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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는 3세기 중엽. 팍스 로마나는 붕괴되었다.
로마, 이 나라는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루며 그와 비슷한 수의 인물을 배출하고 문명을 건설해갔다. 그 과정에서 작은 촌락이었던 로마는 지중해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 세계 제국으로 발전했고 또 전례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유지시켰다. 이는 일찍이 다리우스도, 알렉산드로스도 이루지 못한 전례 없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3세기 초엽, 제국은 안팎으로 서서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제국을 지탱하던 수익성은 한계에 다다랐고 엉성한 제위 계승은 잦은 내전을 낳았으며 그것은 경제와 문화를 치명적이게 파괴시켰다. 게다가 국경 너머 여태껏 야만인이라 불렀던 그들은 제국과는 달리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이교도의 것인지, 새로이 확산되어가던 신흥 보편종교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은 아직 제국을 버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국을 다시 재건한 위대한 황제들의 등장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리리아의 농민 가정이 배출한 이교도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변해가는 환경에 맞게 제국의 사회와 군대를 재편하면서 새로운 로마 제국의 뼈대를 세웠다.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져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개혁을 이어가는 한편 기독교로 제국을 안정시키고 재탄성했으며, 독실한 테오도시우스는 비록 요절해 뜻을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제국을 하드리아노폴리스의 충격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 결과 제국은 위기를 극복해 사마라,하드리아노폴리스,북아프리카 등에서 실패를 겪었음에도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고, 결국 자원의 주요한 공급처였던 아프리카를 상실했던 서방 제국은 몰락했지만 동방 제국은 동서분할로부터 1000년 이상 존속하게 된다.
2.
제국이 상실하고, 또 탈환을 노리는 서방의 상황은 어땠을까? 일반적인 인식대로 정말 게르만족은 로마의 유산을 약탈하고 파괴해 암흑시대를 불러들이기만 했을까? 다음은 주요 게르만 왕국과 그에 관한 사실들을 정리한 것이다.
①서고트 왕국:서고트족은 테르빙족과 그레우퉁족, 라다가이수스 일파의 잔당들이 결합된 잔당들이 결합해 만들어진 최초의 구체적인 게르만 집단으로 초창기 알라리크 시기에는 로마와 대립했지만 이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포에데라티로 종군하기도 하는 등 로마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그들의 우월한 문화를 받아들인다. 이후 프랑크 왕국과 마찰을 겪으며 원래 중심지였던 갈리아 남부를 상실하고 잦은 내전과 고토 수복을 노리는 동방 제국의 공격에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왕국을 건설했다. 초기 서고트 귀족들과 현지민들 사이에 종교적 갈등이 있긴 했지만 이후 이들도 정통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로마 문화의 대부분을 수용하는데 성공했다.그들은 로마식 건축물에서 로마식 관료 체계로 행정업무를 처리했고, 외국과의 해상 교역 역시 자주 이루어졌다.
②반달 왕국:반달 왕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로마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일한 게르만 왕국이다. 그들은 끝까지 이단인 아리우스파 신앙을 고수했고 따라서 현지인들과 상당한 갈등을 겪었지만 우월했던 로마 문화 만큼은 대부분 수용했고 경제 역시 아프리카의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한 농업과 그것을 거래하기 위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③동고트 왕국:테오도릭 대왕은 엄연히 제노 황제의 신하로 마기스테르 밀리툼과 콘술의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물론 그의 영토인 이탈리아에 동방 제국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뜻은 절대 아니지만 그가 그 만큼 로마 문화에 조예가 깊음을 증명해주는 수단 정도는 될 수 있다. 테오도릭은 기존에 이탈리아에 있던 로마의 행정체계를 그대로 계승했으며, 카시오도루스와 보에티우스 등 로마인들도 측근으로 기용했다. 물론 로마 문화의 연속 역시 라벤나의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④프랑크 왕국:클로비스는 갈리아의 로마 지배자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하고 왕국을 세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로마의 유산을 파괴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를 비롯한 사제들에게 '새로운 콘스탄티누스'라 추앙받았으며 일부는 그를 아우구스투스라 여기기까지 했다. 로마 문화는 메로빙 왕조의 프랑크 왕국에서 상당부분 이어졌고, 동방 제국으로 부터 받은 콘술의 작위를 받아 기뻐하는 클로비스를 로마식으로 프랑크 전사들이 방패 위에 태웠다는 데서 알 수 짐작할 수 있듯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동서교역 역시 활발히 이루어져, 갈리아 곳곳에선 이집트에서 나오는 파피루스에 왕의 업적을 기록하는 서기관과 동방의 향신료를 실은 낙타를 모는 상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전혀 드문 일이 아니었다.
⑤앵글로 색슨 7왕국:앞선 예와 달리, 브리타니아 땅에 들어선 게르만계 7 왕국들은 로마의 문화를 수용하지도, 수용하려하지도 않았다. 브리타니아에 남아있던 로마의 문화는 파괴되었고 게르만 지도자들은 거기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법과 통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기독교로 개종해 로마 문화를 동경하게 된 것은 그들의 이주로부터 수백년 뒤의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서방의 게르만 왕국들은 대부분 로마 문화를 동경해 통치.건축,법률 등 여러 방면으로 실제로 수용했으며, 여러 국가들이 들어선 이후에도 그들은 서로 교역과 통상, 외교적 접촉을 통해 지중해적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3.
이렇게 서방의 게르만 왕국들이 활기치는 사이, 동로마 제국은 꾸준히 개혁을 이어가며 국력을 축척해나가고 있었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조가 들어서기 직전의 황제였던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60대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 뒤 20년 간 통치를 이어가며 바실리쿠스의 반달 원정 실패의 재앙을 극복하고 제국을 회복시켰다. 그의 개혁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는데 그 중 3세기의 인플레이션으로 급락한 화폐 가치를 바로 잡고 새로운 청동 주화를 발행한 것은 경기 회복을 상징하고, 또 경기 회복을 더욱더 가속화시키는 그의 대표적인 개혁이었다. 이 청동화는 군대의 급료로 흘러들어갔으며 -여태까지 급료는 현물로 주어졌다- 그대로 군대의 역량과 체계를 강화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국고는 풍족한 여유자금으로 채워졌고, 카바드 1세 시기 전성기를 구가해가던 페르시아의 침략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격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 사후, 제위는 빈자 출신 무지렁뱅이 경호대장 유스티누스의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그의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는 대단히 현명한 인물이었고, 제국은 아나스타시우스 대 처럼 잘 운영되었다. 이후 유스티누스가 사망하자 제위는 큰 분란 없이 유스티니아누스에게 계승되었고, 비록 제위 초기에는 시민들의 반란으로 표출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서방 영토를 수복하고 로마 제국을 재건한다는 야망에 차있었다. 그리고 니카의 반란이 진압됐을 때, 때마침 서방의 게르만 왕국들은 제각기 내분에 빠졌다. 마침내, 고토 수복의 신호탄을 울릴 때가 온 것이다.
①반달 전쟁:반달족이 차지한 아프리카는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해 사실상 서방 제국을 지탱해주는 지역이었고, 따라서 제국은 자신의 이 요충지를 차지하고 오만방자하게 제국의 권위를 무시하던 야만족들을 여러번 공격하려했다. 그러나 반달족은 위대한 지도자 가이세릭의 영도를 받았고, 오히려 이런 제국의 공격은 여태껏 엉성하게 엮여있던 알란족과 하스딩기족,실링기족을 하나로 묶게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제위에 올랐을 때 왕국의 귀족들은 분열되었으며, 음흉한 황제의 모략은 여기에 기름을 부어주었다.
530년, 아리우스파임에도 자신의 왕국 내의 정통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보이고 제국과 동맹을 맺었던 반달인들의 왕 힐데리히는 자신의 숙부 겔리메르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겔리메르는 조카의 관용 정책을 완전히 폐지하는 한편 독선적인 행보를 보였고 심지어 콘스탄티노플의 야심찬 황제에게 모욕적인 내용이 적힌 국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좋은 명분거리였고 그는 곧바로 자신의 위대한 장군 벨리사리우스를 보내 겔리메르를 격파했다. 결국 아프리카에서 100여년에 걸친 반달인의 통치는 지배자의 만용으로 종식되었으며 로마인의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②(동)고트 전쟁:동고트 전쟁의 발단 역시 반달 왕국과 비슷하게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에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왕국을 건설한 테오도릭은 가이세릭에 못지 않는 위대한 인물이었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유약했고, 계승에는 피가 따랐다.
동고트 왕국은 현지인과의 제휴를 통해 만만치 않은 역량을 갖추었고, 따라서 우월한 동원력을 뽐내며 황제의 명에 따라 이번에도 적지로 파견된 벨리사리우스를 여러 차례 위기로 내몰았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장군은 그런 위기를 자신의 천재적인 전술적,전략적 재능으로 모두 극복하면서 기어코 이탈리아 전역을 정복해냈고 동고트족은 최후의 순간 까지 발악을 시도했지만 그 마저 벨리사리우스 못지 않게 뛰어난 지휘력을 가진 노환관 나르세스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그것은 곧, 제국은 자신들의 발원지를 수복하는데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③(서)고트 전쟁:서고트인들이 서유럽에 정착한지 1세기가 넘게 지났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현지인들과 구분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했고 그것은 아리우스파 신앙에 대한 고수와 정통 기독교를 믿는 현지인들에 대한 박해로 표출되었다. 결국 핍박받던 현지인들은 반란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자신들의 굳건한 신앙을 알리는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야심찬 황제의 지도 하에 아프리카에서 반달족의 통치를 종식시킨 제국에게 이베리아 반도로까지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한 로마군은 그곳의 남단을 손쉽게 점령했고, 그곳에서 군대를 새로이 편제하고 방어 체계를 갖추는데 성공했다. 내전을 급하게 수습한 서고트인들은 그제서야 영토에 굶주린 제국의 위협을 몸소 느끼고 자신들의 영역을 회복하려했지만 이미 기반을 공고히한 제국을 다시 몰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워보였다.
야심찬 황제는 결국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지중해는 다시금 제국의 호수가 되었고, 잠시 국경에 뚫린 구멍을 놓치지 않은 페르시아인들의 침략은 성공적으로 격퇴되었다. 또 그는 내치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보였고, 이제 그는 앞선 위대한 두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와 같이 대제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이 번영이 쇠퇴의 서곡이기도 했음을.
카페에 가입하고 처음으로 써보는 제대로 된 시리즈 물입니다. 잘 봐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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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놈의 흑사병이 아아..
유스티니아누스는 업적만 보면 정말 번쩍번쩍하지만 덕분에 후대 황제들이 고생 정말 많이 했죠...
동고트와의 전쟁도 30년이나 끌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애초에 할 필요도 별로 없었는데...
전쟁 당시의 악재와 후일의 우연적인 재앙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토 수복 자체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성공적이었습니다.
흑사병이 없었으면 중세가 빨리 끝날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엥,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든, 일반적으로 말하는 흑사병이든 기존의 세계 체계를 뒤흔든 건 똑같을텐데요.
반달왕국의 경우엔 현지 베르베르인들 아리우스파라 많이 도움받지 않았던가요? 이전 지배층이 가톨릭이어서 그들이 핍박받았던것도 반달족의 아프리카 점령 성공 이유중 하나로 알고있는데
네. 겔리메르가 벨리사리우스한테 탈탈 털리고 몸을 의탁했던 곳이 베르베르인이 거주하던 누미디아로 압니다.
흑사병만 아녔다면.. 로마제국 복원이 수월했을 겁니다..(사산조의 변수가 크지만..) 그랬다면 이슬람 인베이전도 없었을거고.. IS가 설치는 꼬라지도 안봣을텐데 ㅠㅠ
동고트 왕국이 당시 서로마제국을 부활시킬 포텐이 있었지만.. 테오도릭 대왕 이후 명군의 부재, 서고트보다 더 극심했던 가톨릭과의 갈등이 좀.. 아쉽긴 합니다. 대신 테오도릭을 존경한 프랑크의 효웅이 크게 성공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네. 또 개인적으로 동고트 왕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가 1000년 넘게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던 것도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이름짓기귀찮아 롬바르드가 일보직전에 이르렀지만.. 북쪽의 철수아재의 훼방으로도 또 놓쳤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치세때 동로마 전역에 발병한 역병이 일반적인 우리가 알고있는 14세기 발병한 흑사병과 같다고들 하는데 맞나요?
구체적으로 같은 병이다.라고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두 역병 모두 같은 선페스트형을 보인 건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