을 거둡니다. 한국이 소련과 국교를 수립합니다. 정창영 감사관이 1996년에 소련 모스크바 유학을 떠납니다. 그가 모스크바에서 김경천의 가족을 만납니다. 이에 김경천의 생애가 소상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끝까지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스탈린의 마수에 걸려들어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습니다. 정창영이 귀국하여 그 사실을 국내에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김경천은 잊혀져버린 인물이었습니다.
정부에서,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라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그의 독립운동 공을 인정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김경천장군의 그 공은 독립운동사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경천은 김좌진, 홍범도를 넘어서는 무장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은 1920년대의 국내신문 보도, 일본 정보 관계 기록,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에서 벌써 밝혀졌습니다. 단지 너도, 나도 쉬쉬하며, “김경천은 행적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인물”이라며 넘겨버렸을 뿐입니다.
정부에서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이 있는 관계로 그 공을 인정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김경천장군에게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 가족에게 독립운동유공자 혜택을 부여해주었습니다. 그 대통령장은 그의 공적에 비하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 입장에서는 김경천의 후반생에 관한 증거가 가족들의 증언밖에 없는지라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독립운동 공이 제대로 판정 받으려면 가족의 증언에 플러스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2005년 이윽고 그 플러스가 나타납니다. 김경천의 일기인《경천아일록》이 발굴된 것입니다. 이 일기의 가치에 관하여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경천아일록》의 발굴은 독립운동사를 새로 쓰게 만들 획기적인 사건이다. 김경천의《경천아일록》은 김구의《백범일지》, 이순신의《난중일기》에 버금가는 가치 있는 것이다. 한국 오천년 역사에서 장군이 적과 싸우면서 직접 기록한 것은《난중일기》와《경천아일록》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일은 세계사에도 드문 일로 카이사르의《갈리아 전기》 정도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제가 그 일기를 여기 가지고 나왔습니다. 김경천장군이 눈 덮인 시베리아 벌판에서 백마를 타고 일본군과 싸우면서 그 과정을 지도까지 그려가며 소상히 기록했습니다. 제가 이 일기의 가치에 관해서 여기에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 일기가 난해(難解)합니다. 여러 학자들이 그 해독에 나섰는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초야에 묻혀 사는 야인이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정부에서, 그 일기의 평가, 해독내용의 검증… 그러한 것들을 일부학자나 야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직접 나서야 할 때라고 사료됩니다. 김경천 가족의 증언에 의하면 소련 당국이 그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데 내놓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김경천이 스탈린 치하 때 숙청당해 6년간 형무소 생활을 했습니다. 그 유물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며 김경천의 성향으로 볼 때 제2의 일기가 그 중에 있을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정부에서 ― 외무부, 문광부, 보훈처, 교육부에서 ― 나서야만 한다고 생각되기에 제가 이렇듯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첫댓글 김경천이라는분이 많이 생소합니다
저렇게 대단한분이 왜 이렇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겁니까 ?
좌빨들은 북한엔 친일파가 없없다 어쩌구 헛소리나 하죠.... 지들은 말로나 친일매국노 청산이다 애국한다 이러면서 실상 친일파보다 더 매국노짓이나 해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