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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장수산성의 구조형식과 성안의 유적유물
제 1절 장수산성의 구조형식
1. 장수산성의 지리적 위치와 지형
우리나라 서북 지방의 남단인 황해남도 신원군과 재령군의 경계점에는 장수산이 높이 솟아있다. 장수산은 북쪽에는 정방산줄기, 동쪽으로는 멸악산줄기, 서쪽으로는 구월산줄기, 불라산줄기, 남쪽으로는 수양산줄기가 사방으로 막혀있는 벌판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독립적인 산이다.
장수산을 경계로 하여 남쪽구릉지대는 현재 황해남도 신원군에 속하고 북쪽은 재령군에 속한다. 멸악산줄기의 남단에서 시작된 재령강 상류의 한 지류는 장수산의 동남쪽 구릉지대와 산의 동쪽 기슭을 감돌아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장수산성은 신원군 아양리 소재지로부터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장수산에 자리 잡고 있다. 장수산성의 위치는 이 일대의 자연지리적 조건들을 충분히 타산한데 기초하여 선정 되였다.
우선 장수산일대에는 산성을 쌓는데 유리한 군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장수산은 전반적으로 규암으로 이루어졌는데 중생대에 있은 습곡 및 심부파렬구조운동에 의해 심한 파렬이 생기면서 깊은 골짜기들과 절벽들이 형성 되여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있는데다가 주위에는 멸악산줄기, 정방산줄기, 구월산줄기, 불라산줄기, 수양산줄기 등 높은 산들이 가로막고 있어 군사적 요새를 건설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장수산 동남쪽으로 흐르는 재령강은 적의 전진을 저지시키며 군사행동을 크게 제약하는 자연적인 해자로 리용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장수산은 무연한 재령벌을 굽어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므로 장수산을 장악하면 재령강류역의 넓은 평야를 지배할 수 있는 군사적 요지이다.
특히 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하니봉(710m) 주위의 지형은 천연의 자연요새를 이루고 있다. 산성은 장수산의 하니봉을 주봉으로 하여 7개의 산봉우리와 그것을 련결한 산 능선을 따라 쌓아졌는데 하니봉 주위에는 접시모양으로 가운데가 우묵한 백운동분지가 있고 그 동북쪽아래에는 성 가운데의 분수령을 경계로 남쪽에 삼치골과 우물골이, 북쪽에 룡소골과 동부골이 있다. 이 골짜기들은 밑으로 내려오면서 하나로 합쳐져 ≪y≫형을 이루고 있다.
성안의 분지와 골짜기들에는 풍부한 물 원천이 있다. 성안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골짜기를 타고 사철 흘러내리고 있는데 북쪽의 룡소골 만해도 수천 명의 인원이 성안에 들어와 생활하면서 쓰고 남을 정도로 많은 량의 물이 흐르고 있다.
골짜기와 분지를 안에 넣고 빙 둘러싼 봉우리들과 릉선 밖은 높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아슬한 절벽이거나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음으로 그대로 자연적인 장애물을 형성하고 있다.
장수산성은 군사적 조건뿐 아니라 경제적 조건이 유리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장수산 일대는 재령강유역의 넓은 평양지대를 이루고 있는데다가 기후가 따뜻하고 물 원천도 풍부하여 농업발전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중요 알곡생산지의 하나로 되고 있다.
또한 신원, 재령일대는 높은 품위의 갈철광을 비롯한 철광석의 매장량이 많아서 광업, 쇠부리 수공업을 비롯한 각종 수공업발전에도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재령강과 같은 큰 강과 서해바다를 가까이 하고 있어 수산업발전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이것은 수륙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강과 바다를 가까이 한 것으로 보아 배길을 통한 교통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재령강 배길로 평양까지는 280리 이다. 또한 북쪽으로는 봉산, 사리원, 황주를 거쳐 평양으로 통하는 큰 길이 있는데 이 길은 해주, 연안, 배천, 개성을 거쳐 남쪽으로 통하고 서북쪽으로는 재령과 신천을 거쳐 안악 지방으로 통할 수 있다. 륙로로 평양까지는 240리, 해주까지는 60리, 안악까지는 90리 정도 된다.
2. 장수산성의 구조형식
1) 성의 구성
장수산성은 서로 긴밀히 련결된 두 개의 기본성과 이 성들을 보강한 겹성으로 되여 있다. 즉 장수산 하니봉(710m) 주의의 백운동분지를 둘러싼 성과 그 동북쪽 아래의 삼치골, 우물골, 룡소골 등 여러 골짜기들을 둘러싼 성이 하나로 결합 되여 기본 성을 이루고 이 기본성의 남부와 동부에 겹성벽이 쌓아져 하나의 방어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성의 륜곽을 보면 백운동분지와 그 동쪽골짜기들을 안고 빙 돌아간 산봉우리들과 릉선들이 동쪽으로 밋밋하게 낮아지다가 재령강 기슭에서 끊어져 거기에서 골짜기가 형성되는데 성벽은 이 장수산 동남쪽 골짜기에서부터 서쪽으로 릉선을 따라 뻗었다.
성벽은 솔봉, 둥글봉을 안에 넣고, 산릉선 경사면을 따라 서쪽으로 계속 쌓아지다가 하니봉 부근에서 봉우리를 감싸고 동북쪽으로 뻗었다.
성벽은 동북방향으로 계속되다가 장수산의 동북쪽 465m 고지인 뾰족봉을 감사고 돌아 서남쪽방향으로 뻗어 장수산 동남모서리 골짜기로 돌아온다. 성의 평면은 서쪽과 남쪽, 동북쪽 세 방향으로 돌출된 불규칙적인 삼각형모양을 이루었다.
즉 성은 장수산 동남부의 백운동분지와 그 동쪽의 룡소, 삼치골을 둘러싼 하니봉, 뾰족봉 남장대 봉우리를 비롯한 여러 봉우리들과 그것을 련결한 산릉선을 따라 성벽이 쌓아진 고로봉형의 돌성이다.
성벽은 지형지물을 효과적으로 리용 하면서 쌓아졌는데 성의 남, 서 북면은 절벽과 절벽 사이에 쌓아졌고 동쪽 면은 거의 전 구간에 돌 성벽이 축조 되였다.
성벽은 북벽이 비교적 곧고 남벽과 동벽은 가운데가 우묵하게 들어갔다. 성은 전체적으로는 하나로 되여 있으나 중간에 남북으로 길게 잔벽이 쌓아짐으로서 하니봉 주위의 높은 대지를 둘러싼 내성과 그 동족이 여러 골짜기들을 둘러싼 외성으로 구분된다. 내성과 외성을 구분한 사이벽은 룡소골의 서쪽 벼랑과 우물골의 서쪽 산릉선을 경계로 하여 이루어졌다. 분지로 되여 있는 내성은 그 동부의 외성보다 높은 지대를 차지하고 있다. 옛 기록에는 분지를 둘러싼 높은 지대의 성을 ≪웃성≫이라고 했고 낮은 곳의 성을 ≪아래성≫이라고 했다.
※ ≪영조실록≫ 권 34 9년 6월
성의 남벽과 동벽 아래에는 기본성벽의 방위력을 더욱 보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겹성벽이 쌓아졌다.
장수산성에서 겹성벽은 내성 남벽아래 골짜기와 외성 동문으로 올라가는 골짜기들을 가로 막아 쌓아졌다. 또한 장수산성에는 혈성과 차단성이 있다. 내성과 외성으로 되여 있는 성의 총 둘레의 길이는 10.5km이다. 그 중 성벽을 쌓은 구간은 5390m 이고 그 나머지 구간은 절벽을 그대로 리용하였다.
내성과 외성을 구분한 사이벽의 길이는 1070m이다. 내성과 외성을 구분한 간벽과 겹성벽까지 포함한 성의 총 연장길이는 약 12km이다. 구체적으로 장수산성을 이루고 있는 부분성들을 구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내 성
내성은 장수산의 하니봉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성으로서 둘레는 4700m이다. 성안의 지세는 가운데가 우묵한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성밖은 절벽이거나 급한 경사로 되여 있다. 성안의 백운동분지에는 수원이 풍부하다. 성안의 풍부한 수원은 내성의 대지를 적시고 세 줄기의 물곬을 형성하여 외성의 여러 골짜기들과 성밖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그중 한 줄기는 동족벼랑을 타고 외성의 룡소골로 폭포가 되여 흐르고 다른 한줄기는 동남쪽골짜기로, 다른 한 줄기는 서쪽성밖으로 흘러내려 신원읍의 백할산 기슭을 스쳐 재령강 지류인 운대천으로 들어간다.
성의 서북쪽은 험준한 산세와 련결되고 남쪽은 신원읍 및 아양리와 잇닿아 있다. 성벽은 자연지세를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산릉선의 비교적 완만한 경사지들에 쌓아졌고 벼랑과 절벽으로 된 구간은 쌓지 않았다. 성의 동벽은 외성의 서벽을 겸한 성벽구간이다.
○ 외 성
외성은 내성의 동부 삼치골, 울물골, 동부골, 용소골 등 여러 골자기의 대지를 둘러싼 성으로 내성에 비하면 매우 크다. 그 둘레는 7950m이다. 평면은 토끼를 세워놓고 옆에서 보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동북모서리가 밖으로 삐죽 나왔고 서벽은 ≪S≫자 형으로 되였으며 남벽은 둥그스럼하게 휘였다.
동벽은 중간부분이 안으로 밋밋하게 휘여 들어갔다. 성안의 지세는 분수령을 경계로 북과 남으로 골짜기들이 ≪Y≫자 형으로 나있다. 성의 남부는 신원군 아양리 평지와 접하고 동부는 운양리, 월당리 평지와 북부는 장수산의 절경인 열두굽이를 비롯한 산줄기와 서부는 내성과 련결된다.
성벽은 절벽으로 된 구간을 그대로 리용하면서 여러 골짜기 대지를 둘러싼 산봉우리들과 릉선을 따라 쌓아졌다. 성벽은 성의 동쪽과 남쪽 서남쪽에 기본적으로 쌓아졌으며 북쪽과 서북쪽은 높이 수십 메터의 수직절벽이거나 가파로운 벼랑으로 되여있어 자연벽을 그대로 리용 하였다. 성의 서벽은 내성의 동벽과 함께 리용되는 구간이다. 내성과 외성간의 통행은 성문을 따로 내지 않고 사이벽의 통행이 편리한 구간을 리용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겹 성
겹성벽을 쌓는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성에 의거한 싸움에서 성벽으로 둘러막은 기본성 그 자체에 국한하지 않고 보다 큰 방위력을 형성하기 위하여 창안 도입한 방법으로서 일반적으로 기본 성벽 밖의 험한 자연지세를 리용하여 일부 구간들에 성벽을 덧 쌓거나 보루를 설치하여 그것이 기본 성벽을 밖으로 겹쌓아 독립적인 성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장수산성에서는 지형상 관계로 방위조건이 비교적 약한 고리라고 인정되거나 적의 공격이 집중될 수 있는 성문 밖의 일부 구간에 겹성벽을 쌓음으로써 기본 성의 방위력을 더욱 완비하였다. 장수산성의 북쪽은 대부분 수직절벽이거나 험준한 산밭들과 련결된 천연요새를 이루고 있어 적이 공격해오기 매우 불리하다. 여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방어조건이 약한 부분은 성의 남부와 동부이다. 그것은 이 부분이 성밖의 평지와 직접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장수산성에는 이러한 방위력 형성조건의 약점을 보충하기 위하여 내성 남문으로부터 약 70M 아래로 내려와서 두 골짜기를 가로 막은 내성남벽의 겹성벽과 외성 동문 아래 골짜기를 가로 막은 외성 동벽의 겹성벽이 축조되였다. 내성 남문아래에 쌓아진 성벽의 길이는 160M이다. 외성 동문 아래 골짜기를 가로 막아 쌓아진 성벽의 길이는 100M이다.
○ 철 성
장수산성에는 성밖에서 성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지나 방어상 유리한 등성이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러한 지형을 성안에 휘여 넣고 쌓은 성벽인 철성이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산성의 남부지역과 외성안의 삼치골, 우물골을 손금 보듯 내려다 볼 수 있는 우물골의 서쪽 산등성이를 외성 안에 포함시켜 성벽을 쌓은 것이다. 이 철성의 길이는 45M, 폭은 15M이다.
다른 하나는 외성 동북쪽 뾰족산의 높은 봉우리를 빙 둘러쌓은 것이다. 이 철성은 뾰족산의 높은 봉우리를 성 안에 넣음으로서 적들이 높은 고지에서 성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험성을 극복하고 성 방어에서는 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였다. 외성의 동북쪽 봉우리에 철성이 쌓아진 것으로 하여 성의 평면을 보면 동북쪽으로 많이 치우쳐 졌다. 철성은 고구려성 건설에 도입된 독특한 시설물로서 평양성 북성, 롱오리 산성, 태백산성에서 볼 수 있다. 장수산성의 철성도 다른 고구려 산성들의 철성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성 방위력 형서으이 중요한 요소로 되였다.
○ 차단성
차단성은 일반적으로 중요한 통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쌓아지게 된다. 장수산성에서는 외성안의 남부와 북부를 련결하는 주요통로에 차단성벽이 쌓아졌다. 차단성은 외성의 남쪽 골짜기들인 삼치골과 우물골에서 북쪽골짜기인 룡소물로 넘어가는 외통길목인 못재들에 길이 55M로 쌓아졌다.
성벽은 량면쌓기 방법으로 축조되였다. 현재 성벽은 무너진 상태로 남아있다. 성벽의 밑 너비는 2.4M이다.
성벽의 량쪽 끝으로는 한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나있다. 이 차단성을 경계로 그 북쪽과 남쪽에는 성안의 건물터를 비롯한 시설물 배치에서 일련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즉 차단성 남쪽에는 규모가 크고 품위가 있는 건물터를 비롯한 수십채의 건물터가 있으며 북쪽에는 쇠부리터와 같은 생산용 시설물들과 함께 몇 채의 건물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보아 이 차단성은 외성 안의 기본 건물터 구역에 대한 방비를 더욱 강화하고 통행을 단속 차단할 목적에서 쌓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2) 성의 시설물과 그 짜임새
(1) 성벽 축조형식과 방법
장수산성은 석재의 선택과 가공으로부터 성벽의 축조형식과 방법에 이르기까지 장수산의 자연지세와 지질조건이 가장 합리적으로 효과 있게 리용 되였다.
○ 성 돌
장수산성 축조에서는 현지에 흔한 규암질의 성돌이 리용 되였다. 석재의 채취와 가공, 운반은 성축에서 가장 품이 많이 드는 공정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에서는 성 축조에 필요되는 석재를 흔히 현지에서 해결하여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규암은 일반적으로 굳고 깨면 각이 생기는 성지를 가지고 있다.
성돌은 가공 정도와 크기에서 차이가 있으며 그 형태는 모두 4각추, 또는 방추형이다. 문터 부근이나 장대 건물터 주위의 성벽 돌에는 잘 가공된 성들이 쓰이였다. 성돌을 4각추, 방추모양으로 가공하여 쓴 것은 고구려 산성들의 성벽축조에서 볼 수 있는 고유한 모습이다. 성돌은 앞면의 가운데 부분이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것, 한쪽으로 경사지거나 매끈한 것 등 일정하지 않다. 성돌의 테두리와 모서리들은 대체로 모가 난 그대로이다. 이것은 석재가 매우 굳고 깨면 모가 나는 것으로 하여 가공과정에 생긴 것이다.
성돌의 크기는 대체로 너비 30∼40cm, 높이 15∼20cm, 길이 30∼40cm이다.
성벽의 기초부분이나 성문축조에서는 너비 170cm, 높이 55cm, 길이 456cm되는 큰 돌도 리용 되였다. 장수산성 축조에 리용된 이상과 같은 성돌의 모양과 가공정도 그 특징들은 내성과 외성 겹성을 비롯한 모든 성벽들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장수산성의 성벽은 대부분 산릉선의 경사면에 외면 쌓기 방법으로 축조 되였다. 장수산성의 성벽축조형식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형과 지질조건에 따라 몇 가지로 갈라 볼 수 있다.
○ 산릉선의 성벽
외성 남문의 서쪽 벼랑 턱에서 시작된 성벽은 서쪽산 봉우리를 향하여 뻗어 올라간 산릉선 경사면에 축조 되였다. 이 구간에서 성벽은 릉선 마루에서 얼마쯤 밖으로 내려와서 릉선 경사면에 의지하여 쌓았다. 성벽의 기초는 릉선 경사면에 드러난 암반을 그대로 리용 하였다.
성벽의 바깥 면은 처음부터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면서 8∼9돌기 쌓다가 그 우부터 수직으로 쌓아졌다. 성벽은 처음에 릉선바깥 경사면에 의지하여 외면 쌓기 방법으로 쌓아지다가 릉선마루보다 성벽이 높아지면서부터는 량면 쌓기 방법으로 쌓았다. 현재 이 부분성벽 바깥면 높이는 1.8m이고, 안면의 높이는 0.8m이다. 성벽 밑 부분 너비는 3m, 성벽 웃 너비는 2.6m이다. 성벽은 벽돌을 쌓듯이 가로 평행선을 맞추면서 대개 성돌이 6합∼8합으로 맞물리우거나 짓눌리워 하나로 접합 되였다. 성벽의 밑부분은 이 구간의 지반이 암반으로 된 조건에 맞게 암반을 기초로 삼고 그 위에 조금 큰 성돌을 놓고 그 다음 작은 성돌이 쌓아졌다.
○ 산 경사면의 성벽
내성 남문 부근에 있는 외성 서남벽 일부 구간은 경사가 급한 산경사면 중턱에 쌓아졌다. 이 지점의 성벽은 산성 남부지역의 사직골에서 내성 남문 골짜기를 따라 올라오는 적을 막기 위한 성벽으로서 현재 성 시설물인 녀장도 일부 남아있다.
성벽은 먼저 산 경사면의 흙을 암반이 드러날 때까지 수직으로 깎아낸 다음 그 우에 쌓았다. 성벽은 밑으로부터 80cm 높이까지 성안쪽으로 계단을 지으면서 쌓다가 그 우부터는 점차 경사지게 쌓아 올라갔다. 계단식 기초축석의 맨 밑 층계 사이 너비는 3∼4cm이고 다음 층계부터는 계단 너비가 20cm 정도로 되여 있다.
성벽은 2m 높이까지 산 경사면에 붙여 바깥쪽의 한면만 쌓다가 그 우부터는 량면 쌓기 방법으로 쌓아졌다. 량면 쌓기로 축조된 안벽은 약간씩 들어가면서 쌓아졌는데 웃돌은 아래돌보다 2cm 정도 안으로 들어갔다. 성벽의 높이는 바깥쪽이 2.8m 안쪽은 0.8m이다. 성벽의 두께는 웃부분이 1.2m이다. 녀장의 높이는 1.2m, 너비는 2.2m, 두께 0.8m, 녀장과 녀장 상이 거리는 0.5m이다.
성벽의 바깥면과 안면을 쌓는 방법은 같은데 가로줄을 기본적으로 맞추면서 6합∼8할으로 맞물리였다.
성벽의 성심도 매 성돌들이 서로 맞물리우거나 짓눌리웠다. 그러므로 성벽은 한 덩어리가 되여 어느 하나의 성돌도 뽑아지지 않게 되어 있다.
○경사가 심한 산릉선 마루우의 성벽
외성남문에서 동북쪽으로 약 230m 떨어진 지점은 작은 장수산으로 올라가는 산릉선으로서 물매가 급한 암반으로 되여 있다. 이 구간에서 성벽은 릉선 마루밖의 경사도가 너무 심하여 릉선마루를 타고 가면서 쌓아졌다. 성벽은 성돌을 쌓기 편리하게 바닥이 거치른 암반을 일정한 너비로 홈을 파내고 그 우에 쌓았다. 이 구간에서 성벽은 성 자리가 너무 경사졌으므로 맨 밑의 성돌은 바닥과 평행을 이룬 것이 아니라 경사면과 20∼30도 각을 이루도록 바위를 다스려 계단을 지었다.
그것은 경사지형을 고려하여 성돌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막고 성벽의 견고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였다. 성벽 축조에는 처음부터 량면쌓기 방법이 적용 되였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2.5m∼2.7m, 너비는 아래 부분이 3.2∼3.5m, 웃부분이 2.3∼2.5m이다.
○ 경사가 완만한 산릉선의 성벽
외성동문으로부터 서쪽으로 성벽을 따라 약 1km 떨어진 지점은 작은 장수산과 뾰족산을 련결하는 릉선의 동쪽 경사면으로서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성벽은 이 경사면 밖의 흙을 50∼60cm 정도 파 내리우고 막돌과 진흙을 다져 성벽의 기초를 마련한 다음 그 위에 처음부터 안으로 약간 경사를 지으면서 쌓아졌다. 성벽 축조형식과 방법은 앞에서 본 것과 같다. 성벽의 높이는 1.5m, 내탁안쪽성벽 높이는 0.4m, 벽의 두께는 웃부분이 2.3m이다.
○ 골짜기를 건너간 성벽
내성 남문으로 올라가는 오른쪽 골짜기를 가로 막은 성벽은 장수산성의 겹성벽으로서 80m 구간에 쌓아졌다. 이곳에서 성벽은 골짜기의 량쪽 릉선 벼랑 턱에 바싹 잇대여 쌓아졌다. 성벽은 골짜기 중턱 경사면에 쌓아진 관계로 경사면을 깍아 내리우고 돌과 진흙을 섞어다져서 기초를 마련한 다음 외면쌓기 방법으로 쌓아졌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2.2∼2.3m, 너비는 아래 부분이 3.5m, 웃부분이 2.3m이다. 골짜기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성벽 밑 부분에는 가로 너비 0.6m, 높이 0.5m, 길이 3.5m 크기의 장방형수구문을 내여 골짜기로 흐르는 물에 의한 피해를 받지 않도록 되여 있다. 외성 남문 부근과 같은 골짜기 입구의 개활지대를 가로 막은 성벽은 량면쌓기 방법으로 쌓아졌다.
이상의 장수산성 성벽축조형식과 방법을 종합하여 보면 여러 측면에서 고구려 산성 축조의 고유한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 장수산성 성벽축조에 리용된 4각추, 혹은 방추형의 성돌은 고구려의 고유한 성돌 형식이며 구체적인 지질조건에 맞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벽의 기초를 튼튼히 한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성벽축조에 널리 창안 도입한 우수한 점의 하나이다.
또한 장수산성 성벽축조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산릉선경사면에 외면축조방법과 여기에서 량면축조방법의 적절한 배합, 성벽이 골짝입구의 개활지대나 산릉선 마루에 쌓아지게 되는 경우 처음부터 량면축조방법이 적용된 것은 고구려 성벽 축조의 일반적 특징들이다.
장수산성 성벽 축조에서는 단일식 방법과 계단식 방법도 합리적으로 적용되였다. 성벽축조에서 단일식 방법은 성돌을 밑으로부터 우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들여다 쌓음으로써 성벽을 안으로 고르롭게 쌓아올린 수법인데 장수산성에서는 성벽 밖의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지형에서 적용되였다.
성벽축조의 계단식 방법은 성벽 밑부분 몇 단을 층계모양으로 두드러지게 안으로 들여다 쌓다가 그 다음부터 조금씩 경사지게 쌓아올리는 수법으로서 장수산성에서는 성벽 밖의 경사도가 급한 지형에 적용 되였다. 이러한 성벽축조형식과 방법도 고구려 성 축조에 널리 도입된 점의 하나이다. 특히 성벽 밑 부분을 계단식으로 쌓는 것은 고구려 성벽축조의 고유한 특징의 하나이다.
또한 장수산성의 성벽 축조에서 볼 수 있는 개개의 성돌들이 6합-8합으로 맞물리고 성심의 성돌들도 맞물리거나 짓눌리우도록 하여 성벽이 하나로 굳게 결합된 통일체를 이룬 것도 고구려 성벽 축조에서 발휘된 우수한 형식이다. 이밖에도 골짜기를 가로 건너간 성벽에 나있는 수구문시설을 보아도 고구려 성벽 축조의 특징들이 잘 반영되여 있다.
이러한 장수산성 성벽축조 형식과 방법들은 고로봉식의 산성축조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고유한 특징들이다.
고로봉식 산성은 산골짜기를 안에 넣고 그 주위의 산봉우리들과 릉선들을 련결하여 쌓게 되므로 성벽은 산릉선이나 골짜기를 둘러막게 도니다. 이 경우에 성벽축조에서는 외면쌓기와 량면쌓기 방법이 다 적용된다.
외면쌓기 방법은 산등성이나 릉선을 리용하여 성벽을 쌓을 때에 많이 리용되는데 고구려 성벽 축조에서는 성벽을 산릉선 마루에서 바깥쪽 아래로 약간 내려와서 성벽을 쌓을 수 있게 깎아내고 거기에 의지하여 바깥벽만 쌓고 성벽 속은 돌과 흙을 다져서 성벽을 든든히 한다.
량면쌓기 방법은 주로 골짜기입구의 개활지대나 산봉우리의 평탄한 대지를 지나가는 성벽축조에 적용되였는데 안팎은 다듬은 돌로 면을 맞추어 잘 쌓고 속에는 길쭉길쭉한 돌로 서로 맞물리고 눌리도록 한다.
고로봉식 산성은 반드시 골짜기를 끼고 있으므로 성벽은 골짜기를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수구문이나 물빼기 구멍은 성벽의 견고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반드시 갖추어야 할 시설인 것이다. 때문에 고로봉식 산성인 고구려 산성의 성벽은 골짜기를 가로 막으며 그전 성벽 돌에는 례외 없이 수구문이나 물빼기 시설들이 있는 것이다.
(2) 성 시설물과 그 짜임새
장수산성의 성벽 시설물로는 성문 옹성, 녀장과 치, 수구문, 파수터, 장대, 못과 우물을 들 수 있다.
① 성문
성문은 성벽시설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성문이 성 안팎과 련결된 통로로서 성의 출입구이고, 다른 성벽에 비해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약하여, 적의 중요공격목표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문은 교통조건과 방어조건을 고려하 위치에 정하게 된다. 장수산성에는 내성의 남문, 서문, 북문, 외성의 남문, 동문, 북문 등 모두 6개의 성문이 있다.
* 외성 동문 아래에 쌓아진 겹성벽에는 성문이 하나 있었을 수 있다.
○ 외성 남문
외성남문은 산성의 동남모서리에 나있는 골짜기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문은 외서의 기본 출입문이며 장수산 동남부 평지와 직접 잇닿아있는 장수산성의 정문이다. 또한 이 문은 장수산성의 여러 문들 가운데서 교통이 제일 빈번한 곳이며 이 문을 통하여 성안으로 들어가는 군수물자도 모두 운반 되였다. 그러므로 외성남문은 성의 관문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문이다. 이 남문유적은 자리잡음과 지형에서 대성산성 남문유적과 매우 근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 문을 통하여 성안에 들어가면 좌측에는 우물골이, 우측에는 삼치골이 있다. 그리고 두 골짜기를 따라 북쪽으로 넘어서면 룡소골에 이르게 된다. 남문으로는 삼치골과 우물골에서 흐르는 물이 합수되여 흘러내려 재령강으로 들어간다. 문터밖 량쪽에는 솔봉 아래턱에서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긴 릉선과 작은 장수산의 남쪽 아래턱에서 남쪽으로 곧추 뻗어내린 릉선이 있고, 이 릉선들에 의해 둘러막힌 넓은 공지가 있다. 이 넓은 공지는 련병장으로 쓰기 유리하고 문터밖 량켠의 산릉선은 자연적인 옹성으로 되여 문의 방어력을 한층 높이도록 되여 있다.
문앞 공지를 지나 우측 언덕 우에 올라서면 장수산 동남부가 한 눈에 바라보인다. 문터는 이미 오래전에 파괴되고 지금은 문루를 세웠던 동쪽 축대의 기초돌과 문확돌이 남아있다. 문터의 형식은 대성산성 남문유적과 같다.
* ≪고고민속≫ 1966년 1호 45-49페지
문터는 너비가 1.5m인 골짜기입구에 축대, 통로, 통로 앞뒤의 돌계단 시설로 이루어졌다. 축대의 바닥돌은 길이 0.6m, 너비 0.5m, 높이 0.34m 되는 큰 돌들이다. 통로의 뒤에는 돌계단이 좌우로 나있는데 이 계단들은 문루로 오르기 위한 계단이고 앞의 계단은 성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문 뒤의 계단부의 길이는 3.7m이고 문 터 앞 계단부의 길이는 7.4m이다. 문터 앞 돌계단은 큰 돌로 2.7m, 2.9m, 1.8m의 간격을 두고 3개의 기본계단을 마련하고 그 사이에 작은 돌로 계단을 쌓았는데 모두 14개의 층계로 되였다. 계단석의 기초는 주먹 만큼한 돌과 흙을 섞어서 마쳤다. 문터의 너비는 3m, 높이는 2m, 통로 길이는 7.2m이다.
남문부근의 성벽은 문을 중심으로 ≪ㄱ┫├≫형으로 쌓아 방어에서 일련의 특성을 가지도록 하였다. 현재 문터 주위에는 적대의 기초돌과 문확돌이 남아있다. 동쪽 적대의 기초는 먼저 바닥을 평평하게 고르고 길이 1.2m, 높이 0.45m, 너비 0.7m 되는 장방형의 큰 돌을 벽돌 쌓듯이 서로 어기여 맞물리면서 쌓아졌다.
문확돌은 길이 0.4m, 너비 0.25m, 높이 0.2m의 장방형화강암에 네모난 구멍을 뚫고 거기에 쐐기를 박아 문확을 마련하였다. 문확의 길이는 0.17m이고, 생김새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형으로 판 것이다. 문확의 이러한 생김새는 기술적으로 잘 타산된 것으로서 문확의 쐐기에 어떤 변동이 생기는 경우에도 좌우에로의 류동을 방지할 수 있고 문확의 견고성을 높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문터는 그 구조형식과 주변의 시설물을 부근에서 드러난 막새기와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고구려시기의 기와들로 미루어보아 문루가 있었으며 그것은 매우 웅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 외성 동문
외성 동문은 장수산성의 동문으로서 외성 남문에서 동벽을 따라 약 2150m 되는 지점인 뾰족산 남쪽의 첫 골짜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문터에서 골짜기를 따라 성밖으로 곧추 내려가면 신원군 운앙리소재지에 이르고 성안의 골짜기를 따라가면 삼치골과 룡소골에 이르게 된다. 문 터의 통로는 성벽과 직각을 이루어 그 생김새는 ≪┤├≫형이다. 통로의 너비는 2m, 길이는 3m이다.
통로의 한쪽에는 적대가 있다. 문터 주변에서 고구려시기의 붉은 기와를 비롯한 그 이후 시기이에 해당되는 기와 쪼각돌이 쌓여있는 것으로 보아 문루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외성 북문
외성 북문은 룡소의 벼랑 짬에 자리 잡았다. 북문 터에서는 북쪽의 협곡 짬으로 멀리 재령강이 바라보이고 돌아서면 룡소골이다. 룡소골에서 내려오는 물은 북문을 지나 재령으로 흘러간다. 문터밖의 물길을 따라가면 재령군 신덕리에 닿는다. 문터의 서쪽인 높은 벼랑에서는 성벽을 쌓지 않고 동쪽의 물곬바닥으로부터 1.5m 높이에는 암반 우에 성벽을 쌓았다. 문의 본래 모습은 알 수 없는데 주변에는 기와 쪼각들이 널러져 있었다. 북문은 외성 북쪽으로 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 내성 남문
이 문은 내성과 외성이 접하고 있는 내성 남벽의 동쪽 곁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문터 주변을 경계로 내성 남벽과 외성 남벽이 구분되고 내성과 외성을 구분하는 성벽이 쌓아졌다. 내성 남벽은 여기에서 시작 되여 서쪽으로 뻗었고 외성과 내성의 간벽은 여기에서 시작 되여 북쪽으로 쌓아졌다. 남문에서 골짜기를 따라 아래로 곧추 내려가면 아양리 사직동과 동산동에 닿고 동쪽경사면을 타고 250m 정도 가면 외성의 우물골이다. 남눈에서 골짜기를 타고 계속 올라가면 백운동분지로 오르게 되고 성벽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하니봉에 닿는다.
이 성문은 특이한 구조로 축조 되였다. 그것은 성문의 통로가 ≪ㄱ≫자 형으로 되여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성안으로 들어가려면 ≪ㄱ≫자 형 통로를 거쳐 들어가게 되였으며 성밖에서는 성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되여있다. 통로의 길이는 16m, 너비는 2.5m, 통로 좌우벽의 높이는 3m이다. 통로의 우측에는 적대를 쌓았다. 문터 주위에는 붉은 색 회색기와 쪼각들이 쌓여있는 것으로 보아 문루시설이 있었다고 인정된다.
○ 내성 서문
이 문은 하니봉에서 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지점의 좁은 골짜기 우에 자리잡고 있다. 이 문터 아래는 신원읍과 재령군의 접경지이다. 문터에서 특징적인 것은 통로의 너비가 다른 문터들에 비해 매우 좁은 것이다. 통로의 길이 7.5m, 너비 1.2m, 높이가 현재 2m이다. 통로는 ≪┤├≫형으로 골짜기를 향하여 곧추 나있다. 이 문은 암문으로 리용된 것 같다.
○ 내성 북문
이 문은 내성서문의 동북쪽 약 650m지점의 얕은 골짜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문의 구체적인 구조는 알 수 없으나 ≪┤├≫형식으로 통로가 나왔다. 통로는 너비 1.1m, 길이 2.5m이다. 성문 밖은 산릉선이 가로 막고 있어 문자리가 쉽게 알려지지 않는다. 이 문도 역시 동문과 마찬가지로 암문으로 리용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상의 장수산성의 성문들은 모두 교통조건이 편리하고 성 방위를 위한 군사활동에 가장 적합한 위치들에 배치되였거나 그에 맞는 성문시설물들을 갖추고 있어 장수산성의 위력한 방위력 형성의 중요구성부문을 이루고 있다.
② 옹성
옹성은 성문의 방어를 보강하는 중요시설물이다. 장수산성에서는 적의 공격이 집중될 수 있는 주요성문들에 여러 가지 형태의 옹성을 쌓아 성문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장수산성에서 적의 공격이 집중될 수 있는 주요 성문은 외성 남문과 내성 남문, 외성 동문이다. 그것은 이 문들이 성남부의 평지와 직접 잇닿아있는 문들로서 유사시 많은 인원과 군사물자들이 이 문들을 통하여 움직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남쪽의 성문들은 다른 성벽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방어력이 약한 고리이다.
그러므로 외성 남문과 내성 남문의 방비를 특별히 강화하는 것은 성 전체의 운명과 관련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장수산성에는 외성 남문과 내성 남문에 옹성시설을 갖춤으로써 성문 방어를 한층 강ㅇ화하였다.
장수산성의 성문에는 반원형, ≪그≫형의 옹성이 있다. 반원형의 옹성인 외성 남문에서는 옹성벽이 량쪽 절벽에 잇대여 안으로 ≪┤├≫형으로 문을 감싸면서 쌓아졌다. 옹성벽의 축조형식은 량면 쌓기로 되였다. 옹성의 길이는 200m이다.
* <고고민속> 1966년 1호 45∼48페지.
내성 남문의 옹성은 ≪그≫형식으로 되여 있어 성안으로 들어가려면 ≪ㄱ≫자형 통로를 통해 에돌아가게 되여 있으며 통로 량옆의 성벽은 옹성벽의 역할을 하게 되였다.
장수산성에는 이 밖에도 내성 남문 아래 골짜기와 외성 동문아래 골짜기를 가로 막은 성벽이 있는데 이 성벽들은 내성의 남벽과 외성 동벽의 겹성벽인 동시에 문터의 바로 아래에 쌓아졌으므로 옹성벽의 역할도 수행 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장수산성의 옹성 형식들은 고구려 산성들에서 볼 수 있는 옹성형식들이다.
오녀산성의 동문 터에서는 성벽이 ≪ ≫모양으로 서로 어기면서 한쪽 벽이 다른 벽을 모나게 감싸 옹성을 이루었고 산성자산성 남문의 옹성은 성벽이 성문 부근에 이르러 성안으로 네모나게 우무러들면서 이루어졌는데 장수산성 내성 남문의 옹성형식은 바로 우와 같은 옹성 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외성 남문의 옹성과 같이 성문 밖이나 안을 반원형으로 감싼 형식은 롱오리산성, 황룡산성, 청룡산성, 수양산성을 비롯한 고구려 산성들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③ 녀장과 치
녀장은 성벽 우에서 성에 접근하는 적들을 사용할 때 쓰는 시설로서 치와 함께 성에 가장 많이 쓴 기본방어시설의 하나이다. 옛 기록에는 장수산성에 치와 녀장이 내성에 427개, 외성에 553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성벽의 가장 웃부분인 녀장은 무너지기 쉬우므로 원상대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나 없다.
* 증보문헌비고 권 28, 여지고 관방성곽 황해도
현재 남아있는 녀장은 내성 남문 부근의 외성남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녀장은 성벽의 웃부분에 8-10단 터 높이 쌓아졌다. 지금 남아있는 녀장의 높이는 0.5m, 너비 2.2-2.6m, 두께 1m이다. 두께는 성벽의 웃편과 같은데 우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졌다. 그러므로 웃부분의 두께는 0.8-0.9m이다. 녀장과 녀장사이 거리는 0.5-0.6m이다. 녀장은 ≪凸≫형의 평녀장이다. 고구려 산성의 녀장에는 평녀장, 원녀장, 첨녀장이 있는데 고구려때 만든 것으로 본래의 그대로 남아있는 패왕조산성이나 산성자산성의 녀장이나 순천료동성 무덤에 있는 성곽도의 자료들을 보면 ≪凸≫형의 평녀장이 기본이다. 패왕조산성의 성벽의 높이는 5.2m인데 그 가운데서 녀장은 0.5m 높이에 1m 너비로 되였다.
* ≪고고≫ (중문) 1962년 제 11기 569페지.
산성자 산성의 녀장은 높이 0.78-1.3m 너비 0.73-1m이다.
* ≪문물≫ (중문) 1982년 제 6기 82-85페지.
순천 료동성 무덤의 성곽도에는 ≪凸≫형과 ≪∧≫형의 녀장이 그려있다. 장수산성의 녀장은 후세에 성벽을 여러차례 보수하여 썼으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의 자료들에 비추어 볼 때 축조 당시부터 지금 남아있는 ≪凸≫형태의 평녀장이였으리라고 인정된다.
치에 대하여서는 옛 기록에 조금 남아있을 뿐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으므로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④ 수구문
장수산성에는 여러 곳에 수구문과 물빼기 시설이 있었다. 외성남문과 동문 부근에는 우물골과 삼치골, 동부골에서 내려오는 물을 성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수구문을 비롯한 물빼기 시설들이 있었을 것인데 성문과 함께 파괴되고 현재는 내성 남문 아래 골짜기를 가로 막은 겹성벽에 낸 수구문이 잘 남아있다. 이 수구문은 내성 남문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겹성벽 밖으로 빼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수구문은 성벽의 맨 밑에 네모나게 마련하였는데 먼저 바닥에 크고 넙적한 돌을 길게 깔고 좌우에 큰 돌을 두단 올려쌓은 다음 그 우에 역시 크고 넙적한 돌을 오렬놓아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우에 성벽이 쌓아졌다. 수구문의 크기는 가로 너비 0.6m, 높이 0.5m, 길이 3.5이다. 문의 길이는 성벽의 폭과 같다.
⑤ 파수터
장수산성에는 성벽 곁에 성벽과 성 안팎을 감시하는데 리용된 파수터 시설이 있다. 성벽 곁에 마련된 파수터는 여로 곳에 있었겠으나 지금 남아있는 것으로는 외성 남문에서 동북으로 약 800m거리에 있는 외성 동벽의 것을 들 수 있다. 이곳은 성의 동남부 지역과 성벽 안팎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위치이다. 파수터는 한 사람이 들어설만한 크기로 성벽에 잇대여 돌을 돌려쌓고 안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되여 있다. 파수터의 크기는 직경 1.5m, 높이가 현재 0.5m-0.6m, 벽의 두께 0.6-0.7m이다.
바닥에는 돌을 전면에 걸쳐 깔았는데 파수터 밖의 지면보다 0.15-0.2m 더 깊다. 출입구는 성벽을 따라 외성 남문 쪽으로 나있다. 이러한 파수터는 건물을 감시하기 위하여 건물터 뒤에 설치된 것도 있다. 장수산성에는 이와 같이 성벽의 일정한 구간마다 파수터를 설치하고 항상 성벽과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정황을 감시하는 체계가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성벽 감시체계는 다른 고구려 산성들에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⑥ 장대
장대는 유사시 전투를 지휘하고 적정을 감시하는데 리용되는 성안의 중요시설물이다. 장수산성에는 외성 남장대, 동장대, 북장대, 내성 남장대, 서장대, 북장대 등 모두 6개의 장대가 있었다. 장대는 모두 성벽 부근의 높은 고지들에 설치되였다. 외성 남장대는 산성의 정문인 외성 남문 부근을 포함하여 산성의 동남부 지역이 잘 내려다보이는 솔봉에 있다.
동장대는 신원군 아양리와 월당리의 북부지역에 해당하는 산성 동부지역의 남단과 동부지역의 적정을 포착하고 전투를 지휘하는데 편리한 작은 장수산의 북쪽 봉우리 우에 두었다. 외성 북장대는 외성 동북부와 산성 북부에 대한 전망 감시와 전투 지휘보장을 위하여 룡소동 북쪽의 뾰족봉우리에 설치하였다.
내성 남장대는 내성 남문 아래 골짜기와 잇닿은 사직동과 하니봉동 남부에서 뻗은 진재동 동부를 포함한 산성 남부와 성 남부지역의 적정을 포착하고 전투를 지휘할 목적으로 우물골의 서남쪽 전망이 좋은 산등성이 우에 설치하였다. 이 장대에서는 내성과 외성 안은 물론 성밖 남부지역이 한 눈에 안겨온다. 그러므로 중앙 장대의 역할도 수행하게 되여 있다. 내성 서장대는 성의 서남부지역을 포착하고 전투를 지휘하는 곳으로서 산성의 서쪽 봉우리인 하니봉에 설치 되였다. 장대는 여러 사람이 올라설 수 있게 흙을 둥그스럼하게 다져쌓았다. 흙무지의 밑 직경은 5.3m, 높이는 1.2m이다. 내성 북장대는 내성의 동북쪽 봉우리를 리용하였다.
이와 같이 장수산성에서는 성의 규모가 큰 상황에 맞게 장대를 여러 곳에 두고 전체 성에 대한 지휘체계와 감시체계를 확립함으로서 방위력을 높이였다.
⑦ 못과 우물
못과 우물은 성안에 물을 보장하는 수원으로서 성 방위력 형성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된다. 장수산성에는 룡소를 비롯하여 내성과 외성 안의 분지와 골짜기들로 사철 물이 마르지 않고 넘쳐흐르고 있는데다가 여러 개의 못과 우물이 만들어져 있어 물 원천이 매우 풍부하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성안에 우물이 19개, 못이 3개 있었다고 씌여져 있는데 조사과정에 확인된 못은 외성에 4개, 내성에 5개, 우물은 내성과 외성에 각각 3개이다.
외성안의 못은 삼치골의 북쪽 못재등과 동문 부근에 있다. 못재등의 쌍둥이못이라고 전해지는 2개의 못과 동문 부근의 못은 그 생김새가 모두 원형이다. 그 크기는 쌍둥이못의 직경이 각각 13-14m, 12-13m, 동문 부근의 못은 11m이며, 깊이는 1.5-2m 정도이다.
못재등 우에 있는 다른 하나의 못은 사방 20m, 깊이 4m인 정방형으로 판 것이다. 못들은 모두 구뎅이를 판 다음 그 둘레에 성돌과 같은 돌로 성벽을 쌓은 형식으로 못벽이 쌓아졌다. 내성 안의 못은 성의 중심과 서문, 북문 부근에 있다. 내성 중심에 있는 큰 못에는 지금도 물이 차있다.
서문 부근에 있는 못은 길이 9m, 너비 3m, 깊이 1.5m로 된 장방형 못이다. 우물은 외성안의 남쪽 건물터 구역과 성문 부근, 내성 남문부근과 분지 가운데의 못 근처에 있다. 성안의 여러 우물터들 가운데서 발굴과정을 거쳐 그 구조를 알 수 있는 것은 외성 안의 삼치골 막바지 1호 건물터의 남쪽에 위치한 우물이다. 현재 이 우물은 그 웃부분이 없어지고 지표로부터 아래에 부분이 남아있다. 우물은 장수산에 흔한 규암을 가지고 다각형으로 쌓아졌다.
우물의 깊이는 6m이다. 우물은 물이 나올 때까지 땅을 깊이 파고 기초를 든든히 한 다음 둥그스럼하게 우물 벽을 쌓아올렸다. 우물의 바닥은 암반이다. 우물 벽은 먼저 물이 나오는 암반 바닥에 직경 0.82m의 원형 우물자리를 잡고 맨 밑에 큰 돌을 한번 돌리고, 그 우에 조금 작은 돌로 벽돌을 쌓듯이 어긋물림하면서 쌓아졌다. 우물벽의 안쪽은 막돌과 진흙으로 다졌다.
우물은 바닥에서부터 우로 올라가면서 점차 넓어졌는데 2m 높이에서 직경은 1.2m이다. 이렇게 바닥에서 2m 높이까지 점점 넓히면서 쌓아지다가 그 우에서 부터는 갑자기 직경을 줄이였다. 직경을 줄이는 방법은 원통나무를 가로 건너놓고 그 우에 직경을 줄이면서 돌이 쌓아졌다. 돌 한 돌기의 높이는 0.15m-0.2m이다.
우물은 우로 올라가면서 그 직경을 줄이였으므로 아가리부분 직경이 0.66m이다. 우물의 생김새는 고구려 건물의 배부른 기둥과 비슷하다. 우물을 이와 같이 쌓은 것은 우물 벽의 중심에 가해지는 지압을 타산한데 기초한 것이였다고 보아진다. 우물 바닥에서는 격자무늬를 돋힌 고구려의 붉은 기와편이, 여러 겹 드러났다. 우물의 형식은 대성구역 고산동에서 발견된 고구려 시기의 돌우물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