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와 후쿠오카의 수선화
“윤돈주사마가 저의 집 정원에서 수선화로 피었어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후쿠오카에 사는 아키다 나오미秋田直美 씨는 2년 전(2011년) 윤동주 66주기 추모행사를 위해 내가 갔을 때 이렇게 말하면서 수선화 한 다발을 안겨 주었다. 그전에 갔을 때도 그랬었다. 다음에도 그럴 것 같다.
윤동주 추모행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95년이었다. 윤동주 옥사 50주년이며 해방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때는 ‘민족시인 윤동주 위령제’라고 했다.
나는 그때 덕성여대 퇴직 한 해를 앞두고 《한국대학신문》 주필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장의 직함도 갖고 후쿠오카 옛 교도소를 답사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한국대학신문사에서 참으로 많은 경비를 들여서 50명의 추모 행사단을 이끌고 후쿠오카 옛 교도소에 찾아가서 첫 행사를 하게 되었다. 문인과 교수 외에 가수 양희은과 무용가 이애주 교수 등도 동행했다. 바쁜 스케줄로 못 간다는 사람들을 억지로 모셨다. 그 후에는 어려운 사정도 많아서 매년 가지는 못했지만, 첫 회부터 공동개최해 주었던 일본인들이 빠짐없이 계속해 온 것이다. 그 모임이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이다. 그들은 그 모임의 역사를 밝힌 소책자에서 내가 그 모임을 만들게 한 ‘아버지’라고 기록해 놓았다.
내게 수선화를 안겨주는 아키다 나오미 씨도 이 모임의 회원이다.
그녀가 준 윤동주의 수선화는 참으로 향기가 좋다. 눈으로 보듯이 코로 스미는 향기도 그처럼 느낌이 아름답다.
그녀의 집 정원에서는 그가 죽은 2월이 되면 해마다 그렇게 수선화가 되어서 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가면 아키다 씨는 그렇게 수선화 꽃다발을 들고 나를 기다려 준다.
우리가 만나는 곳은 옛 후쿠오카 형무소이며 지금은 후쿠오카 구치지소로 되어 있는 건물 뒤쪽 담벼락에 붙어 있는 니시모모치 공원西百道公園이다.
머리가 반백이 되어 있는 어떤 일본 여인은 윤동주의 시 〈쉽게 쓰여진 시〉를 낭송하다가 눈물을 쏟으며 한참 동안 다음 구절을 잇지 못했었다. 추모제가 열린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처음으로 그 행사에 찾아왔다는 여인이다. 거기서 내가 만나는 그들은 모두 그렇게 아름다웠다. 세균전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의 이름을 딴 731 전투기에서 V자를 그리며 세상을 조롱하는 아베 총리 같은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 말했듯이 윤동주는 일제가 아시아 전역에 피 구름을 몰고 올 때 민족 해방을 위한 일제 전복 계획을 추진하다 체포되었다. ‘재교토학생在京都學生 민족주의 그룹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경에 무슨 뜻인지 모를 큰소리 한마디를 지르며 작고했다.
그가 죽은 후 시신 인수를 위해서 윤동주의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 찾아갔던 윤영춘(전 경희대 교수)의 증언과 함께 모든 정황으로 보면 생체 실험에 의한 죽음이 거의 확실하다. 윤동주와 함께 이상한 주사를 매일 맞고 있다고 윤영춘 교수에게 증언했던 송몽규도 그로부터 23일 만인 3월 10일에 옥사해서 지금도 북간도 고향의 묘지에 나란히 묻혀 있다.
이들이 죽은 지 반년 후에 일제는 패망하고 우리는 해방의 날을 맞이했다. 그렇지만 해방 후 거의 50년의 세월이 흐를 때까지 그가 죽은 자리를 찾아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1994년 가을에 그곳에 혼자 찾아갔다가 높은 담벼락을 바라보며 눈물이 핑 돌았었다.
그 이듬해부터 해마다 그곳에서 추모제를 열기로 했지만, 경비 조달이 어려워서 못 간 해가 많다. 그렇지만 우리가 못 가도 일본인들은 추모제를 계속해 오고 있다. 내가 가면 아키다 나오미 씨는 늘 내게 수선화를 안겨주고 함께 추모행사에 참여한다.
윤동주가 죽은 2월에는 후쿠오카에서 수선화가 많이 핀다. 그래서 아키다 나오미 씨는 윤동주가 죽어서 향기로운 수선화로 부활했다고 말하며 내게 안겨주는 것이다.
일본은 과거에 우리를 침략하고 무서운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 학살의 죄를 범했지만 추모제에 모이는 그들은 모두 평화를 사랑하고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평화롭고 밝은 세상을 지향했던 윤동주는 이처럼 그가 처형된 자리에서부터 그렇게 부활하며 그 큰 문학의 힘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셈이다.
첫댓글 평화를 사랑하였던 윤동주 시인이 조국에서 보다
뼈저린 고통과 아픔 마음을 안고 죽었던 일본에서
더 동경을 받는군요.
부끄럽고 감사하기 이를 데가 없네요. 감사합니다.
김우종교수님께서 연로하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여러모로 좋은 일 많이 하고 계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