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6.25때 서울대생이던 이회창이 한 일....
이회창은 6.25전쟁시 서울대에 재학하던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병력이 모자란 우리국군은 징집대상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을 징집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이회창씨는 징집대상의 나이로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선에 투입되어 나라를 지켜야 할 대상이었지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회창씨는 남들이 다 군대로 끌려갈때
용케도 6.25전쟁내내 멀쩡하게 전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편안한 생활을 하게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일제때 일제검사를 지내다가 해방후
대한민국에 검사가 부족한 틈을타서 친일파로 처단받지 않고 운좋게
대한민국 검사시험에 응시해서 대한민국의 검사로 특채된 이회차의 부친빽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회창이 징집대상 연령으로 전쟁터로 끌려나가게 될 상황에 처하자
이회창과 이회창의 애비는 검사라는 막강한 빽을 이용해서
이회창을 서류상으로만 포항에 속한 학도병부대로 편입시키게 됩니다.
물론 서류상으로만 학도병으로 포함시킨 것이지요..
당시 그 어수선한 시기에 이회창은
서류상으로 포항주둔 학도병부대에 배속된것으로 처리되었으니 당
연히 징집에서 제외될 수 있었고 다른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끌려가 총알받이로 죽어갈때
이회창은 친일파 애비와 따뜻한 쌀밥먹으면서 전쟁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습니다.
이회창은 서울대 다니던 시절
청주에서 중학교를 1년간 다닐때 알게된 중학교 동창이 같은 서울대에 입학하게 되자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 동창생의 하숙비를 졸업할때까지 대신 대주고
대신 그학생에게는 졸업할때까지 대리출석을 시키고는 이회창은 서울대 2학년 말기부터
학교에는 거의 나오지 않고 수덕사 절에 들어가서 부모의 뒷바라지로 고시공부만 했습니다.
그것도 사법고시역사상 최고로 부정한 사시시헙이었던
사시8회에 검사였던 제 아비의 빽덕에 손쉽게 합격한 것이지요..
6.25가 끝나고 위험이 사라진 후에 이회창은
역시 검사였던 애비의 빽덕에 군인중에서도 제일편한 장교,
장교중에서도 제일 편한 법무관, 법무관중에서도 최고로 편한 보직인 공군본부 법무관으로
배속받아서 근무하다가 것도 만기도 채우지 않고 역시 애비 빽으로 조기전역하게 된 것이죠..
6.25 당시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학도병으로 자원한
19세 이하의 어린 학생들이 3000명이 넘게 전선에서 싸우다 죽어갔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에 가면 6.25때 미국이 참전하게되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위해 스스로 자원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하버드대학생들 열댓명의 흉상이 교내에 세워져 있습니다.
과연 부모의 빽에 의지해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때 제 한몸 보전하기에
바빳던 기회주이적인 이회창같은 인간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다면 나라가 어찌되겠습니까?
또한 지하에 계신 호국영령들이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고
삼풍백화접 붕괴나 성수대교 붕괴같은 국가적 재앙으로 우리를 다시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