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완박’을 주도한 윤호중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서울대에 들어온 민간인들을 정보기관 프락치로 몰아 감금해 각목으로 때리고 물고문시킨 ‘서울대 민간인 감금·폭행·고문사건 관련자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윤호중 의원(전 당 원내대표)이 다수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의 법제화 관철을 주도하고 있는 가운데 그가 관련됐던 ‘서울대 민간인 감금·폭행·고문 사건’이 새로이 조명받고 있다.
서울대 민간인 감금·폭행·고문 사건이란 1984년 9월 17일부터 27일까지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학내에 볼일이 있어 들어온 타학교 학생과 민간인 등 4명을 정보기관의 프락치로 판단해 감금·폭행·고문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25명이 넘는 서울대 총학생회 간부들이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이 가운데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유시민(柳時敏, 경제학과 3년)을 비롯, 윤호중(尹昊重·철학과 4년), 백태웅(白泰雄, 공법학과 4년), 이정우(李政祐, 공법학과 4년), 오재영(吳在瑛, 인류학과 4년), 조원봉(趙元鳳, 국사학과 4년)등 6명이 폭행 주동자로 지목돼 징역 10월에서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폭행을 행사한 서울대 학생회 간부들은 검찰 진술에서 “프락치라는 자백을 강요받으면, 이를 이용해 기관에 항의하거나 학생 데모에 한층 더 불을 지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피해자는 고시를 준비중이던 방송통신대 법학과 3년 재학생인 전기동(당시 29세), 임신현(당시 25세), 손현구(당시 19세), 정용범(당시 25세)등이며, 이들은 서울대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학생회 간부들에게 체포돼 각각 22시간에서 6일에 걸쳐 각목 구타와 물고문 등을 당했다.
당시 사건을 조사한 경찰과 법원은 이들이 프락치가 아니라고 밝혔다.하지만 가해자들은 이 사건을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불렀고 지금도 언론 등에서 이런 이름이 잘못 사용되고 있다.
<사진 설명> 기사의 붉은색 네모칸에 유시민, 윤호중의 이름이 보인다
전기동씨는 월간조선 2006년 2월호에 보도된 인터뷰에서 "가해자들이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해서 따라갔다. 나를 프락치라고 몰아세웠다. 계속 아니라고 하니까 교련복으로 갈아입히고 눈을 가렸다. 그때부터 폭행이 시작됐다. 돌아가면서 몇 시간 씩 나를 폭행했다. 가해자들은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하는데 나를 감금한 장소 창문을 미리 신문지로 다 가려놨더라. 물이 담긴 세면대에 머리를 쳐 박거나, 바닥에 눕히고 주전자로 얼굴에 물을 붓는 등 물고문도 했다. 이 과정에서 치아가 부러지고 전치 8주 부상을 입었다. 고문에 못 이겨 군대시절 내 상관이 시켜서 왔다고 아무렇게나 거짓말을 했다. 고문 도중 실신해 2일 만에 풀려났다. 이틀간 식사도 못했다. 풀려나기 직전에야 빵을 주더라. 당연히 먹지도 못했다. 병원에서도 한동안 혼자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전씨는 "당시 나는 방송통신대에 다니며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방송통신대 학생들은 서울대 법대에서 수업을 받기도 한다. 레포트 작성을 위해 서울대 모 교수님에게 책을 빌리러 갔다가 붙잡혔다. 가해자들에게 그 교수님에게 확인해보라고 했다. 교수님이 내 신분을 확인해줬는데도 믿지 않고 폭행을 계속했다. 피해자들은 아직도 고통 받고 있는데 가해자들은 반성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당시 사건은 민주화운동과는 전혀 관련 없는 민간인 폭행·고문 사건"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전씨는 사건 당시 실신해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는 폭행 가해자들이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 혹은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고 주장할 때마다 이에 맞서 법정 투쟁을 해왔다. 전 씨는 폭행 후유증으로 고시 공부를 접어야만 했다. 전 씨는 폭행당한 후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몸이 아파 책상에 앉아 있지를 못하고 자주 바닥에 드러누워야 했다. 전 씨는 뒤늦게나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서울 관악구청 보건소에 근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폭행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핵심 간부였던 조현수, 백태웅, 이정우, 윤호중 등은 도피하여 수배됐고,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이었던 유시민은 사건을 수습하던 중 구속돼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2심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사건을 담당했던 관악경찰서 김영복 수사과장은, 유시민은 폭행을 지시하거나 가담한 사실이 없지만, 당시 서울시경 고위 간부의 지시에 따라 신병 확보가 쉬운 유시민에게 혐의를 씌웠다고 주장했다.
가장 심하게 폭행을 당했던 전기동은 당시 경찰의 신문 조서를 근거로 유시민이 직접 폭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폭행 행위를 묵인하고 피해자들을 조사했다고 주장했다. 전기동은 2006년 한나라당이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유시민(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이 직접 폭력을 행사한 사실이 없다면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도 사건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이 사건의 1심 유죄 판결에 불복하여 작성한 것이다. 유시민은 이후 이 사건의 전모 및 재판 과정을 1986년 저서 <아침으로 가는 길>에 공개했다. 이후 유시민이 2004년 4월 17대 총선 선거 홍보물에서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이미 명예회복을 했다'는 내용을 기재하자, 피해자들은 유시민을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고소했다. 이에 대해 1심에선 벌금 50만원을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무죄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민주화 유공자로 명예회복을 했다는 것은 허위 사실이지만, 기재 당시 유시민이 허위일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무죄이유를 밝혔다.
7급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었던 정용범 씨는 이 사건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 아지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기동 씨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정용범 씨에 대해 "때린 놈이야 신체와 정신이 안 다쳤으니, 마음껏 공부하고 돈을 벌 수 있지만, 나와 용범씨는 그 사건 이후 몸과 정신이 완전히 망가져서 결혼도 못 하고있다“면서 ”그 사람들(서울대 가해 학생들)의 행위는 인간 존엄성을 파괴한 것"이라고 개탄했다.
정용범 씨는 1978년 형이 군(軍)에서 죽자 그 충격으로 신경쇠약에 걸려 한 달 반 정도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는 것. 그 후 정 씨는 1년 가량 집에서 요양을 했기 때문에 폭행을 당할 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정 씨의 어머니 전영재씨는 "우리 용범이가 너무 억울하게 당했다"며 "폭행당한 후 정신이 이상해져 결혼도 못 했는데 내가 죽으면 누가 돌봐줄지 그것이 제일 걱정"이라고 말했다.
"애가 맞고 집에 왔을 때 온몸이 시퍼렇게 돼 있었어요. 두들겨 맞기 전에는 공무원 시험 공부도 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했거든요. 얻어맞은 후부터는 애가 헛소리를 하고 완전히 병신이 되었지요. 후유증으로 몇 년 동안 밤에 제대로 못 자고 약을 입에 달고 살았아요.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정 씨는 폭행당하는 과정에서 앞니 하나가 절반 정도 부러졌다. 정 씨 어머니는 "그때 맞아서 부러진 이 치료를 잘못해서 그 후에 계속 고생을 했다"며 "몇 년 전 2500만 원을 들여 이를 전부 새로 심어야 했다"고 말했다. 1994년 사망한 정씨 아버지는 살아생전 "장가도 못 간 놈이 병이나 도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며 늘 아들 걱정을 했다고 한다.
임신현 씨는 폭행을 당한 후 대인기피증이 심해졌고, 이로 인해 대학 진학 꿈을 접었다. 임 씨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었죠. 이놈이 들어와서 한 시간 패고, 저놈이 들어와서 한 시간 패고…. 자기들도 내가 프락치가 아니란 것을 알았을 겁니다. 민간인을 다짜고짜 패 놓았으니 문제가 될까봐 어떻게든 프락치라는 기록을 남겨 놓으려고 자백을 강요한 것 같아요."
정씨는 절에 가면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입시 공부를 포기하고 절에서 알게 된 사람을 통해 단청(丹靑) 기술을 배웠다. 단청 일은 겨울철에는 일감이 없어서 생활에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그때 일은 잊고 살지만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이 납니다. 그 사람(유시민)을 보기 싫어 TV를 안 본 지 오래됐습니다. 죄없는 사람을 가두어 놓고 폭행을 하는 것들이 인간입니까. 정신병자들이죠. 그런 사람을 장관에 기용하고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는 나라가 한심스럽습니다. 내가 사는 곳이 하필이면 유시민씨 지역구인데 여유만 좀 있다면 이사 가고 싶습니다."
월간조선 보도에 따르면 손형구 씨는 2006년 당시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에 의하면, 사업에 여러 차례 실패한 후 외국에 나가 연락을 끊고 지낸다는 것이다. 손 씨 어머니는 "다 지난 이야기를 뭣 하러 묻느냐. 그 이야기만 나오면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출처] ‘검수완박’을 주도한 윤호중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서울대에 들어온 민간인들을 정보기관 프락치로 몰아 감금해 각목으로 때리고 물고문시킨 ‘서울대 민간인 감금·폭행·고문사건 관련자|작성자 sansibl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