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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약역사회(自若歷史匯)
고대에 독서인(선비)의 최종목표는 무엇인가? "학성문무예(學成文武藝), 화여제왕가(貨與帝王家)" 대다수사람들은 머리를 들이밀어 관료가 되어 광종요조(光宗耀祖), 봉처음자(封妻蔭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인도 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고, 3명의 황제가 연이어 불렀는데도 그는 모두 거절하고 그저 서생으로 책속에 머리를 쳐박고 청빈하고 소박한 생활을 지냈다. 그는 바로 청나라때 동성파(桐城派) 산문의 창시자인 방포이다.
아마도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그는 머리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굳이 힘들게 살려고 하다니, 아래에서 그에 대하여 차례로 알아보기로 하자.
방포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학습능력을 보였다. 4살때 댓구를 맞출 수 있었고, 5살때 문장을 외웠으며, 7살때 <사기>를 읽었다. 10살때에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명저를 외워서 언제든지 꺼내서 말할 수 있었다.
이치대로 하자면 이런 천재소년은 관료로서의 길도 순조로워야할 것이다. 그러나 방포는 재능은 출중했지만, 과거시험에는 약했다. 과거시험에는 연이어 낙방을 한 것이다. 겨우 거인(擧人)이 되었지만, 회시(會試)에서는 또 계속 낙방한다. 강희4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진사에 급제하고, 전시(殿試)에 참가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모친이 돌연 위중해져서 그는 부득이 전시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모친을 돌봐야 했다.
만일 과거시험에서 순조롭지 못했던 것이 그에 대한 1차난관이었다면, 이어서 발생한 사건은 청천벽력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강희50년, 방포는 "대명세안(戴名世案)"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대명세안"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대명세가 책을 한권 썼는데, 그 안의 내용이 '대역무도'했다. 그래서 강희제의 분노를 샀고, 사형에 처해진다. 그리고 방포는 대명세의 이 책에 서문을 써준 적이 있기 때문에 연루되게 된 것이다.
다행히 강희제는 인재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대신 이광지(李光地)가 극력 추천해서, 방포는 요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그의 인생궤적은 이로 인해 크게 바뀌게 된다.
강희제는 방포의 사죄를 사면해주었지만, 그의 신분자유는 회복시켜주지 않았다. 그를 남서방(南書房)에서 일하게 한다. 남서방은 보통 장소가 아니다. 강희제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한 곳으로 강희제의 개인비서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서방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은 모두 황제의 심복이나 지낭이었다.
비록 정식관직은 없었지만, 남서방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다. 방포는 남서방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겅희제를 위해 편서수사(編書修史)하면서 남다른 재능과 학식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강희제로부터 높이 인정받는다.
강희제는 임종전에 특별히 옹정제에게 방포를 중용하라고 당부한 바 있다. 옹정제도 말을 잘 들었다. 방포를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옹정2년, 방포는 허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모친의 장사를 지낸다. 그가 경성으로 돌아온 후, 옹정제는 그에게 첨사부(詹事府) 좌춘방(左春坊) 좌중윤(左中允)의 관직을 내린다. 이는 방포의 일생에서 처음 얻은 관직이다. 이를 보면 옹정제가 그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뿐아니라, 옹정제는 방포를 계속 발탁하여, 한림원 시강학사(侍講學士)에서 내각학사(內閣學士)로 승진시킨다. 내각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방포는 모든 사람이 깜짝놀랄 결정을 한다. 거절한 것이다.
그가 내놓은 이유는 "발과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건 그저 핑계였다. 방포가 거절한 진정한 원인은 번잡한 관료사무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저 계속하여 학문연구에 매진하며 책을 써서 후세를 위해 고귀한 정신유산을 남기고 싶었다.
옹정제는 방포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포는 계속 한림원에 남아서 그가 좋아하는 편서(編書)작업을 계속한다.
옹정제이후, 건륭제가 즉위한다. 건륭제도 방포를 높이 평가했다. 세번이나 그를 남서방으로 불러 일하도록 했고, 예부시랑이라는 관직도 내렸다. 이는 문인에게 있어서 크나큰 영예이다.
방포는 역시 또 거절한다. 그는 다시 서길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이유를 들면서 건륭제에게 사직할것을 요청한다. 건륭제는 여러번 방포를 중용하려 했지만, 억지로 그에게 실직을 맡길 수는 없었고, 그저 그에게 예부시랑의 봉록만 유지시켜주었다.
건륭7년, 이미 82세가 된 고령의 방포는 신체적 원인으로 건륭제에게 고로환향(告老還鄕)을 청한다. 건륭제는 그이 요청을 받아들였고, 그에게 한림원 시강(侍講)이라는 직위를 내리고, 그에게 집에서 편안히 말년을 보낼 수 있게 해준다.
칠년후 방포는 세상을 떠난다.
방포의 일생을 돌아보면, '기구'했다는 두 글자로 형용할 수 있다. 그는 과거에서 실패하고, 감옥에도 갇힌다. 그는 시종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는 자신의 재능으로 관료로서 잘나갈 수 있었찌만, 그는 또 다른 힘든 길을 선택한다. 저서입설(著書立說), 전승문화(傳承文化)
그는 하나의 찬란한 별이 되어, 암흑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했고, 후세문인들에게 길을 밝혀주었다.
그렇다면, 방포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는 정말 권력과 지위에 흥미가 없었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방포도 인간이고, 그도 공명에 대해 전혀 갈망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저 신외지물(身外之物)과 비교하여 그가 더욱 중시한 것은 자신의 내심이었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었고, 후세를 위해 무언가를 남기겠다는 강렬한 바램이었다.
그 시대에 과거는 독서인의 유일한 출로였다. 관료는 그들이 인생의 가치를 실현하는 무대였다. 방포는 그러나 용감하게 그런 틀에서 벗어났고, 자신의 행동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말했다. 인생의 가치는 공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詩)도 있고, 원방(遠方)도 있다. 그리고 이상에 대한 집착과 추구도 있다.
방포의 이야기는 지금 보더라도 여전히 깊은 현실적 의미를 지닌다. 물욕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꿈과 추구는 포기한다. 그들은 새장에 갇힌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방포는 마치 새장을 부수고 뛰쳐나간 튼튼한 매처럼, 용감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했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세속의 관념에 속박되지 말고 용감하게 자신의 꿈을 쫓으라고 격려한다.
아마도 우리는 방포처럼 일대의 문호가 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렇게 이상을 추구하고,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을 배울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맹자의 한 마디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학문지도무타(學問之道無他), 구기방심이이의(求其放心而已矣)"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없다. 그저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일 뿐이다.